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그가 이렇게 직설적인 말을 뱉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그녀에게 이전의 조급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다.“이건 좀 아니지 않아요?”유남준이 그녀에게로 성큼 다가갔다.“아직 명의상 부부인데 안될게 뭐가 있어?”그가 말하며 가운을 서슴없이 풀어 헤쳤다.박민정은 흠칫 고개를 돌리며 황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평소와 다른 그녀의 수치스러워하는 모습에 유남준의 목울대가 진득하게 위아래로 움직였다.“걱정하지 마. 안 건드릴 테니까.”박민정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그렇지.“그럼 전 객실에서 잘게요.”박민정은 돌아서서 나가려고 했다.유남준을 얻지 못한다면 방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다.그러나 이때 그가 한발 앞서 박민정의 손을 홱 잡아챘다. 그의 힘에 박민정의 몸이 속절없이 앞으로 기울더니 그의 가슴팍에 부딪히고 말았다.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두 팔이 그녀를 꼭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움직이지 마. 이제 너도 여기서 자는 거야. 나 혼자서 잠 못 자.”그녀가 떠난 이후 유남준은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약을 찾아 먹고 정신과 의사까지 만나봤어도 나아지지 않았었다.박민정이 돌아오고 그녀를 안고 잠을 청해서야 그는 가까스로 잠에 들 수 있었다.박민정은 그가 직접 이 말을 했다는것이 놀라웠다.“약속 지켜요.”“그래.”박민정은 침대의 한쪽에 눕더니 특별히 이불을 돌돌 말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눈을 감고 그녀는 진주시로 돌아가기 전 의사가 했던 당부를 떠올렸다.의사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지면 의식을 거의 잃는다. 하여 박민정이 목적을 이루려면 그가 의식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그러므로 유일한 방법은 그가 술에 취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난번 술을 먹이려고 시도했을 때, 그가 자신에게 먹이는 바람에 계획이 모두 수포가 되었었다.어쩐지 전에 파견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임무를 완성하지 못하더라니. 이 사람은 아예 다른 사람이 술을 권하도록 내버려두질 않았다.심지어 기념일에서도 어머님 고영란이 권하는
베란다에 나와 밖을 보니 온통 산과 나무들뿐이다.박윤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혼잣말했다.“이거 완전 아이가 아니라 범죄자를 가둔 느낌이잖아.”베란다에 서 있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이는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다른 곳도 살펴보았다.이곳에 갇힌 며칠간 그는 줄곧 도망갈 기회를 찾고 있다.그러나 이곳의 보안 시스템은 너무나도 삼엄했다.아이가 보안 시스템을 모두 피한다고 해도 그의 허약하고 병든 몸은 천 미터도 달리지 못하고 졸도할 것이며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다.사방을 한참 살피던 가정부는 그제야 아이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이름을 불러대기 시작했다.“윤우야, 윤우야? 어디 있어?”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사장이 틀림없이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가정부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아이를 찾고 있을 때, 박윤우가 물 한 잔을 들고 들어왔다.“아줌마, 피곤하죠? 물 마셔요.”박윤우를 보고서야 가정부는 숨을 내돌렸다.아이가 하도 똑똑하고 철이 들어서 가정부는 자신이 서너 살짜리 아이를 돌본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윤우야, 고마워. 아줌마 목 안 말라. 앞으로 뭘 하고 싶으면 하기 전에 꼭 아줌마한테 물어봐야 해~ 아줌마 깜짝 놀랐어, 방금.”“알겠어요.”박윤우가 마음이 무거운 듯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고는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가정부는 아이의 갑작스러운 눈물에 당황하며 다급히 물었다.“윤우야, 왜 그래? 왜 울어?”박윤우가 코를 훌쩍이더니 입을 열었다.“엄마랑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요. 아줌마,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알려주면 안 돼요?”아이에게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가정부는 이 귀여운 아이가 우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그래. 내가 얼른 집사님께 연락할게.”그녀에게 사장님의 연락처가 있을 리 없다.저택 내부의 모든 네트워크 신호가 차단되었으므로 가정부가 집사에게 연락하는 것도 가장 바깥쪽의 보안을 통과해야 했다.그녀는
