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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0화

Author: 윤지
유남준은 냉소를 피식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연지석도 널 그렇게 사랑하는 건 아니던데? 말해봐. 그 자식은 널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둔 거야?”

이번에야말로 유남준은 박민정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잽싸게 쥐어 잡았다.

“왜? 정곡이라도 찔렸어?”

박민정은 애초에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요 몇 년 동안 그녀와 연지석은 줄곧 친구처럼 지내왔다.

“당신이 지금 이렇게 굶주려 있는 걸 보니 이지원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나 봐요?”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자 유남준은 속으로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

“난 너와 달라.”

유남준은 애초에 단 한 번도 이지원을 건드린 적이 없다.

“뭐가 다른데요? 결국 도긴개긴 아닙니까? 저보다 얼마나 더 잘났다고 그러세요? 전 당신이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당신도 결국 그저 그렇네요. 이지원은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나요?”

유남준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박민정의 물음에 하나도 답하지 않았고 그저 계속하여 그녀를 자신의 품 아래에 단단히 가둬놓았다.

그러자 박민정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

갑작스러운 고통에 유남준이 신음을 내며 숨을 들이마셨지만, 그는 여전히 박민정을 놓아주지 않았고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요 몇 년간, 그는 수없이 많은 꿈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꿈꿨었다.

그 자리에 얼어붙은 박민정은 지금 화를 낼 때가 아니라 기회라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그의 스킨쉽을 따랐다.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박민정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선명한 변화를 눈치챈 그는 무척 의아해했다.

하여 유남준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너 지금 나한테 맞춰주고 있는 거야?”

박민정의 동공이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

곧이어 유남준의 동작이 전부 멈췄고 그는 침대 옆 램프 전원을 눌렀다.

박민정은 무의식 간에 자신의 몸을 애써 가렸다.

그러자 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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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1화

    유남준은 긴 다리를 움직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민정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자,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자국이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경계하듯 소파에 붙어서 잤다.실내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아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곧이어 유남준이 전화를 걸어 아침밥을 가져오라고 하려 할 때 누군가가 밖에서 현관문을 열었다.이지원이 손에 아침밥을 들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들어왔다.“오빠, 내가 아침에 먹을 거 좀 가져왔어요. 오늘 회사 창립기념일 아니에요? 있다가 우리 같이...”아직 참석하자는 말을 채 하지도 않았는데 이지원은 소파에서 자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눈앞에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이지원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박민정이 왜 여기서 자고 있단 말인가? 설마 두 사람 밤새 여기서...유남준은 비몽사몽한 모습으로 이지원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너 어떻게 들어왔어?”지문인식이나 얼굴인식을 등록하지 않은 이상, 대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를 뚫고 조용히 들어올 수가 없다.이지원은 손에 든 아침 식사가 든 봉투를 꽉 쥐고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어머님이 보내셨어요. 앞으로 오빠를 잘 보살피라고 하셨거든요.”전에 고영란은 이지원이 유남준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끔 하려고 특별히 대원 별장 대문의 인식 시스템에 이지원의 정보를 입력했다.그런데 이지원은 오늘에서야 시간이 나서 올 수 있었다. 원래는 어제 민 선생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이지원의 시선이 천천히 박민정에게서 옮겨갔다.그녀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오빠,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나가서 말하자.”어젯밤 박민정은 잘 쉬지 못했는데 마침 잠을 자려고 보청기도 끼지 않아서 두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이지원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마음속의 불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민정 씨가 왜 오빠 집 소파에서 자고 있어요?”유남준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내가 민정이한테 다시 들어오라고 했어.”그러자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2화

