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남준은 냉소를 피식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연지석도 널 그렇게 사랑하는 건 아니던데? 말해봐. 그 자식은 널 얼마나 오랫동안 버려둔 거야?”이번에야말로 유남준은 박민정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린 박민정이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유남준이 그녀의 손목을 잽싸게 쥐어 잡았다.“왜? 정곡이라도 찔렸어?”박민정은 애초에 해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요 몇 년 동안 그녀와 연지석은 줄곧 친구처럼 지내왔다.“당신이 지금 이렇게 굶주려 있는 걸 보니 이지원이 당신을 사랑하지 않나 봐요?”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그러자 유남준은 속으로 피식 냉소를 터뜨렸다.“난 너와 달라.”유남준은 애초에 단 한 번도 이지원을 건드린 적이 없다.“뭐가 다른데요? 결국 도긴개긴 아닙니까? 저보다 얼마나 더 잘났다고 그러세요? 전 당신이 일편단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당신도 결국 그저 그렇네요. 이지원은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나요?”유남준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는 박민정의 물음에 하나도 답하지 않았고 그저 계속하여 그녀를 자신의 품 아래에 단단히 가둬놓았다.그러자 박민정이 갑자기 그의 어깨를 힘껏 깨물었다.갑작스러운 고통에 유남준이 신음을 내며 숨을 들이마셨지만, 그는 여전히 박민정을 놓아주지 않았고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요 몇 년간, 그는 수없이 많은 꿈속에서 이러한 장면을 꿈꿨었다.그 자리에 얼어붙은 박민정은 지금 화를 낼 때가 아니라 기회라는 것을 깨닫자 곧바로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그의 스킨쉽을 따랐다.어두컴컴한 조명 아래, 박민정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지만 그녀의 선명한 변화를 눈치챈 그는 무척 의아해했다.하여 유남준이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너 지금 나한테 맞춰주고 있는 거야?”박민정의 동공이 순식간에 움츠러들었다.곧이어 유남준의 동작이 전부 멈췄고 그는 침대 옆 램프 전원을 눌렀다.박민정은 무의식 간에 자신의 몸을 애써 가렸다.그러자 유선
유남준은 긴 다리를 움직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박민정에게 가까이 다가가 보자, 그녀의 얼굴엔 여전히 눈물자국이 있었고 두 손은 주먹을 꽉 쥔 채 경계하듯 소파에 붙어서 잤다.실내 에어컨 온도가 너무 낮아 그녀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곧이어 유남준이 전화를 걸어 아침밥을 가져오라고 하려 할 때 누군가가 밖에서 현관문을 열었다.이지원이 손에 아침밥을 들고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들어왔다.“오빠, 내가 아침에 먹을 거 좀 가져왔어요. 오늘 회사 창립기념일 아니에요? 있다가 우리 같이...”아직 참석하자는 말을 채 하지도 않았는데 이지원은 소파에서 자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눈앞에 광경을 믿을 수 없는 이지원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박민정이 왜 여기서 자고 있단 말인가? 설마 두 사람 밤새 여기서...유남준은 비몽사몽한 모습으로 이지원을 바라보며 의아해했다.“너 어떻게 들어왔어?”지문인식이나 얼굴인식을 등록하지 않은 이상, 대문을 지키고 있는 경비를 뚫고 조용히 들어올 수가 없다.이지원은 손에 든 아침 식사가 든 봉투를 꽉 쥐고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어머님이 보내셨어요. 앞으로 오빠를 잘 보살피라고 하셨거든요.”전에 고영란은 이지원이 유남준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끔 하려고 특별히 대원 별장 대문의 인식 시스템에 이지원의 정보를 입력했다.그런데 이지원은 오늘에서야 시간이 나서 올 수 있었다. 원래는 어제 민 선생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이지원의 시선이 천천히 박민정에게서 옮겨갔다.그녀는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오빠,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나가서 말하자.”어젯밤 박민정은 잘 쉬지 못했는데 마침 잠을 자려고 보청기도 끼지 않아서 두 사람이 말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이지원은 유남준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마음속의 불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민정 씨가 왜 오빠 집 소파에서 자고 있어요?”유남준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내가 민정이한테 다시 들어오라고 했어.”그러자
