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도 추연의 성격은 잘 알고 있다. 일단 마음만 먹으면 그녀를 흔들기 어렵다는걸.“이모, 화내지 마요. 이제 퇴근하고 짐 옮기러 갈게요.”연아도 추연의 적극적인 초대에 거절하기 머쓱한지 하는 수없이 승낙했다.“그래. 이래야 맞지. 네가 그래도 거절하면 나 진짜 진지하게 화낼 거야.”“네, 네. 이모. 그러니까 화 좀 풀어요.”연아는 눈웃음을 치면서 추연을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애교 부리는 연아를 보며 이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추연은 온화해진 말투로 대답했다.“일단 와인 창고 갔다 네가 퇴근하는 시간에 데리러 갈게. 너랑 같이 우여청가야지, 아니면 네가 도망갈 거잖아.” “네! 회사에서 딱 기다리고 있을게요.”“그래. 우리 예쁜 조카”추연은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거리고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다.“빨리 돌아가 업무 봐.”연아는 추연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이모! 나이도 많으신데 운전할 때 조심하세요!”“네 이놈 계집애. 이모 아직도 젊거든!”추연은 주먹을 쥐고 때리려고 시늉하며 답했다.연아는 그런 추연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추연을 배웅하고 나서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연아는 무심하게 서류를 뒤져보고 있었다. 핸드폰의 진동음이 울리더니 민지훈이 게이라는 기사가 알람으로 화면에 떴다. 이런 기사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연아가 웃어버렸다.…같이 시간, 양주의 중심에 세워진 두 고층빌딩 안.“퍽—”민지훈은 전광판에 끊임없이 재생되는 영상을 보면서 화가 났는지 펜까지 꺾어버렸다.옆에 서 있는 오민은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하는 모양이었다.‘민지훈 씨는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요.’웃기고 있네. 이런 말을 입밖에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조연아뿐이다.“웃고 싶으면 웃으세요.”엄숙한 민지훈의 말투에 정신을 바짝 차린 오민은 황급히 대답했다.“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연아 아가씨가 이렇게 아무 말이나 내뱉는다는 게 당황스러워서…”민지훈은 입꼬리를 당기더니 다시 눈길을 인터뷰 영상으로 옮겼다.내가 여자한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는 조
”도련님, 추건이 도망갔답니다.”민지훈은 그의 말에 마음이 철컹 내려앉는듯 했다.“찾아내세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추건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연아는 언제든 위험해질 수 있다. 지금도 연아 주위에 위험 요소들이 가득한데 추건까지 맴돌게 내버려둘 수는 없다.“네, 알겠습니다.”오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났다.화면 속은 여전히 조연아의 인터뷰 영상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었다.차 안에 앉아있는 조연아가 선글라스를 끼고 확신에 찬 말투로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오고 있었다.“누구 여자인지 간지는 나네.”하지만 그녀가 “민지훈은 여자한테 관심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자 다시 굳어버린 민지훈의 표정이었다. 조연아가 저지른 일인데, 참을 수밖에 없지.저녁 시간에 민지훈은 회의실에 앉아 개인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었다.기자는 민지훈의 포스에 눌려 조심스러운 말투로 다음 질문을 이어왔다.“지훈 님이 게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소문일 뿐입니다.”“그러면 조 회장님께서 지훈 님이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시는 건 사실이 아니라 그저 커플 사이의 말다툼뿐인 거네요?”“일부분이 사실이기도 합니다.”그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기자였다.“저는 조연아 말고는 다른 사람한테 관심이 없습니다. 남녀 모두.”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아, 그리고 저랑 민지아 씨는 약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 아닌 소문을 퍼뜨린 분들한테는 꼭 끝까지 책임을 묻겠습니다.”말이 끝나자, 미련도 없다는 듯 회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민지훈의 이번 인터뷰로 인해 그와 조연아의 사이가 더욱더 미스테리로 되어버렸다.“민지훈이 조연아 얘기만 나오면 완전히 달라지잖아. 말투도 엄청 상냥하고. 그런데 민지아랑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고 말할 때는 또 엄청 진지해. 역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만 상냥하다니까! 민지훈 최고!”“헐, 조연아 부럽다… 민지훈이 조연아한테만 관심이 있다잖아! 둘 사이 공개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그
