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했어. 아무나 주는 선물을 함부로 받으면 안 돼, 덫에 걸리기 쉬우니깐, 알았지?”조하랑은 박예찬을 칭찬했다.“알았어, 이모.”박예찬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오랫동안 옆에서 형의 일거일동을 쭉 살펴온 박윤우는 탄복했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어쩜 낯빛 하나 안 변할 수가 있지? 어쩜 형이 자기를 늘 이렇게 속여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어서 빨리들 씻고 자야지?”“알았어, 이모.”둘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아이들을 재운 후, 세 여자는 소파에 앉아서 이것저것 먹으면서 수다를 떨었다.박민정이 제일 먼저 피곤하다면서 방으로 들어갔다.조하랑은 참지 못한 채 민수아한테 물었다.“수아야, 넌 다희씨와 같이 있을 때 감각이 어땠어?”기억 속에 서다희는 말수도 적고 성격도 도도하여 여자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차가운 남자다.“괜찮아, 왜?”“그럼 요즘 유남준에 대한 아무런 얘기도 못 들었어? 왜 갑자기 민정이랑 이혼 못 해서 안달이 났던 건지 통 이해가 안 돼서.”조하랑은 사탐 하는 어조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사실, 민수아도 이 일이 무척 궁금했었댔다. 하지만 최근에 서다희는 유남준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사실은 나도 다희 씨가 일부러 뭔가를 숨기려 하는 것 같았어. 근데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거든.”민수아가 갖은 수단을 부렸지만, 서다희는 입을 꼭 다물고 말해주지 않았다.“그렇구나.”조하랑이 소파에 기댄 채 수심에 잠겼다.민수아는 이튿날에 출근해야 하기에 두 사람은 금방 잠자러 들어갔다.조용히 잠자리에 누운 조하랑은 옆에 누운 박민정이 자지 않고 핸드폰만 만지는 것을 보고 말했다.“피곤하다면서, 왜 아직 안 자?”박민정은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잠이 잘 안 와서 좀 봤어.”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꼭 잡으면서 말했다.“넌 임신부야, 수면시간은 꼭 지켜야 해, 그만 보고 자?”“알았어.”박민정은 방금 핸드폰으로 한수민이 돌아가는데 관한 기사를 보고 나서 잠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보도에는 한
조하랑은 성격이 데면데면한 축이다. 박예찬은 오늘 동생이랑 똑같은 옷을 입었다.“윤우야, 잠시 후 연기 잘할 수 있지?”“형, 걱정하지 마.”여전히 애티가 풀풀 나는 말투로 대답했다.집에 남은 사람이 조하랑만 아니어도 이런 하책은 쓰지 않을 거다. 한데 동생이 자기와 너무나도 달라서 이럴 수밖에 없었다.“간다.”박윤우가 박예찬의 팔을 붙잡으면서 말했다.“형, 돌아와서 무슨 일인지 꼭 얘기해줘.”찌질남아빠한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너무나 궁금했다.“알았어, 걱정하지 마.”박예찬은 동생의 팔을 밀어낸 후 뒷문으로 빠져나갔다.그가 나간 지 얼마 안 되어 조하랑은 방문 앞에서 노크하면서 말했다.“얘들아, 나와서 과일 먹자.”박윤우는 아주 자연스럽게 방문을 열고 나가면서 말했다.“이모, 윤우는 잠자고 있으니 내버려 둬요. 내가 먹을게요.”조하랑은 약간 놀라워했지만, 박윤우가 형으로 가장했는지는 몰랐다.“윤우는 괜찮은 거지? 왜 이 시간에 잠자?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박윤우는 포크로 과일을 찍어서 입으로 넣으면서 잘래잘래 머리를 흔들었다.“필요 없어요. 동생의 병은 원래 이래요. 습관적으로 잠자요.”“그렇구나.”조하랑은 종래로 박예찬을 어린애로 본 적이 없었는지라 의심하지 않았지만, 볼이 미어지게 먹고 있는 애를 보면서 물었다.“예찬아, 예전에 너 과일 싫어하지 않았나?”박윤우는 흠칫하며 먹던 것을 내려놓았다.“배불러. 방으로 돌아가서 놀래, 부르지 마.”시간이 길면 들통날까 봐 방 안에 숨어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알았어, 녀석.”조하랑은 못 이기는 척하면서 웃었다.박예찬은 별장 안팎에 설치된 CCTV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별장을 빠져나와 길옆에 서서 택시를 불러 탔다.“아저씨, 단양길에 있는 이곳으로 데려다주세요.”어제 카메라에 찍힌 길거리 화면을 기사한테 보여주었다.몇 살 안 돼 보이는 어린이를 본 기사는 의아스러웠다.“아가야, 엄마, 아빠는?”“아빠가 그곳에서 일해요. 지금 아빠
박예찬은 택시에서 내려 즉시 김인우를 추적한 위치에 따라 사립병원을 찾기 시작했다.드디어 눈에 잘 띄지 않는 병원 대문 앞에서 여러 명의 변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박예찬은 조심스럽게 대문으로 다가갔다. 워낙 체격이 작은 어린애라서 가림물을 쉽게 찾아 끝내 대문 근처까지 접근했다.대문 앞에는 가림물이 없었다. 그리고 뒷문도 어딘지 모른다. 어떻게 들어가야 할지 뾰족한 수가 안 생겼다. 박예찬은 큰 나무 뒤에 숨어서 김인우한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때마침, 두 의사가 병원으로 들어갔다.딴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 박예찬은 두 의사의 뒤를 따라 들어가려고 시도했다.과연, 경호원들이 쫓아와서 앞길을 막았다.“얘! 저리 가서 놀아.”그중 무뚝뚝하게 생긴 경호원이 막아 나섰다.