“넌 이제 돌아가 봐. 오늘 밤 회사 창립기념일 행사엔 내가 참석할 테니까.”유남준은 살짝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그래요.”이지원은 들고 왔던 아침밥을 내려놓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박민정을 힐끗 보고 떠났다.유남준이 돌아서자 박민정이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왠지 저도 모르게 마음에 찔렸다.“언제 깼어?”박민정이 평온한 표정으로 말했다.“조금 전에 이지원 씨가 남준 씨에게 결혼하자고 말했을 때요. 축하해요.”유남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주변의 공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유남준은 검은 눈동자로 박민정을 바라보며 말했다.“할 말 있으면 지금 해도 돼.”만약 박민정이 그더러 이지원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 유남준은 바로 동의할 것이다.그런데 예상 밖에 박민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두 분 축하드려요. 만약 이혼 절차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도울 거예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윤우를 나에게 돌려줘요.”유남준의 가슴이 식어버리는 것 같았다.박민정이 이젠 자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가 누구와 함께 있든, 다른 여자랑 결혼을 하든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유남준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왜 불편한지 몰랐다.그는 헛기침을 여러 번 하고는 옆에 있는 이지원이 사 온 아침밥을 바로 쓰레기통에 버렸다.“먹고 싶은 거 있으면 네가 직접 시켜 먹어.”말을 마친 유남준은 박민정의 옆을 지나 서재로 걸어갔다.박민정은 유남준이 너무 유치해졌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지원이 가져온 음식을 먹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직접 요리를 하고 밥을 다 먹은 후 유남준에게 나간다고 문자를 남겼다.유남준은 서재에서 박민정이 방금 했던 말을 후회한다고 말하기를 바랐지만, 결국 문자밖에 못 받았다.[나 회사 가요.]너무 짧은 한마디였다.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서재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박민정은 이미 떠났다.주방에 가보자 아무것도 없었다. 박민정은 그를 위
비서가 조심스럽게 휴대폰을 주우면서 물었다.“지원 씨, 어떻게 됐어요?”“나더러 조하랑에게 사과하고 표절한 걸 공개적으로 인정하래.”비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그걸 어떻게 인정해요? 만약 지원 씨가 표절한 걸 인정하면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게 물거품이 되잖아요?”이지원은 민 선생을 난감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녀는 민 선생이 정말로 시간을 낭비하고 돈을 받는 대신 국제 소송을 진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지금 이지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곡이 아니라 박민정의 일을 해결하고 유남준과 결혼하는 것이었다.“오늘 밤 회사 창립기념일 행사에 잘 준비하고 갈 거야.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떠도는 표절 사건은 잠시 돈으로 막고 있어 봐.”이지원은 자신에게 있는 돈으로 오래 막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단지 결혼만 순조롭게 할 수 있으면 괜찮았다.회사에서.얼마 지나지 않아 박민정은 조하랑의 전화를 받았다.“민정아, 오늘 올 거야?”오늘은 주말이라 조하랑은 박민정과 예찬이를 불러 야외에서 캠핑하고 싶었다.그러나 박민정은 거절했다.“유남준이 날 지켜보고 있어. 이미 윤우의 존재를 들켜버렸는데 예찬이까지 들키면 안 돼. 우리 나중에 보자.”조하랑은 그녀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래, 알겠어. 그럼 빨리 유남준 애 갖고 우리 에스토니아로 돌아가자.”“그러자.”박민정은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만졌다. 왠지 이번엔 유남준이 전보다 더 경계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 그의 아이를 가지는 건 조금 어려워 보였다...이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유리창을 통해 보자 서다희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었다.“서 비서, 어쩐 일이에요?”서다희가 걸어 들어오면서 말했다.“민정 씨, 유 대표님께서 사무실에 오라고 하셨습니다.”박민정은 오늘 유남준이 회사에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유남준의 사무실에 가기 싫었지만, 윤우가 그의 손에 있으니 갈 수밖에 없었다.“네, 알겠어요.”
