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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화

Author: 위위두유
last update Last Updated: 2024-11-26 18:15:10
권은채가 웃으면서 일어났다.

“TV나 계속 봐.”

그녀는 약국에 들러 약을 산 후 마트로 걸어갔다. 배정아가 요구했던 물건을 사고는 생리대 코너를 돌다가 갑자기 그녀도 두 달 정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문득 났다.

3년 전에 유산한 후 생리 주기가 항상 불규칙했고 두세 달에 한 번씩 생리하곤 했다.

‘곧 하겠지, 뭐.’

권은채는 혹시라도 생리대가 모자랄까 봐 몇 봉지 더 샀다. 결제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한 여자가 들어오면서 그녀와 어깨를 부딪쳤다. 그 바람에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사과는커녕 자기 옷을 툭툭 털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눈 어디에 두고 다녀?”

권은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직도 걸음걸이를 제대로 못 배웠어?”

주여진은 그녀 앞에서 건방을 떨더니 이젠 하찮게 쳐다보기도 했다.

“너였어? 이 늦은 밤에 여기서 뭐 해? 오빠가 없는 사이에 다른 남자라도 만나러 나온 거야?”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권은채는 허리를 숙여 봉투를 주우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주여진, 해외로 나갔으면 돌아오지 말았어야지. 아직 모르나 본데 난 못되고 잔인한 사람이라서 원한이 있으면 무조건 갚거든.”

그 순간 주여진의 표정이 급격히 흔들렸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뭘 하려고?”

권은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딱히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야. 근데 평생 아이를 갖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갑자기 너한테 복수하고 싶어져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괴롭힐지도 모르니까...”

권은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여진을 힐끗거렸다.

아직 임신과 거리가 멀더라도 그런 소리를 들으니 겁이 날 수밖에 없었다.

“미쳤어? 네가 임신했었는지 안 했었는지는 네가 잘 알 거 아니야. 내가 실수로 너랑 좀 부딪혔다고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 하지 마. 그리고 내 털끝 하나 건드렸다간 주씨 가문에서 가만두지 않을 거야. 우리... 사촌 오빠도 너랑 이혼해서 널 주씨 가문에서 내쫓을 거고. 재산 일전 한 푼이라도 가질 궁리 하지 마.”

“그럼 해보든지. 어차피 난 밑질 게 없거든.”

“미친년.”

주여진은 욕설을 퍼붓고는 성큼성큼 가버렸다. 뒷모습만 봐도 긴장하고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다.

마트에서 나온 후 주여진은 길에 세운 랜드로버에 올라탔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자 옆에 있던 남자가 덤덤하게 물었다.

“물 사러 간 거 아니었어?”

주여진은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바로 원망을 쏟아냈다.

“경민 오빠, 내가 예전에 얘기했던 가짜 임신으로 우리 사촌 오빠한테 결혼을 강요했다던 여자 기억나? 방금 마트에서 그 여자를 만났지, 뭐야. 정말 생각만 해도 역겨워.”

김경민이 말했다.

“물 안 사고 가려고?”

“오빠...”

주여진이 뭐라 하려는데 김경민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 머무른 걸 발견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던 그때 김경민이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의 모습에 주여진도 따라 나가더니 인파 속에서 뭔가를 찾는 듯한 김경민을 잡고 물었다.

“오빠, 왜 그래? 뭘 찾아?”

김경민은 천천히 생각을 거두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아니야. 아무래도 사람 잘못 봤나 봐.”

조금 전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던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본 것 같았다.

주여진이 말했다.

“그만 가자.”

김경민은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

“여진아, 내가 택시 불러줄게. 갑자기 일이 생겨서 집까지 데려다주지 못할 것 같아...”

“근데 나랑 약속했잖아...”

김경민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대전화를 꺼내 택시를 불렀다.

“택시 차 번호 너한테 보냈어. 먼저 갈게.”

그러고는 주여진이 아무리 불러도 무시하고 휙 가버렸다.

...

집으로 돌아온 권은채는 물건들을 냉장고에 정리한 후 생리통 때문에 힘들어하는 배정아에게 따뜻한 물 한잔을 따라주었다.

배정아는 물잔을 건네받고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흔들었다.

“방금 누가 날 추가했는지 알아?”

“괴도 키드? 짱구?”

“장난 아니야.”

배정아는 휴대전화를 권은채에게 보여주었다. 두 줄만 봐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김경민이야.]

[은채에 관한 소식 알고 있어?]

권은채는 문자 두 통을 화면이 꺼질 때까지 멍하니 쳐다보았다. 잠시 후 배정아가 말했다.

“김경민이 귀국했어. 널 여기저기 찾고 다니나 봐. 대체 누가 내 연락처를 알려줬는지. 휴, 지금 나랑 같이 살고 있다고 말할까? 아니면 네 연락처를 그냥 넘길까?”

권은채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아직은 알려주지 마...”

배정아는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강요하지 않고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리고 김경민에게는 권은채와 만나지 않은 지 꽤 됐다고 했고 들리는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려주겠다고 했다.

거짓말인 걸 눈치챘는지는 모르겠지만 김경민은 고맙다는 문자를 보낸 후에는 더는 연락이 없었다.

침대에 누운 권은채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동이 거의 틀 무렵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더듬거리다가 전화를 받았다. 휴대전화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회사 쪽에 일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와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후 또 뭐라 했는데 권은채는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통화가 끝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회사? 무슨 회사?’

권은채는 그제야 발신자를 확인했는데 주도운의 비서 임남규였다. 그녀는 욕실로 들어가 급하게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갔다.

주명 그룹에 도착했을 때 12시 10분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오가는 행인이 배로 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명 그룹 앞에 모여서 뭔가를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감히 날 건드려? 난 너희들 대표의 장인어른이야. 내가 싹 다 잘라버리는 수가 있어. 가서 주도운한테 전해. 이혼하더라도 우리한테 재산을 절반 줘야 한다고. 내 딸이랑 3년을 같이 산 남편인데 이혼한다고 일전 한 푼도 안 준다고?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

권은채는 마침 마지막 한마디를 들었다.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치욕이 밀려와 당장이라도 사라지고 싶었다.

그녀가 도망가려는데 임남규가 언제 옆으로 왔는지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아버님께서 벌써 30분 넘게 소란을 피우고 계세요. 지금 주명 그룹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으니 대표님께서 3분 안에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해결하지 못하면 경찰 불러서 법대로 처리하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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