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 화

그 말을 마친 후 권은채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떤 낯선 방에 누워있었는데 옆에 낯선 남자가 누워있었다. 침대 옆에 널브러진 옷가지들만 봐도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갈증 때문에 목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속상함도 잠시 자신을 위로했다. 적어도 어젯밤의 뚱뚱한 중년 남자보다는 훨씬 더 잘생겼다고 말이다.

어젯밤의 일로 권강훈이 걱정됐던 권은채는 재빨리 옷을 입고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인기척에 침대 위의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깨려 하자 그녀는 재빨리 이불을 얼굴까지 덮어주고 가볍게 토닥이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계속 자요.”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했다.

이불 안에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권은채는 재빨리 도망쳤다.

빚쟁이들은 이미 집에 찾아왔고 다행히 권강훈은 그녀를 찾으러 나가서 집에 없었다.

권은채는 권강훈에게 무사하다는 연락을 한 후 요즘은 집에 들어오지 말고 친구네 집에서 잠시 지내라고 했다. 그리고 그녀는 배정아에게 갔다.

그렇게 두 달 정도 숨어지내던 어느 날, 권은채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권은채가 잠에서 깼을 땐 새벽 4시였다.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신 후 거실에 앉아서 최근 2년 동안 첫사랑에 관한 영화와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그때의 그 풋풋하면서도 달달했던 감정을 다시 찾으려고 말이다.

...

권은채는 방에 3일 동안 틀어박혀 있었다. 겨우 영감이 떠올라 펜을 들려는데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고 예의 바르게 물었다.

“여보세요. 누구시죠?”

“사모님, 주 대표님의 비서 임남규입니다. 대표님께서 몰도브로 출장 가셔야 하는데 혹시 대표님의 파란 줄무늬 셔츠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겨우 떠오른 영감이 고작 이런 가치도 없는 일에 방해받았다는 생각에 권은채는 짜증이 확 밀려왔다. 주도운이 일부러 시비를 거는 거라고 생각하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사람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이미 이혼한 마당에 셔츠가 어디에 있는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도우미한테 물어보라고 해요.”

그러고는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2분 후, 권은채의 휴대전화가 또 올렸고 주도운이라는 세 글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멈칫했다가 전화를 받았다.

“권은채, 30분 내로 당장 튀어와.”

“난...”

권은채가 대답하기도 전에 주도운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는 전화를 꽉 움켜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시원하게 쥐어 패버리고 싶었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방을 나섰다.

배정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은채야, 이 밤에 어디 가?”

“그 자식이랑 끝장을 보고 올게.”

“...”

당연히 말만 이렇게 했을 뿐이었다. 권은채는 절대 주도운의 상대가 아니었다.

호원 맨션에 도착했을 때 도우미들은 이미 다 쉬고 있었고 주변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권은채는 2층으로 올라가 안방 문을 열었다. 주도운이 잠옷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자료를 훑고 있었다. 인기척이 들려도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옷방으로 들어가더니 비서가 얘기한 파란 줄무늬 셔츠를 겨우 찾아냈다. 그런데 옷을 본 순간 그녀는 흠칫했다.

그 셔츠는 다름 아닌 결혼한 해에 주도운이 하위이로 출장 간다는 소리를 듣고 권은채가 사준 셔츠였다. 바닷가와 참 어울리는 셔츠였다.

권은채가 주도운에게 셔츠를 선물했을 때 주도운은 그저 차갑게 보며 말했다.

“이런 싸구려 방식으로 나한테 잘 보이려 하지 마. 그리고 한눈에 보이는 그런 꿍꿍이 같은 것도 품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대체 무슨 꿍꿍이를 품었다고...’

하지만 그날 이후로 권은채는 주도운에게 선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때 쳐다보지도 않던 옷을 이제 와서 입겠다고 그녀까지 불렀다.

그녀에게 복수하고 일부러 괴롭히는 게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권은채는 옷방에서 나와 셔츠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뭐라 말하려는데 주도운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매우 낮았고 권은채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듯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이혼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지만 적절한 타이밍을 찾지 못해 그냥 돌아섰다. 급히 왔다가 급히 가버렸다.

안방을 나서던 그때 주도운이 드디어 고개를 들고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냥 이렇게 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듯 입술을 적시면서 상대에게 말했다.

“응. 일단 이렇게 하고 이만 끊을게.”

권은채가 아래층 거실로 내려오자마자 주도운이 불렀다. 주도운은 계단 위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옷 찾았어?”

“침대에 놨어.”

“다른 건?”

권은채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다른 거라니?”

주도운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얼굴을 찌푸렸다.

“출장 일주일 가는데 옷 한 벌만 가지고 가라고?”

“...”

예전에 이곳에 살 때 이튿날에 출장이 잡히면 항상 권은채가 짐을 싸줬다. 그렇게 3년 동안 아내의 역할을 다했지만 권은채가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의 나쁜 습관만 키우고 말았다.

권은채가 차분하게 말했다.

“주도운 씨, 한 번만 더 얘기하는데 우린 이미 이혼했어. 그러니까 셔츠를 찾는 거든, 짐을 정리하는 거든 이젠 내가 할 일이 아니니까 도우미나 미래 와이프한테 부탁해. 앞으로 이런 식으로 날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주도운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그럼 나도 한마디만 할게. 우리 아직 이혼 절차 마무리하지 않았어. 넌 여전히 법적으로 내 아내니까 네가 해야 해.”

“상의할 여지도 없다는 거야?”

“같은 말 두 번 반복하고 싶지 않아.”

권은채는 코웃음을 치면서 휴대전화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다른 사람을 부려먹고 싶으면 서예빈 씨한테 와서 짐을 정리하라고 할게. 아마 엄청 빨리 뛰어올걸?”

그런데 전화번호를 찾고 통화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주도운이 휴대전화를 확 낚아채고는 싸늘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권은채, 요즘 가만히 내버려 두니까 점점 기어오른다?”

그녀는 텅 빈 손을 한참 동안 보다가 피식 웃었다.

“말조심해. 기어오른다니? 내가 언제?”

주도운의 눈빛이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대체 언제까지 밀당할 건데? 권은채, 자꾸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지 말고 원하는 게 뭔지 그냥 말해.”

권은채는 몇 초 동안 흠칫했다가 말했다.

“지난번에 내가 주명 그룹을 갖고 싶어 한다며? 줄 거야?”

“꿈 깨.”

“그럼 이혼해.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주도운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이혼 말고 할 줄 아는 얘기가 없어?”

권은채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맨날 나한테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했잖아. 근데 왜 이젠 내가 이혼해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