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민정의 손과 다리의 찰과상을 발견하고 다시 차에 끌고 가서 기사에게 병원에 가라고 지시했다.차에 앉아있는 박민정도 이제야 두려움이 폭발했다. 조금 전엔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예찬이와 윤우가 있는데 사고를 당해서는 안 된다.유남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넌 왜 화가 난 거야?”박민정은 손과 다리가 아파 났고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빠졌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싫었다.분명히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고 특히 어렸을 때는 자신의 옆에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쩍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그는 화가 난 듯 말했다.“방금 어디 가려고 했어?”“그냥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기사가 시립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자 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외과 진찰실에서.유남준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남준아, 여긴 웬일이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김인우는 흰 가운을 입고 진찰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이었다.유남준은 왜 왔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김인우는 그의 뒤에 있는 박민정을 흘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가 기어코 인생을 경험해 보라고 하셔서 왔어.”김인우는 의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김훈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법학도 공부했다.김훈은 그가 앞으로 가업을 더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더 실무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김훈이 김인우더러 의사가 하기 싫으면 조씨 가문과 혼인을 맺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의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김훈이 조하랑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지 몰랐다.조하랑과 그 장난꾸러기 아이를 생각하면 김인우는 머리가 아팠다.유남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박민정을 앞
김인우는 박민정이 어떤 곳에 손이 닿지 않아 연고를 바르지 못하는 줄 알고 손을 뻗어 도와주려 했다.박민정은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본능적으로 피했다. 연고는 김인우의 손등에 떨어졌다.“미안해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나 갈게요.”김인우는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약을 바르는 걸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고맙지만 됐어요.”박민정은 떠나려 했다.김인우는 그녀가 또 오해할까 봐 막아섰다.“남준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박민정은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그런 박민정을 바라보는 김인우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를 무서워하지 마. 다신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무서워하지 말라고?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박민정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 김인우는 그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같은 말을 했었다.“미안하지만 비켜줘요.”자신을 해치든 해치지 않든 이런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김인우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약을 다 바르고 나가.”박민정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비뚤어진 성격이 다시 폭발할까 봐 두려워서 귀찮아도 약을 바르러 갔다.“앞으로는 차에서 뛰어 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위험하잖아. 다행히 지금은 가벼운 부상일 뿐이지만.”김인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김인우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걸 오래전부터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약을 바르고 말했다.“다 발랐으니 가도 되죠?”박민정의 맑고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김인우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그냥 여기 있어.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속할게, 응?”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를 썼다.박민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김인우가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하지만
차에 탄 후 유남준은 병원을 힐끗 돌아보았다.“내가 진찰실에서 나간 후에 인우랑 무슨 얘기를 했어?”“제가 대학 다닐 때 누군가를 구한 적이 있냐고 물어봤어요.”박민정은 숨기지 않았다.‘사람을 구했다고?’유남준은 이지원이 대학 시절 김인우와 자신의 어머니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한 것을 발견하고 두 사람을 구했던 일을 떠올렸다.“그래서 뭐라고 했어?”“그때 남준 씨가 돌아왔어요.”박민정은 그 사건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시간이 이르지 않았다. 유남준은 오늘 밤에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박민정은 그를 따라 회사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유리창 밖으로 흩날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말했다.“난 돌아가고 싶어요.”“오늘 밤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 따라와.”박민정의 눈가에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유남준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기사에게 행사장까지 데려다 달라고 했다.기념일 축하 행사가 열리기 전, 유남준은 박민정을 조용한 룸으로 데려갔다.청록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박민정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맑고 깨끗했다.룸 문 앞에 선 유남준은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눈동자에 놀라움이 가득했다.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여기서 기다렸다가 밤에 같이 돌아가자.”박민정은 그를 올려다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순종적인 그녀의 모습에 유남준의 가슴에 파문이 일었다.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회사 창립 기념일 축하 행사.이지원과 고영란도 일찍 왔다.“박민정이 다시 대원으로 돌아갔다는 말이야?”고영란이 물었다.“네, 저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아마도 박민정이 남준 오빠에게 집착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두 사람이 아직 이혼 증명서도 받지 못했고, 박민정은 다루기 어려운 사람이잖아요.”이지원은 고영란에게 박민정을 다시 대원으로 데려온 사람이 유남준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영란은 손에 든 와인을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지난번 생일 연회에서