    “넌 이제 돌아가 봐. 오늘 밤 회사 창립기념일 행사엔 내가 참석할 테니까.”유남준은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요.”이지원은 들고 왔던 아침밥을 내려놓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박민정을 힐끗 보고 떠났다.유남준이 돌아서자 박민정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왠지 저도 모르게 마음에 찔렸다.“언제 깼어?”박민정이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조금 전에 이지원 씨가 남준 씨에게 결혼하자고 말했을 때요. 축하해요.”유남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유남준은 검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지금 해도 돼.”만약 박민정이 그더러 이지원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유남준은 바로 동의할 것이다.그런데 예상 밖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두 분 축하드려요. 만약 이혼 절차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울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윤우를 나에게 돌려줘요.”유남준의 가슴이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박민정이 이젠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가 누구와 함께 있든,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유남준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왜 불편한지 몰랐다.그는 헛기침을 여러 번 하고는 옆에 있는 이지원이 사 온 아침밥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네가 직접 시켜 먹어.”말을 마친 유남준은 박민정의 옆을 지나 서재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유치해졌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지원이 가져온 음식을 먹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직접 요리를 하고 밥을 다 먹은 후 유남준에게 나간다고 문자를 남겼다.유남준은 서재에서 박민정이 방금 했던 말을 후회한다고 말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문자밖에 못 받았다.[나 회사 가요.]너무 짧은 한마디였다.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서재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박민정은 이미 떠났다.주방에 가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박민정은 그를 위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3화

    비서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주우면서 물었다.“지원 씨, 어떻게 됐어요?”“나더러 조하랑에게 사과하고 표절한 걸 공개적으로 인정하래.”비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그걸 어떻게 인정해요? 만약 지원 씨가 표절한 걸 인정하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게 물거품이 되잖아요?”이지원은 민 선생을 난감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녀는 민 선생이 정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받는 대신 국제 소송을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지금 이지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곡이 아니라 박민정의 일을 해결하고 유남준과 결혼하는 것이었다.“오늘 밤 회사 창립기념일 행사에 잘 준비하고 갈 거야.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떠도는 표절 사건은 잠시 돈으로 막고 있어 봐.”이지원은 자신에게 있는 돈으로 오래 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지 결혼만 순조롭게 할 수 있으면 괜찮았다.회사에서.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은 조하랑의 전화를 받았다.“민정아, 오늘 올 거야?”오늘은 주말이라 조하랑은 박민정과 예찬이를 불러 야외에서 캠핑하고 싶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거절했다.“유남준이 날 지켜보고 있어. 이미 윤우의 존재를 들켜버렸는데 예찬이까지 들키면 안 돼. 우리 나중에 보자.”조하랑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 알겠어. 그럼 빨리 유남준 애 갖고 우리 에스토니아로 돌아가자.”“그러자.”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만졌다. 왠지 이번엔 유남준이 전보다 더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그의 아이를 가지는 건 조금 어려워 보였다...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유리창을 통해 보자 서다희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서 비서, 어쩐 일이에요?”서다희가 걸어 들어오면서 말했다.“민정 씨, 유 대표님께서 사무실에 오라고 하셨습니다.”박민정은 오늘 유남준이 회사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유남준의 사무실에 가기 싫었지만, 윤우가 그의 손에 있으니 갈 수밖에 없었다.“네, 알겠어요.”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4화

    박민정을 유남준의 사무실 문 앞까지 데려다준 후에야 서다희는 떠났다.문이 닫혀 있지 않아서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유남준은 대표 의자에 앉아 집중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잘생긴 남자는 진지하게 일할 때 더욱 멋져 보인다. 박민정은 처음에 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이리 와.”박민정이 다가가면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앞으로 아래층에서 일할 필요 없어.”유남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도 여기서 업무 봐.”박민정은 의아해했다.“왜 여기서 업무를 봐야 하죠?”“이유는 없어. 이건 회사의 결정이야.”회사의 결정이 아니라 그의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박민정은 유남준의 부하직원이니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꽤 괜찮은 결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박민정은 어젯밤의 관계로 임신할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했다.“내려가서 노트북 가져올게요.”박민정이 말했다.그녀가 내려가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그녀의 개인물품들과 노트북을 사무실로 가져왔다. 특별히 그녀가 쓰던 테이블도 옮겨 왔다.유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민정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물품들을 살펴봤다.“나 궁금한데, 그동안 회사에서 뭐 했어?”예전에 박민정은 가정주부였다. 유남준의 내조를 하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싶어요? 보여줄게요.”그녀는 유남준이 아직도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 굳이 참을 리가 없었다.그러자 유남준은 관심을 보였다.“그래.”박민정은 유남준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심심할 때 했던 일들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유남준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박민정의 노트북에 많은 프로젝트 계약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언제부터 이런 걸 작성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5화

