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준 씨가 나와 윤우를 놓아주고, 과거 일을 다시 꺼내지만 않는다면요.”유남준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더 주며 꼭 안았다.“그럴 리가.”그녀가 전에 했던 말이 맞다. 한때 부부였던 사람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박민정이 기어코 가야겠다 해도. 죽지 않는 한 절대.박민정의 눈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더니 픽 쓴웃음을 지었다.“이렇게 뒤끝 있는 사람인 줄 알았으면 애당초 결혼할 때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어야 하는 건데.”또 사람을 앞에 두고 후회의 말을 한다.그녀의 결혼을 후회한다던 말들을 떠올리며 유남준의 얼굴은 점차 냉랭해졌다.그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깊은 밤, 차는 적막 속에서 도로를 달리고 있다.박민정은 조금 어지러움을 느꼈고 얼굴은 알코올의 여파로 불그스름하다.자신 때문에 감기가 옮았을까 걱정된 유남준이 손을 그녀의 이마에 갖다 대려 했다. 그러나 가까이 가기도 전에 박민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피해버렸다.그의 손이 공중에서 잠시 멈추더니 다시 한번 이마에 안착했다. 열은 느껴지지 않는다.“그렇게 많이 마시면 속이 좀 편해?”알면서도 묻는다.박민정은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저는 언제 윤우를 볼 수 있어요? 애가 가뜩이나 담이 작은데 낯선 곳에서 얼마나 무섭겠어요.”“너 하는 거 봐서.”유남준의 두루뭉술한 대답에 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유남준이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박민정은 피하지 않은 채 그의 손이 자기 뺨을 어루만지는 것을 바라만 보았다.그녀가 저도 모르게 물었다.“남준 씨, 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뭘?”“혹시 저 좋아하게 된 거예요?”박민정이 또박또박 물었다.만일 좋아하는 거라면 왜 닿는 것도 그렇게 꺼리는 걸까?유남준이 멈칫하더니 얼른 얼굴에서 손을 뗐다.그리곤 다시 원래의 냉담한 모습으로 돌아갔다.“그럴 리가.”당연하게도 착각이다. 그처럼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좋아하겠는가.어쩐지 그렇게 들이대도 거절하더라니.그녀가 태연한 모습
유남준은 목이 무언가에 꽉 막힌 듯 답답함을 느꼈다.그는 종래로 자금과 프로젝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단지 속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을 뿐이다.백화점이었든 다른 곳이었든, 그날 그는 처음으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었다.대답을 하지 않는 유남준을 보며 박민정은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지 몰랐다.“이것 말고는 어떻게 남준 씨 마음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마침내 그녀가 입을 꾹 닫자, 남예준이 고개를 돌려 작고 여린 그녀를 바라보았다.“두 가문이 약속한 지 적어도 8년이 지났어. 이 8년간 프로젝트든 자금이든 모두 기준도 내용도 달라졌을 텐데 어떻게 갚으려고?”“가격 제시해요. 어떤 방법을 쓰든 갚을게요.”박민정이 바로 이어서 말했다.유남준의 깊은 눈동자에 은은한 물결이 일었다.“그래. 그럼 갚는 대로 널 놔줄게.”값을 제시하는 쪽이 이쪽이라면 그 빚은 절대 영원히 갚을 수 없을 것이다.유남준의 속을 모르는 박민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지금 두 사람 사이에 얽힌 것을 말하자면 두 아이를 제외하고는 결혼 당시 가문 사이의 약속뿐이다.그가 제시하는 돈을 모두 갚기만 한다면 박민정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빚지지 않을 것이다.차가 드디어 두원 별장으로 들어섰다.별장으로 돌아온 후 박민정은 속이 울렁거려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갔다.밖에서는 유남준이 보디가드를 추궁하고 있다.“민정이 술 마시게 두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보디가드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죄송합니다. 대표님.”“10분 이내로 숙취해소제랑 약 가져와.”유남준의 차가운 태도에 보디가드가 얼른 대답하며 떠났다.박민정이 다시 나왔을 때 이미 세수를 한 뒤였다. 하지만 얼굴은 백지장처럼 유난히 창백했다.거실에 있던 유남준이 그녀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이리 와봐.”박민정이 그를 향해 한 발짝씩 다가갔다. 그리고 곧이어 테이블에 놓인 숙취해소제와 약을 발견했다.“숙취해소제 마시고 자.”유남준이 낮게 말했다.“네, 고마워요.”박민정은 소
