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서다희는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에 유남준에게 개인적인 충고를 한 것도 나중에 그가 후회하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였다.박민정이 사라진 근 5년 동안 유남준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그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유남준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질책하지 않았다.서다희가 떠난 걸 보고 유남준은 다시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박민정은 마침 조하랑의 전화를 받아 그녀가 경찰서에서 풀려났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민정아, 너 혹시 유남준 씨 찾으러 갔어?”어젯밤에 박민정에게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받지 않아 조하랑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응, 어제 이 일에 대해 얘기했거든.”박민정이 솔직하게 대답했다.“그럼 혹시 너를 난처하게 만들었어?”조하랑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아니.”박민정은 실내로 들어온 유남준을 보며 말했다.“이따가 다시 얘기하자.”박민정이 전화를 끊었다.유남준이 걸어 들어오며 물었다.“누구에게서 걸려 온 전화야?”“내 친구, 하랑이에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선 후 유남준을 보며 물었다.“윤우는 어디 있어요? 윤우가 몸이 약해서 계속 병원에 있어야 하거든요.”“아이 옆에 의료진 붙여놨어.”그 말인즉 박민정은 아들을 만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윤우는 내 아들이에요, 꼭 윤우를 만나야겠어요!”유남준이 한 번 거절한 일은 아무리 사정을 해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걸 박민정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유남준이 자기 말을 믿지 않고 윤우와 친자 확인 검사를 할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 윤우는 그의 아이가 아니라는 거짓말이 모두 들통날 것이니 말이다.“얌전히 집에 있으면 아이를 만나게 해줄게. 그런데 아이에 관한 얘기를 제외하고 따로 나에게 할 말은 없어?”박민정이 의문스러운 얼굴을 보였다.“그동안 외국에서 뭐 했어? 왜 갑자기 돌아오게 된 거야?”유남준은 자선 경매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 때문에 당혹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게다가 박민정은 또 유
“유남준 씨가 윤우를 데리고 갔다고?”윤우의 일을 알게 된 조하랑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응, 남준 씨가 윤우를 어디로 데려갔는지도 몰라.”박민정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그리고, 내가 기억 잃은 척하는 것도 알게 되었어. 앞으로 당분간 거기서 지내야 할 것 같아. 예찬이는 네가 잘 좀 돌봐줘, 부탁할게. 남준 씨가 예찬이까지 발견하면 안 돼.”“걱정하지 마. 예찬이를 잘 숨기고 있을게.”조하랑은 자신 있게 장담하더니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물었다.“민정아, 혹시 유남준 씨가 지금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아니면 왜 꼭 너를 두원 별장에 두려는 걸까?”박민정은 흠칫하더니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부인했다.“이지원이 한 얘기 중에 이것만은 맞는 말이야.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평생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 있어. 남준 씨는 어떻게 내가 몇 년 동안 사라졌다고 갑자기 내가 좋아졌겠어?”조하랑은 한참 생각하더니 짜증이 확 몰려왔다.“유남준이라는 사람, 완전히 쓰레기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왜 구속한대?”박민정이 조하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됐어. 이 얘기는 그만해. 오늘 금요일이니까 이따가 같이 예찬이 데리러 가자.”예찬이의 얘기에 분위기가 한껏 밝아졌다.“좋아.”조하랑은 아직 이지원을 고소하는 걸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 동안 경찰서에 갇힌 것 때문에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조하랑이 박민정에게 네티즌의 댓글을 보여줬는데 그들은 모두 이지원의 편을 들어주고 있었다.박민정은 댓글들을 하나씩 자세히 살펴봤다.[사람이 유명해지니 별 이상한 사람들이 다 물어뜯네.][그러게, 정말 뻔뻔하다니까.][우리 지원이 언니는 유남준 대표님을 생각하면서 그 곡을 만들었단 말이야. 외국의 그 작곡가는 어떻게 곡을 창작했대?][완전 동의. 지원이 언니의 신곡은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잖아. 그 작곡가가 그렇게 떳떳하다면 자기가 창작한 곡도 공개하든가.]박민정은 어금니를 깨물더니 입꼬리를 올렸다.“하랑아, 이제 때가 된 것 같아.”
