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작은 사모님께서 방에서 뛰어내리셨어요!”저택 직원들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한편,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조연아는 오장육부가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순간, 희미한 시야로 승자의 자태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시어머니 송진희의 모습이 들어온다.“지훈아... 나 좀 살려줘...”어쩌면 생의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르는 지금까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민지훈 이름뿐이라니.‘기가 막히네...’사람은 죽기 직전 주마등을 본다고 했던가.돌이켜보면 그녀의 인생은 꽤나 비참했다.민지훈, 조연아. 두 사람이 사랑 없는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조연아의 어머니가 세상을 뜬 뒤로 “작은 사모님”으로서의 지위가 점차 위태로워지기 시작했고 결국 이렇게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되다니.사람들이 다들 쇼윈도 부부라고 수군거려도 조연아 본인은 당당했다.누가 뭐래도 그녀가 사랑한 건 민지훈의 와이프 자리가 아니라 민지훈이라는 남자 그 자체였으므로.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 동안 한 남자만을 바라보았던 해바라기 같은 사랑.‘이 길고 긴 짝사랑도 이제 드디어 끝이네...’뜨거운 피가 조연아의 옷을 붉게 적시고 그녀의 의식은 검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얼마나 지났을까?온몸이 부서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과 함께 조연아는 다시 눈을 뜬다.‘여긴 어디지? 천국인가? 아니... 설마 내가 살아있는 건가?’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미처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언제 들어도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깼어?”익숙한 목소리에 조연아의 가는 손가락이 살짝 움찔거렸다.저택에서 추락하기 전 마지막 기억이 떠오르며 하얀 시트를 잡은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애초에 민지훈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다는 걸 알고 시작한 결혼 생활이었기에 남편으로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하지만... 민지훈이 사인한 이
‘나 때문이라고? 내가 죽인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내가 얼마나 바라왔던 아기인데... 지금 이 남자는 도대체 그녀를 어떤 사람으로 보고 있는 걸까? 아이를 이용해 자작극을 벌일 만큼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걸까? 10년 동안 내가 사랑해 온 남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 걸까...’10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민지훈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조연아였다.조연아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 당신 말이 맞아. 이제 연기 그만할래. 난 당신 사랑도 신뢰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 그러니까 내가 이런 꼴을 당하는 것도 전부 내가 자초한 일이지.”두 눈을 질끈 감은 조연아는 투명한 눈물을 억지로 삼켜냈다. 한때 민지훈으로 인해 뜨겁게 불타는 심장이 똑같은 사람으로 인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깊은 심호흡을 한 조연아가 다시 눈을 떴다. 어떻게든 눈물을 떨구지 않으려고 조연아는 침대 시트를 더 꽉 부여잡았다.‘울면 안 돼... 여기서 울면 정말 비참해지는 거야.’“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게 할게. 내 아기... 나 때문에 죽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난 복수를 해야겠어.”이불을 확 젖힌 조연아는 수액 바늘을 거칠게 뽑아내곤 미친 듯이 병실을 뛰쳐나갔다.송진희...‘내 아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절대 못 넘어가.’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고통으로 비틀거렸지만 아이를 잃은 슬픔과 분노는 육체적 고통 따위가 누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거실에서 여유롭게 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송진희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천불이 이는 기분이었다.“당신 때문에... 당신 때문에 내 아이가 죽었어!”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거칠게 내팽개친 조연아가 송진희의 멱살을 잡았다.“얘가 미쳤나!”평소 큰 소리 한번 낸 적 없던 며느리가 미친 여자처럼 달려드니 당황한 송진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이혼하라고 해서 사인까지 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왜 그랬어. 내 아이한테 왜 그랬냐고!”한편, 잔뜩 겁먹은 얼굴로