30분 후, 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유남준은 여전히 서재에 있다.연락 중에 1.58조를 갚아야 한다는 친구의 말을 들은 조하랑은 깜짝 놀랐다.“그렇게 많은 돈을 어떻게 갚는다고 그래? 네 동생이랑 엄마가 사기 쳐서 가져간 돈을 왜 네가 갚는데?”박민정은 베란다에 앉아 서늘한 바람을 쐬었다. 정신이 조금이라도 맑아지길 기대하면서.“오늘 그 사람이랑 얘기 많이 했어. 종래로 과거 일을 용서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이번에 돈만 갚으면 사기 결혼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했어.”이에 조하랑이 의아하게 물었다.“민정아. 난 왜 네가 속고 있는 것 같지?”“무려 유앤케이 그룹의 대표라는 사람이 그깟 돈이 모자랄 수가 있겠어? 넌 알지 못하겠지만 내가 찾아본 데 의하면 지금 유앤케이 상가의 임대료만 해도 1년에 12조 이상을 벌어. 거기에 다른 부동산들은 말할 것도 없고. 네트워크에 크고 작은 프로젝트까지…”“네가 외국 사람들 말을 못 들어봐서 그래. 유남준이 가진 재산이 일부 국가자금보다도 많대.”확실히 박민정은 그의 재산에 관해 아는 바가 없다.그녀가 아는 사실은 그저 결혼 전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뿐이다. 유남준이 매우 능력 있는 사람이고, 두 사람이 결혼한다면 그녀보다 유남준이 훨씬 아깝다는 것.하여 아버지는 박씨 가문의 모든 속사정을 유남준에게 알려줄 것을 약속했고, 이로써 그가 본인을 챙길 수 있도록 하려 했다.하지만 결국 유남준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당시 박민정은 그가 돈이 모자랄 것을 걱정해 몰래 자신의 부동산으로 유앤케이 그룹의 작은 프로젝트들을 도와주기도 했었다.그러나 나중에 유남준이 그녀의 아버지도 출입할 수 없는 장소들을 드나드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차츰 도움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그의 회사 사정이 호전되는 줄로만 알았지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지 못했다.조하랑의 말을 들으니 그녀는 인제야 비로소 유남준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유남준을 돈 버는
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직설적인 말을 뱉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녀에게 이전의 조급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유남준이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갔다.“아직 명의상 부부인데 안될게 뭐가 있어?”그가 말하며 가운을 서슴없이 풀어 헤쳤다.박민정은 흠칫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평소와 다른 그녀의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에 유남준의 목울대가 진득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걱정하지 마. 안 건드릴 테니까.”박민정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그렇지.“그럼 전 객실에서 잘게요.”박민정은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유남준을 얻지 못한다면 방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다.그러나 이때 그가 한발 앞서 박민정의 손을 홱 잡아챘다. 그의 힘에 박민정의 몸이 속절없이 앞으로 기울더니 그의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두 팔이 그녀를 꼭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이제 너도 여기서 자는 거야. 나 혼자서 잠 못 자.”그녀가 떠난 이후 유남준은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약을 찾아 먹고 정신과 의사까지 만나봤어도 나아지지 않았었다.박민정이 돌아오고 그녀를 안고 잠을 청해서야 그는 가까스로 잠에 들 수 있었다.박민정은 그가 직접 이 말을 했다는것이 놀라웠다.“약속 지켜요.”“그래.”박민정은 침대의 한쪽에 눕더니 특별히 이불을 돌돌 말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눈을 감고 그녀는 진주시로 돌아가기 전 의사가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지면 의식을 거의 잃는다. 하여 박민정이 목적을 이루려면 그가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그러므로 유일한 방법은 그가 술에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난번 술을 먹이려고 시도했을 때, 그가 자신에게 먹이는 바람에 계획이 모두 수포가 되었었다.어쩐지 전에 파견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니. 이 사람은 아예 다른 사람이 술을 권하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심지어 기념일에서도 어머님 고영란이 권하는
베란다에 나와 밖을 보니 온통 산과 나무들뿐이다.박윤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했다.“이거 완전 아이가 아니라 범죄자를 가둔 느낌이잖아.”베란다에 서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이는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다른 곳도 살펴보았다.이곳에 갇힌 며칠간 그는 줄곧 도망갈 기회를 찾고 있다.그러나 이곳의 보안 시스템은 너무나도 삼엄했다.아이가 보안 시스템을 모두 피한다고 해도 그의 허약하고 병든 몸은 천 미터도 달리지 못하고 졸도할 것이며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사방을 한참 살피던 가정부는 그제야 아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윤우야, 윤우야? 어디 있어?”