    한참 지나서 박민정은 이상함을 느꼈다. 유남준은 그녀에게 키스만 할 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박민정이 점점 숨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졌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유남준은 동작을 멈췄다. 비서가 업무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계획이 또 한 번 실패로 끝났다.점심에 두 사람은 같이 밥 먹으러 갔다. 기사는 유남준이 자주 가는 가게로 두 사람을 데려다주었다.식사할 때 유남준은 박민정을 떠보았다.“걱정하지 마. 난 너랑 이혼 안 할 거야.”박민정은 당황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다시 덤덤하게 말했다.“이지원이 원하는 건 신분이야. 그래서 주기로 했어. 그래도 법적으로 내 아내는 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이혼 안 할 거야.”박민정은 믿기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볼게.”박민정은 그가 자신을 떠보는 중이라는 것을 몰랐다.“우리 이혼해요. 그리고 남준 씨는 이지원과 결혼해요.”유남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의 추측이 맞았다. 박민정은 그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만, 그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왜? 그땐 나랑 결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굴더니, 이제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길 바라는 거야?”유남준은 수저를 내려놓고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이지원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건 그가 아닌가?박민정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유남준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기억해. 우린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앞으로 다시는 연지석과 만나지 마.”박민정은 멍해졌다.“왜 남준 씨는 이지원과 만나도 되고 난 친구도 만나면 안 돼요?”“난 배신당하기 싫으니까!”“그게 무슨 말이에요?”“무슨 말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거야.”유남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두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6화

    유남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민정의 손과 다리의 찰과상을 발견하고 다시 차에 끌고 가서 기사에게 병원에 가라고 지시했다.차에 앉아있는 박민정도 이제야 두려움이 폭발했다. 조금 전엔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예찬이와 윤우가 있는데 사고를 당해서는 안 된다.유남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넌 왜 화가 난 거야?”박민정은 손과 다리가 아파 났고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빠졌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싫었다.분명히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고 특히 어렸을 때는 자신의 옆에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쩍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그는 화가 난 듯 말했다.“방금 어디 가려고 했어?”“그냥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기사가 시립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자 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외과 진찰실에서.유남준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남준아, 여긴 웬일이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김인우는 흰 가운을 입고 진찰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이었다.유남준은 왜 왔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김인우는 그의 뒤에 있는 박민정을 흘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가 기어코 인생을 경험해 보라고 하셔서 왔어.”김인우는 의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김훈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법학도 공부했다.김훈은 그가 앞으로 가업을 더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더 실무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김훈이 김인우더러 의사가 하기 싫으면 조씨 가문과 혼인을 맺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의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김훈이 조하랑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지 몰랐다.조하랑과 그 장난꾸러기 아이를 생각하면 김인우는 머리가 아팠다.유남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박민정을 앞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7화

    김인우는 박민정이 어떤 곳에 손이 닿지 않아 연고를 바르지 못하는 줄 알고 손을 뻗어 도와주려 했다.박민정은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본능적으로 피했다. 연고는 김인우의 손등에 떨어졌다.“미안해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나 갈게요.”김인우는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약을 바르는 걸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고맙지만 됐어요.”박민정은 떠나려 했다.김인우는 그녀가 또 오해할까 봐 막아섰다.“남준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박민정은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그런 박민정을 바라보는 김인우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를 무서워하지 마. 다신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무서워하지 말라고?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박민정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 김인우는 그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같은 말을 했었다.“미안하지만 비켜줘요.”자신을 해치든 해치지 않든 이런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김인우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약을 다 바르고 나가.”박민정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비뚤어진 성격이 다시 폭발할까 봐 두려워서 귀찮아도 약을 바르러 갔다.“앞으로는 차에서 뛰어 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위험하잖아. 다행히 지금은 가벼운 부상일 뿐이지만.”김인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김인우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걸 오래전부터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약을 바르고 말했다.“다 발랐으니 가도 되죠?”박민정의 맑고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김인우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그냥 여기 있어.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속할게, 응?”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를 썼다.박민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김인우가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하지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28화