평범한 애들이라면 벌써 무서워서 울음보를 터뜨렸을 것이다.근데, 박예찬은 아주 태연하게 안을 가리키면서 말했다.“우리 아빠는 이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 선생님이에요. 아빠가 나더러 오라고 했어요.”이 도발적인 상황에 경호원은 잠깐 망설이었다. 이 병원 직원들은 아직도 우에서 내린 명령을 받지 못해 애를 여기까지 데려왔나 싶어서 확인 전화를 걸려는 참이었다.“아!”갑자기 앞에 있던 애가 배를 그러안고 처참한 신음을 냈다.“왜 그래?”경호원이 급히 다가가서 물었다.“제 배가 너무 아파요… 똥 마려워요. 병원 안에 있는 화장실에 가서 똥 싸야겠어요. 전에 자주 왔댔어요… 나와서 아저씨랑 다시 얘기해요.”말도 끝내기 전에 박예찬은 안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어린애가 거짓말을 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한 경호원은 행여나 해서 뒤쫓아 갔다.화장실의 표식을 본 박예찬은 재빨리 뛰어갔다.경호원은 밖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밖으로 데리고 나갈 예산이었다.힘들게 병원까지 들어왔는데 순순히 나갈 수는 없었다.박예찬은 화장실 안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이때, 두 사람이 들어와서 작은 소리로 얘기를 나누
“아까부터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리던데, 정숙해 주시기 바랍니다.”간호사가 다가와서 말했다.그 말에 박예찬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벨 소리가 울리지 않자, 간호사는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박예찬은 본래 3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지만, 위로 올라가는 모든 통로가 봉쇄되어 있었다.박예찬은 고사하고 파리 한 마리도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다.하는 수 없이 2층의 어느 한구석에 자리 잡고 앉아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호산 그룹, 마케팅 부서.오늘 왠지 모르게 일하는 내내 마음이 불안한 박민정이다.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긴 하지만, 정확히 어떠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싱숭생숭하기만 했다.한수민의 부고 소식을 접하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정도는 아니었으니 말이다.“팀장님, 윤소현 씨께서 또 부르십니다.”노크하고 들어온 팀원이 박민정에게 말했다.박민정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면서 물었다.“지금 어디에 있는데요?”“바로 옆 사무실에 계십니다.”“네, 지금 바로 갈 테니 그만 가서 업무 보세요.”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박민정은 눈앞이 흐려지면서 약간 휘청거렸다.바로 사무실 테이블을 짚긴 했으나 불안감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겨우 정신을 부여잡은 박민정은 팀원에게 손을 흔들면서 괜찮다고 표시했다.“나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이윽고 천천히 걸음을 내디디며 사무실을 나왔다.옆 사무실 안에는 윤소현, 최현아 그리고 추경은이 한창 웃음 보따리를 풀고 있었다.세 사람은 박민정을 보게 된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민정 씨, 오라고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내로 올 생각 없었죠?”윤소현이 먼저 비아냥거리면서 운을 떼기 시작했다.그러자 옆에 있던 최현아가 말리는 척하면서 맞장구를 쳤다.“엄마를 잃은 사람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동서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줘.”“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요.”윤소현은 한 손으로 턱을 괴면서 잔뜩 비꼬는 모습으로 덧붙였다.“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
단양길 개인 병원.구석에서 몸을 숨긴 채 이곳을 지키고 있던 박예찬.시간은 속절없이 흐르고 있으나 위층에서 진행하고 있는 수술은 끝나지 않았다.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의사들은 그마저 반납해 버렸다.박예찬은 박윤우의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어떻게 됐어?][뭔가 좀 알아내긴 했어. 근데 좀 더 지켜봐야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박예찬이 바로 답장을 보냈다.답장을 보내자마자 꽁꽁 봉쇄해 놓았던 위층의 문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의사 가운을 입은 의료진들이 계단을 타고 우르르 내려오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김인우도 있었다.잔뜩 엄숙한 얼굴로 김인우가 입을 열었다.“다들 수고 많았어요. 주문해 놓았으니 얼른 식사부터 하시죠.”“네, 잘 먹겠습니다.”박예찬은 의료진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는데, 그중 연세가 좀 있어 보이는 몇몇은 확실히 의료계에서 유명한 의사였다.