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사장이 틀림없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가정부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아이를 찾고 있을 때, 박윤우가 물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아줌마, 피곤하죠? 물 마셔요.”박윤우를 보고서야 가정부는 숨을 내돌렸다.아이가 하도 똑똑하고 철이 들어서 가정부는 자신이 서너 살짜리 아이를 돌본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윤우야, 고마워. 아줌마 목 안 말라. 앞으로 뭘 하고 싶으면 하기 전에 꼭 아줌마한테 물어봐야 해~ 아줌마 깜짝 놀랐어, 방금.”“알겠어요.”박윤우가 마음이 무거운 듯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정부는 아이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하며 다급히 물었다.“윤우야, 왜 그래? 왜 울어?”박윤우가 코를 훌쩍이더니 입을 열었다.“엄마랑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아줌마,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알려주면 안 돼요?”아이에게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정부는 이 귀여운 아이가 우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그래. 내가 얼른 집사님께 연락할게.”그녀에게 사장님의 연락처가 있을 리 없다.저택 내부의 모든 네트워크 신호가 차단되었으므로 가정부가 집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가장 바깥쪽의 보안을 통과해야 했다.그녀는
유남준은 목이 메어왔다.합의…우리 사이에 또 무슨 합의가 필요해?유남준은 내키지 않았지만 박민정이 집을 나가겠다고 할까 봐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먼저 써둬.”만일 그에게 불리한 내용이라면 절대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옷을 갈아입고 얼른 정림원으로 향했다.도착한 후 보니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다.“아저씨, 드디어 오셨네요. 우리 아빠한테 저 잡아갔다고 말은 했어요?”아이를 데려가 놓고 어떻게 연지석과 아는 체를 하겠는가.유남준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대답했다.“지금쯤이면 이미 알고도 남았지.”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는 하도 울어서 코끝이 붉다.“그럼 왜 아직도 절 데리러 오지 않는 거예요?”“저 집 가고 싶어요. 아빠도 보고 싶어요…”유남준이 티슈 한 장을 아이 앞에 내밀었다.“그만 생각해. 네 아빠는 너 싫대.”“…”말도 안 되는 소리. 아저씨가 나를 싫다고 할 리가.감히 어린 애까지 겁 주려 한다니. 정말이지 악랄하다.어린애라는 장점을 앞세워 박윤우는 냅다 울어대기 시작했다.“거짓말! 아빠가 윤우를 싫어할 리가 없어! 나중에 엄마랑 동생도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단 말이에요!”유남준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방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고 주위 온도마저 가라앉는 듯했다.“네 아빠가 민정이랑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고?”그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박윤우가 일부러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네! 여동생이랑 남동생 많이 만들어줘서 같이 놀게 해줄 거라고 했어요!”“…”박윤우는 울면서도 몰래 유남준의 안색을 살폈다.우리 엄마 좋아하지 않는 것 아니었나?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둡지?본인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남 주기는 싫은가? 혹시 세상의 모든 쓰레기가 이런 걸까?“그럼 네 엄마는 왜 귀국한 거지?”유남준은 당연히 아이가 속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뱉은 말이었다.그러나 이에 당황한 박윤우는 어리둥절해서 하마터면 곧
유남준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박윤우를 놓아주었다.애가 담이 작아도 너무 작은 것 아닌가.“아저씨, 윤우 때리지 마세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윤우는 무섭단 말이에요…”밖에 있던 가정부들이 아이의 울음소리에 사장이 나쁜 짓이라도 했을까 봐 마음을 졸였다.박윤우를 돌보던 가정부는 해고될 위험을 무릅쓰고 문을 벌컥 열었다.“사장님, 아이가 이렇게나 어린데. 때리면 안 되죠…”그녀는 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유남준의 하얀 셔츠 위의 노랑 액체를 보았다…가정부는 문득 무언가 깨닫고 겸연쩍은 듯 눈을 돌렸다.“아저씨, 화났어요? 왜 대답 안 해줘요? 엄마 언제 만나게 해줄 거예요?”유남준은 경직된 얼굴로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욕실 안에서 그는 한 번 또 한 번 몇 번이고 씻었다. 그 사고뭉치 자식만 생각하면 엉덩이 두 대만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박민정은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사고뭉치 아이를 낳았을까…한 시간 후 욕실에서 나오는 유남준의 몸에서는 은은한 로션 향이 났다.