아무래도 엄마에게서 들은 얘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원은 삼촌의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데 그 아이는 자기와 유씨 가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박예찬은 손에 든 책을 내려놓고는 똘망똘망한 두 눈을 뜨며 물었다.“어떻게 할 생각이야?”그의 물음에 유지훈과 조동민은 멀뚱히 서로만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유지훈이 박예찬에게 다가가더니 입을 삐죽이며 물었다.“예찬아, 어떻게 하면 좋을까?”‘두 사람 아무 계획 없을 줄 알았어. 하지만 나에게는 생각해 둔 계획이 있지.’낮은 목소리로 그 계획에 대해 속삭이는 박예찬을 보더니 유지훈과 조동민은 신이 났다.이때, 어떤 여자애가 다가오며 물었다.“예찬 오빠, 무슨 얘기 하고 있어?”유지훈이 여자애를 옆으로 밀어내며 말했다.“저리 가, 지금 남자들끼리 얘기하고 있잖아.”여자애는 입을 삐죽이더니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다른 한 편.길을 주행하는 연예인 밴 안에서 이지원이 메이크업 수정을 마쳤다.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말했다.“지원 씨, 애 데리러 가는데 그냥 다른 사람 보내도 되잖아요.”이지원이 눈을 희번덕거렸다.“뭘 안다고 그래? 보통 집안 자식이 아니란 말이야. 유씨 가문의 장손을 데리러 가는 기회가 쉽게 찾아오는 줄 알아?”지난번 이지원이 축하연에서 망신당한 후로 유명훈은 유난히 그녀를 꺼렸다.유지훈은 유명훈이 가장 예뻐하는 증손주였기 때문에 아이만 잘 달랜다면 이지원은 곧 어르신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이지원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언제쯤이면 남준 오빠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아이가 생기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는데 말이야.’이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발신자를 확인한 이지원은 통화 버튼을 누른 후 목소리를 낮췄다.“앞으로 다시는 나에게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지원아, 돌아와 줘. 너 정말 보고 싶으니까 제발 돌아와. 네가 없으면 정말 못 살 것 같아.”전화기 너머로 애원하는
“대스타 이지원이 유씨 집안 아이 데리러 갔다가 된통 혼났잖아. 불쌍하기도 하지.”“역시 재벌 집안은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네. 연예인도 결국 다 똑같아. 남자친구 형수님 아이한테까지 잘 보이려 해야 한다니...”“쯧쯧쯧,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여자가 되면 얼마나 좋아. 유명한 연예인으로 활동하면서 번 돈은 이미 충분하지 않나? 왜 굳이 재벌 가문에 기어 들어가겠다는 거지?”“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니까...”모두 저마다 한마디씩 보태며 화제를 더욱 뜨겁게 달궜다.그리고 그제야 이지원이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것을 대충 눈치챈 조하랑은 다급히 인파 속으로 들어가 까치발을 하고 상황을 살폈다.곧바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채 몇 명의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밴을 타고 떠나는 이지원을 발견하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박장대소를 터뜨렸다.“이지원 너도 이런 꼴을 당할 때가 있구나. 쌤통이다!”이지원이 떠나자 구경거리를 찾던 사람들도 서서히 흩어졌다.한편, 조하랑은 여전히 박예찬의 행방을 찾고 있었고 바로 그때, 누군가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이모!”“동민이? 너 왜 아직도 안 갔어?”웃통을 홀딱 벗은 채 자신을 향해 헤헤 인사하는 조동민을 바라보며 의아해하던 조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조동민에게 다가가 물었다.“기사님께서 데리러 안 오셨어?”그러자 조동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제가 10분 늦게 오시라고 했어요.”“왜?”“아까 그 여자 보셨죠? 그거 제 작품이거든요.”그러자 조하랑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네가 물을 부은 거라고?”자유를 되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번에는 조카가 또 들어갈까 봐 조하랑은 다소 겁을 먹었다.이지원은 무려 유남준의 첫사랑이란 말이다!그러자 조동민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저뿐만 아니라 그리고...”조동민이 다른 공범 두 사람을 지목하기도 전에 박예찬이 걸어 나와 그를 불렀다.“동민아, 기사님께서 오셨다.”그 말에 조동민이 슬쩍 바깥을 내다보자 정말 기사 아저
이지원이 뭐라 해명하기도 전에 통화는 그대로 끊기고 말았다.화가 치밀어 오른 이지원은 애써 손바닥을 꾹 눌렀다.유지훈 이 빌어먹을 놈이 집에 돌아가 고자질했나 보군.이윽고 곰곰이 생각해보던 이지원은 자신이 넘어진 것이 기필코 그 몇몇 아이들과 관계있으리라고 단정 지었다.애초에 유치원의 복도가 그렇게 미끄러울 리가 없는 데다가 왜 하필 그녀가 넘어지고 유지훈 그 빌어먹을 자식과 다른 아이가 물통을 들고 걸어온단 말인가.게다가 공교롭게도 물을 모두 그녀의 몸에 끼얹는다고?이지원은 자신이 어린애의 수단에 넘어갈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여 다음에 또다시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한창 씩씩대며 화를 내고 있는데 마침 매니저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지원아, 큰일 났어. 측에서 네 노래를 고소했어. 인터넷에서 지금 난리도 아니야.”“다 해결된 문제 아니에요?”“해결되긴 뭐가 해결돼. 너 절로 봐봐. 민 선생님 노래는 4년 전에 이미 발매된 곡인데 네 노래가 그분 곡이랑 99%나 비슷하대.”매니저는 급하다 못해 뜨거운 가마 속에 놓인 개미처럼 안절부절못했다.“지금 민 선생님 측에서 널 표절로 고소한것도 모자라 네가 사권을 이용해서 상대 변호사를 하루 동안 가뒀다고 항의하고 있어. 게다가 우리 측 비서와 민 선생님 측 작업실 사이에 나눴던 대화도 전부 들통났다니까. 지금 사람들 전부 우리는 곡을 살 능력이 안 되니까 훔칠 수 밖에 없다고 조롱하고 있어.”매니저의 말에 이지원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이었다.“일단 제가 한번 봐볼게요.”이지원은 애써 침착하게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켰지만, 핸드폰을 열자마자 자신의 표절 기사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했음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이지원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트위터 계정과 가장 가까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백한 사람은 결국 깨끗하기 마련이라는 게시물은 팬과 일반인의 댓글들로 도배를 당하고 말았다.[반전이다. 처음에 절대 표
