“아!” 윤소현이 뒤늦게 아픔을 느끼며 비명을 질렀다. “아파, 이 못된 녀석, 네가 감히 나를 물다니!” 그녀는 손을 들어 박연우를 때리려 했다. 하지만 박민정이 어떻게 그녀가 자기 아이를 때리도록 놔두겠는가? 박민정은 그녀의 손을 재빨리 잡아 막았다. 두 사람은 모두 임산부였기에 서로 밀리지 않았다. 박연우는 입안에 느껴지는 피 맛을 무시한 채 눈빛이 차갑게 변하며 윤소현의 팔을 놓지 않았다. 평소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이 모습을 본 집안의 사용인들도 충격에 휩싸여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할 뿐 누구도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 2층에서 옷을 갈아입던 고영란이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놀라 서둘러 내려왔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박민정과 윤소현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모습과 박연우가 여전히 윤소현의 팔을 물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도대체 여기서 무슨 짓들이야?” 고영란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박연우는 윤소현의 팔을 놓았다. 박민정과 윤소현 역시 싸움을 멈추었지만 윤소현은 특히나 팔에 심한 상처를 입어 피가 맺혀 있었고 박연우가 있는 힘껏 물었던 탓에 자국이 선명했다. 고영란이 다가오자 윤소현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박연우가 울먹이며 먼저 말했다. “할머니, 이모가 우리 아빠가 멍청이가 됐다고 했어요. 바보가 됐다고요.” 그의 고자질하는 모습에 윤소현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고영란은 그 말을 듣자 날카로운 시선으로 윤소현을 바라보았다. “윤소현, 네가 이모로서 어린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다고?” 윤소현은 억울한 듯 자신의 팔을 보여주며 말했다. “어머니, 이거 보세요. 이건 그 아이가 문 거예요.” 박민정은 아이가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윤소현 씨, 아이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이 아이가 물었겠어요?” 그러자 윤소현은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반박했다. “제가 말한 게 틀렸나요? 형님은 분명히 지력에 문제가 생겨서 바보가 되셨잖아요. 거짓말한 것도 아
한편 저택에서는 고영란이 박연우를 달래며 말했다. “아가, 울지 말렴. 네 아빠는 그냥 아픈 것뿐이고 곧 괜찮아지실 거야.” 박연우는 어린아이의 티를 내며 눈물을 흘리며 묻지만 속으론 할머니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란 걸 알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순진하게 연기하며 말했다. “정말이죠? 그럼 아빠를 볼 수 있나요? 아빠가 어떻게 지내시는지 보고 싶어요.” 고영란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박민정을 바라보았다. “민정아, 이거...” “우리 이따 저녁 다 먹고 아빠 보러 가자.” 고영란은 유남준이 바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만 박민정은 이를 알고 있다. 박민정은 앞으로 박연우에게 유남준의 병이 나아서 괜찮아졌다고 말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저녁 먹고 바로 가보자.” 박민정의 말에 고영란은 결정을 내렸다. 박연우는 이내 슬픈 표정을 풀고 순순히 저녁 식사를 했다. 드디어 아빠의 상황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고영란은 박연우와 박민정을 데리고 유남준이 있는 곳으로 갔다. 현재 유남준은 예전에 그가 거주하던 곳에서 머물고 있으며 예전의 사용인들이 돌보고 있어 본가에서보다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박민정 일행이 도착했을 때 유남준은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남준은 식사했니?” 고영란이 사용인에게 물었다. “이미 드셨습니다.” 사용인이 대답했다. “그래, 밥을 잘 먹고 있다니 다행이네.” 고영란은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연우는 엄마 뒤에서 아빠의 모습을 살펴보며 정말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정말 수술 후유증이 이렇게 심한 건가 싶었다. 아빠가 지금 이런 상태라면 엄마에게 부담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에 슬퍼졌다. “아빠.” 박연우는 유남준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불렀다. 박민정은 혹시라도 유남준이 바보인척하는 게 들킬까 봐 박연우를 조용히 데리고 나왔다. “아빠는 지금 휴식이 필요해. 오늘은 방해하지 말고 그
이렇게 행동하는 박민정을 보고 유남준은 그녀가 서둘러 떠나려고 하는 줄 알았다.그는 저도 모르게 박민정의 손을 꼭 잡았다. “나 혼자 여기 있는 것도 불편해.”그처럼 일하는데 깔끔하고 차가운 성격의 사람이 이런 말을 하니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박민정은 조금 어이가 없었다. “여기는 남준 씨 집이잖아요. 왜 불편해요?”“우리 집은 두원 별장이잖아?”유남준이 박민정에게 물었다.박민정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예전에는 그는 두원 별장이 두 사람의 집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근데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말한다. “네, 그래요. 그럼 잠시 같이 있어 줄게요.”박민정은 지금의 유남준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그녀가 남는다고 하자 유남준은 일어나 실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임산부가 앉기 좋은 의자를 찾아 그녀더러 앉으라고 했다.“앉아, 너무 오래 서 있지 말고.”의자에 앉은 박민정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말했다. “고마워요.”유남준은 또 방으로 가서 과일과 먹을 것을 가져다 박민정에게 주었다.박민정은 그의 방에 이렇게 많은 음식이 있는 것을 보고 약간 놀랐다. “왜 먹을 게 이렇게 많아요? 다 도우미가 준비한 거예요? 근데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네요?”박민정이 먹을 것을 보며 물었다. 어떤 거는 심지어 유남준이 싫어하는 음식이었다.유남준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웃는 모습은 되게 이뻤다.“네가 온다고 해서 내가 몰래 사 오라고 한 거야. 안 그러면 네가 얼마나 심심하겠어. 게다가 임산부는 원래 빨리 배고파진다고 들었어. 당연히 먹을 게 있어야 하지 않겠어?”그는 이제 시력이 회복되고 건강도 거의 회복되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남편의 책임을 져야 하고 임신 중인 박민정을 잘 보살펴야 한다.이렇게 많은 맛있는 음식을 보고 박민정은 더없이 기뻐했다. 테이블 위에 먹을 것을 한 무더기 올려놓고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신나요.”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유남준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먹을 것뿐만 아니라 예쁜 옷까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