그중 박예찬이 알고 있는 신경과 전문의도 있었다.순간 박예찬은 모든 퍼즐이 맞춰졌고 ‘답’을 얻어낼 수 있었다.수술받은 사람은 바로 쓰레기 아빠 유남준이라는 것을.“근데 왜 엄마한테 직접 말씀드리지 않고 이혼하려고 한 걸까? 굳이 왜?”유남준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좀 바뀌게 되는 순간이었다.김인우 일행이 가고 나서도 박예찬은 3층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3층 문이 곧바로 닫혔을뿐더러 아직도 경호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박예찬은 더는 병원에 머물지 않고 점심 먹으러 나서는 간호사들을 따라서 몰래 나왔다.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박예찬.때마침 박윤우도 조하랑에게 들통나기 일보 직전이었다.“예찬이 일어날 때 되지 않았어? 왜 못 나오게 하는 거야?”“비켜 봐봐. 들어가 봐야겠어. 무슨 일이라도 난 거 아니야?”조하랑은 박윤우의 방어를 뚫고 박예찬의 방으로 들어갔다.문이 열리는 순간 박윤우는 모든 게 들통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박예찬이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이불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이모, 나 괜찮아.”무탈해 보이는 박예찬을 확인하는 순
박예찬은 마냥 의문이 들기만 했다.“익숙한 회사라고? 그럴 리가... 혹시 이 회사 본 적이 있어?”박윤우는 자기 노트북을 펼치고서 IM 그룹의 외부 사진을 자세히 훑어보았다.“쓰레기 아빠 회사인 것 같아.”그 말에 박예찬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말도 안 돼!’IM 그룹은 진주시뿐만 아니라 국내 곳곳에서 이름만으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존재이니 말이다.하물며 앞이 보이지도 않은 유남준인데, 회사를 차리다니 놀라울 따름인 일이다.“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박예찬이 물었다.“그럴 리 없어. 내가 형만큼 문자에 대한 기억력은 강하지 않지만, 그림에는 꽤 익숙하거든.”박윤우는 어느 한 건물 이미지를 가리키면서 덧붙였다.“쓰레기 아빠 회사에 간 적이 몇 번 있는데, 매번 여기로 들어갔었어.”박예찬은 박윤우가 가리키고 있는 건물을 보았는데, 그곳은 IM 그룹에 속하지 않은 곳이었다.따라서 모든 게 공교로운 일이라면서 마침 잇닿아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다.“여긴 IM 그룹 영역이 아니야. 쓰레기 아빠 회사 규모도 얼마 되지 않을 거야.”박예찬의 말을 듣고서 박윤우는 더는 따지지 않고 그의 생각을 인정했다....호산 그룹.윤소현 일행은 박민정을 괴롭히려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하지만 박민정은 앞으로 며칠 동안의 업무를 모두 마치고 가버렸다.“그냥 이렇게 간 거야?”화가 치밀어 올라 펄쩍펄쩍 뛰고 있는 윤소현이다.이때 마케팅 5팀의 팀원이 다가와서 말했다.“무슨 문제라도 있으시면 직접 저희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팀장님께서 가시기 전에 저희한테 당부하셨습니다. 팀원으로서 저희도 팀장님 못지않게 프로젝트에 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윤소현은 모든 팀원을 흘겨보고 난 뒤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이윽고 바로 위층에 있는 대표이사실로 올라갔다.“남우 씨는 어디에 있어?”유남우는 대표이사실에 없었다.“대표님께서 요즘 바쁘십니다.”유남우 비서의 대답에 윤소현은 의혹만 들었다.‘뭐가 바쁘다는 거?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부랴부랴 들어온 윤소현을 보고서 정수미는 당황했다.서두도 없이 바로 친딸에 관해 묻자 그 역시 약간 언짢았다.“누구한테 들은 거야?”정수미는 아직 이에 대해 윤소현에게 알린 적이 없다.이성을 부여잡은 윤소현은 그제야 약간 뻘쭘하기 시작했으나 바로 기특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다름이 아니라 저 역시 동생에 관해서 알아낸 게 있어서 그래요.”“뭐라고?”정수미는 흥분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뭘 알아냈는데?”“동생에 관해서 알고 난 뒤로 저도 한번 알아봤는데, 한수민 씨 간병인의 딸이 바로 제 동생이었어요.”윤소현은 정수미가 이미 알아낸 내용을 다시 한번 말했다.그 말을 듣고 난 정수미는 그리 흥분하지 않았다.“나도 이제 알게 됐어.”“네?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아직 모르시는 줄 알고 급히 달려온 건데...”그 모습을 보고서 정수미는 자기가 윤소현을 오해했다고 착각하게 되었다.“소현아, 힘써줘서 고마워.”“그리고 미리 하는 말인데, 엄마가 설령 딸을 찾는다고 하더라도 절대 너에 대한 사랑은 줄지 않을 것이니 절대 걱정하지 마.”윤소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 연기했다.“알고 있어요. 엄마야말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동생이랑 서로 챙겨주면서 꼭 잘 지낼 거예요.”잘 지내기는커녕 정수미의 친딸이 바로 죽었으면 하는 윤소현이다.“그래.”정수미는 친딸을 찾아서 그동안 못 해준 것을 모두 해주고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뿐이다.정씨 가문의 재산을 모두 친딸에게 주려는 마음도 없었다.왜냐하면, 비서가 준 자료에 따르면 지금 친딸의 교육 배경으로는 정씨 가문을 관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윤소현의 마음이 결코 그리 순수하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이야말로 회사를 관리할 수 있고 절대 손해를 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참, 소현아, 한수민 부고 소식 듣지 않았어? 인사는 하고 왔어?”정수미는 매정한 사람이 아니다.어찌 됐든 윤소현의 친엄마는 한수민이고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끊었다