박민정은 조하랑의 집에서 밥을 먹으며 그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그러다 시간도 늦어지니 차를 타고 두원 별장으로 돌아갔다.그녀는 박예찬이 괜한 생각을 할까 두려워 조하랑 더러 박윤우의 얘기와 자신이 현재 두원 별장에서 지내고 있단 얘기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사실 박예찬은 이미 오래전부터 엄마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엄마를 배려하여 굳이 더 묻지는 않았다. 그러고는 사석에서 몰래 하랑 이모의 입을 열 생각이었다.두원 별장.5시에 이미 회사에서 돌아온 유남준은 거실의 소파에 묵묵히 앉아있었고 탁자 위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선물 박스가 놓여 있었다.“땅—”벽에 걸려있는 유럽식 벽시계의 시침이 10에 닿으며 시간을 알렸다.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왜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유남준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린 적이 없었다. 하여 그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이내 선물 박스가 유남준의 예쁘고 기다란 손 위에 올려지고 그는 한 번, 또 한 번 선물을 살피며 내용물이 여자의 마음에 쏙 들리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박스를 닫았다.또 반 시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유남준은 더욱 짜증이 났다.이윽고 유남준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선물을 잡아채고 직접 박민정을 잡아 오려 몸을 일으킨 순간, 입구에서부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유남준이 고개를 돌리자 연분홍빛을 띈 레드 원피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집안으로 걸어들어오는 박민정과 마주하였다.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하고 한순간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그때, 먼저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말을 건넸다.“아직도 안 주무셨어요?”잠을 자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밥도 먹지 않았다.유남준의 머릿속은 현재 뒤죽박죽 엉키고 설켜 복잡하기 그지없었다.“어디 갔다가 이제 와?”“아, 친구 집에 밥 먹으러 갔어요.”박민정은 이내 슬리퍼로 갈아 신고 걸어오더니 그대로 유남준을 지나쳐 곧장 위층에 있는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줄곧 사람을 붙여 그녀를
유남준은 그만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박민정이 직접 본인 입으로 보석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확실해?”유남준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박민정은 현재 유남준의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며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은 필연코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전 누구의 선물이든 전부 받지만, 유독 당신 선물은 받고 싶지 않아요.”말을 마치고 박민정은 유남준을 밀어낸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박민정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남준은 그대로 선물 박스를 쓰레기통에 집어 던졌다.밤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데다 감기 기운까지 더해지니 위가 또 살살 아파 나기 시작했다.유남준도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 고객이 보내준 럭셔리 팔찌를 보노라니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 흉내를 낼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지만 전 화장하기 좋아합니다. 예쁘고 화려한 옷도 좋아하고요. 그리고 금은보화 액세서리도 좋아합니다.”정말 사서 고생이군!유남준은 계속하여 싸늘한 얼굴을 하고는 화를 내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박민정은 이제 유남준의 비위를 맞춰주지 않았고 항상 혼자 방에 들어가 씻고 휴식을 취했다.전에 의사가 박민정은 항상 평온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밤새지 말고 충분히 휴식을 취해야만 병이 재발하지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그러나 어제 그녀의 귀에 또 문제가 생겼다.유남준은 소파에 30분 정도 더 앉아있다가 위층 박민정의 방에 인기척이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 여자는 이제 정말 그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방 안, 박민정은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잠가놓았던 문이 누군가에 의해 열쇠로 열리면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방안에 들어왔다.남자는 이불을 걷어내어 큰 손으로 박민정의 몸을 품속에 꽉 끌어안았다.박민정의 몸에서 나는 익숙하면서도 향기로운 냄새를 맡으며 유남준의 몸살은 조금 나아진 듯 싶었다.하지만 이윽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박민정이 두 눈을 떠버렸고 어두컴컴한 방 안, 남자