    차에 탄 후 유남준은 병원을 힐끗 돌아보았다.“내가 진찰실에서 나간 후에 인우랑 무슨 얘기를 했어?”“제가 대학 다닐 때 누군가를 구한 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박민정은 숨기지 않았다.‘사람을 구했다고?’유남준은 이지원이 대학 시절 김인우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구했던 일을 떠올렸다.“그래서 뭐라고 했어?”“그때 남준 씨가 돌아왔어요.”박민정은 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이르지 않았다. 유남준은 오늘 밤에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박민정은 그를 따라 회사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리창 밖으로 흩날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돌아가고 싶어요.”“오늘 밤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따라와.”박민정의 눈가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기사에게 행사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리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조용한 룸으로 데려갔다.청록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박민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맑고 깨끗했다.룸 문 앞에 선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여기서 기다렸다가 밤에 같이 돌아가자.”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에 유남준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회사 창립 기념일 축하 행사.이지원과 고영란도 일찍 왔다.“박민정이 다시 대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야?”고영란이 물었다.“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박민정이 남준 오빠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두 사람이 아직 이혼 증명서도 받지 못했고, 박민정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잖아요.”이지원은 고영란에게 박민정을 다시 대원으로 데려온 사람이 유남준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영란은 손에 든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지난번 생일 연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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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34화

    윤소현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아봤다.그녀의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던 사촌 동생한테 뺨을 맞으니 그 충격은 거의 배로 느껴졌다.“정윤아, 너 어디 두고 봐!”그러자 정윤아는 팔짱을 끼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언제까지 두고 보시려고요? 몇십 년 뒤 백발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까요?”그녀의 말 한마디에 윤소현은 또다시 발악했다.“난 절대 감옥에 가지 않을 거야! 누군가가 꼭 데리러 올 거거든.”“아, 그래요? 그 사람이 누구인데요?”그러나 윤소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사실 윤소현한테는 정윤아가 마지막 동아줄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졌기 때문이다.정윤아는 대답 못 하는 그녀에게 계속 일침을 날렸다.“그거 알아요? 제가 너무 심심해서 유남우 씨는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했거든요?”유남우라는 이름이 들리자마자 윤소현은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뭐 하고 있는데?”“여기저기 선을 보러 다니느라 아주 정신이 없더라고요. 거의 괜찮은 집 여자들은 다 한 번씩 만나본 것 같던데 왜 이렇게 결혼을 서두르는지 모르겠어요. 설마 언니의 그늘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윤소현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그런 남자랑 결혼하는 것 자체가 불행이야.”윤소현의 순결도 유남우 때문에 더럽혀졌다. 이때 정윤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녀에게 되물었다.“유남우 씨를 좋아했던 게 아니었어요?”순간 윤소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그 누구한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왜요?”정윤아는 순간 그녀의 말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그러나 윤소현은 그때의 악몽이 떠오르면서 또다시 입을 다물었다.말을 꺼리는 모습에 정윤아는 더욱 호기심이 차올랐다.“혹시 유남우 씨가 언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요?”“네가 알아서 뭐 하게?”끝까지 대답하지 않으려는 모습에 정윤아도 어쩔 수 없이 그만 물어야 했다.“알겠어요. 그런데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아직 끝난 것 같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33화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방성원은 방문호와 한창 거실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걸 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혹시나 자기 아내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았는지 살피는 방성원의 모습에 안현자는 혀를 끌끌 차며 방문호에게 말했다.“여보, 애들도 쉬어야 하는데 우리도 그만 돌아갑시다.”그러자 방문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래.”그리고 돌아가기 전 그는 방성원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마치 어린아이에게 당부하듯 말했다.“인하랑 싸우지 말고 잘 지내.”두 사람이 가자마자 방성원은 빠르게 설인하한테 다가와 걱정스레 물었다.“엄마가 심한 말은 안 하셨어?”순간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걸 느낀 설인하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그저 시시콜콜한 얘기만 나눴어.”말을 마치자마자 설인하가 갑자기 방성원을 향해 양팔을 뻗으며 물었다.“나 좀 안아줄 수 있어?”사실 두 사람은 약혼 날 이후로 포옹해 본 적이 없었다.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그녀를 품에 안았고 설인하는 그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성원 씨...” 오늘따라 유난히 다정하게 들리는 그녀의 부름에 방성원이 대답했다.“응.”“앞으로 우리 사이좋게 지내자. 서로 숨기는 일 없이 솔직하게 말하기.”방성원은 갑자기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했다.“그래.”방성원은 고민조차 하지 않고 바로 답했다.설인하는 눈을 꼭 감은 채 그의 온기를 느끼려 했지만 방성원은 자기 감정을 억제하느라 꽉 안아주지도 못했다.그렇게 두 사람이 애틋하게 안고 있을 무렵, 갑자기 도우미가 방은정을 데리고 들어오는 바람에 분위기가 깨져버리고 말았다.“아이고, 정말 죄송합니다. 바로 나갈게요.”그러자 설인하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아니에요. 괜찮습니다.”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도우미에게 다가가더니 방은정을 자기 품에 안고 그녀의 귀여운 볼에 입을 맞췄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32화

