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민정의 손과 다리의 찰과상을 발견하고 다시 차에 끌고 가서 기사에게 병원에 가라고 지시했다.차에 앉아있는 박민정도 이제야 두려움이 폭발했다. 조금 전엔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예찬이와 윤우가 있는데 사고를 당해서는 안 된다.유남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넌 왜 화가 난 거야?”박민정은 손과 다리가 아파 났고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빠졌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싫었다.분명히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고 특히 어렸을 때는 자신의 옆에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쩍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그는 화가 난 듯 말했다.“방금 어디 가려고 했어?”“그냥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기사가 시립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자 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외과 진찰실에서.유남준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남준아, 여긴 웬일이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김인우는 흰 가운을 입고 진찰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이었다.유남준은 왜 왔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김인우는 그의 뒤에 있는 박민정을 흘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가 기어코 인생을 경험해 보라고 하셔서 왔어.”김인우는 의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김훈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법학도 공부했다.김훈은 그가 앞으로 가업을 더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더 실무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김훈이 김인우더러 의사가 하기 싫으면 조씨 가문과 혼인을 맺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의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김훈이 조하랑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지 몰랐다.조하랑과 그 장난꾸러기 아이를 생각하면 김인우는 머리가 아팠다.유남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박민정을 앞
김인우는 박민정이 어떤 곳에 손이 닿지 않아 연고를 바르지 못하는 줄 알고 손을 뻗어 도와주려 했다.박민정은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본능적으로 피했다. 연고는 김인우의 손등에 떨어졌다.“미안해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나 갈게요.”김인우는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약을 바르는 걸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고맙지만 됐어요.”박민정은 떠나려 했다.김인우는 그녀가 또 오해할까 봐 막아섰다.“남준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박민정은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그런 박민정을 바라보는 김인우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를 무서워하지 마. 다신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무서워하지 말라고?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박민정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 김인우는 그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같은 말을 했었다.“미안하지만 비켜줘요.”자신을 해치든 해치지 않든 이런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김인우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약을 다 바르고 나가.”박민정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비뚤어진 성격이 다시 폭발할까 봐 두려워서 귀찮아도 약을 바르러 갔다.“앞으로는 차에서 뛰어 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위험하잖아. 다행히 지금은 가벼운 부상일 뿐이지만.”김인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김인우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걸 오래전부터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약을 바르고 말했다.“다 발랐으니 가도 되죠?”박민정의 맑고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김인우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그냥 여기 있어.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속할게, 응?”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를 썼다.박민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김인우가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하지만