박민정을 유남준의 사무실 문 앞까지 데려다준 후에야 서다희는 떠났다.문이 닫혀 있지 않아서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유남준은 대표 의자에 앉아 집중해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잘생긴 남자는 진지하게 일할 때 더욱 멋져 보인다. 박민정은 처음에 유남준의 잘생긴 얼굴에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유남준은 그녀가 온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말했다.“이리 와.”박민정이 다가가면서 물었다.“무슨 일 있어요?”“앞으로 아래층에서 일할 필요 없어.”유남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너도 여기서 업무 봐.”박민정은 의아해했다.“왜 여기서 업무를 봐야 하죠?”“이유는 없어. 이건 회사의 결정이야.”회사의 결정이 아니라 그의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박민정은 유남준의 부하직원이니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알겠어요.”꽤 괜찮은 결정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와 접촉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박민정은 어젯밤의 관계로 임신할 가능성은 작다고 생각했다.“내려가서 노트북 가져올게요.”박민정이 말했다.그녀가 내려가기도 전에 이미 누군가가 그녀의 개인물품들과 노트북을 사무실로 가져왔다. 특별히 그녀가 쓰던 테이블도 옮겨 왔다.유남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민정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물품들을 살펴봤다.“나 궁금한데, 그동안 회사에서 뭐 했어?”예전에 박민정은 가정주부였다. 유남준의 내조를 하는 것 외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해 본 경험이 없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알고 싶어요? 보여줄게요.”그녀는 유남준이 아직도 자신을 경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어제 굳이 참을 리가 없었다.그러자 유남준은 관심을 보였다.“그래.”박민정은 유남준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심심할 때 했던 일들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유남준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의아해했다. 박민정의 노트북에 많은 프로젝트 계약서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언제부터 이런 걸 작성
한참 지나서 박민정은 이상함을 느꼈다. 유남준은 그녀에게 키스만 할 뿐,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박민정이 점점 숨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졌을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그제야 유남준은 동작을 멈췄다. 비서가 업무 보고하러 온 것이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계획이 또 한 번 실패로 끝났다.점심에 두 사람은 같이 밥 먹으러 갔다. 기사는 유남준이 자주 가는 가게로 두 사람을 데려다주었다.식사할 때 유남준은 박민정을 떠보았다.“걱정하지 마. 난 너랑 이혼 안 할 거야.”박민정은 당황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유남준은 다시 덤덤하게 말했다.“이지원이 원하는 건 신분이야. 그래서 주기로 했어. 그래도 법적으로 내 아내는 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난 이혼 안 할 거야.”박민정은 믿기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다른 해결 방법을 생각해 볼게.”박민정은 그가 자신을 떠보는 중이라는 것을 몰랐다.“우리 이혼해요. 그리고 남준 씨는 이지원과 결혼해요.”유남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의 추측이 맞았다. 박민정은 그와 관계를 갖고 싶어 하지만, 그에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왜? 그땐 나랑 결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굴더니, 이제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하길 바라는 거야?”유남준은 수저를 내려놓고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하지만 이지원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건 그가 아닌가?박민정도 입맛이 뚝 떨어졌다.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유남준이 갑자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기억해. 우린 아직 법적으로 부부야. 앞으로 다시는 연지석과 만나지 마.”박민정은 멍해졌다.“왜 남준 씨는 이지원과 만나도 되고 난 친구도 만나면 안 돼요?”“난 배신당하기 싫으니까!”“그게 무슨 말이에요?”“무슨 말인지는 네가 제일 잘 알 거야.”유남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두
