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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5 화

작가: 위위두유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26 18:15:10
하여 평소 밖에 나올 때도 아내와 동행하지 않았다. 강민기는 지금까지 권은채를 딱 두 번 봤다.

한 번은 주도운이 서류를 놓고 갔는데 일에 지장 줄까 봐 권은채가 직접 회사까지 가져다줬었다. 주도운이 아무리 싸늘하게 대해도 권은채는 잠깐 실망만 할 뿐 그 어떤 원망도 쏟아내지 않았다. 보기에는 참 말도 잘 듣고 철이 든 여자였다.

또 한 번은 주씨 가문 어르신의 생신 연회였는데 그 해는 주도운과 권은채가 결혼한 이듬해였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했고 소개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날 저녁 권은채는 주씨 가문에서 공짜로 구한 도우미처럼 바쁘게 움직였지만 칭찬 한마디는커녕 오히려 눈에 거슬린다는 소리만 들었다.

결국 그녀는 계속 구석에만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반박하지 않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최대한 그들과 멀리하려 했다.

강민기의 기억 속 주도운의 아내는 사람들이 함부로 해도 가만히 있기만 하던 그런 여자였다. 오늘 저녁 기세가 사납고 누구든지 다 짓밟아버릴 것 같은 이 여자는 절대 권은채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도운은 권은채가 떠난 방향을 아무 말 없이 쳐다보았다.

강민기가 마른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아까 여기 왔을 때 문 앞에서 임성한을 만났어.”

주도운이 물었다.

“누구?”

“힐링 주얼리의 편집장.”

“기억이 좀 있긴 해.”

주명 그룹과 힐링 주얼리가 예전에 협력한 적이 있어 주도운도 편집장을 몇 번 만났다.

강민기가 감탄하며 말했다.

“아까 임성한이 그러는데 루안을 찾았대. 다른 문제가 없다면 루안과 계약할 거라고 하더라고. 루안이 누군지 기억하지?”

“아니.”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기억해야 하나?’

강민기가 말했다.

“그럼 3년 전 제7회 신예 디자이너 대회는 기억하겠지? 그때 루안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거든. 주명 그룹의 후원을 받고 파린 연수를 갈 수 있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그 기회를 포기했어. 나중에 대회 담당자한테서 들은 바로는 루안이 유학 자금을 현금으로 주면 안 되겠냐고 물어봤대. 그래서 담당자가 너한테 물어봤었는데 네가 거절했어. 그 후로 아무런 소식도 들리지 않았어. 루안 그 사람 진짜 센스가 남다른 디자이너였는데. 너무 아쉽다.”

주도운이 천천히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강민기가 한 얘기를 들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 기억이 안 나.”

두 사람을 데려다주는 길에 임성한은 권은채의 기분이 조금 전 식사할 때보다 눈에 띄게 나빠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가 없어 배정아에게 눈치를 주며 물었다. 배정아는 말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만 가볍게 내저었다.

집 밑까지 데려다준 후 임성한이 말했다.

“은채 씨 작품 기대할게요. 그리고 우리도 하루빨리 계약했으면 좋겠어요.”

권은채는 기분이 많이 나아진 듯했다. 하던 생각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편집장님. 열심히 할게요.”

임성한이 웃어 보였다.

“그럼 이만 갈 테니까 얼른 올라가요. 다음 주에 봅시다.”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배정아가 물었다.

“은채야, 아직도 그 두 연놈 때문에 화났어?”

“응.”

권은채는 정신을 딴 데 판 나머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가 다시 말했다.

“아니. 작품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어.”

임성한이 그녀에게 준 주제는 ‘퍼스트 러브’였다. 배정아는 출판사가 디자이너와 계약한 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시리즈이자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한다고 했다. 하여 이번 작품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하지만 첫사랑이 권은채에게는 너무도 오래전 일이라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면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설렘이지만 주도운과 결혼한 3년 동안 그 설렘은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배정아가 말했다.