차에 탄 후 유남준은 병원을 힐끗 돌아보았다.“내가 진찰실에서 나간 후에 인우랑 무슨 얘기를 했어?”“제가 대학 다닐 때 누군가를 구한 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박민정은 숨기지 않았다.‘사람을 구했다고?’유남준은 이지원이 대학 시절 김인우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구했던 일을 떠올렸다.“그래서 뭐라고 했어?”“그때 남준 씨가 돌아왔어요.”박민정은 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이르지 않았다. 유남준은 오늘 밤에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박민정은 그를 따라 회사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리창 밖으로 흩날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돌아가고 싶어요.”“오늘 밤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따라와.”박민정의 눈가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기사에게 행사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리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조용한 룸으로 데려갔다.청록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박민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맑고 깨끗했다.룸 문 앞에 선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여기서 기다렸다가 밤에 같이 돌아가자.”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에 유남준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회사 창립 기념일 축하 행사.이지원과 고영란도 일찍 왔다.“박민정이 다시 대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야?”고영란이 물었다.“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박민정이 남준 오빠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두 사람이 아직 이혼 증명서도 받지 못했고, 박민정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잖아요.”이지원은 고영란에게 박민정을 다시 대원으로 데려온 사람이 유남준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영란은 손에 든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지난번 생일 연회에서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서.유남준은 어머니가 와인잔을 계속 건네는 모습을 보고, 또 이지원이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그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술을 더 마실 수 없어요.”유남준은 고영란이 다시 건네는 와인을 정중하게 거절했다.고영란은 그가 약간 취한 것을 보고 이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이지원은 즉시 유남준의 곁으로 와서 그를 부축했다.“오빠가 술을 마셨으니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관계를 가져야 했다.유남준은 아직 정신이 맑아서 팔을 빼려고 했는데 멀리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이지원을 밀어내지 않고 깊은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녀의 외모가 너무 뛰어나서 놀랍게도 참석자 대부분은 그녀가 박씨 가문의 청각 장애인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고영란도 무심코 그녀를 바라보다가 온몸이 얼어붙었다.이전의 박민정은 옷을 잘 입지 못했고, 얼굴이 예쁘긴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부족했다.지금의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박민정은 유남준과 이지원에게 곧장 다가갔다.“지원 씨, 남준 씨를 집에 데려다주러 왔어요.”이 한마디에 행사 참석자들은 모두 시선을 돌렸다.“저 사람 박민정 아니야? 유 대표님의 아내 말이야.”“저 여자가 박민정이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많이 변했죠? 그래도 여전히 예쁘네요.”“원래 예뻤어요. 전에는 대중 앞에 잘 안 나왔거든요.”“이지원보다 더 예뻐 보이는데, 저 여자가 여기 왔으니 이지원은 불륜녀 아니야?”이지원은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졌다.이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깊은 눈빛으로 박민정을 향해 물었다.“왜 내려왔어?”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면서 아직 약효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남준 씨가 와인을 많이 마신 것을 보고 취할까 봐 걱정되어 내려왔어요.”두 사람의 대화는 이지원
이지원의 말은 확실히 유남준의 아픈 곳을 찔렀다. 박민정과 연지석 사이에 이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유남준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민정과 방성원이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방성원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긴 다리로 박민정을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일 다 끝났어요? 이제 집에 갈까요?”박민정의 말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유남준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배에 화가 가득 찼지만 그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그는 박민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언제부터 성원이랑 얘기도 했어?”방성원은 답답한 성격이라 친구 몇 명과 함께 놀 때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그가 다른 여성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먼저 나를 부른 건 그 사람이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뒤따라 차에 앉았다.박민정은 의아했다. 그는 분명히 와인을 많이 마셨고, 거기에 무언가 첨가되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여전히 정신이 이렇게 말짱할 수 있을까?유남준 자신만이 이 순간 그가 얼마나 참기 힘든지 알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박민정에게서 나는 희미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박민정은 점차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약의 후유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런데 이때 급커브로 인해 그녀는 유남준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고 아예 안겨 버렸다.“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박민정은 일부러 천천히 일어나면서 사과했다.차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자 몸을 잘못 가눈 척하며 다시 안겼다.유남준은 자신의 무릎에 넘어진 박민정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번에도 고의가 아니야?”박민정은 이제야 알아차린 척하고 서둘러 일어나면서 뺨이 붉어졌다.그녀는 이번엔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했다.“내 손에 상처가 있잖아요. 방금 실수로 눌렀어요, 그래서...”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바쁘게 눈을 피