    설인하는 안현자의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여태껏 방성원은 자신을 너무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그저 미적지근한 태도로 대했다.특히 연애 초반에도 방성원은 달콤한 말 한마디나 그 어떤 사랑 고백, 하물며 그 흔한 선물조차 준 적이 없었다.‘그런데 꼭 나랑 결혼해야 한다고 매달렸다고?’안현자는 한눈에 봐도 눈앞의 설인하가 지금 자기 말을 믿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인하야, 이런 걸로 내가 너를 속이겠니? 너도 잘 생각해 봐. 너희 집이 그때 파산하고 네 부모님까지 돌아가셨으면 우리 방씨 가문에서는 충분히 그 결혼을 무를 수 있었어.”여기까지 들은 설인하는 자기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그대로 파혼을 밀고 나갔다면 좀 창피했을 수는 있었겠지만 그 선택이 우리 방씨 가문에는 더 유리했을 거야. 그런데 우리 성원이가 무조건 너랑 결혼하겠다고 억지 부리는 바람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그때 성원이는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또 너를 위해 우리 앞에서 무릎 꿇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어.”그 무뚝뚝한 방성원이 자신을 위해 무릎까지 꿇었다는 소리에 설인하는 더 이상 고개를 들 수 없었다.“저는...”이때 안현자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솔직히 난 아직도 네가 내 며느리인 게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우리 아들이 죽고 못 산다고 하니 엄마로서 다른 방법이 없잖니.”안현자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설인하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었다.그리고 그녀가 방금 했던 말이 점점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그런데 왜 여태껏 이런 말을 저한테 해주지 않으셨어요?”“난 네가 진심으로 우리 아들을 사랑하는 줄 알았으니까!”안현자가 갑자기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넌 그저 겉으로만 우리 성원이를 사랑한다고 했고 우리 아들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그만큼 표현하지 않았던 거야.”“그 애는 자기 아빠를 닮아서 어릴 때부터 말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걸 잘 못 했어. 그렇다고 이게 너한테 상처받을 이유는 못 되잖아?”안현자는 어떻게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31화