“어떻게든 엄마보다 먼저 찾아야 할 거야. 찾고 나서 바로 머리카락이든 뭐든 유전자 검사할 것들을 가지고 와.”윤소현은 가장 먼저 친자확인 검사부터 할 생각이다.만약 함미현이 정수미의 친딸만 아니라면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가니 말이다.하지만 만약 친자로 드러난다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네.”비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모든 걸 당부하고 난 뒤 윤소현은 그제야 전화를 끊고 계속 쉬기 시작했다....박민정은 퇴근하고 나서 직접 운전해서 돌아갔다.두원 별장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박민호가 말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장례식장은 지금 한창 한수민의 장례로 바삐 돌고 있었다.박민정은 밖에 서서 한수민의 영정 사진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나서야 다시 두원 별장으로 향했다.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조하랑이 덥석 안기면서 말했다.“오늘 어땠어?”“괜찮았어. 며칠 동안의 업무를 앞당겨서 완성했거든. 앞으로 집에만 있고 어디에도 가지 않을 거야.”“그럼 됐어. 그동안 집에서 케이크도 만들고 밀린 드라마도 보고 재미있게 놀자.”조하랑이 흥분해 마지 못하면서 말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두 아이도 드디어 침실에서 나왔다.“엄마가 오니 바로 나오네? 종일 방안에만 있더니! 방안에서 뭘 했는지 한 번도 나오지 않았었어.”조하랑이 박민정에게 고자질했다.그 말을 듣고서 박예찬이 약간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이모, 설마 같이 드라마를 봤으면 했던 건 아니지? 우리 유치원생인데?”순간 조하랑은 말 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역시나 보통 녀석이 아니야.’박민정은 티격태격하는 그들의 모습에 오래간만에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알았어! 애들은 애들끼리 어른은 어른끼리 놀게.”박예찬과 박윤우는 그제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조하랑은 박민정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았다.“얼른 드라마나 보자. 수아 오면 그때 저녁 먹자.”“그래.”시끌벅적한 것이 역시나 집안이 따뜻했다.박민정과 조하랑은 그렇게 드라마를 보고 민수아가 오고 나서 여자
조하랑은 요즘 집에서 태교에만 전념하고 있었다.그녀는 요 며칠 김인우가 어쩐 일인지 늦게야 귀가하는 게 수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그가 어디를 다녀오는 건지 궁금해져 하녀에게 슬쩍 물었지만 하녀는 말끝을 흐릴 뿐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그걸 본 김훈은 손자를 거론하며 말했다.“하랑아, 인우는 네 남편이다.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넘어갈 거냐? 궁금하면 직접 전화해서 확인해. 딱 잡아봐야 정신 차리지.”그리고는 단단히 이죽였다.“만약 귀찮다느니, 피하려 든다느니 하면 내게 말해. 그놈 등짝 몇 대는 내가 책임진다.”조하랑은 원래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거나 집착하듯 물어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임신한 이후로는 자꾸만 불안해졌다.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그가 밖에서 사고를 당하진 않을까, 예상치 못한 위험에 휘말리진 않을까 하고.아무래도 몸 안에 김인우의 피가 흐르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걱정도 따라온 모양이었다.“...알겠어요.”조하랑은 김훈이 자신 편을 들어준다는 사실에 조금 안심한 듯 더는 망설이지 않고 김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김인우는 아직 클럽을 떠나지도 않은 상태였다.“하랑 씨, 무슨 일이에요?”전화가 오자 그는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다정하게 받았다.“지금 어디예요?”조하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김인우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가 괜한 오해를 할까 싶어 거짓말을 꺼냈다.“아, 지금? 돌아가는 길이죠.”돌아가는 길이라고?그런데 조하랑의 귀에는 전화기 너머로 분명 남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누가 들어도 외부 소음이 아니라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였다.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정말이에요?”“당연하죠. 내가 왜 하랑 씨한테 거짓말을 하겠어요?”김인우는 그녀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필 그때, 뒤편에서 이지원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오빠,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오빠?그 말을 듣자마자 김인우는 재빨리 경호원에게 시