응어리진 마음을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박민정은 결국 바에서 술 몇 잔을 시켰다. 알코올에 취해야만 잠시라도 이 고민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같은 시각.한 시간이 넘는 찬물 샤워를 하고 나서야 유남준은 약효가 조금 떨어졌다.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간 그는 박민정이 집에 없음을 눈치챘다.보디가드에게 물으니 홀로 외출하여 바에 갔단다.바에서.홀로 알코올을 들이켜는 박민정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누군가 빛을 등진 채 그녀를 향해 멈춰 섰다.몽롱하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박민정의 눈에 신이 정성스레 빚은 듯한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왜 왔어요?”박민정이 입을 열자, 알코올 향이 물씬 풍겨온다.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술은 언제 배운 거야?”한 잔이면 바로 취하던 그녀였는데, 테이블 위에 빈 술잔이 꽤 보였다.박민정은 오히려 그가 자신이 술을 마시는지 여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결혼하고 2년 뒤쯤인 것 같아요.”유남준이 곁에 없는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알코올에 의존해야만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다.유남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목이 메여왔다.그제야 유남준은 자신이 종래로 아내를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박민정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잔을 홱 빼앗아 한쪽으로 내팽개쳐 버렸다.“집에 돌아가자.”집에 돌아간다라...박민정의 눈앞이 저도 모르게 눈물로 흐려졌다.살결을 사정없이 스치는 밤바람은 그다지 살갑지 않았고 조금 춥게 느껴졌다.박민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나 몇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유남준에 의해 번쩍 안아 올려졌다. 몸이 공중에 붕 뜨자 그녀의 여린 손이 본능적으로 유남준의 팔뚝을 잡았다.“내려줘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박민정이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그러나 유남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앞으론 술 마시지 마.”품에 안긴 박민정은 정
“남준 씨가 나와 윤우를 놓아주고, 과거 일을 다시 꺼내지만 않는다면요.”유남준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며 꼭 안았다.“그럴 리가.”그녀가 전에 했던 말이 맞다. 한때 부부였던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박민정이 기어코 가야겠다 해도. 죽지 않는 한 절대.박민정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픽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뒤끝 있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애당초 결혼할 때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또 사람을 앞에 두고 후회의 말을 한다.그녀의 결혼을 후회한다던 말들을 떠올리며 유남준의 얼굴은 점차 냉랭해졌다.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깊은 밤,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를 달리고 있다.박민정은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고 얼굴은 알코올의 여파로 불그스름하다.자신 때문에 감기가 옮았을까 걱정된 유남준이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대려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박민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피해버렸다.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더니 다시 한번 이마에 안착했다. 열은 느껴지지 않는다.“그렇게 많이 마시면 속이 좀 편해?”알면서도 묻는다.박민정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저는 언제 윤우를 볼 수 있어요? 애가 가뜩이나 담이 작은데 낯선 곳에서 얼마나 무섭겠어요.”“너 하는 거 봐서.”유남준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유남준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박민정은 피하지 않은 채 그의 손이 자기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그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남준 씨,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뭘?”“혹시 저 좋아하게 된 거예요?”박민정이 또박또박 물었다.만일 좋아하는 거라면 왜 닿는 것도 그렇게 꺼리는 걸까?유남준이 멈칫하더니 얼른 얼굴에서 손을 뗐다.그리곤 다시 원래의 냉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그럴 리가.”당연하게도 착각이다. 그처럼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겠는가.어쩐지 그렇게 들이대도 거절하더라니.그녀가 태연한 모습