유남준은 냉소를 피식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연지석도 널 그렇게 사랑하는 건 아니던데? 말해봐. 그 자식은 널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둔 거야?”이번에야말로 유남준은 박민정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잽싸게 쥐어 잡았다.“왜? 정곡이라도 찔렸어?”박민정은 애초에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요 몇 년 동안 그녀와 연지석은 줄곧 친구처럼 지내왔다.“당신이 지금 이렇게 굶주려 있는 걸 보니 이지원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나 봐요?”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그러자 유남준은 속으로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난 너와 달라.”유남준은 애초에 단 한 번도 이지원을 건드린 적이 없다.“뭐가 다른데요? 결국 도긴개긴 아닙니까? 저보다 얼마나 더 잘났다고 그러세요? 전 당신이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당신도 결국 그저 그렇네요. 이지원은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나요?”유남준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박민정의 물음에 하나도 답하지 않았고 그저 계속하여 그녀를 자신의 품 아래에 단단히 가둬놓았다.그러자 박민정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유남준이 신음을 내며 숨을 들이마셨지만, 그는 여전히 박민정을 놓아주지 않았고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요 몇 년간, 그는 수없이 많은 꿈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꿈꿨었다.그 자리에 얼어붙은 박민정은 지금 화를 낼 때가 아니라 기회라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그의 스킨쉽을 따랐다.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박민정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선명한 변화를 눈치챈 그는 무척 의아해했다.하여 유남준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너 지금 나한테 맞춰주고 있는 거야?”박민정의 동공이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곧이어 유남준의 동작이 전부 멈췄고 그는 침대 옆 램프 전원을 눌렀다.박민정은 무의식 간에 자신의 몸을 애써 가렸다.그러자 유선
윤소현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아봤다.그녀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던 사촌 동생한테 뺨을 맞으니 그 충격은 거의 배로 느껴졌다.“정윤아, 너 어디 두고 봐!”그러자 정윤아는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언제까지 두고 보시려고요? 몇십 년 뒤 백발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까요?”그녀의 말 한마디에 윤소현은 또다시 발악했다.“난 절대 감옥에 가지 않을 거야! 누군가가 꼭 데리러 올 거거든.”“아,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그러나 윤소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윤소현한테는 정윤아가 마지막 동아줄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정윤아는 대답 못 하는 그녀에게 계속 일침을 날렸다.“그거 알아요? 제가 너무 심심해서 유남우 씨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거든요?”유남우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윤소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뭐 하고 있는데?”“여기저기 선을 보러 다니느라 아주 정신이 없더라고요. 거의 괜찮은 집 여자들은 다 한 번씩 만나본 것 같던데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언니의 그늘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윤소현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런 남자랑 결혼하는 것 자체가 불행이야.”윤소현의 순결도 유남우 때문에 더럽혀졌다. 이때 정윤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유남우 씨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어요?”순간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그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왜요?”정윤아는 순간 그녀의 말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그러나 윤소현은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말을 꺼리는 모습에 정윤아는 더욱 호기심이 차올랐다.“혹시 유남우 씨가 언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요?”“네가 알아서 뭐 하게?”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정윤아도 어쩔 수 없이 그만 물어야 했다.“알겠어요.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아직 끝난 것 같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방성원은 방문호와 한창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혹시나 자기 아내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방성원의 모습에 안현자는 혀를 끌끌 차며 방문호에게 말했다.“여보, 애들도 쉬어야 하는데 우리도 그만 돌아갑시다.”그러자 방문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그리고 돌아가기 전 그는 방성원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마치 어린아이에게 당부하듯 말했다.“인하랑 싸우지 말고 잘 지내.”두 사람이 가자마자 방성원은 빠르게 설인하한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엄마가 심한 말은 안 하셨어?”순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낀 설인하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그저 시시콜콜한 얘기만 나눴어.”말을 마치자마자 설인하가 갑자기 방성원을 향해 양팔을 뻗으며 물었다.“나 좀 안아줄 수 있어?”사실 두 사람은 약혼 날 이후로 포옹해 본 적이 없었다.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그녀를 품에 안았고 설인하는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성원 씨...”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하게 들리는 그녀의 부름에 방성원이 대답했다.“응.”“앞으로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서로 숨기는 일 없이 솔직하게 말하기.”방성원은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다.“그래.”방성원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설인하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온기를 느끼려 했지만 방성원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느라 꽉 안아주지도 못했다.그렇게 두 사람이 애틋하게 안고 있을 무렵, 갑자기 도우미가 방은정을 데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리고 말았다.“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그러자 설인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도우미에게 다가가더니 방은정을 자기 품에 안고 그녀의 귀여운 볼에 입을 맞췄다.