“제발. 나 좀 믿워줘. 정말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봤어. 날 민 건 분명 어머님이었다고!”훌쩍이던 조연아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민지훈을 바라보았다.‘단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 좀 믿어줘.’하지만 진심으로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민지훈의 얼굴에는 조연아를 향한 경멸만이 가득했다.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한 민지훈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놓았다.‘아, 이 남자는 날 믿지 않는구나. 내가 아무리 해명해도 내 말 따윈 듣지 않겠구나...’말보다 확실한 행동에 조연아는 절망스러웠다.남들 앞에서는 누구보다 인자하고 고상한 사모님인 송진희가 그녀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악독한 시어머니라는 걸, 사람들 앞에서는 착하고 애교 많은 민지아가 사실은 누구보다 가식적인 사람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면 좋을까?조연아가 아무리 목이 터져라 외쳐도 사람들의 눈에 그녀는 영원히 악녀일 뿐이었다.정신력으로 겨우 버텨오던 다리가 휘청이던 순간.“조연아, 나가. 다신 너 보고 싶지 않아.”이 말을 마지막으로 민지훈은 저택을 나섰다.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조연아는 드디어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그리고, 아들 앞에서는 그렇게도 억울한 척하던 송진희, 민지아가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너도 참 멍청하다. 지훈이 내 아들이야. 설마 정말 네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네?”팔짱을 낀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송진희는 패자를 경멸하는 승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네가 아직도 너희 집안에서 오냐오냐 떠받들던 공주님인 줄 알아? 너희 엄마는 죽었고 너희 아버지는 벌써 내연녀, 사생아랑 살림까지 차렸다면서. 추산그룹도 너희 그 덜떨어진 삼촌이 물려받았다면서? 부모 사랑도 재산도 이제 네 몫은 없어. 그 잘난 집안 하나 믿고 우리 집에 시집온 거잖아? 이제 네 이용 가치가 없어졌으니 이만 떨어져 나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차가운 바닥에 누운 조연아는 멍한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보았다.온몸이 욱신대는 고통보다 송진
하지만 추현의 분노에도 송진희, 민지아 두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피식 웃은 송진희가 한 발 앞으로 다가섰다.“추현도 죽었겠다. 그 집안에 얘 편 들 수 있는 사람이 있긴 해? 아, 당신? 당신이 뭔데.”추연이 다시 화를 내려던 그때, 이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진 조연아가 스르륵 쓰러졌다.“연아야!”깜짝 놀란 추연의 목소리가 저 동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연아야! 정신 좀 차려봐. 어머, 피가...”하체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발견한 추연의 안색 역시 창백해졌다....‘꿈인가?’깊은 잠에 빠진 조연아는 신혼여행 날의 꿈을 꾸었다.다른 점이라면 혼자 있었던 현실과 달리 민지훈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었다.‘아, 꿈이구나...’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조연아는 밝게 웃어 보였다. 깨어나 곧 맞이할 현실이 아무리 잔혹하다 해도...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코를 찌르는 소독수 냄새와 규칙적인 기계음은 다시 그녀를 현실로 끌어당겼다.“윽...”겨우 눈을 뜬 조연아가 얕게 신음을 내뱉었다.“연아야?”그 소리를 들은 추연이 벌떡 일어섰다.“이모...”초췌해진 안색의 추연이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너 이틀이나 누워있었어. 이모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지금은 좀 어때? 아직도 많이 아파?”“이틀이나 누워있었다고요?”조연아는 아직도 천근만근인 머리를 굴려보려 애썼다.“그래. 출혈이 심했는데 다행히 잘 잡혔대. 절대 안정이라니까 당분간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고마워요, 이모.”“가족끼리 고맙다는 말 하는 거 아니야. 정 고마우면 얼른 낫든가.”조연아를 위해 물을 따라준 추연이 물었다.“그런데... 너랑 민 서방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이혼이라니.”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가족들은 민지훈에 대한 조연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지독한 시집살이와 남편의 냉대에도 그에 대한 사랑 하나만으로 지옥 같은 결혼생활을 버텨온 그녀인데 왜 갑자기