회사 창립기념일 축하 행사에서.유남준은 어머니가 와인잔을 계속 건네는 모습을 보고, 또 이지원이 있는 쪽을 흘겨보았다.그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밤에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술을 더 마실 수 없어요.”유남준은 고영란이 다시 건네는 와인을 정중하게 거절했다.고영란은 그가 약간 취한 것을 보고 이지원을 힐끗 쳐다보았다.이지원은 즉시 유남준의 곁으로 와서 그를 부축했다.“오빠가 술을 마셨으니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관계를 가져야 했다.유남준은 아직 정신이 맑아서 팔을 빼려고 했는데 멀리서 청록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답고 정숙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그는 이지원을 밀어내지 않고 깊은 눈빛으로 박민정을 바라보았다.박민정이 이곳에 나타난 순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그녀의 외모가 너무 뛰어나서 놀랍게도 참석자 대부분은 그녀가 박씨 가문의 청각 장애인 아가씨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고영란도 무심코 그녀를 바라보다가 온몸이 얼어붙었다.이전의 박민정은 옷을 잘 입지 못했고, 얼굴이 예쁘긴 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부족했다.지금의 그녀는 다른 사람 같았다.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박민정은 유남준과 이지원에게 곧장 다가갔다.“지원 씨, 남준 씨를 집에 데려다주러 왔어요.”이 한마디에 행사 참석자들은 모두 시선을 돌렸다.“저 사람 박민정 아니야? 유 대표님의 아내 말이야.”“저 여자가 박민정이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많이 변했죠? 그래도 여전히 예쁘네요.”“원래 예뻤어요. 전에는 대중 앞에 잘 안 나왔거든요.”“이지원보다 더 예뻐 보이는데, 저 여자가 여기 왔으니 이지원은 불륜녀 아니야?”이지원은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졌다.이때 유남준은 그녀의 손을 떼어내고 깊은 눈빛으로 박민정을 향해 물었다.“왜 내려왔어?”박민정은 그를 바라보면서 아직 약효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남준 씨가 와인을 많이 마신 것을 보고 취할까 봐 걱정되어 내려왔어요.”두 사람의 대화는 이지원
이지원의 말은 확실히 유남준의 아픈 곳을 찔렀다. 박민정과 연지석 사이에 이미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유남준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박민정과 방성원이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방성원이 나가는 것을 보고 긴 다리로 박민정을 향해 재빨리 걸어갔다.“일 다 끝났어요? 이제 집에 갈까요?”박민정의 말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유남준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배에 화가 가득 찼지만 그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그는 박민정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언제부터 성원이랑 얘기도 했어?”방성원은 답답한 성격이라 친구 몇 명과 함께 놀 때도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의 아내를 제외하고는 그가 다른 여성과 대화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먼저 나를 부른 건 그 사람이었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를 차에 태우고 자신도 뒤따라 차에 앉았다.박민정은 의아했다. 그는 분명히 와인을 많이 마셨고, 거기에 무언가 첨가되었을 수도 있는데 어떻게 여전히 정신이 이렇게 말짱할 수 있을까?유남준 자신만이 이 순간 그가 얼마나 참기 힘든지 알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좌석 등받이에 기대어 박민정에게서 나는 희미한 향기를 어렴풋이 맡을 수 있었다.박민정은 점차 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약의 후유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런데 이때 급커브로 인해 그녀는 유남준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고 아예 안겨 버렸다.“미안해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박민정은 일부러 천천히 일어나면서 사과했다.차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지자 몸을 잘못 가눈 척하며 다시 안겼다.유남준은 자신의 무릎에 넘어진 박민정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이번에도 고의가 아니야?”박민정은 이제야 알아차린 척하고 서둘러 일어나면서 뺨이 붉어졌다.그녀는 이번엔 너무 서두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했다.“내 손에 상처가 있잖아요. 방금 실수로 눌렀어요, 그래서...”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바쁘게 눈을 피
응어리진 마음을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박민정은 결국 바에서 술 몇 잔을 시켰다. 알코올에 취해야만 잠시라도 이 고민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같은 시각.한 시간이 넘는 찬물 샤워를 하고 나서야 유남준은 약효가 조금 떨어졌다.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간 그는 박민정이 집에 없음을 눈치챘다.보디가드에게 물으니 홀로 외출하여 바에 갔단다.바에서.홀로 알코올을 들이켜는 박민정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누군가 빛을 등진 채 그녀를 향해 멈춰 섰다.몽롱하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본 박민정의 눈에 신이 정성스레 빚은 듯한 끔찍하리만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왜 왔어요?”박민정이 입을 열자, 알코올 향이 물씬 풍겨온다.유남준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술은 언제 배운 거야?”한 잔이면 바로 취하던 그녀였는데, 테이블 위에 빈 술잔이 꽤 보였다.박민정은 오히려 그가 자신이 술을 마시는지 여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의아했다.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결혼하고 2년 뒤쯤인 것 같아요.”유남준이 곁에 없는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알코올에 의존해야만 그리움을 잊을 수 있었다.유남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으며 목이 메여왔다.그제야 유남준은 자신이 종래로 아내를 이해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는 박민정의 손에 쥐어져 있던 술잔을 홱 빼앗아 한쪽으로 내팽개쳐 버렸다.“집에 돌아가자.”집에 돌아간다라...박민정의 눈앞이 저도 모르게 눈물로 흐려졌다.살결을 사정없이 스치는 밤바람은 그다지 살갑지 않았고 조금 춥게 느껴졌다.박민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나 몇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유남준에 의해 번쩍 안아 올려졌다. 몸이 공중에 붕 뜨자 그녀의 여린 손이 본능적으로 유남준의 팔뚝을 잡았다.“내려줘요. 혼자 걸을 수 있어요.”박민정이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입을 열었다.그러나 유남준은 아랑곳 하지 않고 빠르게 밖으로 걸어 나갔다.“앞으론 술 마시지 마.”품에 안긴 박민정은 정
