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인은 정수미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제가 은인이라고요?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한수민의 간병인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정씨 가문 사람을 알 리도 없었고 은인은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말이다.“얼마 전에 보육원에 가지 않았어요? 20년 전 어느 큰 눈이 내리던 날에 여자아이를 입양했다고 보육원 원장님께 말했다면서요?”덧붙여 설명한 정수미의 말을 듣고서 간병인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정수미는 기대에 잔뜩 찬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았다.주위를 훑어보더니 정수미는 시선은 어린 남자아이를 안고 있는 20살 남짓한 여자한테 떨어졌다.월등한 외모는 아니지만 청순하고 착안 이미지였다.마찬가지로 정수미의 말을 듣게 된 함미현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엄마가 20년 전에 여자아이를 입양했다고? 설마 나야?”간병인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눈물을 머금고 함미현을 향해 걸어가면서 정수미가 입을 열었다.“미현아...”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정수미는 겨우 소리를 냈다.“우리 딸 맞아?”눈시울은 금세 붉어졌고 정수미는 순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몰랐다.원룸 크기의 집을 바라보면서 저렴한 옷을 입고 있는 함미현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정수미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10년 넘게 차고 다니던 천연 에메랄드 팔찌를 함미현에게 해주었다.비록 무슨 팔찌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눈에 봐도 값이 범상치 않을 정도로 예뻤다.“저한테 왜 이런걸...”함미현은 아들을 남편에게 건네고 거절했다.자기의 뜻을 거절하고 있는 함미현을 바라보면서 정수미는 순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랐다.그때 옆에 있던 비서가 말했다.“아가씨, 얼른 받으세요. 1억 달러가 되는 팔찌예요.”‘1억 달러? 팔찌 하나에?’함미현은 다소 믿어지지 않았지만, 간병인은 알고 있었다.정수미가 절대 얼렁뚱땅 찾아온 게 아니라고 말이다.“미현아, 실은 그동안 엄마가 알려주지 않은 게 있어. 네가 남들한테 업신여길까 봐 숨겨둔 사실인데, 이렇게 친엄마가
함미현 남편은 자기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부잣집 딸이 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어머님, 이게 다 진짜예요?”믿어지지 않는 듯 거듭 확인하고 있는 함미현 남편이다.얼마 전까지만 해도 간병인한테서 함미현의 출생 증명서를 봤었으니 말이다.그런데 갑자기 불과 며칠 사이에 입양한 아이가 되다니...하물며 아무런 징조도 없이 바로 들이닥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더 묻지 말게. 이렇게 된 건 미현이도 자네한테도 다 좋은 일이니.”사위는 순간 모든 걸 알아차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그들과 같은 일반 가족이나 일반 가족보다 더 어려운 사정에 이러한 일이 생겼다는 건 ‘경사’나 다름없다.정수미는 함미현과 손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기쁨을 숨길 수가 없었다.정수미의‘친딸’이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서 윤소현은 미리 거실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정수미는 윤소현을 보자마자 윤소현이 저지른 일이 생각나 무시해버렸다.일어나라는 소리도 없이 바로 지나가려고 했다.오히려 함미현이 정수미의 옷깃을 잡아당기면서 의혹이 가득한 눈빛으로 윤소현을 바라보면서 물었다.“왜 이러고 있는 거예요?”“너희 가족 그렇게 가두어 놓은 사람이 바로 쟤야.”함미현의 질문에 대답하고 난 정수미는 윤소현을 바라보았다.“임신한 몸으로 그만 꿇어. 사고라도 생기게 되면 그땐 내가 무슨 짓을 할지도 몰라.”차갑기 그지없는 그 말을 듣고서 함미현에 대한 윤소현의 ‘한’은 더 깊어졌다.‘친딸이 오자마자 찬밥 신세네...’“엄마, 제가 왜 그랬는지 좀 들어주시면 안 돼요?”윤소현은 무척이나 억울한 모습으로 말했다.“뭐?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거야? 말이 돼?”입술을 사리물고서 윤소현은 그럴듯하게 연기하기 시작했다.“별장으로 데리고 간 건 친자확인 검사가 나오는 대로 엄마한테 서프라이즈를 해주려고 한 거였어요. 직접 별장으로 모시고 가려고 했다고요. 두 분 상봉할 수 있게끔 말이에요.”‘서프라이즈?’정수미는 사탕 하나에 넘어가는 세 살짜리 아이가 아니다.상업