바로 그때였다.차가운 눈빛 하나가 이지원을 향해 날카롭게 꽂혔다.이지원도 그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그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짙은 먹빛처럼 어두운 김인우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오늘 김인우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 바이어 몇 명을 데리고 식사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지원의 처참한 몰골이었다.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냉담했다.하지만 이지원은 그 눈빛마저도 한 줄기 희망처럼 여긴 듯 허겁지겁 바닥에서 일어나 울먹이며 소리쳤다.“인우 오빠! 오빠!”그녀는 그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김인우의 곁을 지키던 경호원들이 즉시 그녀를 막아섰다.이지원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쳤다.“오빠, 제발... 날 좀 살려줘요. 나 좀 살려줘...”김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이때 곁에 있던 바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사님, 혹시 아는 분입니까?”김인우는 천천히 시선을 거두며 냉정히 답했다.“제가 어떻게 저런 여자를 알겠습니까.”“그렇죠, 그렇죠.”바이어는 머쓱한 듯 웃으며 연신 사과했다.“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네요. 딱 봐도 저런 여자는 별로 좋은 사람 같지가 않더군요. 아마 이사님께 잘 보이려고 들러붙은 거겠죠.”진주시에서 김인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바이어는 이지원에게 노골적인 혐오를 드러내며 옆의 경호원에게 명령했다.“저 미친 여자 좀 치워. 여기서 체면 깎지 말고.”“네, 알겠습니다.”경호원들은 말도 없이 이지원을 들쳐 업듯 끌어내어 도로가 쪽으로 내던졌다.끌려가면서도 이지원은 계속해서 외쳤다.“오빠, 왜 그래... 왜 나를 모른 척해?”“놔, 이 사람들아! 인우 오빠는 내 친구야! 그 사람이 이 일 알면 절대 너희들 가만 안 둘 거야!”그녀는 말끝마다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의 이지원은 확실히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과거의 자신이 잘나가던 시절의 기억 뿐이었고 김인우와
“민정 씨, 내가 잘못했어요. 제발, 제발 나 좀 도와줘요.”이지원은 박민정의 손을 덥석 붙잡고 애원했는데 눈빛엔 간절함이 가득했다.“이제는 정말 부탁할 사람이 민정 씨밖에 없어요. 내가 한창 잘 나갈 때 일도 너무 많이 벌였고 지금은 완전히 매장돼서 진 빚이 평생을 갚아도 못 갚을 만큼이에요.”박민정은 조용히,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그녀를 바라봤다.“왜 내가 당신을 위해 돈을 갚아줄 거라 생각하죠?”이지원은 순간 멍해졌다.요즘 들어 그녀는 자꾸 옛날 꿈을 꾼다. 박민정과 친구로 지내며 가까웠던 그 시절, 박민정은 늘 그녀를 감싸고 누가 괴롭히려 하면 앞장서서 막아줬고 어떤 일이든 조건 없이 도와줬다.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정의 아버지 역시 그녀를 친딸처럼 잘해줬고 학비도 지원해주며 박민정과 같은 학교를 다니게 해줬다.가끔 꿈에서 깨면 지금의 현실이 너무 낯설어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때도 있었다.“민정아,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너한테 그런 짓을 한 내가 미쳤었어, 정말이야...”이지원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지만 박민정은 아무런 감정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손을 그녀의 손에서 빼냈다.“이지원,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이지원이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박민정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네가 지금처럼 망가지지 않았다면 넌 후회했을까?”이지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생각해봐. 네가 아직도 잘나가는 톱스타였다면, 남준 씨랑 인우 씨가 아직도 진실을 모른 채 널 감싸고 있었다면 넌 지금처럼 후회하며 내 앞에 이렇게 무릎을 꿇었을까?”박민정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만약 그런 상황이었다면 이지원은 아마 자신을 더 깊이 짓밟고 더 높은 곳에서 비웃었을 것이다.이지원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박민정의 눈은 깊고도 고요했는데 마치 파동조차 없는 죽은 물처럼 어떤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예전엔 널 정말 내 가장 소중한 친구라 생각했어. 하지만 내가 사람을 잘못 봤더라. 이젠 너에게 어
