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란은 손자를 돌보는 일에 꽤 관심이 있었다. 평소 그녀는 부인들과 차를 마시거나 피부 관리를 하고 가끔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는 것 외에는 거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네, 연우를 데리고 가서 며칠 동안 놀게 할게요.” 박연우를 데려가면 박민정은 두 곳을 오가느라 바쁘지 않을 것이다. “좋아, 오늘 중요한 회의가 있다면서? 내가 참석하고 회의가 끝난 후 너희와 함께 돌아갈게.” 고영란의 눈빛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네.” 박민정은 고영란이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면 오늘 더 흥미로운 상황이 펼쳐질 것 같아 기대가 됐다. 박민정은 8시 반에 호산 그룹에 도착했고 회의 자료를 준비하던 중 유남우에게 불려갔다. “민정아, 큰형 일에 대해 들었지?”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침에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남준 씨를 찾으셨다더군요. 연우를 데리고 옛 저택에 가서 남준 씨를 돌보라고 하셨어요.” “오늘 아침에 너에게 전화했는데 형의 실종에 대해 얘기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금방 돌아오다니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네.” 유남우가 말했다. ‘전화?’ 박민정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제가 왜 당신의 전화를 받지 못했죠?” “아마 너무 일찍이라 아직 자고 있었던 것 같아. 반쯤 잠에 취해 전화를 끊었을지도 몰라.” 유남우는 그녀가 핑계를 댈 만한 이유를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박민정은 문득 아침에 유남준이 했던 ‘스팸 전화’ 발언이 떠올랐다. 유남우를 ‘스팸 전화’라고 칭하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한 걸까? 박민정은 어이가 없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랬나 봅니다.” 잠시 후 문밖에서 홍주영이 문을 두드렸다. “둘째 도련님, 곧 회의가 시작됩니다.” “좋아.” 유남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오늘은 영업부의 월간 실적 보고가 있는 날이었다. 최근 영업부장 자리에 새로운 인물이 들어왔기에 유남우는 그 성과에 대해 걱정이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에
“그럼, 최 부장님. 정말로 그들과의 계약 해지를 받아들여야 하나요? 그건 상당한 손실인데. 차라리 프로젝트를 박 부장님께 돌려드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진서연은 순진해 보이는 큰 눈으로 말했다. 최현아는 피가 거꾸로 솟을 지경이었다. 박민정은 진서연의 연기를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진서연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돌려드려도 고객들이 다시 받아줄지 모르겠네요.” “어서 나가!” 최현아는 거의 비명을 지르며 진서연을 내보내려 했다. 회의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은 묘한 재미를 느끼며 지켜보고 있었다. 고영란은 눈을 살짝 좁히며 진서연이 나가려는 순간 불렀다. “잠깐, 그냥 가지 말고 있어 봐요.” 진서연은 순진한 표정으로 다시 자리 잡고 서며 문을 닫아 최현아가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했다. 고영란은 그녀의 얘기를 들은 후 최현아를 향해 물었다. “최현아 씨, 박민정 씨의 프로젝트를 빼앗았다는 게 무슨 뜻이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고영란은 오늘 회의에 참석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오지 않았다면 회사 안에 이런 불순한 인물이 있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고현아가 아직 아무 말도 하기 전에 다른 부서의 부장들이 고충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고 이사님, 저희도 좋은 프로젝트를 최 부장님께 뺏겼습니다.” 그들은 유성혁이 최현아에게 프로젝트를 몰아주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빼앗겼다고 표현했지만 고영란은 눈치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우리 호산 그룹이 최 씨 가문의 소유가 되었나요?” 고영란의 말에는 차가운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런 불공정 경쟁은 호산 그룹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며 이는 큰 손실을 초래할 가능성이 컸다. 최현아는 고영란의 반박에 대꾸할 엄두도 못 내고 눈빛으로 유성혁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성혁은 최현아를 지키기는커녕 마치 남인 척하며 질책했다. “현아야, 네 행동이 옳지 않아. 네가 비록 유 씨 가문의 며느리일지언정 호산 그룹에선
내부자는 자신이 이미 정체가 드러난 것을 알지 못한 채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 “부장님, 저를 오해하신 게 아닐까요?” 박민정은 그녀와 더는 말다툼하지 않고 최근 확보한 증거들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좋게 헤어지자고요.” 결국 내부자는 호산 그룹을 떠났다. 전에 최현아가 가로챘던 프로젝트들이 다시 5팀으로 돌아오자 5팀의 직원들은 하나같이 박민정에 대한 존경심이 커졌다. 그녀는 언제나 말한 것을 지키며 직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회사에서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박민정은 고영란을 찾아갔다. 고영란은 박민정이 도착하자 환한 미소로 맞았다. “민정아, 여기 와서 앉아.” 박민정은 고영란 옆에 앉았다. “요즘 몸은 괜찮니? 매일 이렇게 일하는데 힘들지 않아?”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의사 선생님도 아기가 잘 자라고 있다고 하셨어요. 몸도 피곤하지 않고요.” 고영란은 박민정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최현아 사건, 네가 계획한 거지?” 박민정은 숨기지 않고 답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유성혁 씨가 제가 맡은 좋은 프로젝트를 모두 최현아 씨에게 넘기고 저희 5팀에는 골칫거리만 넘겼거든요.” 고영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충고했다. “잘했어. 그렇지만 앞으로 조심해야 해. 네 큰아버지 쪽 사람들은 소심하고 복수심이 강해. 틀림없이 체면을 되찾으려 할 거야.”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조심할게요.” “너무 걱정하지 마. 네 뒤에는 내가 있어. 내가 살아 있는 한 너와 남준이 불안할 일은 없도록 할 거야.” 고영란은 진지하게 말했다. 두 사람은 회사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눈 후 함께 박연우를 데리러 유치원으로 향했다. 고영란의 차가 유치원 앞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차를 바라보았다. “저거 호산 그룹 차 아니야?” “한정판 차량에 경호원까지... 호산 그룹 고위층 아이도 이 유치원에 다니나?” 아이를 데리러 온 다른 학부모들은 모두 놀란 표정이었다. 다들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미안해요.”“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오늘 밤 집에 안 가.”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평생 고독하게 살라고...3년 전 박씨 일가와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오셨어요, 민정 씨.”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미안해요, 깜빡했어요.”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장애인 아내라...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먼지 하나 안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할 얘기 다 했어요?”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민정 씨 문자야?”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낙관적이라, 말이 쉽지.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비 그쳤네.”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