가정부는 조심스레 그에게 와서 말했다.“사장님, 윤우 이제 안 울어요. 그리고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그리고 착한 아이가 될 테니 제발 죽이지 말아달래요. 아직 엄마·아빠도 보지 못했다고요.”아이의 말을 전하는 가정부도 말하면서 깜짝 놀랐다.아이가 사장의 아들이나 친척이 아니었구나. 그럼 죽인다는 건 또 무슨 말이지?무언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기분. 이러다 입막음 당하면 어떡하지?아이를 죽인다고?어쩐지 그 사고뭉치 자식이 오줌을 지리더라니, 오해한 것이었군…“그래요.”그는 어린애와 실랑이할 겨를이 없었다.떠나기 전 그는 가정부에게 아이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가정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박윤우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방 안에 있던 박윤우는 유남준의 자동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어찌나 통쾌하고 시원했는지 모른다.그와 형이 태어나고 엄마가 그들을 돌보면 얼마나 많은 똥 기저귀를 갈았는데, 겨우 한
“왔어요?”박민정이 피아노 커버를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훤칠한 키의 유남준이 문 옆에 기대어 그녀를 응시했다.“왜 더 안 쳐?”전에는 일이 바빠 그녀가 이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언젠가 박민정이 자신을 찾아와 프로젝트를 요청하며 한 번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당시 그는 박민정의 동생 박민호에게 화가 난 상태였고 박민정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녀는 아마 이 일로도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그 일 이후로 박민정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고, 피아노를 연주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남준 씨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박민정이 이어 말했다.“합의서 준비했으니 보러 가요.”외출하고 온 유 남준은 합의서에 관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래.”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유남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잘 치던데, 곡 이름이 뭐야? 못 들어본 곡인 것 같네.”그의 말에 박민장이 어리둥절했다.“못 들어봤다고요?”이 곡은 그녀가 학창 시절 만든 곡이었고 당시에 특별히 유남준에게 연주해 주었던 곡이다.유남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내가 들어봤던 곡이야?”박민정은 그가 잊은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그냥 한 말이었어요. 이 곡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 쓴 거예요. 아직 발표하지 않은.”박민정이 직접 썼다는 말에 유 남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높이 보게 되었다.그는 자기 아내가 이토록 많은 재능을 갖고 있음을 이제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먼저 앞장서자 박민정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그의 반응이 곡을 정말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박민정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렇게 바쁜 사람이, 게다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곡 하나를 여태 기억하고 있겠는가.방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자신이 직접 쓴 합의서를 가져와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지원이 친자 확인 검사 결과를 받은 그 날, 정수미는 곧장 그녀를 병원으로 보내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정수미는 이지원의 몸에 남겨진 수많은 상처들과 뼈밖에 남지 않은 앙상한 몸을 보며 물었다“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야?”정수미의 눈에는 안타까움만 잔뜩 묻어 있었다.이지원은 다정한 눈길로 정수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괜찮아요, 하나도 아프지 않을걸요. 다 제가 너무 어리고 철이 없어서, 사람들의 심기를 잘못 건드렸던 탓이에요.”이지원은 함미현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그 말을 들은 정수미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미안하구나, 널 더 일찍 찾지 못했던 내 탓이야.”왜인지는 몰라도 이지원을 마주한 정수미의 마음이 아려왔다. 상처 많은 딸이 안타깝긴 했지만 함미현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감동은 느껴지지 않았다.아마 이미 한 번 데인 탓에 트라우마가 남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엄마, 그런 말씀 하세요. 