유남준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박민정의 손과 다리의 찰과상을 발견하고 다시 차에 끌고 가서 기사에게 병원에 가라고 지시했다.차에 앉아있는 박민정도 이제야 두려움이 폭발했다. 조금 전엔 너무 충동적이었다. 그녀에게는 예찬이와 윤우가 있는데 사고를 당해서는 안 된다.유남준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넌 왜 화가 난 거야?”박민정은 손과 다리가 아파 났고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차 안은 다시 정적에 빠졌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싫었다.분명히 예전에는 말을 많이 했고 특히 어렸을 때는 자신의 옆에서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쩍하면 말을 하지 않는다.그는 화가 난 듯 말했다.“방금 어디 가려고 했어?”“그냥 차에서 내려서 걸어 다니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 가고 싶었던 건 아니에요.”아이가 그의 손에 있는데 어디로 갈 수 있을까?기사가 시립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자 유남준이 그녀를 데리고 차에서 내렸다.외과 진찰실에서.유남준이 문을 밀고 들어갔다.“남준아, 여긴 웬일이야?”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김인우는 흰 가운을 입고 진찰실 안에 앉아 있었는데, 예전의 부잣집 도련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진지한 표정이었다.유남준은 왜 왔냐고 묻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김인우는 그의 뒤에 있는 박민정을 흘끗 보고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었다.“할아버지가 기어코 인생을 경험해 보라고 하셔서 왔어.”김인우는 의학에 관심이 없었지만 김훈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국제 비즈니스와 법학도 공부했다.김훈은 그가 앞으로 가업을 더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더 실무적인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김훈이 김인우더러 의사가 하기 싫으면 조씨 가문과 혼인을 맺으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절대 의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김인우는 김훈이 조하랑의 어떤 점을 보고 자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지 몰랐다.조하랑과 그 장난꾸러기 아이를 생각하면 김인우는 머리가 아팠다.유남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박민정을 앞
김인우는 박민정이 어떤 곳에 손이 닿지 않아 연고를 바르지 못하는 줄 알고 손을 뻗어 도와주려 했다.박민정은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그가 자신을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고 본능적으로 피했다. 연고는 김인우의 손등에 떨어졌다.“미안해요.”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나 갈게요.”김인우는 그녀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설명했다.“약을 바르는 걸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고맙지만 됐어요.”박민정은 떠나려 했다.김인우는 그녀가 또 오해할까 봐 막아섰다.“남준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잖아.”박민정은 무관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그냥 밖에서 기다릴게요.”그런 박민정을 바라보는 김인우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나를 무서워하지 마. 다신 널 해치지 않을 테니까.”무서워하지 말라고?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고?박민정은 말도 안 되는 농담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 김인우는 그녀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같은 말을 했었다.“미안하지만 비켜줘요.”자신을 해치든 해치지 않든 이런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았다.그러나 김인우는 여전히 문 앞을 막고 움직이지 않았다.“약을 다 바르고 나가.”박민정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의 비뚤어진 성격이 다시 폭발할까 봐 두려워서 귀찮아도 약을 바르러 갔다.“앞으로는 차에서 뛰어 내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 위험하잖아. 다행히 지금은 가벼운 부상일 뿐이지만.”김인우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김인우의 성격이 변덕스러운 걸 오래전부터 예리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재빨리 약을 바르고 말했다.“다 발랐으니 가도 되죠?”박민정의 맑고 담담한 눈빛을 마주한 김인우는 가슴이 콕콕 찔렸다.“그냥 여기 있어. 아무 짓도 안 한다고 약속할게, 응?”그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를 썼다.박민정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졌다. 김인우가 말한 대로 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다.하지만
박민정이 회사로 복귀한 후 긴장감이 감도는 사람은 윤소현뿐만이 아니었다. 이지원 역시 초조해하고 있었다.어렵사리 다시 연예계에 복귀한 그녀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이 박민정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드러날까 두려웠다.이지원은 종종 몰래 박민정의 일거수일투족을 염탐하곤 했다.그날도 촬영을 마친 뒤 그녀의 차는 PMJ 회사 앞에 멈춰 있었다.이지원은 차 안에 앉아 박민정이 퇴근하기를 기다렸다.드디어 박민정이 회사에서 나오는 것이 보이자 이지원은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도드라진 모습으로 걸음을 옮겼다.박민정도 그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누군지 알아보기 전에 이지원은 그녀 앞까지 다가와 길을 막아섰다.“민정 씨, 드디어 돌아왔네요.”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박민정의 마음 한구석에 본능적인 반감이 피어올랐다.비록 그녀는 이지원이 저질렀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불쾌감을 느꼈다.