설인하는 안현자의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여태껏 방성원은 자신을 너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저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했다.특히 연애 초반에도 방성원은 달콤한 말 한마디나 그 어떤 사랑 고백, 하물며 그 흔한 선물조차 준 적이 없었다.‘그런데 꼭 나랑 결혼해야 한다고 매달렸다고?’안현자는 한눈에 봐도 눈앞의 설인하가 지금 자기 말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인하야, 이런 걸로 내가 너를 속이겠니? 너도 잘 생각해 봐. 너희 집이 그때 파산하고 네 부모님까지 돌아가셨으면 우리 방씨 가문에서는 충분히 그 결혼을 무를 수 있었어.”여기까지 들은 설인하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그대로 파혼을 밀고 나갔다면 좀 창피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 선택이 우리 방씨 가문에는 더 유리했을 거야. 그런데 우리 성원이가 무조건 너랑 결혼하겠다고 억지 부리는 바람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그때 성원이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또 너를 위해 우리 앞에서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그 무뚝뚝한 방성원이 자신을 위해 무릎까지 꿇었다는 소리에 설인하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저는...”이때 안현자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솔직히 난 아직도 네가 내 며느리인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죽고 못 산다고 하니 엄마로서 다른 방법이 없잖니.”안현자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설인하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방금 했던 말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그런데 왜 여태껏 이런 말을 저한테 해주지 않으셨어요?”“난 네가 진심으로 우리 아들을 사랑하는 줄 알았으니까!”안현자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넌 그저 겉으로만 우리 성원이를 사랑한다고 했고 우리 아들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만큼 표현하지 않았던 거야.”“그 애는 자기 아빠를 닮아서 어릴 때부터 말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걸 잘 못 했어. 그렇다고 이게 너한테 상처받을 이유는 못 되잖아?”안현자는 어떻게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약혼했고 설인하는 학교에 다닌 것 외에는 주로 방성원 만나러 성진그룹에 갔다. 그때의 방성원은 설인하에게 한없이 차갑고 무뚝뚝해서 남들의 눈에는 여자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졸업하고 난 뒤 양가 부모님의 허락하에 두 사람은 혼인을 맺었고 모든 게 탄탄대로 흘러갈 줄 알았다.그러나 결혼하기 얼마 전에 설씨 가문이 부도났고 동시에 설인하의 부모님도 돌아가게 되었다.그때 설인하는 큰 타격을 받고 한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게다가 방성원은 설인하와의 결혼 첫날 밤에 그녀에게 상처 주는 말까지 해버렸다.그 이후로부터 설인하는 방성원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분명 두 사람은 부부였지만 어딘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했다.설인하는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빠르게 자기 손을 뺐다.그러자 방성원은 한껏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래?”설인하는 주먹을 꽉 쥐고 답했다.“아니야.”그리고 지금의 방성원을 더 이상 보기 싫어 아예 등지고 앉았다. 혹시나 혼자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방성원이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왠지 모르게 익숙지 않았고 오히려 불편했다.방성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던 이때, 설인하가 다시 답했다.“천천히 하자, 천천히.”그제야 방성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설인하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많이 배려한 셈이다.집에 돌아와 보니 방성원의 부모님이 이미 와있었고 한창 방은정과 놀아주고 있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물었다.“왜 이렇게 늦게 와?”“퇴근하고 병원에 친구 보러 갔었어요.”“그래.”안현자는 방은정을 안고 설인아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에게 말했다.“인하야,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좀 나와 봐.”말을 마친 뒤 아이를 도우미에게 넘겨줬다.그러나 방성원은 본능적으로 자기 어머니가 설인하에게 못된 말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엄마,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안현자는 자기 아들의 예민한 반응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혹시나 정수미와 박민정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갈 때도 모두 짝을 지어 돌아갔는데 그중 정민기와 진서연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서다희와 민수아도 팔짱을 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하더니 그녀도 임신했다고 알렸다.세 커플 중 오직 방성원과 설인하 두 사람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진작에 눈치챈 방성원은 아까부터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애써 참고 있었다.