그는 비웃는 듯이 말했다.“연아 유산되게 만들었을 때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을 안 해봤어요?”송진희는 이 말에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민지훈의 눈길도 피하기 시작했고 질타하던 목소리도 많이 낮아졌다.“너…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니? 나 때문에 유산된 거라고? 그건 조연아가 아기를 갖고 싶지 않아 저절로 3층에서 뛰어내린 거야! 그저 이 애를 이용해…”“닥쳐!”화가 치밀어 오른 민지훈은 그녀의 말을 제지했다.이런 민지훈의 모습에 겁먹은 송진희도 몇 발짝 물러섰다…“지, 지훈아. 근거 없는 일이잖아… 어떻게 엄마를 모함해? ”송진희의 말투는 전처럼 당당하지 않았다. “전엔 그 여자 말 하나도 믿지 않더니,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도리어 네 엄마인 내 말은 의심하고!”민지훈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전엔 당신만 믿었기 때문에 연아한테 상처만 줬었지.”말투는 차가웠지만 조연아 얘기만 나오면 눈빛은 부드러워졌다.“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예요.”단호하게 말을 끝내자, 미련도 없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오민과 송진희도 급하게 따라갔다. 귀부인의 모습은 어디 간 지 없고 초라하게 매달리고 있었다.“지훈아, 너 미쳤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 조연아가 먼저 뻔뻔하게 우리 민 씨네랑 결혼하려고 했던 거잖아. 그래서 너도 미워했던 거고. 그런데 이제 며칠 지났는데 갑자기 왜 사람이 다 달라진 거야? 지금 조연아 그년이 너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우리 모자 사이를 이간질한 거지?”민지훈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걔랑 결혼하는 건 제가 한 약속입니다.”예전엔 민지훈 뒤만 졸졸 따라다녔던 조연아였다. 아무리 민지훈이 밀어내고 내쫓아도 떠나질 않았는데 결국 둘이 결혼하게 되었다니. 어떻게 보면 그때 조연아한테 했던 약속을 지켜낸 셈이다.하지만 그렇게 자기만 좋아해 준 조연아한테 상처만 주고 울게만 만들고 그녀의 목숨까지 지켜내지 못할 뻔했다.그 모든 것이 비수처럼 그의 마음을 찔러왔다.그녀 때문에
”생각하신 대로입니다.”민지훈은 한 마디 덤덤하게 내뱉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탑승했다.서서히 닫치는 엘리베이터 문을 보고 당황한 송진희는 갑자기 휘청거렸다.“생각난 거야? 고등학교 때 조연아랑 같이 납치당한 일을…”그들이 납치된 그 두 날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후에 조연아가 이토록 민지훈과 결혼하겠다고 집착하고 있다는 건 송진희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민지훈이 기억을 잃어 그녀를 미워해도 한 발짝 떠나지 않고 그의 기억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송진희는 민지훈이 평생 기억을 되찾지 못할거로 생각했지만 지금 민지훈은 그 모든 걸 기억해 냈다.오민이 송진희 앞으로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사모님, 그럼, 이만.”“대체 언제 생각난 거야? 오민, 대체 지훈이가 언제 기억을 되찾은 거냐고!”송진희는 오민의 손을 잡고 연신 물었다.하지만 오민은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공식적으로 대답했다.“사모님, 빨리 타시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습니다.”“오민, 항상 뒤에만 따라 다녔는데 넌 알잖아… 빨리 대답해!”“사모님, 지금 저한테 아무리 여쭤보셔도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습니다.”송진희가 만족스러워하는 대답을 듣지 못하면 포기를 안 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다.“너희 다 나한테 이럴 거야? 그래…그래!”송진희는 오민의 얼굴을 대고 흉측한 표정으로 손가락질하며 분풀이하고 있다.하지만 끄떡없는 오민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가 올라타니 마침 핸드폰에 전화가 한 통 걸려들어 왔다.“사모님, 큰일입니다. 지아 아가씨가 지금 난리 치고 있습니다!”하인의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곧이어 뭔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돌아갈 거니까 다치지 않게 잘 보고 있어!”전화를 끊고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민지아의 추문이 밝혀진 후, 온종일 집에만 처박혀서 살다 오늘 조연아와 민지훈의 기사에 과하게 반응을 한 모양이다.인터뷰 뉴스를 본 민지아도 역시 송진희의 추측처럼 미