이렇게 된 이상 더 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추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양조장에 문제가 좀 생겼어. 연준이는 지금 양조장에 거의 갇힌 신세고. 지금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양조장?’양조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조연아는 바로 이불을 젖혔다.하지만 두 다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이 세포 하나하나를 가득 메웠다.하지만 하나뿐인 동생이 양조장에 갇힌 상황, 짐승보다 못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생각하면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연아야,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추연이 미친 사람처럼 병실을 뛰쳐나가는 조연아의 뒤를 따랐다.한편, 민하그룹 회의실.왠지 모를 긴장감에 다들 애꿎은 침만 삼키고 있던 그때, 문자를 확인한 오민이 민진훈의 곁으로 다가갔다.가장 상석에 앉은 민하준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말하세요.”“아, 사모님... 아니, 조연아 씨가 깨어났답니다. 그런데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긴 건지 병원을 뛰쳐나갔다는데요...”빠각!펜촉이 부러지는 소리가 조용한 회의실에서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업무 보고 중이던 부장마저 그 소리에 겁을 먹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뭐야, 왜 갑자기 표정이 저렇게 안 좋아지신 거지.’‘아, 진짜 다음 차례가 우리 부서인데. 하필...’한참을 침묵하던 민지훈이 차갑게 한 마디 내뱉었다.“그래서요?”“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군요. 죄송합니다.”“큼큼, 다음 분기는...”오민이 눈치껏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부장은 자연스레 다시 보고를 시작했다.방금 전 해프닝은 꿈인 듯 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어딘가 더 무거워진 분위기에 부장들의 마음은 더 서늘해졌다....부슬부슬 내리는 겨울비가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날...부랴부랴 달려온 조현아의 시야로 엉망이 된 양조장과 백장미, 조연준의 모습이 들어온다.“조연준, 유운주 제조법 당장 말하라고.”차가 채 멈추지도 않았음에도 뛰어내린 조연아가
“너... 지금 날 때린 거야? 어쨌거나 난 네 새엄마야!”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의 백장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뭣들 하고 있어! 당장 잡아! 이 두 연놈들이 유운주 제조법을 말하기 전엔 절대 내보내지 마!”백장미의 호통에 경호원들이 바로 조연아의 두 팔을 제압했다.“이거 놔!”조연아가 거칠게 반항해 보아도 두 장정과 힘 싸움으로 이길 리가 없으니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백장미, 당신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당장 그 손 안 놔?”뒤이어 따라온 추연이 달려들었지만 역시나 경호원들에게 잡혀 꼼짝도 하지 못했다.“연아는 민 회장님이 직접 고르신 며느리야. 그런 연아한테 이렇게 하고 넌 무사할 줄 알아?”“민 회장?”하지만 백장미는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죽을 날 받아놓은 영감탱이가 뭘 어떻게 할 건데. 애비한테도 버림받고 남편에게도 버림받은 애야. 이런 대접 받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백장미!”추연의 외침에도 백장미는 개의치 않았다.“뭘 가만히 있어. 움직여. 말로 해서 안 통하니 몸 고생 좀 해봐야지.”백장미의 명령에 몽둥이를 든 경호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가녀린 그녀의 몸에 몽둥이세례가 이어졌지만 맑은 눈동자에 담긴 증오의 감정만은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또각또각.그녀의 앞으로 다가온 백장미가 뾰족한 하이힐 굽으로 조연아의 등을 꾹 찍어 눌렀다.“유운주 제조법 너도 알고 있지? 어차피 다 말하게 되어 있으니까 그냥 말해. 괜히 더 버텨봐야 몸만 상하잖아.”하지만 조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조인주업의 생명과도 같은 유운주의 제조법을 말하느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였다.‘하지만... 운 좋게 살아남는다면 무조건 복수할 거야.’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조연아를 노려보던 백장미가 코웃음을 쳤다.“하, 좋아.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두고 봐.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 있을지 두고 볼 테니까.”빠각.등뼈가 부러진 듯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조