이때 진서연이 재빠르게 박민정 앞을 막아섰다.“당신 누구에요?”이지원은 그제야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었는데 필러로 채워진 얼굴이 드러났다. 시간의 흔적과 연예계의 생존 경쟁 속에서 그녀는 온갖 방법으로 외모를 유지하려 애썼다.진서연은 그녀를 알아보자 얼굴을 찌푸렸다.“이지원 씨, 여기 왜 온 거예요? 또 우리 보스한테 해코지하려는 거 아니에요?”이지원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천한 년!'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겉으로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박민정에게 말했다.“민정 씨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상태가 어떤지 보러 온 거예요.”박민정은 냉랭하게 대꾸했다.“그렇다면 고맙네요.”그녀의 말투는 차갑고 거리감이 느껴졌다.이지원은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박민정이 아직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찾아와요. 부담 갖지 말고.”이지원은 친절한 척 덧붙였다.“우리 보스가 당신 같은 사람을 찾을 일은 없으니 그만 꺼져요!”진서연
“민정아, 엄마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지 말아줄래? 날 욕해도, 화를 내도 괜찮으니 제발 그렇게 차갑게만 하지 말아줘, 응?”정수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지만 박민정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저는 화낼 이유가 없어요.”박민정은 솔직하게 말했다.지금의 그녀는 예전과 달랐다. 과거에는 기억이 있었기에 정수미가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에도 냉대를 받을 때마다 깊이 상처받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일이 없었다.그녀는 눈앞의 정수미를 낯선 사람처럼 느꼈고 그래서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않았다.정수미는 목이 칼로 베인 듯한 고통을 느꼈다.“모두 내 잘못이야... 전부 내 잘못이야...”어떻게 해야 박민정에게 사죄하고 보상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정수미는 눈을 떨구고 등을 살짝 구부린 채 방을 떠났다.그녀가 떠난 뒤, 진서연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물었다.“보스, 대체 무슨 일이에요? 아이를 다치게 했다니, 무슨 소리죠?”박민정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진서연에게 설명했고 진서연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분노를 터뜨렸다.“윤소현이 어떻게 그런 모함을 할 수 있죠? 제 생각엔 일부러 자기 아이를 다치게 한 게 틀림없어요.”그녀는 단 한마디로 진실을 꿰뚫었지만 박민정은 쉽게 믿을 수 없었다.“설마. 그래도 자기 친딸인데.”“그 여자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진서연은 단호히 말한 뒤 박민정을 위로했다.“보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꼭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그래.”하지만 진서연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여러 차례 그녀에게 당부를 했다.박민정은 기억을 잃은 후 꽤 오랜 시간을 보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기억을 되찾으려 했지만 아직 성과는 없었다.그녀는 오늘도 진서연과 함께 회사로 출근했다.점심시간, 박민정은 모두가 쉬고 있을 때 잠깐 밖에 나가겠다며 자리를 떴다.그녀는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그동안 주
가정부가 나가고 나자 정수미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다.“어떻게 이렇게까지 악랄할 수 있지?”정수미는 깊은 후회에 사로잡혔다. 왜 하필 윤소현을 입양했을까?비서도 믿기 힘든 듯 고개를 저었다.“큰아가씨의 복수심이 너무 강해요. 자신의 딸마저 이용하다니요.”비서는 윤소현이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정수미가 박민정, 그녀의 친딸을 미워하게 만들려 한 것이다.“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정수미는 스스로 중얼거리며 비서에게 묻는 듯 자신에게 묻는 듯한 말을 했다.비서는 사적인 가정사에 대해 조언할 수 없었기에 침묵을 지켰다.오랜 고민 끝에 정수미는 윤소현의 방으로 향했다.윤소현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이의 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고열까지 나고 있는데도 이렇게 편안히 잠들 수 있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소현아!”정수미가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녀를 깨우자 윤소현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엄마, 이 시간에 무슨 일이길래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쉬셔야 할 시간 아니에요?”정수미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너랑 얘기할 게 있어서 왔다.”윤소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무슨 얘긴데 내일 하면 안 돼요?”“다혜와 민정이에 대한 얘기야.”정수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그 말을 듣자 윤소현은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엄마, 박민정한테 경고할 거죠?”흥분한 그녀의 말투에 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아니, 너한테 경고하려고 왔어.”정수미의 단호한 말에 윤소현은 멍해졌다.“그게 무슨 말이에요?”정수미는 가정부가 털어놓은 모든 진실을 이야기했고 윤소현은 머리가 텅 빈 것처럼 멍해졌다.“엄마, 그 여자의 헛소리를 믿지 마세요! 다혜의 친엄마인 제가 어떻게 제 아이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어요?”“처음엔 나도 네 말을 믿었다. 네가 민정이를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네 감정을 진정시키려고 민정이를 경찰에 넘긴 거였어. 그런데 네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구나. 정말 실망이야.”정수미는 깊이 한숨을