”아가씨, 조심 하세요. 아가씨…”“아가씨, 그러지 마세요!”“사모님은 언제 돌아오신대요?”하인들은 민지아를 말리지도 못하고 그녀가 던진 물건에 맞을 뻔했다.집에 도착한 송진희는 방바닥에 널브러진 물건을 보고 민지아한테 꾸중을 하려 했으나 이미 정신이 나간 듯한 그녀를 보고 차마 말을 입밖으로 내뱉지 못했다.“진정해 지아야!”송진희는 방 안으로 들어가 민지아를 안았다. 하지만 송진희를 본 그녀는 억울함이 터졌다는 듯 더 소리를 높여 울기 시작했다.“모든 걸 다 잃었어… 나 어떻해 엄마… 나 진짜 모든 걸 다 잃었어.”민지아의 눈물은 끊임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조연아가 모든 걸 망쳐버렸어. 내가 다시 연예계에 발을 못 들이게 만들어 버리고 지금 오빠까지 빼앗아 갔어. 지훈오빠가 지금 조연아 말이라면 꼼짝도 못하잖아. 조연아 진짜 무서운 년이야. 무슨 꼼수를 쓴거야 대체!”조연아의 말을 꺼내니 갑자기 바짝 긴장한 듯한 민지아는 송진희의 팔을 꽉 붙잡았다. “분명 예전에 오빠가 걜 그렇게 미워했는데, 지금 갑자기 사람이 변해버렸잖아! 무조건 이상한 수를 써서 그런 걸 거야!”송진희는 민지아를 진정시키려고 물었다.“지아야, 일단 진정해! 조연아가 무슨 방법을 썼든 간 먼저 이게 사실이 맞는지 엄마한테 알려줘.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너랑 그 낯선 남자의 영상이 진짜야?”이 영상의 진실여부에 대해 줄곧 근심하고 있었던 송진희였다.민지아는 송진희의 질문을 듣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하며 자기의 팔을 잡고 있던 송진희를 확 밀쳐버렸다.“그래! 나 맞아. 그 남자 품에 안기고 있는 년이 나 맞는다고! 걔네랑 같이 잔 것도 나라고. 뭐 어쩔 건데? 지훈 오빠도 날 사랑해 주지 않는데 다른 남자보고 사랑해달라고 하는 것도 안 돼?”그녀는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팍을 내리치고 있었다.“민지훈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날 좋아해 주는 남자가 많잖아…봐봐, 이렇게 많은데! 하하하!”송진희는 그녀의 대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영상에서 남자들
”너…너…”민지아는 바닥에 산산이 조각난 유리 파편을 들고 하인들 앞으로 걸어갔다. “다들 지금 서서 보기만 하네… 재밌나 봐? 재밌게 보셨어요?”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내가 물어보잖아! 대답해!”곧이어 민지아는 손에 들고 있던 유리 파편으로 하인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얼굴에 상처가 난 하인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소리를 질렀다.“아, 아닙니다. 재미없습니다.”하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물음에 대답했다.“재미없다면서 왜 아직도 안 꺼져? 빨리 꺼져! 꺼지라고!”민지아가 유리 파편을 그들한테 던지니 놀라서 정신을 잃은 하인들은 황급하게 방을 빠져나갔다.다들 나간 뒤, 민지아는 방문을 잠구고 다시 침대 위에 앉아버렸다. 그 옆에는 송진희가 벽을 짚고 서 있었다.“우리 엄마, 많이 화가 났어요? 엄마가 화를 내다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지아는 어떡해요?”말하면서 갑자기 미친 듯이 웃어버리는 민지아다. 지금 그녀를 보면 마치 정신이라도 나간 사람 같았다. 웃음이 멈추더니 눈을 부릅뜨고 송진희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보탰다.“엄마. 조연아 처리 해 줄 거지? 지훈오빠랑 결혼도 못하고 태영그룹을 내 손에 쥐어주지 않으면, 엄마가 한 짓거리들 모두 까밝힐 거야.”“지금 날 협박하는 거야? 너 진짜 미쳤어?”“그래, 지금 협박하는 거야. 나 미친 거 맞아. 다 너희 때문이잖아! 암튼 난 모든 걸 이미 다 잃었으니 무서운 것도 없어! 그러니까 똑바로 들어. 난 민지훈을 원해. 태영 그룹도 가질 거야. 태영 그룹 전체. 지훈오빠가 민하 그룹이랑 추산 그룹을 합병할 거라며? 둘 다 모조리 가질거야.”민지아는 송진희 앞으로 다가가 더욱더 미쳐가는 웃음소리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엄마 진짜 모습을 다 까발릴 거야. 그때면 지훈 오빠도 자기 엄마의 진짜 모습에 놀라지 않을까? 몇십 년간 엄마라고 불러온 사람이 악마였다는 사실에? 게다가 그때 3층 베란다에서 조연아를 창밖으로 밀친 사람이 엄마라는 것도 내