민지훈을 발견한 추연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백장미를 향해 소리쳤다.“백장미! 네가 무슨 자격으로 민 서방이라는 말을 입에 올려!”조연아도 애써 고개를 들어 민지훈을 바라보았다.‘정말... 나 때문에... 날 구해주려고 온 건가.’11년 동안 일편단심으로 민지훈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한때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했으니 위기의 순간 그녀를 구해줄 정 정도는 있을 거라 믿었다.떨리는 손으로 민지훈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조연아가 입을 벙긋거렸다.도와달라고, 살려달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구멍이 꽉 막힌 듯했다.“지... 지훈 씨...”겨우 한 마디 내뱉은 조연아가 눈물 섞인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았다.진심을 담은 이 눈빛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길 바라며...하지만 차가운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던 민지훈은 쓰러진 그녀를 향해 손조차 내밀지 않았다.“또 이런 식이지. 이렇게 연기하는 거 지겹지 않아?”네 수작 따위 내 손바닥 안이라는 듯 경멸 어린 시선, 차가운 목소리.잠시나마 불꽃을 틔웠던 희망이 차가운 빗방울과 함께 식어버렸다.‘역시... 넌...’민지훈의 바지를 잡았던 그녀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그 모습에 잠시나마 긴장했던 백장미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민 서방 안으로 들어와...”“들으셨겠지만 저 조연아랑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민 이사라고 불러주세요.”“그... 그게 무슨...”백장미의 얼굴을 가득 채웠던 아부 섞인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민지훈의 비서 오민이 한 발 앞으로 다가서며 대신 대답했다.“민 대표님께서 조인주업의 지분 55%를 인수하셨습니다.”지분 55%?다리에 힘이 풀린 백장미의 하이힐이 순간 삐끗거렸다.절반이 넘는 지분, 즉 지금 이 시간부로 민지훈이 조인주업의 대주주가 된 것이었다.“제 사업장에서 누가 죽어 나갔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차분한 말투와 달리 민지훈의 눈동자는 차갑게 번뜩였다.잠깐의 시간 동안 부리나케 머리를 굴린 백장미는 빠르게 상황
오민이 어떻게든 버티려는 추연을 억지로 병실에서 내보내고 다시 조용해진 병실.조연아를 꼭 안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연기 좋았어.”단호한 말투에 조연아의 몸이 순간 움찔했지만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그게 무슨 소리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큭.”피식 웃던 민지훈이 하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상관없어. 연기가 맞든 아니든 난 협조할 테니까.”“...”말없이 민지훈의 품에 안긴 조연아의 눈동자가 살짝 가라앉았다.‘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내 연기는 완벽했어. 그런데 왜... 들킨 걸까?’“나 피곤해.”대충 핑계를 대고 민지훈의 품에서 벗어난 조연아는 그를 등진 채 돌아누웠다.“재워줄까?”‘예전의 조연아라면 분명 그래 달라고 하겠지.’한편, 이미 들킨 거나 마찬가지지만 모르쇠를 대기로 했으니 조연아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어떻게 재워줄까?”이때 조연아의 곁으로 훅 다가온 민지훈의 숨결이 그대로 그녀의 귀를 적셨다.‘미친 변태자식.’여전히 눈을 굳게 감은 조연아의 볼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착잡한 그녀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건지 조연아의 볼에 뽀뽀를 하고 이불까지 잘 덮어준 민지훈은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눈을 감고 있고 돌아누워 등까지 진 상태였지만 그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어지러운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조연아는 방금 전 추연의 말과 반응들을 다시 떠올렸다.‘추신수... 그 자식이 날 물속으로 잡아당길 때 분명히 봤어. 목에 걸린 옥 목걸이를.’그 옥 목걸이는 조연아의 어머니와 추연 두 자매의 어머니, 즉 조연아의 외할머니가 두 딸을 위해 특별 제작한 유일무이한 팬던트였다.‘하지만 엄마가 하고 있던 팬던트는 6년 전에 이미 깨졌어. 유품 정리할 때 분명 확인했다고. 그럼 추신수 목에 걸린 건 이모 거란 소린데... 이모 팬던트가 왜 추신수한테 있는 거지?’한번 불씨를 튼 의심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추신수