    모든 게 완벽해 보였다.그렇게 두 사람은 약혼했고 설인하는 학교에 다닌 것 외에는 주로 방성원 만나러 성진그룹에 갔다. 그때의 방성원은 설인하에게 한없이 차갑고 무뚝뚝해서 남들의 눈에는 여자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졸업하고 난 뒤 양가 부모님의 허락하에 두 사람은 혼인을 맺었고 모든 게 탄탄대로 흘러갈 줄 알았다.그러나 결혼하기 얼마 전에 설씨 가문이 부도났고 동시에 설인하의 부모님도 돌아가게 되었다.그때 설인하는 큰 타격을 받고 한동안 말조차 하지 못했다.게다가 방성원은 설인하와의 결혼 첫날 밤에 그녀에게 상처 주는 말까지 해버렸다.그 이후로부터 설인하는 방성원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고 분명 두 사람은 부부였지만 어딘가 서먹서먹하고 어색했다.설인하는 문득 그때의 일이 떠오르자 빠르게 자기 손을 뺐다.그러자 방성원은 한껏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왜 그래?”설인하는 주먹을 꽉 쥐고 답했다.“아니야.”그리고 지금의 방성원을 더 이상 보기 싫어 아예 등지고 앉았다. 혹시나 혼자 지낸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방성원이 다정하게 대해주는 게 왠지 모르게 익숙지 않았고 오히려 불편했다.방성원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지던 이때, 설인하가 다시 답했다.“천천히 하자, 천천히.”그제야 방성원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알겠어.”설인하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많이 배려한 셈이다.집에 돌아와 보니 방성원의 부모님이 이미 와있었고 한창 방은정과 놀아주고 있었다.그리고 두 사람이 같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물었다.“왜 이렇게 늦게 와?”“퇴근하고 병원에 친구 보러 갔었어요.”“그래.”안현자는 방은정을 안고 설인아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녀에게 말했다.“인하야,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좀 나와 봐.”말을 마친 뒤 아이를 도우미에게 넘겨줬다.그러나 방성원은 본능적으로 자기 어머니가 설인하에게 못된 말을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엄마, 그냥 여기서 얘기해요.”안현자는 자기 아들의 예민한 반응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30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은 혹시나 정수미와 박민정의 휴식을 방해하는 것 같아 하나둘씩 돌아가기 시작했다.갈 때도 모두 짝을 지어 돌아갔는데 그중 정민기와 진서연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서다희와 민수아도 팔짱을 끼고 가다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말하더니 그녀도 임신했다고 알렸다.세 커플 중 오직 방성원과 설인하 두 사람만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상황에서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그리고 이런 상황을 진작에 눈치챈 방성원은 아까부터 마음이 불편했지만 사람이 많아서 애써 참고 있었다.하여 빠르게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김인우가 그의 팔을 잡았다.“성원아, 나도 곧 아이가 태어날 것 같아.” 그러자 방성원이 뜬금없이 한마디를 내뱉었다.“우리 은정이는 이제 곧 두 살이야.”“어쩌라고? 우리 딸이 아마 네 딸보다 더 귀여울걸?”그의 말에 방성원은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아직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면서.”순간 김인우는 할 말을 잃었다.그의 말대로 아무리 자기가 딸은 원한다고 무조건 딸이 태어나는 것도 아니었다.그러고 보니 유남준도 딸을 간절히 원했지만 태어난 네 명의 아이는 모두 남자였다. 역시나 딸 복이 없는 건 어쩔 수 없나보다.그러다가 방성원은 문득 설인하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걸 발견하고 재빨리 김인우에게 말했다.“그만하자.”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설인하를 쫓아갔다.“뭘 이리도 빨리 가?”설인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기다리란 소리도 없었잖아.”방성원은 그녀의 대답에 어이없다가 문득 앞에서 하하호호 즐겁게 걸어가고 있는 두 커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자신과 설인하는 비록 지금 이혼에 대한 얘기를 더 이상 꺼내지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냉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방성원은 지난번 설인하와 연지석 사이를 오해한 게 미안한 것도 있어서 차에 올라탈 때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남자의 돌발행동에 설인하는 온몸이 굳어진 채 고개를 돌리고 그에게 물었다.“뭐 하는 거야?”“손잡고 싶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9화