제가 보육원에 보내진 건 절대 엄마 탓이 아니에요. 언니한테서 들었는데, 엄마는 저를 찾는 걸 포기한 적 없다고 그랬거든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 받고 치유 받았어요.”이지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정수미는 이지원에게서 엄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에 띄게 멍한 기색을 보였지만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일단 쉬고 있어. 곧 있으면 의사가 올 거야. 난 잠깐 나갔다가 올게.”“네.”정수미는 병실을 나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비서가 말을 걸었다.“대표님, 잠깐 쉬시는 게 어때요?”그 말에 정수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분명 내 친딸을 찾았는데도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답답해.”“아마도 함미현 때문일 겁니다. 그 여자가 너무도 뻔뻔하게 대표님을 속여왔으니까요.”정수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그럴지도 모르지. 가자, 그 애 보러 가야지.”“네.”함미현의 병실은 일반 병실이었다.정수미와 그녀의 비서
“감히 정씨 가문에서 거짓말을 해요? 그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는 그래요?”윤소현이 순간적으로 욱하며 화를 냈다.하지만 이지원은 조금도 겁내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저도 더는 방법이 없어요. 김인우는 저를 죽지 못해 살아가게 만들었고, 유남준은 저를 완전히 헌신짝 버리듯 버렸죠. 저에게도 피난처가 필요해요.”이지원은 윤소현의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친자확인결과 조작만 해주시면 제가 소현 씨의 노예가 되어드릴게요. 뭘 시키든지 다 해낼 수 있어요.”“박민정의 목숨은 물론이고, 그 여자 아이까지 없애 달라고 한다면 기꺼이 하겠습니다.”이지원은 진심을 다해 윤소현에게 맹세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었던 윤소현도 이지원의 말을 듣는 순간 깊은 생각이 잠겼다.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이 동했다.일전, 함미현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을 때도 그녀는 함미현을 제대로 이용하려 했다.하지만 함미현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고, 이제 윤소현에게는 자신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그리고 그런 사람이 타이밍 좋게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 게다가 그 사람 역시 자신처럼 박민정을 죽도록 증오하고 있었다.“예전에 저는 같은 이유로 함미현을 도왔던 적이 있어요. 하지만 걔는 결국 제 목숨을 노렸죠. 지원 씨는 안 그런다고 하겠지만, 제가 그걸 어떻게 믿죠?”윤소현이 일부러 시험하듯 물었다.그녀의 말에 이지원이 손을 들어 맹세했다.“제가 소현 씨를 배신하면 그 자리에서 죽을 겁니다.”아직도 믿지 못하는 것 같은 윤소현에 이지원이 곧장 말을 덧붙였다.“저는 함미현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에요. 제가 정수미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알려준다면, 소현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저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굳이 배신할 이유가 없죠.”윤소현은 이지원의 말에 더 의심을 품지 않았다.“좋아요. 그 말 잊지
그럼에도 오랜만에 자신의 딸을 만난 방성원은 감격을 금치 못했다. 그가 마침 베이비시터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그때, 딸이 입을 열어 방성원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연지석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방성원은 재빨리 표정을 굳힌 채 연지석에게 불편하다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하지만 자신이 있는 이곳이 박민정의 집이었던 탓에 더 말을 얹을 수는 없었다.설인하는 곧장 방성원에게 다가가 말했다.“이제 다 봤지? 그럼 돌아가. 더는 내 딸 찾아와서 방해하지 마.”방성원은 방은정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네 딸이라고 했어? 애는 너 혼자 낳니?”설인하의 말문이 다시 막혀버렸다.“말 들어. 애 데리고 나랑 돌아가자, 이제.”방성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로서도 설인하에게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자유를 주었다.하지만 설인하는 여전히 고집스레 말했다.“내가 말했지? 너랑은 더 이상 같이 못 산다고. 이럴 시간 있으면 차라리 이혼 서류나 준비해.”또 이혼 얘기였다.두 사람 사이에 스파크가 튀기자 유남준이 다가와 말했다.“성원아.”방성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했다. 남의 집에서 싸우는 것은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방은정을 다시 설인하에게 돌려주었다.