“말 나온 김에 묻자. 김경민하고는 계속 연락 안 했어?”

권은채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3년 전 신예 디자이너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그녀는 파린 유학 기회를 얻었지만 거절했다.

김경민은 권은채를 여러 번 찾아와 왜 가지 않겠다고 했는지 물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실을 말할 용기가 없어 김경민의 연락처까지 다 지워버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대회에서 우승한 그 날 한창 기쁨에 겨워하고 있던 그때 권정환이 사채빚을 2억이나 졌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얘기해야 하나?

권은채는 그날의 그 충격에서 아직도 완전히 헤어나오지 못했다.

배정아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소파에 기댔다.

“지금도 너랑 김경민이 안 된 게 너무 아쉬워. 그때 학교에서 둘이 얼마나 잘 어울렸었는데.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어. 둘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고 누가 먼저 적극적으로 대시하면 잘될 거라는 거. 두 사람 파린으로 가면 잘될 줄 알았는데 뒤에 그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어휴, 운명이란 참.”

권은채는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다 지나간 일이야.”

“됐어. 속상한 얘기는 그만하자. 아 참, 서예빈에 관한 일을 얘기한다는 걸 깜빡했네. 걔가 이 업계에 금방 들어와서 잡지 화보를 찍을 때 조명이 뭔지도 잘 몰랐대...”

배정아는 권은채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해주면서 기분을 풀어준 후 그 두 연놈을 거의 온 저녁 욕했다.

그런데 권은채가 침대에 누웠을 때 낮에 서예빈이 화장실에서 했던 얘기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 상스러운 말은 절대 주도운이 했을 리가 없지만 아마 전한 뜻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권은채는 자신이 주도운의 발목을 잡았다는 걸 알았기에 결혼 3년 동안 좋은 아내가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상처가 되는 모진 말을 듣든 주씨 가문 사람들이 무시하든 원망 한번 한 적이 없었다. 주도운이 그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니까.

그런데 그 현실이 마치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마구 찔렀을 땐 그녀도 고통을 느꼈다. 숨 한번 쉬어도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아팠다.

권은채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뭔가를 떠올렸다.

3년 전, 권정환이 사채빚을 2억 졌다는 소리를 들은 후 권은채는 여기저기 다니며 돈을 구했다. 심지어 자존심까지 내려놓고 대회의 담당자에게 파린 유학 비용을 현금으로 줄 수 없냐고 물어도 봤었다.

그때 담당자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미안해요, 루안 씨. 대표님이 그러는데 이번 기회는 디자이너의 꿈을 이루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 대회를 사업 기회로 삼아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에게 주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그 얘기를 들은 후 권은채는 한참이나 멍해 있었다. 울면서 집으로 돌아와 대표라는 사람을 온 저녁 욕했었다.

‘날 뭐로 보고. 난 뭐 디자이너가 되기 싫어서 이러는 줄 알아?’

그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권정환은 도망쳤다. 빚쟁이가 집까지 찾아와서 권은채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남동생의 팔 하나를 자르든지, 권은채가 그들과 함께 떠나든지.

다른 선택이 없었던 권은채는 목놓아 울부짖는 권강훈을 두고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빚쟁이들은 권은채를 케이 클럽에 팔았다. 돈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 스트레스와 욕구를 마음껏 푸는 그 케이 클럽 말이다.

그들은 권은채의 술에 약을 탔다. 이미 죽는 것도 두렵지 않은 그녀였지만 사오십대로 보이는 뚱뚱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을 때 그녀는 문득 김경민이 생각났고 지키지 못한 파린 약속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갑자기 용기가 생겨 중년 남자를 확 밀어낸 다음 비틀거리며 달려 나왔다.

뒤에서 계속 누군가 쫓아왔고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눈앞에 훤칠한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권은채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의 고급 양복 옷소매를 잡고 애원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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