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민정의 손과 다리의 찰과상을 발견하고 다시 차에 끌고 가서 기사에게 병원에 가라고 지시했다.차에 앉아있는 박민정도 이제야 두려움이 폭발했다. 조금 전엔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예찬이와 윤우가 있는데 사고를 당해서는 안 된다.유남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넌 왜 화가 난 거야?”박민정은 손과 다리가 아파 났고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빠졌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싫었다.분명히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고 특히 어렸을 때는 자신의 옆에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쩍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그는 화가 난 듯 말했다.“방금 어디 가려고 했어?”“그냥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기사가 시립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자 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외과 진찰실에서.유남준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남준아, 여긴 웬일이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김인우는 흰 가운을 입고 진찰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이었다.유남준은 왜 왔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김인우는 그의 뒤에 있는 박민정을 흘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가 기어코 인생을 경험해 보라고 하셔서 왔어.”김인우는 의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김훈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법학도 공부했다.김훈은 그가 앞으로 가업을 더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더 실무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김훈이 김인우더러 의사가 하기 싫으면 조씨 가문과 혼인을 맺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의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김훈이 조하랑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지 몰랐다.조하랑과 그 장난꾸러기 아이를 생각하면 김인우는 머리가 아팠다.유남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박민정을 앞
김인우는 박민정이 어떤 곳에 손이 닿지 않아 연고를 바르지 못하는 줄 알고 손을 뻗어 도와주려 했다.박민정은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본능적으로 피했다. 연고는 김인우의 손등에 떨어졌다.“미안해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나 갈게요.”김인우는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약을 바르는 걸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고맙지만 됐어요.”박민정은 떠나려 했다.김인우는 그녀가 또 오해할까 봐 막아섰다.“남준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박민정은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그런 박민정을 바라보는 김인우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를 무서워하지 마. 다신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무서워하지 말라고?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박민정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 김인우는 그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같은 말을 했었다.“미안하지만 비켜줘요.”자신을 해치든 해치지 않든 이런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김인우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약을 다 바르고 나가.”박민정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비뚤어진 성격이 다시 폭발할까 봐 두려워서 귀찮아도 약을 바르러 갔다.“앞으로는 차에서 뛰어 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위험하잖아. 다행히 지금은 가벼운 부상일 뿐이지만.”김인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김인우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걸 오래전부터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약을 바르고 말했다.“다 발랐으니 가도 되죠?”박민정의 맑고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김인우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그냥 여기 있어.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속할게, 응?”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를 썼다.박민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김인우가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하지만
차에 탄 후 유남준은 병원을 힐끗 돌아보았다.“내가 진찰실에서 나간 후에 인우랑 무슨 얘기를 했어?”“제가 대학 다닐 때 누군가를 구한 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박민정은 숨기지 않았다.‘사람을 구했다고?’유남준은 이지원이 대학 시절 김인우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구했던 일을 떠올렸다.“그래서 뭐라고 했어?”“그때 남준 씨가 돌아왔어요.”박민정은 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이르지 않았다. 유남준은 오늘 밤에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박민정은 그를 따라 회사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리창 밖으로 흩날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돌아가고 싶어요.”“오늘 밤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따라와.”박민정의 눈가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기사에게 행사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리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조용한 룸으로 데려갔다.청록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박민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맑고 깨끗했다.