윤소현의 일이 터지자 이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그중에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지내던 이지원도 있었다.요즘 이지원은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빚쟁이들을 피해 도망 다니는 와중에 박민정과 유남준이 자신을 찾아올까 봐 늘 초조한 심정으로 지내고 있었다.하지만 이지원은 몰랐다.그 불안감 자체가 박민정이 의도한 것이란 걸.박민정은 윤소현의 문제를 매듭짓자마자 곧장 정민기에게 물었다.“요즘 이지원은 어떻게 지내요?”정민기는 그녀가 어느 허름한 월셋집에 숨어 살며 배달이나 택배를 받을 때만 문을 열고 그 외엔 꼼짝도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아직도 제정신으로 살고는 있나 보네요.”이지원은 자신뿐만 아니라 조하랑까지 위기에 몰아넣을 뻔했다. 그런 그녀를 그냥 둘 수 없었다.“이젠 그 평온한 삶에도 금이 좀 가야겠죠.”박민정은 조용히 말했다.정민기는 그 말뜻을 곧바로 알아차리고 지시를 내렸다....그날도 이지원은 언제나처럼 문 앞에 도착한 택배를 가지러 나섰다. 하지만 그 순간, 서너 명의 남자들이 그녀를 둘러쌌다.그중 선두에 선 남자가 비웃듯 말했다.“우리 대스타님, 어디 가시나?”이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아무 데도 안 가요. 정말이에요.”“그래서 돈은 언제 갚을 건데? 당신 같은 사람 믿고 우리 사장님이 그 딜 들어갔다가 결국 손해만 봤잖아. 안 그래?”남자는 거칠게 그녀의 팔을 움켜잡았다.“제발요. 진짜 돈이 없어요... 제발 한번만 봐주세요…”이지원은 애걸했다.“돈이 없으면 일이라도 해야지, 그렇게 방구석에 처박혀서 빚만 미루고 있으면 되겠어?”사방을 둘러싼 이들은 이지원을 완전히 포위했다.이지원은 어떻게든 도망치려 했지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결국 일해서 갚겠다는 조건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미 업계에서 퇴출당한 몸, 일자리를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결국, 이지원은 다시 ‘제우스 클럽’으로 돌아왔다.예전에 그녀는 정
이미 손연서의 번호는 더는 연결되지 않았다.오준수가 다급하게 물었다.“어때요? 뭐래요?”차현영의 눈빛에는 짙은 분노가 어려 있었다.“손연서 저년은 아예 우리랑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이야.”그 말을 들은 옆자리의 오성훈이 발끈했다.“아빠, 할머니! 나 집에 갈래요! 나 비행기 갖고 놀고 싶단 말이에요! 도대체 언제 집에 가요?”오준수는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조용히 해! 지금 집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라?”하지만 오성훈은 그런 사정쯤엔 관심이 없었다.“나 금희 아줌마가 만든 대추떡 먹고 싶어요! 아줌마 불러와요! 당장!”허금희는 오씨 가문이 파산한 이후, 오준수가 내쫓아버린 가사도우미였다.차현영은 손자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그래그래, 우리 착한 성훈이. 조금만 있으면 아줌마 다시 부를게. 그때 대추떡 많이 해달라 하자, 응?”“싫어요! 지금 당장 먹고 싶단 말이에요! 지금!”오성훈은 철없이 키워진 탓에 떼를 쓰기 시작했다.“먹을 거, 먹을 거! 입만 열면 먹을 거냐? 계속 이러면 진짜 혼난다?”오준수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태어나서 처음 아버지에게 소리를 들은 오성훈은 놀란 눈으로 울음을 멈췄지만 그 잠깐의 정적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내 방 안은 아이의 울부짖는 소리로 가득 찼고, 그 어떤 달램도 통하지 않았다.그렇게 오씨 가문 식구들 모두는 진이 다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채권자들은 이들의 사정을 봐줄 만큼 착하지 않았다.그 다음 날 아침, 오씨 가문의 저택이 압류되었다.오준수는 하룻밤 새 작은 사업가에서 무일푼의 노숙자가 되었고 차현영은 분노와 스트레스로 결국 병이 나 병원에 입원했다.그리고 오성훈은 계속 울기만 하며 ‘집에 갈래’를 외쳤다.“연서 엄마 불러줘요. 연서 엄마 보고 싶어요!”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손연서가 곁에 있을 때 자신이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았는지를. 하지만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손연서는 부하에게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그들이 과거 자신에게