유남준은 목이 메어왔다.합의…우리 사이에 또 무슨 합의가 필요해?유남준은 내키지 않았지만 박민정이 집을 나가겠다고 할까 봐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먼저 써둬.”만일 그에게 불리한 내용이라면 절대 서명하지 않을 것이다.그는 옷을 갈아입고 얼른 정림원으로 향했다.도착한 후 보니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다.“아저씨, 드디어 오셨네요. 우리 아빠한테 저 잡아갔다고 말은 했어요?”아이를 데려가 놓고 어떻게 연지석과 아는 체를 하겠는가.유남준이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대답했다.“지금쯤이면 이미 알고도 남았지.”사슴 같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는 하도 울어서 코끝이 붉다.“그럼 왜 아직도 절 데리러 오지 않는 거예요?”“저 집 가고 싶어요. 아빠도 보고 싶어요…”유남준이 티슈 한 장을 아이 앞에 내밀었다.“그만 생각해. 네 아빠는 너 싫대.”“…”말도 안 되는 소리. 아저씨가 나를 싫다고 할 리가.감히 어린 애까지 겁 주려 한다니. 정말이지 악랄하다.어린애라는 장점을 앞세워 박윤우는 냅다 울어대기 시작했다.“거짓말! 아빠가 윤우를 싫어할 리가 없어! 나중에 엄마랑 동생도 만들어주겠다고 했었단 말이에요!”유남준의 안색이 눈에 띄게 흐려졌다. 방 안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차가워졌고 주위 온도마저 가라앉는 듯했다.“네 아빠가 민정이랑 아이를 낳겠다고 했다고?”그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확인한 박윤우가 일부러 모른 척 말을 이어갔다.“네! 여동생이랑 남동생 많이 만들어줘서 같이 놀게 해줄 거라고 했어요!”“…”박윤우는 울면서도 몰래 유남준의 안색을 살폈다.우리 엄마 좋아하지 않는 것 아니었나?그런데 왜 이렇게 표정이 어둡지?본인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남 주기는 싫은가? 혹시 세상의 모든 쓰레기가 이런 걸까?“그럼 네 엄마는 왜 귀국한 거지?”유남준은 당연히 아이가 속사정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뱉은 말이었다.그러나 이에 당황한 박윤우는 어리둥절해서 하마터면 곧
유남준은 얼굴이 흙빛이 된 채 박윤우를 놓아주었다.애가 담이 작아도 너무 작은 것 아닌가.“아저씨, 윤우 때리지 마세요. 고의가 아니었어요… 윤우는 무섭단 말이에요…”밖에 있던 가정부들이 아이의 울음소리에 사장이 나쁜 짓이라도 했을까 봐 마음을 졸였다.박윤우를 돌보던 가정부는 해고될 위험을 무릅쓰고 문을 벌컥 열었다.“사장님, 아이가 이렇게나 어린데. 때리면 안 되죠…”그녀는 방으로 들어온 후에야 유남준의 하얀 셔츠 위의 노랑 액체를 보았다…가정부는 문득 무언가 깨닫고 겸연쩍은 듯 눈을 돌렸다.“아저씨, 화났어요? 왜 대답 안 해줘요? 엄마 언제 만나게 해줄 거예요?”유남준은 경직된 얼굴로 아이를 침대 위에 내려놓고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욕실 안에서 그는 한 번 또 한 번 몇 번이고 씻었다. 그 사고뭉치 자식만 생각하면 엉덩이 두 대만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박민정은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사고뭉치 아이를 낳았을까…한 시간 후 욕실에서 나오는 유남준의 몸에서는 은은한 로션 향이 났다.가정부는 조심스레 그에게 와서 말했다.“사장님, 윤우 이제 안 울어요. 그리고 대신 미안하다고 전해달래요.”“그리고 착한 아이가 될 테니 제발 죽이지 말아달래요. 아직 엄마·아빠도 보지 못했다고요.”아이의 말을 전하는 가정부도 말하면서 깜짝 놀랐다.아이가 사장의 아들이나 친척이 아니었구나. 그럼 죽인다는 건 또 무슨 말이지?무언가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게 된 기분. 이러다 입막음 당하면 어떡하지?아이를 죽인다고?어쩐지 그 사고뭉치 자식이 오줌을 지리더라니, 오해한 것이었군…“그래요.”그는 어린애와 실랑이할 겨를이 없었다.떠나기 전 그는 가정부에게 아이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가정부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박윤우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방 안에 있던 박윤우는 유남준의 자동차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어찌나 통쾌하고 시원했는지 모른다.그와 형이 태어나고 엄마가 그들을 돌보면 얼마나 많은 똥 기저귀를 갈았는데, 겨우 한
“왔어요?”박민정이 피아노 커버를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훤칠한 키의 유남준이 문 옆에 기대어 그녀를 응시했다.“왜 더 안 쳐?”전에는 일이 바빠 그녀가 이렇게 피아노를 잘 치는 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언젠가 박민정이 자신을 찾아와 프로젝트를 요청하며 한 번 연주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당시 그는 박민정의 동생 박민호에게 화가 난 상태였고 박민정을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녀는 아마 이 일로도 자신에게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그 일 이후로 박민정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고, 피아노를 연주한 적은 더더욱 없었다.그러나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남준 씨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박민정이 이어 말했다.“합의서 준비했으니 보러 가요.”외출하고 온 유 남준은 합의서에 관한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그래.”두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유남준이 의아한 듯 물었다.“잘 치던데, 곡 이름이 뭐야? 못 들어본 곡인 것 같네.”그의 말에 박민장이 어리둥절했다.“못 들어봤다고요?”이 곡은 그녀가 학창 시절 만든 곡이었고 당시에 특별히 유남준에게 연주해 주었던 곡이다.