유남준은 목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는 종래로 자금과 프로젝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단지 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뿐이다.백화점이었든 다른 곳이었든, 그날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다.대답을 하지 않는 유남준을 보며 박민정은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지 몰랐다.“이것 말고는 어떻게 남준 씨 마음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마침내 그녀가 입을 꾹 닫자, 남예준이 고개를 돌려 작고 여린 그녀를 바라보았다.“두 가문이 약속한 지 적어도 8년이 지났어. 이 8년간 프로젝트든 자금이든 모두 기준도 내용도 달라졌을 텐데 어떻게 갚으려고?”“가격 제시해요. 어떤 방법을 쓰든 갚을게요.”박민정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은은한 물결이 일었다.“그래. 그럼 갚는 대로 널 놔줄게.”값을 제시하는 쪽이 이쪽이라면 그 빚은 절대 영원히 갚을 수 없을 것이다.유남준의 속을 모르는 박민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두 사람 사이에 얽힌 것을 말하자면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결혼 당시 가문 사이의 약속뿐이다.그가 제시하는 돈을 모두 갚기만 한다면 박민정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빚지지 않을 것이다.차가 드디어 두원 별장으로 들어섰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박민정은 속이 울렁거려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밖에서는 유남준이 보디가드를 추궁하고 있다.“민정이 술 마시게 두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보디가드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10분 이내로 숙취해소제랑 약 가져와.”유남준의 차가운 태도에 보디가드가 얼른 대답하며 떠났다.박민정이 다시 나왔을 때 이미 세수를 한 뒤였다. 하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유난히 창백했다.거실에 있던 유남준이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봐.”박민정이 그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그리고 곧이어 테이블에 놓인 숙취해소제와 약을 발견했다.“숙취해소제 마시고 자.”유남준이 낮게 말했다.“네, 고마워요.”박민정은 소
“언제 쇼핑몰을 인수한 거예요? 저는 왜 모르고 있었죠?”박민정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차에 탑승한 후 다른 두 여인은 공짜로 된 옷을 무제한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랑 함께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아쉽게도 설인하는 연장 근무 중이라 함께 할 수가 없었다.“전에 호 산 그룹에 있을 때 사적으로 사들인 거야, 나도 잊고 있었어.”유남준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당시에 많은 회사들을 사들인 탓에 잊고 있었다.“옷을 사다 잊어버렸단 소리는 들어봤어도 쇼핑몰 한 채 구매하고 잊어버렸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어요.”민수아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역시 부자라 좋네요.”“앞으로 쇼핑하고 싶으면 서 비서랑 함께 와요.”유남준은 이미 박민정의 친구한테 잘 보이는 법을 배웠다.두 눈이 빛이 난 민수아는 말했다.“진짜예요?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진서연도 감사하다고 말했다.쇼핑몰에서 고급 화장품이며 스킨케어 제품, 옷이랑 신발을 구매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민수아와 진서연은 오늘 종일 쇼핑해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진서연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보스, 얼른 유 대표님이랑 재결합하세요. 전에 제가 조사해 봤는데 출산 신고도 해야 되는데, 혼인 신고 증서가 필요해요.”“그렇게 번거로운 거였어, 그러면 재결합하는게 맞아.”민수아도 맞장구를 쳤다.유남준은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느꼈다.쉽게 포섭된 그녀들을 본 박민정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괜찮아, 없어도 출산할수 있어.”박민정의 말을 듣고 조급해진 그녀들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를 몰랐다.이 상황을 본 유남준은 낮에 김인우가 제안했던 일을 떠올렸다.‘어떻게 하면 그녀가 죄책감을 가질까?’한편, 늦은 시간 퇴근 중이던 설인하는 멀리 있는 차 안에서 누군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같은 시각 퇴근 중이던 연지석은 설인하 뒤에 차량을 발견하고 운전 중이던 차를 그녀 앞에 멈추어 세웠다.“늦었는데, 민정 씨도
판매원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저들이 돈을 지급하지 않았으니 내가 바로 구매해도 되는거 아니야?”옷을 든 민수아는 기분이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우리가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옷을 다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구매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물건을 구매하는 것도 선후가 있는 거 아닌가요?”박민정은 그녀를 말렸다.“그만해. 수아야, 옷 그들에게 줘. 우리가 다른 매장 가서 사면돼.”곧 아이를 출산할 박민정은 임신 중 지금 이런 사소한 일로 저들이랑 실랑이를 피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군자가 복수를 갚는 데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지금은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민수아는 옷을 판매원에게 돌려주었다.판매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감사합니다.”이때 이지원이 앞으로 다가와 수습하는 척 말했다.“소현 씨, 우리도 구매한 아기 옷 이 많은데 이 옷 중 몇 벌을 그들에게 양보해 줄까요?윤소현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그래. 우리 엄마가 특별히 디자이너를 불러서 아기 옷을 주문했는데, 이런 저가품들은 그냥 그녀들에게 주지.”