손연서가 전화를 끊고 막 눈을 붙이려던 참에 또다시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조금 의아한 마음에 전화를 받자 익숙하면서도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손연서? 연서 맞니?”차현영이었다.예전, 오준수가 그녀와 이혼한 직후 차현영은 그녀의 연락처를 아예 차단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의 전화기를 빌려 걸고 있었다.바로 옆엔 오준수가 서 있었다. 손연서가 전화를 곧장 끊을까 염려해, 그나마 그녀와 연락이 닿을 가능성이 있는 차현영이 전화를 맡은 것이다.손연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저 맞아요.”“아이고, 다행이다. 드디어 네 목소리를 듣는구나. 언제 시간 좀 내서 집에 한 번 들르지 않겠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 연서야.”차현영은 최대한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했다.손연서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오 여사님. 그쪽 아들과 저는 이미 이혼했어요. 그러니 그쪽도 제 어머니가 아니죠.”차갑고 또렷한 그 말에 차현영의 얼굴빛이 순간 어두워졌다.하지만 지금은 사정해야 할 입장이니 차현영은 억지로 분노를 눌러가며 상냥한 척 말을 이었다.“연서야, 그땐 준수가 철이 없었어. 나도 정말 많이 후회하고 있어. 왜 그때 너희를 막지 못했을까 싶어서...”“내가 준수 야단도 쳤어. 전처럼 이천애 같은 여우한테 절대 다시 안 휘둘릴 거야. 그러니까 너도 다시 돌아오면 안 되겠니?”그녀는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오성훈을 툭툭 건드렸다.“성훈아, 어서 엄마라고 부르렴.”오성훈은 귀찮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말은 잘 들었다.“엄마... 엄마, 돌아와 줘요. 저 엄마밖에 없어요. 엄마, 제발 돌아와 줘요.”아이의 목소리에 손연서의 가슴이 순간적으로 저려왔다.하지만 그건 오성훈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 아이에게 쏟았던 과거의 마음과 시간, 그 모든 것이 헛수고였다는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전에 차현영은 손연서에게 오성훈의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고 했고 오성훈 역시 그렇게
차현영은 그래도 이성의 끈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 이천애가 헉헉대며 숨을 몰아쉬는 모습을 보자 급히 아들을 말렸다.“준수야, 그만해. 죽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오준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손에 힘을 풀며 그녀를 밀쳐냈다.이천애는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거칠게 기침을 쏟아냈다. 그녀를 향한 오준수의 눈에는 단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그는 그대로 다가가 발로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마지막으로 한번 묻는다. 물건 어디 있냐?”이천애는 기침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정말이야. 켁켁... 도, 도둑맞았어.”오준수는 더는 말 섞을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는지 곧장 어머니를 불러들여 방 안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서였다.하지만 방을 반 이상 뒤지고 나서도 끝내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이천애는 그제야 정신을 좀 차렸는지 얼굴 가득 눈물 자국을 남긴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정말이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도둑맞지 않았으면 벌써 출국했겠지.”“닥쳐!”오준수는 또다시 그녀의 몸을 걷어찼고 차현영은 참담한 얼굴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너 우리 준수 생각은 안 해도, 네 아들 생각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니? 그게 우리가 가진 마지막 돈이었어! 도대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어?”이천애는 고개를 숙이고 두 주먹을 꼭 쥐었다.가난하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금 절대 해선 안 되는 말이었다.“오빠, 제발... 제발 이번 한 번만 날 용서해 줘. 그래도 나, 성훈이 엄마잖아. 성훈이가 엄마 없이 자라게 하고 싶어?”오준수는 그녀를 향해 침을 뱉었다.“너 같은 게 무슨 엄마야. 내가 눈이 멀었지, 너 같은 걸 좋아했던 내가 미친 거였어.”솔직히 그는 지금 누구보다 후회하고 있었다. 당시, 한낱 모델이었던 이천애에게 빠져 손연서와 아이를 저버렸던 그 선택이 뼛속까지 원망스러웠다.차현영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내가 그때 널 말렸어야 했는데... 연