유남준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내가 들어봤던 곡이야?”박민정은 그가 잊은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그냥 한 말이었어요. 이 곡은 제가 고등학생일 때 쓴 거예요. 아직 발표하지 않은.”박민정이 직접 썼다는 말에 유 남준은 저도 모르게 그녀를 높이 보게 되었다.그는 자기 아내가 이토록 많은 재능을 갖고 있음을 이제야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다.유남준이 먼저 앞장서자 박민정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넋을 잃은 듯 바라보았다.그의 반응이 곡을 정말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 같았기 때문이었다…박민정은 의아함을 느꼈지만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렇게 바쁜 사람이, 게다가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곡 하나를 여태 기억하고 있겠는가.방으로 돌아온 박민정은 자신이 직접 쓴 합의서를 가져와 그에게 건네주었다.
밤이 되자 유남준은 집을 나섰다.그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민정은 정민기의 메시지를 받았다.유남준이 집을 나갔으니 둘러대고 밖에 나오라고, 그리고 알려줄 것이 있다는 문자.두원별장의 보안이 삼엄한 탓에 정민기는 어쩔 수 없이 먼발치에서 박민정이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하여 때로는 유남준이 떠났는지, 집에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박민정은 악보를 닫고 정리한 후 문밖으로 나갔다.차에 탄 그녀는 운전기사를 시켜 여러 곳을 돌게 하여 뒤따라오는 보디가드를 따돌렸다.곧이어 정민기의 차가 눈앞에 나타났고, 박민정은 차에서 내려 정민기의 차로 옮겨탔다.“무슨 일이에요?”정민기가 휴대폰을 꺼내 내비게이션을 켜더니 진주시 서부를 가리켰다.“아침에 유남준이 가던 방향인데, 보안이 철저한 것을 보아 아마 아드님이 끌려간 곳인 것 같아요.”박민정은 그 광활한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았다.“지도로 단순히 보기엔 장소가 너무 넓은 것 같아요.”“그렇죠.”이때 정민기가 새 휴대폰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 휴대폰 가져가세요. 지금 쓰고 있는 건 도청될 수도 있으니까요.”“연 선생님은 며칠만 있으면 돌아올 거라고 했어요.”박민정이 휴대폰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연 선생님께서 휴대폰 받으면 안부 전해 달라고 했어요.”정민기가 말을 보탰다.“알겠어요.”정민기가 차를 감시 카메라가 없는 은폐된 곳으로 몰았다.박민정이 전화를 걸자 건너편에서 빠르게 받았다.“민정아, 지금 좀 어때?”“난 괜찮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 나도 윤우 어디로 끌려간 건지 알아낼 방법 열심히 찾아볼 거야.”박민정이 얼른 대답했다.그러나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그들이 윤우의 위치를 찾는다 해도 유남준의 방해로 아이를 데리고 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음. 내 말은, 그 사람이 너한테 상처 줬어?”연지석은 건물의의 가장 높은 층에 서 있다.쌀쌀한 바람을 맞으며 그가 서 있는 곳은 아직 깜깜한 새벽이다.그의 훤칠한 몸과 다부진 상반신에
수호 클럽 펜트하우스.어두운 조명 아래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많은 상류층 귀공자들도 있었다. 유남준은 조용한 곳에 앉아 휴대전화를 켜서 박민정을 뒤따라가던 경호원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놓쳤습니다.]유남준이 떠나자마자 박민정이 외출했는데 지금 사라지기까지 하다니.유남준은 눈살을 찌푸리고 메시지를 보냈다. [한 시간 후에 못 찾으면 더 이상 진주시에 있을 생각하지 마.]유남준의 메시지에 진주시의 모든 CCTV를 동원했다.유남준은 또 박민정에게 통화를 시도했다."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이때, 박민정은 은정숙과 통화하고 있었다. 박민정은 윤우와 예찬은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화면 너머 은정숙은 머리가 희끗희끗했고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민정아, 무슨 일 있으면 혼자 짊어지지 말고 꼭 아줌마랑 연지석한테 연락해.”은정숙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박민정의 우울증이다. 박민정이 또 바보 같은 짓을 할까 봐 두려웠다.“네, 안심하세요.”박민정은 그녀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정민기가 급하게 오는 것을 보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무슨 일이에요?”“유남준 쪽 사람들이 민정 씨를 찾고 있어요.”정민기가 대답했다. 말을 들은 박민정은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자기를 데리러 한 도로 입구에 오라고 운전기사에게 전화했다.그런 다음 그녀는 옷 사러 간 척하고 차에 탔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남준의 경호원이 박민정을 발견하고 즉시 사진을 찍어 유남준에게 보냈다.유남준은 사진을 보며 전화 걸었다.휴대전화 진동 소리를 듣고서야 박민정은 유남준이 전화한 것을 발견했다.“여보세요.”“지금 어디야?”유남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박민정은 근처를 둘러보더니 말했다.“타임스퀘어에요. 이제 막 돌아가려던 참인데, 무슨 일이에요?”‘타임스퀘어?’“수호 클럽 펜트하우스로 와.”유남준은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타임스퀘어는 수호 클럽과 몇백 미터 떨어진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박민