이기적이고 가식적인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난 민수아는 상대가 임산부만 아니었어도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싸웠을 것이다.“민정아, 저들이 너무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니야?”윤소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어쩔 건데?”한창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은 그녀들이 오지 않자, 쇼핑몰로 갔다.이 쇼핑몰은 현재 IM 그룹 이것이었다.가게 앞에 도착한 유남준은 윤소현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여기에 모두 저가품이라고 생각되시면 다른 곳에 가서 고가품을 사시죠.”유남준의 목소리를 들은 윤소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돌려보았다.이지원은 회복된 유남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남준 오빠...”이지원이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날줄 몰랐던 유남준은 그가 전에 그녀에게 준 교훈이
유남준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성원아, 내가 건의하는데 네가 이럴수록 인하 씨의 맘이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거야.”방성원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있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인하가 나의 딸아이랑 가출했는데 내가 머리 숙여 사과라도 하란 말이야?”함께 있던 서다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전에 그는 방성원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대표님처럼 똑같이 멍청하기 그지없었다.한쪽에서 축 처진 자세로 앉아서 게임을 하던 김인우가 끼어들어 말했다.“성원아, 내가 생각하기로는 너의 마음이 여전히 약한 것 같아. 나라면 그녀가 어디 가든 상관하지 않고 딸만 빼앗아 올 거야.”자신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김인우는 또 말을 이어갔다.“나한테 길든 조하랑을 보면 몰라? 얼마나 고분고분해졌는데.”그를 향해 두 남자는 눈길을 돌렸다.“허풍 떨지 마!”두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김인우는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근무 중이던 조하랑은 김인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았다.“무슨 일이세요?”조하랑의 말투를 들은 김인우는 바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전에 있었던 일 잊지 마요.”조하랑은 고분고분 말했다.“김 도련님, 무슨 일이 있나요?”“저녁에 이모에게 요리 적게 하라고 해요. 저는 저녁에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요.”‘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다 먹을 수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전화한 거야?’조하랑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또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알겠어요.”김인우가 전화를 끊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방성원이 다가와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유남준도 귀가 솔깃했다.지금의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거야.”김인우는 자기 일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대충은 이런 거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봐.”방성원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좋아, 만약 잘되면 너에게 개인 비
“미안 너희들 많이 놀랐지?”박민정은 손으로 배를 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아이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벌써 어린 나이에 말 잘 듣다니, 너무 착하네.”박민정은 부드럽게 웃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일어나는 소리에 바로 그녀를 부축하러 갔다 배가 점점 불러 오르고 있는 박민정은 가끔 일어나기가 매우 불편했다.“출산예정일이 다음 달이니 회사 일은 부하 직원들에게 맡기고 병원에 같이 가자.”유남준은 엄숙하게 말했다.유남준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 제가 업무처리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유남준은 그녀가 결정한 일이면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알았어. 그러나 꼭 몸조심해. 만약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줘야 해. 알았어?”박민정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그녀는 유남준이 점점 잔소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했다.회사에 갈 때마다 유남준은 그녀를 사무실 안까지 바래다주었다.출근길에서도 유남준은 고의로 박민정에게 말을 건넸다.마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기라도 할까봐 두려운 듯 말이다.”박민정이 겨우 그를 돌려보내자, 설인하 일행이 곁에서 그녀를 조롱했다.“유 대표님, 혹시 대표님을 빼앗기실까 봐 매일 와서 주도권 선전하시는 건가요?”유남준은 회사 전체 직원들에게 밀크티를 사주면서 박민정 남편이 한턱 냈다고 소문내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난하지 마세요. 우리 힘내 일해요.”“그래요.”설인하는 연지석이 그에게 준 프로젝트를 급하게 처리해야 했다. 프로젝트가 순조롭지 못한 탓에 그녀는 골치가 아팠다.분명히 간단한 프로젝트인데,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결단으로 그녀와 계약하지 않으려했다.설인하는 연지석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부사장님.”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왜 그래요?”연지석은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설인하는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없는 원인을 그
