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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9 화

작가: 위위두유
last update 최신 업데이트: 2024-11-26 18:15:10
권은채는 고개를 들어 빌딩의 유리벽 안을 바라보았다. 안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차가운 눈빛이 그녀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 눈빛에 그녀는 등골이 다 오싹했다.

‘이런 소란까지 피웠으니 내가 얼마나 싫을까. 죽이고 싶은 생각도 들겠어.’

권은채는 임남규가 데려온 경비의 도움을 받아 인파 속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바닥에 앉아서 난동을 부리는 권정환을 본 순간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예요?”

권정환은 그녀를 보더니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마침 잘 왔어. 주도운더러 내려오라고 해. 이혼 후 재산 분할에 관해 얘기해야지.”

“내가 말했었죠? 그 사람 돈은 나랑 상관이 없다고.”

그녀의 말에 권정환이 목청을 높였다.

“왜 상관이 없어? 그럼 3년 동안 공짜로 잠자리해준 거야? 웃겨, 정말. 밖에서 다른 여자 만나도 돈을 주지 않으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는다고.”

권은채는 뭐라 말하려다가 딱히 할 말도 없어 임남규에게 말했다.

“신고해요.”

임남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은채가 떠나려 하자 권정환이 재빨리 그녀를 잡았다.

“이렇게 가면 어떡해? 내가 누굴 위해서 이러는데. 돈을 받으면 나한테 조금만 주면 돼. 어차피 결국에는 다 네 돈이야. 근데 아빠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냥 가려고? 정말 괜히 키웠어.”

그러자 권은채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아빠가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아빠가 잘 알 거 아니에요. 계속 소란 피우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요. 아빠가 잡혀가면 나도 며칠 정도는 조용히 있을 수 있겠죠. 아 참, 보석으로 풀어줄 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말아요. 강훈이도 해주지 않을 테니까 경찰서에 얌전히 있어요. 거기엔 먹을 것도 있고 마실 것도 있고 빚쟁이들도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권정환이 권은채의 따귀를 냅다 후려갈기더니 두 눈을 부릅떴다.

“네가 인간이야? 너랑 강훈이를 힘들게 키워놓았더니 돈 많은 남자한테 시집갔다고 이 아빠를 무시하는 거야?”

“마음대로 생각해요.”

구경꾼들이 점점 많아져 권은채는 1초라도 머물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인 채 그냥 가버렸다.

한참 동안 소란을 피웠는데도 주도운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권은채마저 왔다가 가버렸다. 게다가 신고까지 한 상황이라 진짜 경찰에 잡혀간다면 골치가 아프게 된다.

권정환은 경비들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너희들 대표한테 전해. 며칠 후에 또 올 거라고.”

권정환이 떠난 후 사람들도 흩어졌다.

임남규는 회사 안으로 들어와 통유리 앞에 서 있는 주도운에게 말했다.

“대표님, 해결했습니다.”

주도운은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은 휴대전화를 들고 얼음장같이 차가운 기운을 내뿜었다. 드디어 그가 입을 열었다.

“권은채는?”

“이미 갔어요.”

주도운이 코웃음을 쳤다.

“갔다고?”

“네. 그리고...”

뺨도 맞았다는 말을 하기 전에 주도운이 먼저 말했다.

“오후 회의를 내일로 미뤄.”

임남규가 대답했다.

“네.”

주도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권은채에게 문자를 보냈다.

[3시. 가정법원.]

10분 후 답장이 왔다.

[알았어.]

권은채는 길옆의 벤치에 앉아 답장을 보낸 후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두 다리를 끌어안고 쪼그리고 앉아 무릎 사이에 머리를 파묻었다.

만약 가능하다면 아무도 모르는 낯선 곳에 가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권정환도 없고 주도운도 없으며 모욕도 없는 그런 곳에서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권은채는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먼저 가정법원에 가서 기다리려고 일어난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온 세상이 빙빙 돌았다. 그러다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의 소독수 냄새가 코를 찔렀는데 다름 아닌 병원이었다.

권은채는 머리를 주무르며 휴대전화를 찾아 시간을 확인했다. 4시 30분이었다.

‘망했어.’

주도운에게 문자를 보내 설명하려던 그때 커튼이 열리면서 옆에 있던 간호사가 웃으며 말했다.

“깼어요? 의사 선생님이 검사해 봤는데 저혈당에 아침도 먹지 않아서 쓰러진 거래요. 큰 문제는 아니니까 좀 쉬다가 가면 돼요.”

권은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아 참, 임신인 데다가 몸도 좋지 않아서 특별히 더 주의해야 해요. 특히 3개월까지는 조심 또 조심해야 해요. 며칠 후에 시간 되면 남편과 같이 산부인과에 가서 검사받으세요.”

간호사는 당부를 마친 후 자리를 떠났다.

권은채는 임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침대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고 상을 받은 그 날 권정환이 수억 원의 사채빚을 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거의 맞물리는 정도였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암흑을 벗어나 광명을 찾을 수 있었지만 누군가 갑자기 눈앞에 높은 벽을 세워놓은 바람에 아무리 노력해도 지나갈 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권은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도운에게 설명할 새도 없이 산부인과에 접수했다.

의사가 검사를 마친 후 말했다.

“임신 맞습니다. 40일 차고 아주 건강하게 자라고 있어요. 근데 전에 유산할 때 출혈이 심한 데다가 몸조리를 제대로 못 해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많아요. 이번에 임신한 것도 쉽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너무 긴장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돌아가서 몸조리 잘하면 돼요.”

권은채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이 아이를 원하지 않으면 지워도 될까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의사는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잘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가뜩이나 몸이 좋지 않아서 겨우 임신한 건데 이번에도 유산하면 몸에 많이 나빠질 겁니다. 어쩌면 앞으로...”

“앞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단 말인가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많이 어려울 겁니다. 산모의 몸 상태에 따라 다르거든요.”

권은채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자 의사가 계속하여 말했다.

“일단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세요. 게다가 지금 몸이 많이 약해서 수술하는 것도 어려워요. 꼭 지워야 한다면 보름 후에 다시 오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권은채도 무슨 정신으로 병원을 나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이 사실을 주도운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잠깐 스쳤다.

하지만 아주 잠깐일 뿐 절대 말해선 안 되었다.

가뜩이나 주도운이 그녀가 이혼하려는 게 진심이 아니라 밀당이라고 의심하는데 이 와중에 임신까지 했다고 하면 그 의심이 사실이 돼버린다.

그리고 주도운이 이 아이를 원치 않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혐오한다는 걸 권은채는 잘 알고 있었다.

돌아가는 길에 검색해본 결과 콘돔으로는 100% 피임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경우는 누구에게 따져야 한단 말인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온 배정아가 불을 켰다. 그제야 권은채가 담요를 뒤집어쓰고 두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배정아는 그녀 옆으로 다가가 손을 흔들었다.

“앉아서 뭔 생각을 그렇게 해?”

권은채는 두 눈을 천천히 뜨고 차분하게 말했다.

“나 임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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