룸 문 앞에 선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여기서 기다렸다가 밤에 같이 돌아가자.”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에 유남준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회사 창립 기념일 축하 행사.이지원과 고영란도 일찍 왔다.“박민정이 다시 대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야?”고영란이 물었다.“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박민정이 남준 오빠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두 사람이 아직 이혼 증명서도 받지 못했고, 박민정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잖아요.”이지원은 고영란에게 박민정을 다시 대원으로 데려온 사람이 유남준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영란은 손에 든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지난번 생일 연회에서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서.유남준은 어머니가 와인잔을 계속 건네는 모습을 보고, 또 이지원이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그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술을 더 마실 수 없어요.”유남준은 고영란이 다시 건네는 와인을 정중하게 거절했다.고영란은 그가 약간 취한 것을 보고 이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이지원은 즉시 유남준의 곁으로 와서 그를 부축했다.“오빠가 술을 마셨으니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관계를 가져야 했다.유남준은 아직 정신이 맑아서 팔을 빼려고 했는데 멀리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이지원을 밀어내지 않고 깊은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녀의 외모가 너무 뛰어나서 놀랍게도 참석자 대부분은 그녀가 박씨 가문의 청각 장애인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고영란도 무심코 그녀를 바라보다가 온몸이 얼어붙었다.이전의 박민정은 옷을 잘 입지 못했고, 얼굴이 예쁘긴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부족했다.지금의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박민정은 유남준과 이지원에게 곧장 다가갔다.“지원 씨, 남준 씨를 집에 데려다주러 왔어요.”이 한마디에 행사 참석자들은 모두 시선을 돌렸다.“저 사람 박민정 아니야? 유 대표님의 아내 말이야.”“저 여자가 박민정이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많이 변했죠? 그래도 여전히 예쁘네요.”“원래 예뻤어요. 전에는 대중 앞에 잘 안 나왔거든요.”“이지원보다 더 예뻐 보이는데, 저 여자가 여기 왔으니 이지원은 불륜녀 아니야?”이지원은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졌다.이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깊은 눈빛으로 박민정을 향해 물었다.“왜 내려왔어?”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면서 아직 약효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남준 씨가 와인을 많이 마신 것을 보고 취할까 봐 걱정되어 내려왔어요.”두 사람의 대화는 이지원
이지원의 말은 확실히 유남준의 아픈 곳을 찔렀다. 박민정과 연지석 사이에 이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유남준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민정과 방성원이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방성원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긴 다리로 박민정을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일 다 끝났어요? 이제 집에 갈까요?”박민정의 말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유남준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배에 화가 가득 찼지만 그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그는 박민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언제부터 성원이랑 얘기도 했어?”방성원은 답답한 성격이라 친구 몇 명과 함께 놀 때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그가 다른 여성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먼저 나를 부른 건 그 사람이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뒤따라 차에 앉았다.박민정은 의아했다. 그는 분명히 와인을 많이 마셨고, 거기에 무언가 첨가되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여전히 정신이 이렇게 말짱할 수 있을까?유남준 자신만이 이 순간 그가 얼마나 참기 힘든지 알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박민정에게서 나는 희미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박민정은 점차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약의 후유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런데 이때 급커브로 인해 그녀는 유남준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고 아예 안겨 버렸다.“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박민정은 일부러 천천히 일어나면서 사과했다.차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자 몸을 잘못 가눈 척하며 다시 안겼다.유남준은 자신의 무릎에 넘어진 박민정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번에도 고의가 아니야?”박민정은 이제야 알아차린 척하고 서둘러 일어나면서 뺨이 붉어졌다.그녀는 이번엔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했다.“내 손에 상처가 있잖아요. 방금 실수로 눌렀어요, 그래서...”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바쁘게 눈을 피