그렇게 생각한 강은지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으며 유남준의 곁에 앉았다.어두운 빛 아래에서 강은지는 유남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은지는 처음에 있던 당황스러움과 수줍음을 잊고 과일을 깎아 주려고 했다.유남준은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만약 내가 돈을 안 주면 여기 앉았을 거야?”잠시 멈칫하던 강은지는 얼른 반응했다.“대표님 옆에 앉게 되어 영광이에요. 돈은 필요 없어요.”‘하, 돈이 필요 없다니.’그 말을 들은 유남준은 자연스럽게 박민정이 떠올랐다.몇 년간의 결혼 생활, 이혼한 후에야 박민정이 유씨 집안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래. 그러면 지금부터 월급 없이 여기서 일해.”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다.비록 수호가 유남준의 재산은 아니지만, 그의 말 한마디면 사장은 즉시 실행할 것이다.강은지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유 대표님, 저랑 장난하시는 거죠?”강은지가 만약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일할 수 있었겠는가.그녀의 학력으로 볼 때, 한 달에 200만 원 버는 일자리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한 달에 200만 원 버는 것이 어떻게 하루에 200만 원 버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게다가, 강은지는 젊고 미모가 아름다워서 금수저 신랑감을 낚을지도 모른다.“네 생각은 어때?”유남준이 되물었다.옆에 있던 친구들이 놀랐다. “남준이 형, 왜 그래?”유남준은 대답 없이 강은지만 쳐다보았다.“불만 있어?”강은지는 유남준의 아우라에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강은지는 유남준이 단지 그녀를 시험하고 싶을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았다.유남준의 친구는 그가 한번 뱉은 말은 번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굳이 강은지에게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강은지가 이번에 한 일은 다 헛수고가 되겠네.’강은지는 앞으로 수호에서 어떠한 보수도 받지 못할 것이고 누구도 감히 그녀에게 돈을 주지 못하리라
홍주영은 오늘 유남우와 함께 회사로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다.차에서 내리겠다는 유남우의 말에 그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가 돌아오지 않자 걱정이 되어 직접 찾아왔다.그리고 그녀가 마주한 것은 지금 이 끔찍한 장면이었다.홍주영은 여실히 박민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급히 소리쳤다.“도련님, 빨리 민정 씨를 놓아주세요! 지금 위험해 보여요.”그제야 홍주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유남우는 급히 박민정을 놓았다.하지만 이미 박민정은 얼굴이 창백하고 보랏빛이 돌 정도로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민정아!”유남우의 얼굴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박민정은 숨을 헐떡이며 말할 겨를조차 없었고 홍주영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말했다.“민정 씨, 천천히 숨을 고르세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고르려 노력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그녀는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유남우의 눈빛에는 뚜렷한 죄책감이 어렸고 그는 손을 들어 그녀에게 다가가려 하며 나지막이 말했다.“괜찮아? 다친 데는 없지?”하지만 박민정은 곧바로 몇 걸음 물러나 그의 손길을 피했다.“나, 방금 거의 죽을 뻔했어요.”그녀는 아직도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만약 유남우가 조금이라도 더 심하게 했다면 그녀는 정말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유남우의 손은 공중에서 멈춰버렸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홍주영이 대신 사과하며 말했다.“민정 씨,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홍주영은 누구보다도 유남우가 박민정에게 얼마나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방금 들었던 유남우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라 그녀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그녀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천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더는 오빠를 보고 싶지 않아요.”그녀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유남우의 머릿속에는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만이 맴돌았다.‘보고 싶지 않아요.’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던 홍주영은 조심스레 말했다.