“너무 무리하지 마.”민지훈이 조연아를 끌어안았다.아무런 저항 없이 얌전히 안긴 모습, 모든 게 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이때 밖에서 요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뭐? 연아가 기억상실증? 그럴 리가 없어. 내가 당장 들어가서 확인해야지.”“이모님,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나 연아 이모야. 무슨 자격으로 날 막아!”그렇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들어온 추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리고 다급하게 그 뒤를 따르던 오민도 눈을 질끈 감았다.‘세상에 두분 지금... 서로 안은 거 맞지?’“이모.”이때 추연을 발견한 조연아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이모도 왜 병원복 차림이에요? 이모도 어디 아파요?”“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충격을 받은 추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는 거야?”“네.”그리고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울화가 치미는 추연이었다.“민 대표, 두 사람 이렇게 스킨십하는 거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봤어 봐. 우리 연아 입장이 얼마나 난처해지겠어? 두 사람 이미 이혼한 사이잖아.”“이혼이요?”조연아가 깜짝 놀란 얼굴로 민지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우리 언제 이혼한 거야?”“이혼”이라는 단어에 기분이 상한 민지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이모님, 이만 나가주시죠. 이모님도 다치셨는데 푹 쉬셔야죠.”오민 역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네, 의사선생님께서 이모님도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얼른 가시죠.”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추연이 아니었다.“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기억상실증에... 걱정하지 마. 잃어버린 기억은 천천히 되찾으면 되니까. 아니, 영원히 찾지 못해도 상관없어. 그 동안 있었던 일 이모가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 줄 테니까. 네 옆에 서 있는 이 남자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을 당할 뻔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이 왜 이혼하게 된 건지 전부.”하지만 조연아의 맑은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했다.“이모 말
“환자분,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검사를 마친 의사가 물었다.말없이 고개를 저은 조연아는 또다시 공허한 눈빛으로 민지훈을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대표님, 환자분 뒤통수에 생긴 상처는 아마 며칠 동안 통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이고 뇌출혈 증상도 없으니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네.”의사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민지훈의 시선은 여전히 조연아를 향해 꽂혀있었다.“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민지훈을 향해 꾸벅 인사를 남긴 의사가 병실을 나서려던 그때, 조연아의 목소리가 조용한 병실의 정적을 깨트렸다.“저... 어떻게 다친 거죠?”그 질문을 들은 순간, 의사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환자분, 어떻게 다치셨는지 기억 안 나십니까?”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던 조연아는 민지훈을 돌아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여보, 나 어떻게 다친 거야?”“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여보?’확실히 어딘가 이상한 모습에 민지훈은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아, 남편이라는 호칭 불편해? 미안. 그러니까 그렇게 화난 표정 짓지 말아줘.”3년 전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조심스럽고 겁 많은 새 같은 모습. ‘뭐지?’혼란스러웠지만 민지훈은 애써 미소를 지어보였다.“아니. 남편 맞아. 화난 거 아니야.”그리고 다시 의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민지훈이 꾸짖 듯 물었다.“별문제 없다면서요. 이게 무슨 상황이죠?”당황스러운 건 의사도 마찬가지였다.“그러게 말입니다. 뒤통수 가격으로 인해 출혈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외상일 뿐입니다. 기억상실증까지 올 수준은 아닌데요... 