이튿날 아침, 이지원은 정수미와 함께 혈액 검사하러 갔다.검사 결과는 며칠 후 나올 것이었다.정수미는 야위고 수척해진 이지원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으나 함미현에 대한 관심보다는 크지 않았다.정수미는 경계심을 높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려고 했다.한편, 정수미는 사람을 시켜 이지원을 조사했다.그 결과 이지원은 확실히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가 맞았다.그러나 보육원 출생기록이 완정하지 않은 탓으로 이지원의 출생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입양된 적이 없는데 왜 이 씨 성을 가지게 된 거야?”정수미는 이지원에게 물어보았다.이지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저를 돌봐 주신 어머님이 이 씨 성이라 어머님의 성씨를 따랐어요.”“아, 그런 거였구나.”“네가 박씨 가문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야?”정수미가 다른 만만한 남자들과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는 이지원은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대답했다.“맞아요. 박씨 가문에서 저의 학업을 후원해 주셨어요, 늘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제가 그분들에게 보답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휴... 제가 졸업 후 줄곧 성공하지 못한 탓이에요.”이지원은 탄식하며 말했고 그녀의 솔직함에 정수미도 그에 대한 경계심을 낮췄다.정씨 가문 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윤소현은 함미현만 없어지면 순조로운 줄만 알았는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나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정수미의 방에서 나온 이지원은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윤소현의 앞으로 갔다.“소현 씨.”이지원은 굽실거리며 윤소현에게 말했다.“소현 씨의 태아는 4, 5개월쯤 되셨죠? 남자아기인 것 같은 데 태교를 시작할 시기에 왜 아이 아빠가 옆에 없나요?”이지원은 고의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녀는 오기 전 윤소현과 유남우의 일에 대해 알아보았다.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지원은 유남우가 윤소현에게 맘이 없다고 추측했다.이지원은 유남우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민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소현은 얼굴빛이 어두워지면서 대답했다.“왜 그렇게 말
현관문 앞까지 걸어 들어가자, 윤소현의 눈앞엔 낯익은 그림자가 보였다.그녀는 얇은 옷을 걸치고 온몸은 상처투성이며 이쁘장한 얼굴엔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저는 그때 진주시 보육원에 있었어요. 지금까지 친부모님을 찾고 다니다가 마침 대표님께서 보도한 뉴스를 보고 말씀하신 출생 날짜랑 똑같아서 확실하지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맘에 친자 확인이라도 해보려고 찾아왔어요.”이지원은 정수미 앞에서 또박또박 말했다.정수미는 방금 전에 이미 함미현한테 속은 일 때문에 이지원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 가 없었다.“이지원 씨 출생일이 내가 말한 시간과 같다고 하니 우리 내일 병원 가서 친자 확인해 봐요.”이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대표님.”이지원은 옷차림은 평범했지만 행동거지는 여느 부잣집 딸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이때 비서는 정수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정 대표님, 제가 보기엔 이 아가씨 얼굴이 대표님 젊은 시절 때 모습이랑 많이 닮았어요.”비서의 말을 듣고서야 정수미는 잠깐이나마 위로가 되었다.윤서현은 급하게 달려오면서 정수미를 불렀다.“엄마!”그러고는 이지원에게 물었다.“이지원 씨, 우리 집엔 어쩐 일로 오셧어요?”전에 이지원과 유남준의 일로 윤소현은 이지원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윤소현, 너 이지원 씨 알아?”정수미가 물었다.“아는 사이라고는 못하고 유남준 씨 첫사랑이 였어요. 전에 한두 번 본 적도 있고요.”정수미는 이지원도 유남준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다.이지원은 상관 없다는 듯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대학교 시절에 유남준과 사귀었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결국 헤어졌어요.”윤소현은 싸가지 없는 태도로 말했다.“어떤 집안 사정요? 박민정이 끼어들어 헤어진 거 아니었어요?”이지원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박민정이 아니었어도 유남준은 저 같은 고아와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여기 찾아와서 우리 엄마 친딸로 속이려는 거예요?”윤소현은 정씨 가문의 지위를 지키려는 마음에 일부러 이지원을
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그동안 소현이를 너무 섭섭하게 했어. 다 내 잘못이야.”“걱정하지 마세요, 큰 아가씨는 대표님을 이해할 겁니다.”다른 한편, 상처치료를 마친 윤소현은 갇혀 있는 함미현의 꼴이 궁금해 급히 보러 갔다.윤소현이 온 힘을 다해 돌멩이로 내리친 탓에 함미현은 아직까지 의식을 차리지 못했고 그런 함미현을 바라보던 윤소현은 갑자기 마음이 불안해졌다.‘함미현이 깨어나면 엄마한테 박민정의 일을 말할게 뻔한데, 그러면 난 어떡하지?’윤소현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막아야만 했다.그때 의식이 돌아온 함미현은 머리가 너무 아팠고 천천히 눈을 떠보니 그녀의 눈앞에 보이는 건 윤소현의 얼굴뿐이었다.“윤소현!”“드디어 깨어났네.”함미현이 깨어나자마자 윤소현은 자신이 맞은 그대로 똑같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정씨 가문의 둘째로 사는 게 안 좋았어? 꼭 일을 이렇게 만들어야 했니? 게다가 나까지 죽이려고 했어?”함미현은 이제 더 이상 되돌릴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윤소현에게 빌지도 않았다.