박민정은 손바닥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오빠는 거짓말쟁이잖아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 있겠어요? 오빠가 준 그 약들, 내가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자신을 아껴주던 남우 오빠가 어떻게 자신을 이렇게까지 해칠 수 있는지.유남우의 눈에는 깊은 고통이 스쳐 지나갔다.“이 방법밖에 없었어!”그는 박민정을 자기 곁에 완전히 붙잡아 둘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박민정은 냉소를 흘렸다.“방법이 이것뿐이라니. 오빠는 정말 너무 이기적이고 비열해요. 오빠가 이런 사람이 되어버릴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박민정의 마지막 말이 유남우의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을 끊어버린 것 같았다.그는 손을 들어 박민정의 팔을 움켜쥐었고 분노와 슬픔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변했다고? 네가 그 말을 할 자격이 있어?”유남우가 박민정의 팔을 더 강하게 움켜쥐자 그녀는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며 외쳤다.“이거 놔요!”하지만 유남우는 손을 놓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변한 건 너야! 네가 먼저 변했어! 너 어릴 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나를 좋아한다고, 크면 나랑 결혼하겠다고 했잖아!”그는 목이 메었다.“너는 나랑 유남준도 구별 못 했어.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어떻게 그 인간이랑 결혼하고 그 인간을 사랑할 수 있어?”유남우의 목소리가 떨렸다.“넌 원래 나만 좋아해야 했어. 네가 변하면 안 되는 거였다고.”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충격에 휩싸였다.“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유남우는 그녀를 강하게 끌어안았다.“내가 헛소리를 하는 건지 아닌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그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있었다.“내가 너를 1년 넘게 보살폈어. 그런데 유남준이 나타나자마자 넌 또 유남준한테 가버렸지. 너한테 사랑은 그렇게 쉬운 거야?”박민정은 그가 너무 꽉 끌어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
박예찬 역시 하루빨리 박민정 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병세가 계속 나아졌다 악화됐다를 반복하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라 그의 마음도 놓이지 않았다.게다가 김인우와 조하랑은 여전히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다투었고 이 끝없는 싸움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었다.그렇게 매일 부딪히면서도 결국 두 사람이 잘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이런저런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박예찬은 밤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박씨 가문.그날 밤, 박민정은 금세 잠에 들었다.이곳에서의 밤은 신림현에서 지낼 때와 달랐는데 전에 느끼던 두려움 없이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전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몇 번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그녀의 휴식을 방해할까 두려워 결국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그렇게 밤새 뒤척이던 그는 다음 날 아침, 눈 밑에 푸른 기운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곤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제대로 쉬지 못한 티가 났다.유남준은 아침부터 박민정을 찾았지만 진서연에게 뜻밖의 답을 들었다.“보스는 이미 나가셨어요.”“언제 나간 거야? 어디로 갔는데?” 유남준이 다급히 묻자 진서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민기 씨가 따라갔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유남준은 그녀가 안전한지 걱정되는 한편, 어제의 감정이 풀렸는지도 알고 싶었다.한편, 박민정은 차에 앉아 어제의 불쾌한 감정을 이미 잊은 듯했다.운전기사가 차를 몰며 앞길을 달리는 동안 박민정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정민기는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며 동행자 역할을 했다. 박민정이 묻는 질문에만 간단히 대답했을 뿐,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덕분에 박민정은 그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정도였다.얼마 후, 두 사람은 한 대학의 정문에 도착했다.이곳은 박민정이 예전에 다녔던 대학교였다.익숙하면서도 낯선 이곳에 발을 내딛으며 그녀는 말했다.“분명 여기서 학교를