응어리진 마음을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박민정은 결국 바에서 술 몇 잔을 시켰다. 알코올에 취해야만 잠시라도 이 고민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같은 시각.한 시간이 넘는 찬물 샤워를 하고 나서야 유남준은 약효가 조금 떨어졌다.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간 그는 박민정이 집에 없음을 눈치챘다.보디가드에게 물으니 홀로 외출하여 바에 갔단다.바에서.홀로 알코올을 들이켜는 박민정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누군가 빛을 등진 채 그녀를 향해 멈춰 섰다.몽롱하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박민정의 눈에 신이 정성스레 빚은 듯한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왜 왔어요?”박민정이 입을 열자, 알코올 향이 물씬 풍겨온다.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술은 언제 배운 거야?”한 잔이면 바로 취하던 그녀였는데, 테이블 위에 빈 술잔이 꽤 보였다.박민정은 오히려 그가 자신이 술을 마시는지 여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결혼하고 2년 뒤쯤인 것 같아요.”유남준이 곁에 없는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알코올에 의존해야만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다.유남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목이 메여왔다.그제야 유남준은 자신이 종래로 아내를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박민정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잔을 홱 빼앗아 한쪽으로 내팽개쳐 버렸다.“집에 돌아가자.”집에 돌아간다라...박민정의 눈앞이 저도 모르게 눈물로 흐려졌다.살결을 사정없이 스치는 밤바람은 그다지 살갑지 않았고 조금 춥게 느껴졌다.박민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나 몇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유남준에 의해 번쩍 안아 올려졌다. 몸이 공중에 붕 뜨자 그녀의 여린 손이 본능적으로 유남준의 팔뚝을 잡았다.“내려줘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박민정이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그러나 유남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앞으론 술 마시지 마.”품에 안긴 박민정은 정
“남준 씨가 나와 윤우를 놓아주고, 과거 일을 다시 꺼내지만 않는다면요.”유남준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며 꼭 안았다.“그럴 리가.”그녀가 전에 했던 말이 맞다. 한때 부부였던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박민정이 기어코 가야겠다 해도. 죽지 않는 한 절대.박민정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픽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뒤끝 있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애당초 결혼할 때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또 사람을 앞에 두고 후회의 말을 한다.그녀의 결혼을 후회한다던 말들을 떠올리며 유남준의 얼굴은 점차 냉랭해졌다.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깊은 밤,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를 달리고 있다.박민정은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고 얼굴은 알코올의 여파로 불그스름하다.자신 때문에 감기가 옮았을까 걱정된 유남준이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대려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박민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피해버렸다.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더니 다시 한번 이마에 안착했다. 열은 느껴지지 않는다.“그렇게 많이 마시면 속이 좀 편해?”알면서도 묻는다.박민정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저는 언제 윤우를 볼 수 있어요? 애가 가뜩이나 담이 작은데 낯선 곳에서 얼마나 무섭겠어요.”“너 하는 거 봐서.”유남준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유남준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박민정은 피하지 않은 채 그의 손이 자기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그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남준 씨,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뭘?”“혹시 저 좋아하게 된 거예요?”박민정이 또박또박 물었다.만일 좋아하는 거라면 왜 닿는 것도 그렇게 꺼리는 걸까?유남준이 멈칫하더니 얼른 얼굴에서 손을 뗐다.그리곤 다시 원래의 냉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그럴 리가.”당연하게도 착각이다. 그처럼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겠는가.어쩐지 그렇게 들이대도 거절하더라니.그녀가 태연한 모습
유남준은 목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는 종래로 자금과 프로젝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단지 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뿐이다.백화점이었든 다른 곳이었든, 그날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다.대답을 하지 않는 유남준을 보며 박민정은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지 몰랐다.“이것 말고는 어떻게 남준 씨 마음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마침내 그녀가 입을 꾹 닫자, 남예준이 고개를 돌려 작고 여린 그녀를 바라보았다.“두 가문이 약속한 지 적어도 8년이 지났어. 이 8년간 프로젝트든 자금이든 모두 기준도 내용도 달라졌을 텐데 어떻게 갚으려고?”“가격 제시해요. 어떤 방법을 쓰든 갚을게요.”박민정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은은한 물결이 일었다.“그래. 그럼 갚는 대로 널 놔줄게.”값을 제시하는 쪽이 이쪽이라면 그 빚은 절대 영원히 갚을 수 없을 것이다.유남준의 속을 모르는 박민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두 사람 사이에 얽힌 것을 말하자면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결혼 당시 가문 사이의 약속뿐이다.그가 제시하는 돈을 모두 갚기만 한다면 박민정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빚지지 않을 것이다.차가 드디어 두원 별장으로 들어섰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박민정은 속이 울렁거려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밖에서는 유남준이 보디가드를 추궁하고 있다.“민정이 술 마시게 두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보디가드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10분 이내로 숙취해소제랑 약 가져와.”유남준의 차가운 태도에 보디가드가 얼른 대답하며 떠났다.박민정이 다시 나왔을 때 이미 세수를 한 뒤였다. 하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유난히 창백했다.거실에 있던 유남준이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봐.”박민정이 그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그리고 곧이어 테이블에 놓인 숙취해소제와 약을 발견했다.“숙취해소제 마시고 자.”유남준이 낮게 말했다.“네, 고마워요.”박민정은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