    정수미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만약 어느 날 네 마음이 변했더라도 민정이한테 상처 주지 말고 그냥 우리 정씨 가문으로 보내줘.”여태껏 살아오면서 이미 수많은 일을 겪어온 정수미는 약속이란 게 참 지켜내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유남준도 그녀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지금으로서는 딱히 자기 말을 증명해 낼 수 있는 게 없었다.하여 허리를 숙이고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비록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말해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아는데요. 꼭 행동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전 이미 IM 그룹의 모든 지분을 민정이 명의로 변경했어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저희 둘이 헤어지면 민정이가 평생 먹고 남을 돈은 있는 거잖아요.”사실 박민정은 이미 지엔 그룹을 소유하고 있기에 금전적인 면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지만 그래도 유남준이 저렇게 말하니 마음이 든든했고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하여 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그래, 나도 두 사람의 행복을 빌어줄게.”“네.”유남준의 입꼬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민정이 수술이 끝났는지 이만 가볼까요?”“그래.”그렇게 유남준은 정수미의 휠체어를 밀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사실 방금 정수미가 당부했던 말은 서주에 있을 때 정근우도 똑같이 말했었다.“만약 우리 민정이를 괴롭히는 날에는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때나 지금이나 유남준은 그들의 말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박민정을 지켜주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했다.박민정의 수술은 점심이 되어서야 끝났고 김인우가 수술실에서 걸어 나오자마자 유남준이 빠르게 달려가 물었다.“어떻게 됐어?”김인우는 마스크를 벗으며 긴 한숨을 몰아쉬었다.“아마 큰 문제는 없을 텐데 회복되는 걸 지켜봐야 할 것 같아.”유남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고 정수미와 다른 사람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다들 배고프시죠? 얼른 가서 밥부터 먹고 옵시다.”김인우도 웃으며 답했다.“그래요. 밥부터 먹어요.”박민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8화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너 오늘 수술한다고 해서 옆에 있어 주려고, 겸사겸사 정 대표님도 보려고 왔지.”박민정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아직 안 깨어나셨어.”“괜찮아, 밖에서 기다릴게.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김인우는 그녀의 업무를 전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줬고 조하랑은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그녀는 박민정곁에 앉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되물었다.“맞다, 남준 씨는?”“예찬이 학교에 데려다주고 바로 올거야.”지금 정민기도 매우 바쁜 시기라 왠지 유남준이 직접 박예찬을 데려다줘야 안심될 것 같았다.“아, 그렇군.”그렇게 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또 한동안 위로의 말을 건네는걸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박민정의 얼굴이 지금 괜찮아 보여도 속은 말이 아니란 걸 조하랑은 다 알고 있었다.“괜찮을 거야, 민정아.”그러고는 박민정을 꽉 안아줬다.김인우는 곁에서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지 몰라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어느 정도 얘기를 나누다가 조하랑은 정수미 보러 들어갔다.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는데 전혀 환자처럼 보이지 않았다.“정 대표님, 오면서 과일 좀 사 왔어요.”조하랑은 혹시나 정수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최대한 밝게 인사를 건넸다.“하랑 씨, 고마워요.”“저는 민정이 친구이고 민정이 엄마면 제 엄마나 마찬가지예요.”그리고 뒤에 서 있는 김인우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나중에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 남편한테 말씀 주시면 되겠습니다.”그러자 김인우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와 정수미에게 말했다.“하랑 씨말대로 혹시나 병원에 불편한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알겠어요. 그런데 여기 병원 너무 좋아요.”정수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박민정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정수미가 중병 환자란 사실마저 잊어버렸다.그리고 얼마 안 남은 시간을 매일 슬픔 속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7화