저녁 식사 시간 내내 박민정은 유남준을 철저히 무시했다.유남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기로 결심했다.식사가 끝난 후 박민정이 소화를 시키기 위해 산책을 나서자 유남준은 그녀를 따라갔다.민수아와 다른 사람들은 눈치 있게 자리를 피해주었다.박민정은 걸음을 멈추고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유남준을 한 번 쳐다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민정아, 화 풀어.”유남준이 다가가며 말했으나 박민정은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아까는 내가 너무 성급했어.” 유남준이 다시 말을 꺼냈다.사실 박민정은 그렇게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너무 자연스럽게 행동했던 모습이 떠올랐다.그 순간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 후 어떻게 지내왔는지 문득 궁금해졌다.“우리가 결혼했을 때에도 평소에 자주 내 일에 간섭했어요?”박민정이 마침내 입을 열었지만 그건 유남준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유남준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급히 대답했다.“당연히 아니지.”그가 어찌 감히 박민정을 화나게 할 수 있었겠는가.“그런데 아까는 왜 그렇게 자연스러웠는데요?”박민정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유남준은 말문이 막혔다. 아직 변명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는데 박민정이 다시 입을 열었다.“지금은 혼자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이만 얘기 그만하죠.”“민정아...”유남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그러나 박민정은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하며 경계하는 얼굴로 말했다.“유남준 씨, 자중하세요.”유남준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민수아, 설인하, 그리고 진서연은 흥미진진하게 속닥거렸다.“무슨 일이야? 부부싸움 한 건가?”“부부싸움은 개도 안 끼는 법이라더니. 우리 얼른 자러 가자.”“나도 그게 맞는 것 같아.”그들은 수군거리며 한쪽으로 사라졌다.박민정은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더는 산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 유남준을 뒤로 하고 거실로 돌아갔다.유남준은 딱딱하게 굳은 발걸음으로 민수아와 두 사람에게
박민정은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낯선 번호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민정아, 나야, 에리.”청량하고 활기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자 박민정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야?”“날 완전히 잊어버렸나 봐.”에리가 과장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예전에 나한테 밥 한 끼 빚진 거 기억 안 나? 게다가 지금 난 네 회사에 소속된 배우야. 이렇게 날 방치해서 되겠어?”그는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며 살짝 애교 섞인 투정을 부렸다.박민정은 이런 방식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처음 접해본 터라 당황스러웠다.“저기, 그거... 조금만 더 미뤄도 될까?”그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안 돼! 벌써 1년이나 빚진 건데 또 미루겠다고?”에리는 단호하면서도 애교를 섞어 불만을 드러냈다.옆에 서 있던 유남준은 통화 내용으로 대충 누군지 짐작이 갔다. 그는 박민정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예상대로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에리였다.“민정아, 설마 유 대표가 우리 약속을 눈치채는 게 걱정되는 거야? 안심해. 절대 비밀로 할게!”‘우리 약속’라는 말에 유남준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에리 씨, 다시 제 아내를 귀찮게 굴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그렇게 말한 뒤 그는 단숨에 전화를 끊어버렸다.박민정은 휴대폰을 빼앗기고 전화를 끊어버린 유남준의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남준 씨,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그녀는 분명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의 휴대폰을 빼앗아 전화를 끊는 건 예의 없는 행동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화가 난 것을 보고 곧장 해명에 나섰다.“민정아, 에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배우라는 것들도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고.”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그를 올려다봤다.“그게 당신이 내 휴대폰을 빼앗고 내 전화를 끊은 이유예요?”그녀의 차가운 시선에 유남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어쩐지 아내 앞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