“당신 같은 나쁜 사람은 죽는게 맞아.”“내가 나쁘다고? 넌 애초에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너의 어머니와 내통하여 정씨 가문에 들어왔잖아! 그리고 너의 어머니가 사고가 난 후에도 멀쩡히 정씨 가문에서 자유롭게 살았으면서 대체 누가 나쁜 거니?”“그건 다 내 아들을 위해서 그런 거예요.”함미현의 변명에 윤소현은 웃으며 말했다.“쯧쯧, 참 당당하게도 말하네. 부를 누리고 싶었으면 그렇다고 말하면 되지 어디서 변명이야.”윤소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경고하는데 네 아들 동하한테 무슨 일이 생기길 원치 않으면 입단속 잘해. 박민정에 관한 얘기 하나라도 꺼내면 네 아들은 내 손에 죽을 줄알아.”함미현은 윤소현이 이렇게 파렴치하게 아들로 자신을 위협할 줄은 몰랐다.곧 정수미도 함미현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급한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말해봐, 내 친딸이 누군데? 지금 어디 있는데?”함미현은 간절하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
박민정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함미현이 정수미 딸로 속인 건 틀린 일이라 박민정도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었다.두 사람은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밤, 그 둘은 티비를 보다가 함미현이 친딸로 사칭한 죄로 수감되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뉴스에서 정수미는 친딸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면 이백억 원을 주겠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뉴스를 보던 진서연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함미현 참 비참하게 됐네.”옆에 있던 민수아가 사과를 먹으며 말했다.“적어도 몇 달은 부잣집 아가씨로 살았으니 그렇게 비참한 편은 아닌 거 같아.”“하긴 그러네요.”진서연은 민수아의 말에 찬성하며 대답했다.하지만 설인하는 오히려 그 말을 부정하며 말했다.“고작 몇 달간 부잣집 아가씨로 살려고 저렇게 속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진서연과 민수아는 설인하가 방씨 집안의 아가씨였던 일을 알고 있었다.그들처럼 피라미드 최상급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당연히 그 위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를 것이고 반면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부자의 삶을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함미현은 아마 그녀의 아들을 위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어요. 재산을 전부 팔아서라도 아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싶었을 거에요.”진서연이 말했다.“그런데 정수미는 진짜 저렇게 통쾌하게 친딸의 정보만 제공하면 이백억 원의 현상금을 준단 말이야?”“그 이백억 원을 저도 갖고 싶네요.”그들이 뉴스를 보면서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을 때 박민정은 베란다에 서서 어두컴컴한 밖을 내다보며 넋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그때 유남준도 아래층에 있는 여자 몇 명이 함미현에 관해 토론하는 것을 듣고 박민정을 향해 다가가며 말했다.“왜 혼자 여기 이러고 있어?”유남준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냥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이제 들어가요.”“그래.”침대에 누운 박민정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정수미는 방금 차에서 내린 박민정과 진서연을 돌아 보더니 함미현이 자신을 속인 일이 박민정과 관련 있을 거로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민정 씨,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예요?”“함미현 씨 찾으러 왔어요.”박민정은 담담하게 함미현앞으로 걸어가 계약서를 돌려주면서 말했다.“함미현 씨, 호의는 고맙지만, 저는 이 계약서를 받을 수 없어요.”박민정의 손에 쥐여있는 계약서를 보던 함미현은 무릎을 꿇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민정 씨, 저...”함미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이 다가와 계약서를 가로채면서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이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였어. 당신이 돌려주지 않아도 우린 이 계약을 인정하지 않아.”정수미는 의아해하며 물었다.“무슨 계약서인데?”윤소현은 가로챈 계약서를 정수미한테 넘겨주면서 말했다.“엄마, 이거에요. 함미현이 엄마 딸로 권력을 가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푼도 받지 않고 박민정과 수억 원이 되는 큰 계약을 맺었어요. 이 일이 아니었으면 저도 미현이가 엄마 친딸이 아니라는 의심은 하지 못했을 거예요. 정씨 가문의 사람이 어떻게 이런 밑지는 장사를 할 수 있겠어요.”“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아요. 소현 씨는 진작 내가 정수미 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협박해 왔잖아요. 오늘 난 당신이랑 같이 죽을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그 계약서는 제가 민정 씨에게 빚진 걸 갚은 거에요. 민정 씨가 전에 저랑 저의 어머니를 도와주었기에 보답하고 싶었던 거예요.“보답?”정수미는 너무 화난 나머지 웃음만 나왔다.“내 돈으로 다른 사람한테 은혜를 갚는다고? 내 친딸로 사칭하고 내 딸이 가져야 할 이익까지 누렸으면서 나한텐 왜 보답을 안 하는 거니?”함미현은 정수미를 바라보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사실 민정 씨가...”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윤소현은 어디선가 돌멩이를 주워 함미현의 뒤통수를 내리쳤고 함미현은 바로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정수미는 경악하며 소리쳤다.“윤소현, 이게 무슨 짓이야!”윤소현은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