“며칠 뒤에 또 올 거야.”그 말만 남긴 채, 그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섰다.밖으로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방성원은 조금 전 자신의 행동을 수십 번이고 후회했다.연지석과 설인하의 모습으로 미루어봤을 때, 자신이 괜한 오해를 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원래대로였다면 그 역시 김인우의 조언대로 설인하를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의 계획은 이런 식으로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늦은 시간에 퇴근한 연지석과 설인하는 미처 못한 식사를 한 레스토랑 안에서 함께 하기로 했다.박윤우 역시 연지석이 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만나려고 일부러 자리에 함께했다.“지석 아저씨, 왜 이렇게 늦게 퇴근하세요? 다음부터는 일찍 퇴근해서 식사도 일찍 하는 게
다행히 차를 조금 더 앞으로 몰고 갔던 연지석 덕에 부딪히는 사고가 나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운전기사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그는 자신의 대표에게 사과하기 위해 차에서 내리려 했지만 이미 차에서 내린 방성원이 연지석의 차로 다가오고 있었다.설인하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자신을 계속 따라오던 사람이 바로 방성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연지석도 그런 방성원에게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히 차에서 내렸다.손을 위로 높이 추켜든 방성원이 연지석에게 폭력을 행사하려던 그때였다.반응속도가 빨랐던 연지석은 재빨리 방성원의 공격을 피했다.깜짝 놀란 설인하가 다급히 차에서 내려 방성원을 가로막았다.“방성원, 너 미쳤어? 이 사람은 내 상사야!”“상사?”방성원은 분노에 찬 헛웃음을 터뜨렸다.“그 어떤 상사가 이 야심한 밤에 여직원을 집까지 데려다주는데?”“네가 이런 식으로 날 미행하고 다녔으니까, 혹시라도 나한테 스토커가 생긴 건 아닐까 걱정돼서 그런 거잖아!”그 말에 방성원이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매서운 눈길로 그는 노려보던 설인하는 이내 고개를 돌려 미안한 듯한 눈빛으로 연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합니다, 부사장님.”부사장님이라고?방성원은 조금 전 차에서 내릴 때 봤던 연지석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설인하가 그를 부사장이라고 부르는 순간, 방성원은 순식간에 그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그쪽이 연지석 씨입니까?”연지석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네, 접니다.”방성원의 눈빛이 한순간에 차가워졌다.“민정 씨한테는 손도 못 대더니, 이제 내 와이프한테 손대려고요? 역시 떠도는 소문이 정확했나 봅니다, 연지석 씨. 취향 참 독특하시네요. 유부녀만 좋아하신다면서요?”그 말에 연지석이 천천히 손을 말아 주먹을 꽉 쥐었다. 설인하를 봐서라도 방성원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하지만 분노에 찬 설인하의 얼굴은 이미 열을 받아 빨개져 있었다.“방성원, 말조심해. 나랑 부사장님은 아무 사이 아니니까.”연지석과
“언제 쇼핑몰을 인수한 거예요? 저는 왜 모르고 있었죠?”박민정은 궁금해하며 물었다.차에 탑승한 후 다른 두 여인은 공짜로 된 옷을 무제한 입을 수 있다는 생각에 부러운 눈길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그녀랑 함께라서 다행이라 생각했다.아쉽게도 설인하는 연장 근무 중이라 함께 할 수가 없었다.“전에 호 산 그룹에 있을 때 사적으로 사들인 거야, 나도 잊고 있었어.”유남준은 사실대로 말했다.그는 당시에 많은 회사들을 사들인 탓에 잊고 있었다.“옷을 사다 잊어버렸단 소리는 들어봤어도 쇼핑몰 한 채 구매하고 잊어버렸다는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어요.”민수아는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역시 부자라 좋네요.”“앞으로 쇼핑하고 싶으면 서 비서랑 함께 와요.”유남준은 이미 박민정의 친구한테 잘 보이는 법을 배웠다.두 눈이 빛이 난 민수아는 말했다.“진짜예요? 감사합니다, 유 대표님.”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진서연도 감사하다고 말했다.쇼핑몰에서 고급 화장품이며 스킨케어 제품, 옷이랑 신발을 구매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민수아와 진서연은 오늘 종일 쇼핑해도 부족한 것만 같았다.진서연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보스, 얼른 유 대표님이랑 재결합하세요. 전에 제가 조사해 봤는데 출산 신고도 해야 되는데, 혼인 신고 증서가 필요해요.”“그렇게 번거로운 거였어, 그러면 재결합하는게 맞아.”민수아도 맞장구를 쳤다.유남준은 이 방법이 효과가 있다고 느꼈다.쉽게 포섭된 그녀들을 본 박민정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괜찮아, 없어도 출산할수 있어.”박민정의 말을 듣고 조급해진 그녀들은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를 몰랐다.이 상황을 본 유남준은 낮에 김인우가 제안했던 일을 떠올렸다.‘어떻게 하면 그녀가 죄책감을 가질까?’한편, 늦은 시간 퇴근 중이던 설인하는 멀리 있는 차 안에서 누군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같은 시각 퇴근 중이던 연지석은 설인하 뒤에 차량을 발견하고 운전 중이던 차를 그녀 앞에 멈추어 세웠다.“늦었는데, 민정 씨도