홍주영은 하민재가 자신을 위해 그런 말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지만 머릿속에선 박민정이 오늘 했던 말들이 자꾸만 맴돌았다.유남우는 정말 겉모습처럼 좋은 사람일까?예전엔 그녀가 유남우에게 너무 마음을 줬던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외국에 있을 당시, 병을 앓고 있던 그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유남우의 좋은 면만을 보며 그를 받아들였지만 지금 점점 그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됐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요.”하민재는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어두운 기색을 보고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홍주영도 더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한편, 손연서도 박민정 쪽 상황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기색이었지만 입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다혜를 입양하지 못하더라도 전 종종 찾아가 볼 생각이에요.”박민정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할 때 손연서가 말을 이었다.“맞다, 민정 씨. 저 이천애 찾았어요.”“이렇게 빨리요?”박민정이 놀라서 되물었다.“전 오히려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는걸요.”손연서는 이천애의 얄미운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분이 치밀었다.“그럼 이제 찾았으니 어떻게 할 건데요?” 박민정의 물음에 손연서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깊이 고민하지도 않고 대답했다.“일단 이천애 주소를 오준수에게 흘려뒀어요. 둘이 알아서 치고받게 두는 거죠.”그녀는 이천애를 감시하라고 사람을 붙여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곧바로 손연서 쪽에 영상이나 소식이 들어왔다.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곧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이천애는 오준수의 어머니가 아끼던 액세서리를 훔쳐 출국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도망치듯 허름한 여관에 숨어 있었다.오준수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그곳까지 찾아가 문을 박차고 들어갔는데 차현영도 함께였다.모자는 마치 원수를 만난 듯 이천애를 노려봤다.“이 죽
잠시 후, 홍주영은 병원에 도착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문 너머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몰래 엿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 안에서 ‘유남우’라는 이름이 나오는 순간, 그녀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췄다.결국 문을 두드리지 못하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그 유남우란 사람, 설마 자기 형 복수라도 하려는 건가?”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그럴 리 없어. 유남우랑 유남준 사이 엄청 안 좋았어.”하민재가 친구에게 단언하듯 말했다.“이번 일은 내가 졌다고 인정해야지. 세상에, 이렇게까지 음험한 짓을 할 줄은 몰랐어. 나를 해치려고 일부러 교통사고를 꾸미다니.”그 말에 홍주영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유남우가 하민재를 해치려고 사람을 시켜 교통사고를 냈다고? 그게 정말 사실일까?하지만 왜? 이유가 뭐지?“난 이만 간다. 혹시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대화를 나누던 하민재의 친구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이었다.홍주영은 재빨리 복도 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사람이 완전히 떠난 뒤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마음을 다잡고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주영 씨, 안 오는 줄 알았어요.”하민재는 그녀를 보자 두 눈이 반짝였는데 정말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홍주영은 조용히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밥은 먹었어요?”하민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주영 씨가 시켜준 음식 진짜 맛있었어요.”“그래요?”홍주영은 속으로 좀 민망했다. 배달 음식이 맛있을 게 뭐가 있다고...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고 조심스레 물으며 분위기를 살폈다.“근데 말이에요, 이번 교통사고에서 혹시 다른 사람은 안 다쳤어요?”하민재는 그녀가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시곤 그대로 숨기기로 마음먹었다.“아니요, 나만 다쳤어요. 내가 좀 재수가 없었죠.”그는 알고 있었다. 유남우가 홍주영에게 어떤 존재인지. 혹여 진실을 말하면 그녀는 자신을 도와주기는커녕 화를 낼지도 몰랐다.하지만 홍주영은 감정에는 조금 둔할지 몰라도 바보는 아니었다. 하민재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