“와, 엄마 여기 엄청 넓어.”함미현이 미처 반응하기 전에 아들이 먼저 손을 놓고 뛰어 들어갔다.“엄마, 침대도 엄청나게 크고 푹신푹신해.”“이건 뭐야? 반짝반짝해.”함미현은 아들이 여기 보고 저기 보고 흥분해 마지 못한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좋아해 주는 손자의 모습에 정수미는 형언할 수 없이 기뻤다.“우리 강아지,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외할머니한테 얼마든지 얘기만 해. 외할머니가 다 사줄게.”정수미는 말하면서 비서를 바라보았다.“아이가 좋아하는 거 다 적어놓아.”“좋아요. 저 장난감 차도 갖고 싶고 비행기도 갖고 싶고...”흥분해 마지 못한 모습으로 아이는 끊임없이 말했다.비록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자기 외할머니라고 하는 사실이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돈도 많고 시원시원한 새로운 외할머니가 좋았다.함미현은 흥분한 아들을 잡아당기면서 이내 뻘쭘한 얼굴로 정수미에게 말했다.“더는 꾸밀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이대로도 좋아요.”그렇다, 함미현은 단 한 번도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산 적이 없다.아무런 요구도 없다는 함미현의 말을 듣게 된 정수미는 더 많은 걸 해주고 싶었다.자라온 환경이 입에 풀칠할 정도니 이러한 성격을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미현아, 앞으로 엄마한테 이러지 않아 돼. 네가 밤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하더라도 엄마는 꼭 따주고 말 거야.”이러한 말을 듣게 된 함미현은 속으로 정수미의 친딸이 유난히 부러웠다.“그럼, 저 다른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함미현은 아들을 잡아당기면서 말했다.“얼마든지.”“우리 동하가 어릴 적부터 당뇨병에 앓고 있는데, 좀 치료해줄 만한 의사 없을까요?”함미현은 자기 친엄마인 염혜란이 거짓말을 한 이유가 바로 동하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수미를 엄마로 인정하기만 하면 동하 역시 살 수 있게 되니 말이다.함미현의 말을 듣고 난 정수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자기 손자가 어린 나이에 심한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이윽고 즉시 비서에게 지시를 내렸다.
비서의 말에 윤소현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뭐라고 나왔어?”“혈연관계 아닙니다.”윤소현은 마침내 한시름을 놓게 되었다.‘앗싸! 함미현 우리 엄마 딸 아니야!’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윤소현은 바로 사실을 정수미에게 알리려고 했으나 얼마 전 정수미가 했었던 경고가 생각났다.“함미현이 친딸이 아니라면, 그냥 이번 기회에 함미현한테 잘해주면서 나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변화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함미현이 정수미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들통나게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따라서 서두를 것 없이 일단 함미현에게 맞춰주면서 정수미에게 ‘착한 언니’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했다.나중에 정수미가 사실을 알고 나면 자기한테 더욱더 죄책감을 느끼게끔 말이다.그렇게 생각하면서 윤소현은 함미현의 방으로 들어갔다.함미현은 순간 신경이 곤두서면서 경계하기 시작했다.방안에는 집사도 있었는데, 집사 역시 윤소현을 보고서 경계 모드로 변했다.정수미가 가기 전에 집사에서 함미현 모자를 잘 챙겨주는 것 외에 윤소현이 와서 무슨 일을 저지르게 되면 바로 알리라고 했었다. 집사는 함미현이야말로 정수미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함미현에 대한 존경심이 더 기울었다.“아가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대표님께서 둘째 아가씨와 도련님께서 쉬셔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별일 없으시면 그만 나가주시죠.”집사가 말했다.이 집사를 윤소현도 잘 알고 있다.정수미가 서울에서 모셔온 집사라는 것을.함미현 모자 전담 마크 집사로 일하게끔 둘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윤소현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정수미가 사실을 알게 되면 후회하지 않을까 하면서 말이다.“동생 보러 온 것뿐이에요. 괴롭히는 일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윤소현은 말을 마치고서 다소 어색해하는 함미현을 바라보았다.이윽고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건네주었다.“미현아, 우리 처음으로 만나는 건데 내가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 이건 엄마가 나 어릴 적에 준 건