    그의 호들갑에 조하랑은 미간을 찌푸리고 답했다.“지금 여기서 어떻게 더 늦게 가란 소리예요? 전 그냥 임산부일 뿐이지 어디 몸이 불편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제발 걷는 것까지 뭐라 하지 말고 좀 가만히 있어 줄래요?”조하랑이 임신한 사실을 안 뒤로부터 김인우는 조하랑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고 먹는 것도 철저하게 관리했다.그리고 지금은 혹시나 넘어질까 봐 걷는 것까지 걱정했다.조하랑은 이제 더 이상 대꾸할 기력도 없었다.“하랑 씨는 제 아내이고 뱃속에는 제 아이가 있는데 제가 신경 쓰지 않으면 누가 신경 써줘요? 말 좀 들어요, 네?”김인우는 말하면서도 조하랑의 눈치를 힐끔힐끔 봤지만 조하랑은 그냥 못 들은 척 앞으로 직진했다.병원에는 당연히 사람도 많고 급히 걸어가는 의사나 환자, 그리고 병간호는 사람들도 많았다.그 보습을 지켜보던 김인우는 조하랑을 안쪽으로 세우더니 사람들에게 소리쳤다.“여기 임산부가 있는데 혹시나 부딪치지 않게 조심해주세요.”병원 관계자들은 그가 김인우란 사실을 알아차린 뒤 바로 벽 쪽에 붙다시피 지나다녔다.하지만 환자나 환자 가족들은 당연히 김인우가 누구인지, 그가 병원에서 어떤 존재인지 모르고 있었기에 저마다 이상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조하랑은 순간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 기어들어 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과잉보호하는 남자를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지 문득 의심이 들었다.“그만해요. 인우 씨는 얼굴이 두꺼워서 잘 못 느끼겠지만 전 부끄러워 미치겠어요.”그러나 김인우는 지금 조하랑의 뱃속의 아이가 안전한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역시나 빠르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고작 임신한 거로 왜 저리 오버야?”“내 말이, 누가 보면 이 병원에서 혼자 임신한 줄?”“너무 저러면 오히려 위험한 일이 더 많이 발생하던데.”“그러니까요. 너무 몸을 사리는 것도 안 좋더라고요. 차라리 그냥 우리처럼 자연스레 행동하는 게 낫지.”“문제는 아직 배도 너무 불러온 게 아니던데요?”몇

  • 죽기 전엔 못 놔줘   제1826화

    어렵게 되찾은 친엄마의 사랑을 다시 잃는 게 두려워서일까?박민정은 그렇게 찬물로 여러 번 얼굴을 씻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아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저녁.박민정은 유남준을 집으로 돌려보낸 뒤 혼자 남아서 정수미 곁을 지키려 했다.그러나 정윤아도 남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정수미는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그렇게 밤이 되자 정수미는 또다시 통증이 밀려와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어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다.그 모습을 발견한 박민정이 그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엄마, 잠이 안 오면 우리 수다나 떨어요. 어차피 저도 안 피곤하거든요.”정윤아도 고개를 끄덕였다.“네, 고모, 우리 얘기나 나눠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그래.”정윤아가 먼저 대화의 주제를 꺼냈다.“민정 언니, 언니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전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데.”어렸을 때라...박민정은 그 시절 행복했던 부분만 말해줬다.“사실 별거 없어요. 그때 저는 한 가정부네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학교 끝나서 집에 돌아오니...”박민정이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해주자 정윤아와 정수미는 모두 귀 기울이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특히 정수미는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그녀한테는 너무 소중한 시절이라 하나도 빠짐없이 새겨들었다.그러다가 중간중간에 정윤아는 궁금한 점도 박민정에게 물었다.그렇게 세 사람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나눴고 정수미의 통증도 어느새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저녁 10시.정수미는 시계를 보다가 문득 내일 박민정의 수술이 생각나 졸린 척 하품했다.“안 되겠다. 나 너무 피곤한데 우리 이만 자자.” “네? 한참 재밌는데 벌써 잔다고요?”정윤아는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전 아직 하나도 안 졸려요.”그러자 정수미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나 같은 늙은이가 너희 젊은 사람들의 체력을 따라가기 쉬운 줄 알아? 자, 너희 둘은 옆에 칸에 가서 자. 민정이는 내일 수술도 해야 하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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