“남준 씨가 나와 윤우를 놓아주고, 과거 일을 다시 꺼내지만 않는다면요.”유남준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며 꼭 안았다.“그럴 리가.”그녀가 전에 했던 말이 맞다. 한때 부부였던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박민정이 기어코 가야겠다 해도. 죽지 않는 한 절대.박민정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픽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뒤끝 있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애당초 결혼할 때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또 사람을 앞에 두고 후회의 말을 한다.그녀의 결혼을 후회한다던 말들을 떠올리며 유남준의 얼굴은 점차 냉랭해졌다.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깊은 밤,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를 달리고 있다.박민정은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고 얼굴은 알코올의 여파로 불그스름하다.자신 때문에 감기가 옮았을까 걱정된 유남준이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대려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박민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피해버렸다.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더니 다시 한번 이마에 안착했다. 열은 느껴지지 않는다.“그렇게 많이 마시면 속이 좀 편해?”알면서도 묻는다.박민정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저는 언제 윤우를 볼 수 있어요? 애가 가뜩이나 담이 작은데 낯선 곳에서 얼마나 무섭겠어요.”“너 하는 거 봐서.”유남준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유남준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박민정은 피하지 않은 채 그의 손이 자기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그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남준 씨,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뭘?”“혹시 저 좋아하게 된 거예요?”박민정이 또박또박 물었다.만일 좋아하는 거라면 왜 닿는 것도 그렇게 꺼리는 걸까?유남준이 멈칫하더니 얼른 얼굴에서 손을 뗐다.그리곤 다시 원래의 냉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그럴 리가.”당연하게도 착각이다. 그처럼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겠는가.어쩐지 그렇게 들이대도 거절하더라니.그녀가 태연한 모습
유남준은 목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는 종래로 자금과 프로젝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단지 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뿐이다.백화점이었든 다른 곳이었든, 그날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다.대답을 하지 않는 유남준을 보며 박민정은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지 몰랐다.“이것 말고는 어떻게 남준 씨 마음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마침내 그녀가 입을 꾹 닫자, 남예준이 고개를 돌려 작고 여린 그녀를 바라보았다.“두 가문이 약속한 지 적어도 8년이 지났어. 이 8년간 프로젝트든 자금이든 모두 기준도 내용도 달라졌을 텐데 어떻게 갚으려고?”“가격 제시해요. 어떤 방법을 쓰든 갚을게요.”박민정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은은한 물결이 일었다.“그래. 그럼 갚는 대로 널 놔줄게.”값을 제시하는 쪽이 이쪽이라면 그 빚은 절대 영원히 갚을 수 없을 것이다.유남준의 속을 모르는 박민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두 사람 사이에 얽힌 것을 말하자면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결혼 당시 가문 사이의 약속뿐이다.그가 제시하는 돈을 모두 갚기만 한다면 박민정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빚지지 않을 것이다.차가 드디어 두원 별장으로 들어섰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박민정은 속이 울렁거려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밖에서는 유남준이 보디가드를 추궁하고 있다.“민정이 술 마시게 두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보디가드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10분 이내로 숙취해소제랑 약 가져와.”유남준의 차가운 태도에 보디가드가 얼른 대답하며 떠났다.박민정이 다시 나왔을 때 이미 세수를 한 뒤였다. 하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유난히 창백했다.거실에 있던 유남준이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봐.”박민정이 그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그리고 곧이어 테이블에 놓인 숙취해소제와 약을 발견했다.“숙취해소제 마시고 자.”유남준이 낮게 말했다.“네, 고마워요.”박민정은 소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
박민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나야, 에리.”청량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봐.”에리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밥 한 끼 빚진 거 기억 안 나? 게다가 지금 난 네 회사에 소속된 배우야. 이렇게 날 방치해서 되겠어?”그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박민정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처음 접해본 터라 당황스러웠다.“저기, 그거...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돼! 벌써 1년이나 빚진 건데 또 미루겠다고?”에리는 단호하면서도 애교를 섞어 불만을 드러냈다.옆에 서 있던 유남준은 통화 내용으로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는 박민정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리였다.“민정아, 설마 유 대표가 우리 약속을 눈치채는 게 걱정되는 거야? 안심해. 절대 비밀로 할게!”‘우리 약속’라는 말에 유남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에리 씨, 다시 제 아내를 귀찮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빼앗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남준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보고 곧장 해명에 나섰다.“민정아, 에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배우라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그게 당신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내 전화를 끊은 이유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유남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어쩐지 아내 앞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