물에 빠진 뒤 잠깐의 익수가 있었지만 구조가 빨랐기에 뇌손상도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도 기억을 잃은 거라면 트라우마로 인한 단발적인 기억상실증이 큽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그럼 가장 실력 좋은 의사로 컨택해 주세요.”“네.”의사를 비롯한 의료진들이 빠르게 병실을 나서고 조용해진 병실, 조연아의 옆에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여전히 걱정스레 민지훈을 바라보던 오민은 뭔가 결심한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그래. 욕 먹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얘기는 해야 해.’“저기... 대표님. 지금 총알을 빼내지 않으면 심각한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 씨가 깨어나고 나서 대표님 이런 모습 보면 얼마나 속상해하겠어요. 아니, 어쩌면 화를 낼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행여나 앞으로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면 큰 결함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다른 라이벌들 이길 수 있으시겠어요?”민지훈이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는 건 조연아뿐이라는 걸 알고 있는 오민은 자극 요법을 사용했다.“대표님. 제발 연아 씨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세요!”그제서야 살짝 흔들리던 민지훈이 결국 일어섰다.“그래요. 치료하죠.”“네, 네.”잠시 후, 역시 수술실로 옮겨진 민지훈은 바로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뒤 마취가 풀리기도 전에 바로 조연아가 있는 응급실로 달려갔다.그리고 조연아가 이런 저런 검사를 받고 큰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그녀와 함께 VIP 병동으로 입원까지 할 수 있었다.한편 이 모든 걸 지켜보는 오민은 걱정되는 마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를뿐이었다.누구보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민지훈이 사랑 때문에 이 정도로 충동적으로 움직이다니. 이게 사랑의 힘인가 싶었다.‘연아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연아 씨가 깨어나야 저희 대표님 좀 쉬실 거 같으니까...’...조용한 병실, 차가운 달빛이 커튼을 넘어 침대를 비춰주었다.민지훈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은 조연아의 손을 꼭 잡았다.‘연아야... 제발...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널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힘든 건 다 내가 감당할 테니까 넌 그냥 행복만 해줘.’...한편 조연아는 깊은 꿈속을 걷고 있었다.오로라를 기다리던 그날 밤,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자가 나타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귓가에 다정한 사랑의 말을 건네는 꿈이었다.하지만 다음 순간,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그녀를 불바다 속으러 밀어버리고
가슴을 움켜쥐고 바다에 추락하는 걸 바라보는 조연아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그리고 그런 조연아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던 민지훈이 한 마디 내뱉었다.“겁 먹지 마.”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조연아의 얼굴에서는 조금의 핏기도 느껴지지 않았다.민지훈의 요트가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이제 정말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바다에 빠졌던 추신수가 불쑥 수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요트 난간을 부여잡은 추신수가 악에 받친 얼굴로 조연아의 다리를 잡아끌었다.“으악!!”비명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사방에 튕기고 그와 동시에 민지훈은 망설임 없이 바다에 뛰어들었다.“대표님!”이에 오민 역시 짧은 고함과 함께 바다에 몸을 던졌다....두려울 정도로 조용한 바다...방금 전까지 시끌벅적하던 소음이 전부 사라지고 턱턱 막히는 숨이 이곳이 물속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아... 이렇게 죽는 건가...’의식이 아득하게 사라지고 천근만근 무거운 몸에선 더 이상 바닷물의 차가움마저 느껴지지 않았다.바로 그때, 탄탄한 팔이 그녀를 꽉 껴안고 빠르게 수면위로 올라갔다.하지만 민지훈과 조연아가 모습을 드러낸 순간 탕탕탕 소리가 들려왔다.갑판 위에 남은 남자들이 해수면을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한 것이다.조연아를 꽉 끌어안은 민지훈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총 따위 무섭지 않아.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연아만 무사하다면...’한편, 거센 기침과 함께 눈을 뜬 조연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바닷물에 엉망으로 젖었음에도 여전히 멋진 민지훈의 얼굴이었다.쿵.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과 함께 위급한 이 상황이 잊혀질만큼 마음속 한 구석에 묘하게 따뜻해졌다.“탕!”비처럼 쏟아지는 총알이 민지훈의 팔을 관통하고 피가 뿜겨져나왔다.“민지...”바다 내음인지 피냄새인지 헷갈리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지만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극심한 고통에 조연아의 의식은 다시 저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원들이 갑판