비서는 정수미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제 생각에 둘째 아가씨는 아이에게 그렇게 잔인한 짓을 할 사람 같지 않아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그래. 하지만 소현이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 내가 그때 민정이를 도왔다면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어떤 난리를 칠지 몰랐겠지.”정수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혜 일은 빨리 조사해 봐.”“알겠습니다.” 비서가 대답했다.정수미는 온몸에 상처투성이인 외손녀를 바라보며 다짐했다.“다혜야, 걱정하지 마. 외할머니가 꼭 널 다치게 한 사람을 찾아낼게.”그녀는 윤소현을 편드는 것도, 박민정을 믿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지금은 윤소현을 달래며 조용히 진실을 파악하려 했을 뿐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어린아이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지 밝혀내기 위해.밤이 깊었을 때, 정수미는 아이를 돌보던 가정부를 불렀다.“자, 말해 봐. 오늘 왜 거짓말을 했는지. 누가 너한테 뭔가를 줬니?”가정부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대표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저는 거짓말 안 했습니다. 정말로 사모님께서 그랬어요.”정수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아직도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거야? 병원에서 네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 민정이가 다혜를 안은 뒤로 다혜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고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대체 어떻게 그게 민정이가 했다는 걸로 바뀐 거지? 네가 직접 민정이가 아이를 해치는 걸 봤어?”가정부는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얼버무렸다.“민정 아가씨가 다혜를 때리는 걸 희미하게 본 것 같아요...”정수미는 더욱 화가 났다.“희미하게 봤다고? 그럼 왜 그 자리에서 막지 않았지?”가정부는 말을 잇지 못했다.“그, 그게 제가 혹시 잘못 본 걸까 봐...”그녀의 말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다.정수미는 확신했다. 이건 명백히 거짓말이었다.“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지금이라도 사실을 말하면 용서해 줄 테지만 계속 거짓말을 한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정수미의 위협에 가정부는 몸을
“분명히 말하지만 오늘 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이곳을 떠날 생각하지 마.”윤소현은 박민정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며 소리쳤고 박민정은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었다.“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 거예요?”“무릎 꿇고 사과해!”윤소현은 단호하게 네 글자를 뱉었다.그녀는 박민정이 기억을 잃은 틈을 타 그녀를 망신시키고 고통받게 하고 싶었다.‘무릎을 꿇으라고?’박민정은 아이를 해친 적이 없기에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그건 못 해요.”윤소현은 다시 정수미와 고영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보셨죠? 증거가 다 있는데도 저렇게 나오잖아요. 사과조차 하지 않겠다고요.”그녀는 이어 말했다.“이제 경찰서에 보내는 수밖에 없겠네요.”윤소현은 휴대폰을 꺼내 신고 전화를 걸었다.고영란과 정수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정말 박민정이 그렇게 어린아이를 해쳤다면 사과를 해야 하는 게 맞을 터였다.그러나 박민정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고 결국 경찰에 연행되었다.아이의 상처는 모두 목격자의 증언에 근거하고 있었고 박민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다른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그녀는 간단히 사건 경위를 설명한 뒤, 임시로 구금되었다.혼자 차가운 공간에 남겨진 박민정은 종종 머리가 아파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 이보다 더 끔찍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 유남준이 그녀를 보석으로 풀어주었다.“왜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어?” 유남준이 물었다.그는 본가로 돌아갔다가 박민정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하인들에게 물어본 끝에 그녀가 병원에 갔다는 사실을 알았다.이후 고영란과 연락을 취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했다.박민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당신도 내가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내가 그 아이를 해쳤다고 믿어요?”유남준은 거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누가 뭐래도 네가 했을 리 없어. 넌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야.”박민정은