하여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김인우가 그의 팔을 잡았다.“성원아, 나도 곧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그러자 방성원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우리 은정이는 이제 곧 두 살이야.”“어쩌라고? 우리 딸이 아마 네 딸보다 더 귀여울걸?”그의 말에 방성원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순간 김인우는 할 말을 잃었다.그의 말대로 아무리 자기가 딸은 원한다고 무조건 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그러고 보니 유남준도 딸을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네 명의 아이는 모두 남자였다. 역시나 딸 복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그러다가 방성원은 문득 설인하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걸 발견하고 재빨리 김인우에게 말했다.“그만하자.”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설인하를 쫓아갔다.“뭘 이리도 빨리 가?”설인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기다리란 소리도 없었잖아.”방성원은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가 문득 앞에서 하하호호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두 커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자신과 설인하는 비록 지금 이혼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방성원은 지난번 설인하와 연지석 사이를 오해한 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차에 올라탈 때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남자의 돌발행동에 설인하는 온몸이 굳어진 채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손잡고 싶
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만약 어느 날 네 마음이 변했더라도 민정이한테 상처 주지 말고 그냥 우리 정씨 가문으로 보내줘.”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미 수많은 일을 겪어온 정수미는 약속이란 게 참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유남준도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자기 말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하여 허리를 숙이고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비록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아는데요. 꼭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전 이미 IM 그룹의 모든 지분을 민정이 명의로 변경했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저희 둘이 헤어지면 민정이가 평생 먹고 남을 돈은 있는 거잖아요.”사실 박민정은 이미 지엔 그룹을 소유하고 있기에 금전적인 면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그래도 유남준이 저렇게 말하니 마음이 든든했고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하여 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나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게.”“네.”유남준의 입꼬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민정이 수술이 끝났는지 이만 가볼까요?”“그래.”그렇게 유남준은 정수미의 휠체어를 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사실 방금 정수미가 당부했던 말은 서주에 있을 때 정근우도 똑같이 말했었다.“만약 우리 민정이를 괴롭히는 날에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때나 지금이나 유남준은 그들의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다.박민정의 수술은 점심이 되어서야 끝났고 김인우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유남준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어떻게 됐어?”김인우는 마스크를 벗으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아마 큰 문제는 없을 텐데 회복되는 걸 지켜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정수미와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들 배고프시죠? 얼른 가서 밥부터 먹고 옵시다.”김인우도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밥부터 먹어요.”박민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오늘 수술한다고 해서 옆에 있어 주려고, 겸사겸사 정 대표님도 보려고 왔지.”박민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안 깨어나셨어.”“괜찮아, 밖에서 기다릴게.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김인우는 그녀의 업무를 전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고 조하랑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그녀는 박민정곁에 앉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맞다, 남준 씨는?”“예찬이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로 올거야.”지금 정민기도 매우 바쁜 시기라 왠지 유남준이 직접 박예찬을 데려다줘야 안심될 것 같았다.“아, 그렇군.”그렇게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또 한동안 위로의 말을 건네는걸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박민정의 얼굴이 지금 괜찮아 보여도 속은 말이 아니란 걸 조하랑은 다 알고 있었다.“괜찮을 거야, 민정아.”그러고는 박민정을 꽉 안아줬다.김인우는 곁에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지 몰라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어느 정도 얘기를 나누다가 조하랑은 정수미 보러 들어갔다.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는데 전혀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정 대표님, 오면서 과일 좀 사 왔어요.”