판매원은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저들이 돈을 지급하지 않았으니 내가 바로 구매해도 되는거 아니야?”옷을 든 민수아는 기분이 언짢다는 듯이 말했다.“우리가 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옷을 다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지 구매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물건을 구매하는 것도 선후가 있는 거 아닌가요?”박민정은 그녀를 말렸다.“그만해. 수아야, 옷 그들에게 줘. 우리가 다른 매장 가서 사면돼.”곧 아이를 출산할 박민정은 임신 중 지금 이런 사소한 일로 저들이랑 실랑이를 피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군자가 복수를 갚는 데는 십년도 늦지 않다고 지금은 아이를 무사히 출산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이 상황이 달갑지 않은 민수아는 옷을 판매원에게 돌려주었다.판매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감사합니다.”이때 이지원이 앞으로 다가와 수습하는 척 말했다.“소현 씨, 우리도 구매한 아기 옷 이 많은데 이 옷 중 몇 벌을 그들에게 양보해 줄까요?윤소현은 눈썹을 살짝 추켜세우며 말했다.“그래. 우리 엄마가 특별히 디자이너를 불러서 아기 옷을 주문했는데, 이런 저가품들은 그냥 그녀들에게 주지.”이기적이고 가식적인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구역질이 난 민수아는 상대가 임산부만 아니었어도 자신의 화를 참지 못하고 싸웠을 것이다.“민정아, 저들이 너무 사람을 무시하는 거 아니야?”윤소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어쩔 건데?”한창 논쟁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남준은 그녀들이 오지 않자, 쇼핑몰로 갔다.이 쇼핑몰은 현재 IM 그룹 이것이었다.가게 앞에 도착한 유남준은 윤소현의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여기에 모두 저가품이라고 생각되시면 다른 곳에 가서 고가품을 사시죠.”유남준의 목소리를 들은 윤소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돌려보았다.이지원은 회복된 유남준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남준 오빠...”이지원이 자신의 앞에 다시 나타날줄 몰랐던 유남준은 그가 전에 그녀에게 준 교훈이
유남준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성원아, 내가 건의하는데 네가 이럴수록 인하 씨의 맘이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거야.”방성원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있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해? 인하가 나의 딸아이랑 가출했는데 내가 머리 숙여 사과라도 하란 말이야?”함께 있던 서다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전에 그는 방성원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 보니 대표님처럼 똑같이 멍청하기 그지없었다.한쪽에서 축 처진 자세로 앉아서 게임을 하던 김인우가 끼어들어 말했다.“성원아, 내가 생각하기로는 너의 마음이 여전히 약한 것 같아. 나라면 그녀가 어디 가든 상관하지 않고 딸만 빼앗아 올 거야.”자신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김인우는 또 말을 이어갔다.“나한테 길든 조하랑을 보면 몰라? 얼마나 고분고분해졌는데.”그를 향해 두 남자는 눈길을 돌렸다.“허풍 떨지 마!”두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김인우는 조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근무 중이던 조하랑은 김인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퉁명스럽게 받았다.“무슨 일이세요?”조하랑의 말투를 들은 김인우는 바로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전에 있었던 일 잊지 마요.”조하랑은 고분고분 말했다.“김 도련님, 무슨 일이 있나요?”“저녁에 이모에게 요리 적게 하라고 해요. 저는 저녁에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요.”‘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다 먹을 수 있는데 고작 이런 일로 전화한 거야?’조하랑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또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알겠어요.”김인우가 전화를 끊자, 건너편에 앉아 있던 두 남자는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방성원이 다가와 말했다.“어떻게 된 거야?”유남준도 귀가 솔깃했다.지금의 박민정은 유남준에게 부드럽게 대하지 않았다.“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여자가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거야.”김인우는 자기 일을 두 사람에게 말했다.“대충은 이런 거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봐.”방성원은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좋아, 만약 잘되면 너에게 개인 비