박민정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좋아요, 신고해요. 경찰이 와서 모든 걸 조사하게 해요. 제가 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은 겁니다!”그녀는 나쁜 짓을 하기 않았기에 당당했다.윤소현은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려 했지만 고영란이 그녀를 막아섰다.“소현아, 분명 이건 오해가 있을 거야. 민정이가 그렇게 어린 아이를 해칠 리가 없잖니.”정수미도 고개를 끄덕였다.“맞아. 우리 모두 한 가족인데 경찰까지 부르는 건 너무하지 않니?”그러나 윤소현은 눈가가 붉어진 채 항의했다.“엄마, 지금 제 딸이 이런 상태인데도 엄마는 저를 외면하시겠다는 거예요? 우리 아이 편을 들어주실 생각은 없으세요?”박민정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그만해요. 차라리 신고해요.”지금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방법은 경찰 조사를 통해서뿐이었다.윤소현은 사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이 없었다. 아이의 일은 박민정과 무관했으며 그녀 스스로 꾸며낸 일이었기 때문이다.“민정아, 흥분하지 마. 우리 가족 일이니 우리끼리 해결해.”정수미가 그녀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윤소현은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비꼬듯 말했다.“좋아요. 우리끼리 해결하죠.”“그럼 말해봐, 박민정. 내 딸이 이렇게 됐는데 넌 어떻게 책임질 거야?”“제가 한 일이 아닌데 왜 제가 책임져야 하죠?”박민정이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되묻자 윤소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지금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야? 우리 다혜는 늘 멀쩡했어. 그런데 네가 안은 뒤로 이렇게 됐다고!”박민정은 미간을 찌푸렸다.“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적 없어요!”그녀는 어린 다혜가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걸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그런데도 윤소현은 여전히 공격적이었다.“엄마, 보셨어요? 얘는 끝까지 오리발만 내밀잖아요!”정수미는 한숨을 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유다혜는 너무 어리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누가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때 고영란이 오늘 아이를 돌본 보모를 불러왔고 보모는 떨
박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유남준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박민정은 고영란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해 윤소현이 말한 병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아이는 보이지 않았고 윤소현이 병실에서 달려나오더니 곧장 박민정에게 달려들었다.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벌어져 주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역시 피할 겨를이 없었고 결국 윤소현의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세게 내려앉았다.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증이 얼굴을 타고 번졌다. 그러나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 박민정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박민정도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고 그렇게 둘은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고영란은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했지만 도저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박민정, 네가 어떻게 다혜한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다혜는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안 됐는데!”‘뭐?’박민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아요. 전 당신 딸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우리 다혜 몸에 이렇게나 많은 상처가 났는데도 끝까지 모른 척하겠다고? 너 정말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윤소현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분노를 퍼부었고 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집중했다.고영란이 아무리 소리쳐도 윤소현은 멈추지 않았다.“소현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만둬!”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병실에 울려 퍼졌고 윤소현은 그제야 멈췄다.박민정도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정수미가 황급히 달려와 박민정의 얼굴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을 보고 안타까워했다.“민정아, 괜찮아?” 그녀가 걱정스레 물었다.하지만 윤소현은 불만을 터트렸다.“엄마, 똑같이 엄마 딸인데 우리가 싸웠으면 두 사람 다 챙겨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박민정만 신경 쓰는 거예요?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에요?”정수미는 한숨을 내쉬며 윤소현을 돌아보았다.“무슨 일인지 제대로 설명해봐. 왜 둘이