조하랑은 혹시나 정수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최대한 밝게 인사를 건넸다.“하랑 씨, 고마워요.”“저는 민정이 친구이고 민정이 엄마면 제 엄마나 마찬가지예요.”그리고 뒤에 서 있는 김인우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나중에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 남편한테 말씀 주시면 되겠습니다.”그러자 김인우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정수미에게 말했다.“하랑 씨말대로 혹시나 병원에 불편한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알겠어요. 그런데 여기 병원 너무 좋아요.”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박민정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정수미가 중병 환자란 사실마저 잊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매일 슬픔 속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호들갑에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지금 여기서 어떻게 더 늦게 가란 소리예요? 전 그냥 임산부일 뿐이지 어디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걷는 것까지 뭐라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줄래요?”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안 뒤로부터 김인우는 조하랑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고 먹는 것도 철저하게 관리했다.그리고 지금은 혹시나 넘어질까 봐 걷는 것까지 걱정했다.조하랑은 이제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하랑 씨는 제 아내이고 뱃속에는 제 아이가 있는데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줘요? 말 좀 들어요, 네?”김인우는 말하면서도 조하랑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지만 조하랑은 그냥 못 들은 척 앞으로 직진했다.병원에는 당연히 사람도 많고 급히 걸어가는 의사나 환자, 그리고 병간호는 사람들도 많았다.그 보습을 지켜보던 김인우는 조하랑을 안쪽으로 세우더니 사람들에게 소리쳤다.“여기 임산부가 있는데 혹시나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병원 관계자들은 그가 김인우란 사실을 알아차린 뒤 바로 벽 쪽에 붙다시피 지나다녔다.하지만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당연히 김인우가 누구인지, 그가 병원에서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저마다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조하랑은 순간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 기어들어 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과잉보호하는 남자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그만해요. 인우 씨는 얼굴이 두꺼워서 잘 못 느끼겠지만 전 부끄러워 미치겠어요.”그러나 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의 아이가 안전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역시나 빠르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작 임신한 거로 왜 저리 오버야?”“내 말이, 누가 보면 이 병원에서 혼자 임신한 줄?”“너무 저러면 오히려 위험한 일이 더 많이 발생하던데.”“그러니까요. 너무 몸을 사리는 것도 안 좋더라고요. 차라리 그냥 우리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게 낫지.”“문제는 아직 배도 너무 불러온 게 아니던데요?”몇
어렵게 되찾은 친엄마의 사랑을 다시 잃는 게 두려워서일까?박민정은 그렇게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저녁.박민정은 유남준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남아서 정수미 곁을 지키려 했다.그러나 정윤아도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그렇게 밤이 되자 정수미는 또다시 통증이 밀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어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다.그 모습을 발견한 박민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엄마, 잠이 안 오면 우리 수다나 떨어요. 어차피 저도 안 피곤하거든요.”정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모, 우리 얘기나 나눠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래.”정윤아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꺼냈다.“민정 언니, 언니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어렸을 때라...박민정은 그 시절 행복했던 부분만 말해줬다.“사실 별거 없어요. 그때 저는 한 가정부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박민정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자 정윤아와 정수미는 모두 귀 기울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특히 정수미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그녀한테는 너무 소중한 시절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그러다가 중간중간에 정윤아는 궁금한 점도 박민정에게 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눴고 정수미의 통증도 어느새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저녁 10시.정수미는 시계를 보다가 문득 내일 박민정의 수술이 생각나 졸린 척 하품했다.“안 되겠다. 나 너무 피곤한데 우리 이만 자자.” “네? 한참 재밌는데 벌써 잔다고요?”정윤아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아직 하나도 안 졸려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 같은 늙은이가 너희 젊은 사람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쉬운 줄 알아? 자, 너희 둘은 옆에 칸에 가서 자. 민정이는 내일 수술도 해야 하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