“미안 너희들 많이 놀랐지?”박민정은 손으로 배를 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아이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벌써 어린 나이에 말 잘 듣다니, 너무 착하네.”박민정은 부드럽게 웃었다.유남준은 그녀의 일어나는 소리에 바로 그녀를 부축하러 갔다 배가 점점 불러 오르고 있는 박민정은 가끔 일어나기가 매우 불편했다.“출산예정일이 다음 달이니 회사 일은 부하 직원들에게 맡기고 병원에 같이 가자.”유남준은 엄숙하게 말했다.유남준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거절하지 않았다.“그래요. 제가 업무처리를 완료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유남준은 그녀가 결정한 일이면 누구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알았어. 그러나 꼭 몸조심해. 만약 불편한 곳 있으면 바로 나한테 말해 줘야 해. 알았어?”박민정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알았어요.”그녀는 유남준이 점점 잔소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했다.회사에 갈 때마다 유남준은 그녀를 사무실 안까지 바래다주었다.출근길에서도 유남준은 고의로 박민정에게 말을 건넸다.마치 다른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모르기라도 할까봐 두려운 듯 말이다.”박민정이 겨우 그를 돌려보내자, 설인하 일행이 곁에서 그녀를 조롱했다.“유 대표님, 혹시 대표님을 빼앗기실까 봐 매일 와서 주도권 선전하시는 건가요?”유남준은 회사 전체 직원들에게 밀크티를 사주면서 박민정 남편이 한턱 냈다고 소문내기 시작했다.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장난하지 마세요. 우리 힘내 일해요.”“그래요.”설인하는 연지석이 그에게 준 프로젝트를 급하게 처리해야 했다. 프로젝트가 순조롭지 못한 탓에 그녀는 골치가 아팠다.분명히 간단한 프로젝트인데, 상대방의 갑작스러운 결단으로 그녀와 계약하지 않으려했다.설인하는 연지석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죄송합니다. 부사장님.”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말했다.“왜 그래요?”연지석은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설인하는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없는 원인을 그
이튿날 아침, 이지원은 정수미와 함께 혈액 검사하러 갔다.검사 결과는 며칠 후 나올 것이었다.정수미는 야위고 수척해진 이지원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으나 함미현에 대한 관심보다는 크지 않았다.정수미는 경계심을 높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얘기하려고 했다.한편, 정수미는 사람을 시켜 이지원을 조사했다.그 결과 이지원은 확실히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가 맞았다.그러나 보육원 출생기록이 완정하지 않은 탓으로 이지원의 출생기록을 찾을 수 없었다.“입양된 적이 없는데 왜 이 씨 성을 가지게 된 거야?”정수미는 이지원에게 물어보았다.이지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저를 돌봐 주신 어머님이 이 씨 성이라 어머님의 성씨를 따랐어요.”“아, 그런 거였구나.”“네가 박씨 가문과 많은 연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진짜야?”정수미가 다른 만만한 남자들과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는 이지원은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대답했다.“맞아요. 박씨 가문에서 저의 학업을 후원해 주셨어요, 늘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제가 그분들에게 보답하기도 전에 돌아가셨어요. 휴... 제가 졸업 후 줄곧 성공하지 못한 탓이에요.”이지원은 탄식하며 말했고 그녀의 솔직함에 정수미도 그에 대한 경계심을 낮췄다.정씨 가문 딸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윤소현은 함미현만 없어지면 순조로운 줄만 알았는데 또 한 사람이 나타나 그녀를 위협하고 있었다.정수미의 방에서 나온 이지원은 바로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윤소현의 앞으로 갔다.“소현 씨.”이지원은 굽실거리며 윤소현에게 말했다.“소현 씨의 태아는 4, 5개월쯤 되셨죠? 남자아기인 것 같은 데 태교를 시작할 시기에 왜 아이 아빠가 옆에 없나요?”이지원은 고의로 비아냥거리며 말했다.그녀는 오기 전 윤소현과 유남우의 일에 대해 알아보았다.남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지원은 유남우가 윤소현에게 맘이 없다고 추측했다.이지원은 유남우가 좋아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민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윤소현은 얼굴빛이 어두워지면서 대답했다.“왜 그렇게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