자기 집안일에 마음을 써주는 박민정을 보고서 간병인은 점점 더 죄책감이 깊어졌다.박민정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부풀어 올라서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더는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듣게 된 박민정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거죠?”순간 간병인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앞으로 다시는 찾아와서 귀찮게 하지 않을 거예요. 민정 씨,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제가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할게요.”고마운 마음도 있고 사죄하는 마음도 있고.박민정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간병인이다.왜냐하면, 박민정이야말로 정수미의 친딸일 수 있기 때문이다.자기의 욕심으로 두 모녀의 상봉을 막고 있으니 죄책감에 시달리기만도 하다.간병인에게 무엇인가 속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알았으면 하지 않은 것을 느끼고 박민정은 더는 묻지 않았다.“그럴 필요 없어요. 그럼, 건강하세요.”박민정은 전화를 끊었다.끊긴 전화를 바라보면서 간병인은 혼자서 중얼거렸다.“어찌 됐든 더 이상 민정 씨한테 죄지으면 안 돼. 우리 동하 치료 다 끝나면 그때 민정 씨한테 알려주자.”한편, 박민정은 계속 업무에 집중하고 있었다.간병인을 돕겠다고 했을 때부터 박민정은 그에 마땅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었다.도와주는 것과 이용하는 건 서로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박민정이다.“팀장님, 여기 회수 비용이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팀원이 노크하고 들어오면서 말했다.박민정은 바로 정신을 차리고 확인해 보았는데, 약속했던 가격과 차이가 컸다.“어떻게 된 일이죠?”“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곧 월말인데, 근원을 찾아낼 수 없으면 우리 팀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팀원이 한숨을 내쉬었다.“일단 가서 일 봐요. 이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요.”박민정이 말했다.회수 비용과 계약금액이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누군가가 장난을 했다는 것이다.현재 마케팅 5팀의 실적으로는 이번 달 1위
추경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확신을 해주었다.“네, 일반인이 아니라 지적 장애 환자처럼 있어요.”실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 채 최현아는 표정과 달리 안타까운 척을 했다.“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예요?”“무슨 수술을 했다고 했는데, 그 수술이 잘못되면서 머리가 완전히 나빠졌다고 했어요.”본래 부잣집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부귀영화나 누릴 줄 알았는데, 유남준에게 목 졸라서 죽을 뻔한 뒤로 그 헛된 욕망이 사라져버렸다.그리고 추경은은 지금 유남준에 대한 마음이 조금도 없다.더럽고 역겨울 뿐만 아니라 지적 장애까지 있으므로 서 있는 것만으로 아우라가 넘치던 그때 그 유남준이 아니니 말이다.“세상에 이런 일이!”말로는 무척이나 안쓰러워하고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지사로 파견되어 잡일이나 하는 유성혁을 불러올 생각이었다.추경은은 최현아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연히 모른다.“올케언니, 저 이제 어떻게 해요? 저 저런 병신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최현아가 추경은이 누구랑 결혼하든 말든 전혀 알고 싶지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그래도 결혼하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제 와서 거절하는 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저 대신 할아버님께 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아직 이렇게 젊고 예쁜데 저런 놈이랑 결혼해서 인생 망치고 싶지 않아요.”이럴 줄 알았더라면 절대 유명훈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인데 말이다.“미안해요. 내가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직접 집안 어른들께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럼, 먼저 끊을게요.”최현아는 말을 마치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추경은 그제야 최현아가 자기를 도와줄 마음조차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렇다고 한들 지금 고영란이랑 유명훈에게 후회하고 있다고 결혼하지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가만히 계속 있기로 했다.그러나 유남준이 깨어나기만 하면 유남준의 주위에 있던 사람 중 가장 먼저 봉변은 당하는 사람은 항상 추경은이었다.도우미들 역시 그러한 현상이 이상하기만 했다.눈