”이 꼬락서니로 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낳지나 마!”민지아는 두 눈을 부릅뜨고 갑자기 송진희의 손을 잡아 왔다.“내 말, 잘 기억했어? 조연아는 죽어야 하고 오빠랑 그룹 둘 다 나한테 줘야 해!”“그래, 그래 알았어!”송진희는 휘청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민지아는 그녀가 자기 요구에 동의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기쁘다는 듯 소리를 놓고 웃었다.“그래! 이제야 좀 엄마답네! 하하하!”송진희는 가볍게 방문을 닫고 옆에 서 있는 하인들을 향해 말했다.“거기 서서 뭐 해! 빨리 아가씨 방 청소해 드려.”“네.”하인들은 대답한 후 두려움을 무릅쓰고 다시 민지아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집사인 오 씨도 물컵과 약을 들고 송진희 앞으로 다가갔다. 민지훈한테서 쫓겨난 후 다시 송진희 곁에서 일하고 있는데 전부터 송진희와 같이 민 씨네로 왔기 때문에 송진희를 잘 알고 있었다.“사모님, 너무 화내시지 말고 어서 약부터 드세요.”송진희는 심장질환을 앓고 있어 큰 감정 기복은 될수록 피해야 한다. 그녀는 떨린 손으로 오 씨가 건네다 준 물컵과 약을 가져왔다.“사모님, 일단 자기 몸부터 챙기셔야 합니다! 아가씨는…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이미 미치신 것 같습니다. 하인들도 다들 아가씨만은 피해 다닙니다.”“맞아. 쟤 진짜 미쳤어.”마음을 가다듬은 송진희는 살기가 가득 찬 빨간 눈으로 말했다.“미쳤으니까 옆에 둘 필요도 없지. 날 협박하는 사람을 어떻게 옆에 둬? 먼저 쟤부터 해결해 버리고 조연아를 해결할 거야. 절대 지훈이랑 재혼할 기회를 주면 안돼! 내 말을 안 듣는 사람은 모조리 없앨 거야.”“사모님의 뜻은…지아 아가씨를 죽일 겁니까?”송진희는 방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바뀌었다.“걔가 방금 한 말이잖아.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삶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길 바란다며. 죽길 원한다는데 엄마인 내가 도와줘야지. 난 쟤한테 삶을 줄 수도 있고 쟤 목숨도 가져갈 수 있는 사람이잖아.”오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론사에서의 연락을 이 정도로 많이 받아본 것도 처음이지만 연락 중의 대부분이 사생활에 관해 묻고 있었다.“인터뷰?”업무에 집중하느라 인터뷰 영상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네.”조연아는 바로 인터넷에 접속했는데 역시나 온통 민지훈 인터뷰 영상에 대한 검색어가 떠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인터뷰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 1위의 자리까지 차지했다.그녀는 영상을 클릭해 보기 시작했다.-지훈 님이 게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소문일 뿐입니다.-그러면 조 회장님께서 지훈 님이 여자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시는 건 사실이 아니라 그저 커플 사이의 말다툼 뿐인 거네요?-일 부분이 사실이기도 합니다.조연아 말고는 다른 사람들한테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저랑 조연아 씨는 약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 아닌 소문을 퍼뜨린 분들한테는 꼭 끝까지 책임을 묻겠습니다.여기까지 본 연아는 당장이라도 영상 안으로 들어가 민지훈을 향해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이렇게 되면 둘의 사이는 더욱 애매해지게 될 것이다. “민지훈!”화가 난 채로 영상을 바로 꺼버렸다.조연아가 이토록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듯한 비서가 갑자기 이런 생각을 했다.아무래도 지훈 씨를 좋아하기에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아닐까?“언론사에서 연락이 오면 저랑 민지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꼭 말씀해 주세요! 굳이 관계를 따져야 한다면 저희는 그저 이미 이혼한 사이일 뿐입니다.”“알겠습니다. 회장님, 곧 회의 시간입니다.”조연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회의실을 향해 걸어갔다.회의실 안.연아를 본 임원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인사를 했다. 곧이어, 회의가 시작되었다.“회장님, 모노 영상이랑 공동 제작한 걸그룹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D dream》이 이미 준비 단계에 들어섰습니다. 프로그램의 트레이너들은 모두 정했지만, 엠씨자리가 아직 비어있습니다. 모노 영상 측에서도 후보 몇 명을 보내왔는데 여기 있습니다.”조연아 앞에는 이미 후보들의 리스트가 놓여있었다. 조연아는 리스트를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