박민정은 그 아기가 윤소현의 딸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한 채 자연스럽게 다가갔다.“무슨 일이죠?”보모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경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오늘 하루 종일 울기만 하고 어떻게 달래도 소용이 없네요.”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따라온 보모에게 두 아들을 잘 돌보라고 지시한 뒤, 직접 아이를 안아 들어 달래기 시작했다.그러나 유다혜는 그녀의 품에서도 여전히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엄마가 된 경험 덕분인지 박민정은 아기를 돌보는 법을 잊었더라도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은 알 수 있었다.그녀는 먼저 보모에게 아이가 충분히 먹었는지 물었고 이어 아이의 기저귀를 확인하며 배탈이 났는지 살펴보았다.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도 아기가 계속 울자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아기를 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이렇게 계속 우는 건 뭔가 이상한 것 같아요.”보모도 동의했다.“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보모가 아기를 다시 받으려던 찰나, 멀리서 윤소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 누가 내 딸을 저 여자한테 맡기라고 했어?”윤소현은 높은 굽의 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어와 박민정의 품에서 아이를 거칠게 빼앗아 갔다. 그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보모를 질책했다.“내 딸을 당신한테 맡겼더니 이렇게밖에 돌보지 못해?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 책임인 줄 알아!”그녀는 이어 박민정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너도 아이가 있잖아. 내 아이를 왜 안고 있었던 거야?”박민정은 그 아이가 윤소현의 딸임을 알았더라면 절대 안았을 리 없었다.보모는 난처한 표정으로 해명했다.“작은 사모님, 다혜가 계속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께서 잠깐 도와주셨던 것뿐이에요. 아무런 악의도 없었습니다.”“악의가 없었다고?”윤소현은 여전히 울고 있는 딸을 보며 냉소를 지었다.“그 말이 사실이길 바랄 뿐이야.”그러다 보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작은 사모님, 아이를 병
윤소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선두에 있던 여하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이어 한 하인을 거칠게 밀어내고 안으로 들어섰다.들어가자마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박민정과 유남준 가족이 함께 웃으며 화목하게 있는 모습이었다.그 광경에 윤소현의 눈빛이 질투로 뒤덮였다. 그녀는 곧바로 고영란을 향해 차갑게 비아냥댔다.“어머니, 저랑 남우 씨가 비록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저도 유씨 가문에서 떳떳하게 맞아들인 며느리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를 모른 척하시겠다는 거예요?”고영란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윤소현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유남우 역시 큰 잘못을 저질렀고 이 모든 상황이 그녀에겐 큰 실수로 느껴졌다.“소현아, 내가 그런 말을 한 건 아니야. 어서 남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렴. 여긴... 당분간 환영받지 못할 것 같구나.”윤소현은 이 말을 듣고도 뻔뻔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왜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쩌시려고요? 혹시 당신 아들 유남우가 저지른 일들을 제가 다 까발릴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고영란도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윤소현이 마지막 퇴로조차 거부하자 냉소를 띠며 대꾸했다.“우리 아들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한번 말해 보렴.”윤소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뭘 말하냐고요? 당신 아들이 자기 형의 여자를 탐냈다는 거. 이게 바로 당신들이 자랑하는 유씨 집안의 가풍인가요?”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에 있던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민정은 옆에서 두 아이를 달래며 이 상황에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그러나 유남준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다들 뭘 보고 있어? 당장 저 여자를 끌어내!”윤소현은 유남준이 자신을 쫓아내려 하자 더 큰 소리로 외쳤다.“유남준 씨, 이 말을 듣기 싫은 거죠? 뭐, 당연하죠. 형의 여자를 뺏어갔다니, 저라도 그런 꼴은 못 참겠어요!”만약 그녀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벌써 그녀에게 직접 손을 댔을 것이다.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