박민정에게 모든 걸 쏟아부을 만큼 잘해주고 있는 유남우에 관해서 얘기가 나오자 윤소현은 바로 안색이 어두워졌다.“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우리 남우 씨가 그랬는데, 박민정 저렇게 회사에 남겨둔 것도 모두 어머님 결정이라고 했었어요. 어머님의 뜻을 거역하기 힘들다고 가만히 있는 거고요.”말을 그렇게 하고 있지만, 윤소현 역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최현아는 개의치 않아 하면서 웃었다.“그런 거라면 다행이고.”이윽고 최현아는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윤소현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이제 겨우 함미현 일로부터 평정심을 되찾은 윤소현은 또다시 부글부글 타오르기 시작했다.반드시 회사에서 박민정을 쫓아버릴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아니면 최현아는 정말로 유남우의 마음에 자기가 아니라 박민정의 비중이 더 크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라면서 이를 악물었다.가만히 생각하더니 윤소현은 곧 해결방법을 찾아냈다.바로 정씨 가문과 유씨 가문의 합작으로 손을 쓰는 것이었다.두 가문의 합작은 여러 대주주와 연관되어 있고 호산 그룹과 유남우의 미래에도 연관되어 있다.만약 박민정이 그 합작에서 실수라도 하게 된다면 유남우는 박민정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다.그렇게 어느 정도 계획을 세우고 나서 윤소현은 박민정 사무실로 찾아왔다.“시작하자.”박민정은 윤소현이 또 시비를 걸려고 온 줄 알았으나 오늘 이상할 정도로 인수인계가 잘 되었다.거의 그 어떠한 파동도 없이 말이다.퇴근할 때 즈음, 거의 8할 정도의 인수인계를 끝 맺혔다.윤소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남은 건 내일 계속하자. 가능한 한 빠르게 합작하게끔 하고. 서로 시간 낭비도 하지 말고.”“네.”박민정은 뭐라고 더 하지 않았지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윤소현이 가고 나서 박민정은 두 가문 사이의 합작 계약서를 비롯한 모든 자료를 검사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일하다 보니 그때 유남준이 가르쳐준 적이 헛것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만약 유남준의 가르침이 없었더라면 박민정은 호산 그룹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대표님 지금 어때요? 어떤 상황이죠?”서다희가 계속 물었다.박민정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서 비서님, 제가 드려야 하는 질문이 아닌가요?”“쓸데없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요? 저랑 남준 씨 이혼했으니 참견하지 말라면서요.”박민정은 계속 덧붙였다.서다희가 그렇게 심한 말을 한 것도 모두 유남준의 ‘지시’의 따른 것이었다.일단 바보가 되면 박민정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다고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고 신신당부했었으니 말이다.그러나 최근 들어 서다희는 유남준이 결코 잘 지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조사에 따르면 유남준은 유남우에게 갇혀 행동도 제한받고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다고 했었다.서다희는 그런 유남준을 구해내고 싶었지만, 저택의 보안 시스템이 너무 삼엄했다.박민정에 대한 유남우의 마음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서다희 역시 잘 알고 있기에 도움을 청하려고 이렇게 연락한 길이었다.“사모님, 전에 대표님께서 왜 그렇게 애를 쓰셨는지 대충 알고 계시죠?”“실은 전에 검사받으면서 머릿속에 유리 파편이 시각 신경을 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그 유리 파편만 제거하면 시력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기억을 잃을 일도 없고 위험한 상황에 놓일 일도 없을 것이라고 했었어요.”서다희는 천천히 설명했다.“대표님께서 수술 전에 미리 이혼한 이유도 바로 수술에 실패할까 봐 그런 거였어요.”“그동안 살아오면서 미움을 산 사람이 한 둘이가 아니라면서 자기한테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 사람들이 사모님과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도 있다고 했었어요.”“만약 그 전에 이혼해서 아이들 양육권까지 사모님에게 주면 유씨 가문 사람들도 한을 품은 사람들도 사모님과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을 수 있다고 했었어요.”“그리고 저랑 인우 도련님께 사모님과 아이들을 지키라고 거듭 당부하셨고요.”서다희는 그전까지 유남준의 요구에 따라서 일하려고 했었다.하지만 지금 서다희는 자기가 지금껏 따라온 유남준이 조금이라도 저 편안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