추신수의 말대로 저 멀리 수평선 뒤로 다가오는 요트들을 발견한 조연아는 살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다시 무겁게 가라앉고 말았다.‘또... 민지훈이라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는 건가?’이때, 그녀의 머리채를 홱 잡은 추신수가 총구로 그녀의 머리를 겨누었다.“허튼 짓 할 생각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아무리 구조 요트로 도망쳐 봤자 쾌속 요트의 추격을 따돌릴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추신수는 조연아를 미끼로 쓰기로 결정했다.“민지훈. 이 여자 머리에 구멍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당장 멈춰.”추신수가 무전기를 사용해 소리쳤다.한편, 인질로 잡힌 조연아를 발견한 민지훈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곧 모든 요트들이 멈춰서고... 방금 전까지 당황한 표정이던 추신수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하, 전 와이프한테 남은 미련이 그렇게 많아? 그 유명한 민지훈 대표가 이렇게 순정남일 줄 몰랐어. 우리 동생 어디가 그렇게 매력적이길래 잊지를 못하실까? 뭐 침대에서 끝내주나 보지? 하하하.”추신수의 음담패설에 오민이 확성기를 빼앗아들고 소리쳤다.“추신수 씨, 이쯤에서 그만 하십시오. 당신이 저희 대표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괜한 발버둥치지 말고 조연아 대표 풀어주세요.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하지만 오민의 경고가 굉장한 농담이라도 되는 듯 추신수는 웃음을 터트렸다.“그만 해? 의미없는 발버둥? 하하하, 정말 의미없는 발버둥일까? 조연아가 내 손에 있는 한 민지훈은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 너희 잘난 대표님 얼굴 좀 봐. 날 찢어죽이고 싶은데 어쩌할 방도가 없는 저 모습을.”“원하는 게 뭐야?”민지훈이 물었다.“아, 역시 통쾌하셔.”추신수가 피식 웃었다.“요트 한 대만 가까이 붙여. 조종수 한 명만 남겨두고.”잠시 후, 그의 주변으로 다가오는 요트를 바라보며 추신수는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그만!”“너, 뛰어내려.”추신수가 배에 타고 있는 오민을 향해 말했다.조연아가 인질로 잡힌 상황인데다 어차피
정신을 잃기 일보 직전인 추연의 모습에 조연아가 소리쳤다.“이모, 이모. 정신 좀 차려봐요. 이모.”겨우 눈을 뜬 추연아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털썩.남자들의 손길대로 움직이다 그대로 갑판 위에 쓰러진 추연을 바라보는 조연아는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그녀 역시 꿈쩍도 할 수 없는 터라 그저 애타게 소리칠 뿐이었다.“이모! 이모!”그녀의 목소리가 추연에게 닿아 정신을 지키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이모랑 사이가 이렇게 좋았어?”한편, 흥미롭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추신수가 피식 웃었다.“너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연이 이모는 너한테도 이모잖아.”“동생아, 내가 그걸 모를까 봐? 내가 가족, 핏줄 그런 데 얽매이는 사람처럼 보여? 그럴 거면 애초에 납치도 하지 않았어. 너희 두 사람 오늘 절대 살아서 여기서 못 벗어날 거니까 쓸데없는 기대 따위 하지 마.”추신수가 음침한 미소에 순간 소름이 돋는 조연아였다.“너... 진짜 미쳤구나? 왜? 나랑 이모 다 죽이고 스타엔터 네가 차지하려고?”“그래. 네 말이 맞아.”그 와중에 여유롭게 총구를 닦던 추신수가 말을 이어갔다.“솔직히 널 죽인다고 해서 내가 스타엔터를 차지할 거란 보장은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네가 살아있는 한 그 회사가 내 몫이 될 수는 없다는 거야. 그리고 어차피 사람들도 내가 널 죽였다곤 상상도 못할걸. 여기서 물고기밥이 되어서 시체도 못 찾을 텐데. 안 그래?”“너... 신수야, 너 어떻게 그런 짓을.”바닥에 쓰러져있던 추연이 소리쳤다.“아무리 미워도 우린 피를 나눈 가족이야. 어떻게 가족한테 이런 짓을 해... 넌 죄책감 같은 것도 없어?”“죄책감?”한발 앞으로 다가간 추연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죄책감 그게 밥 먹여줘? 돈만 가질 수 있으면 난 뭐든 할 수 있어.”말을 마친 추신수는 추연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이모!”“왜 그런 눈으로 봐?”추신수가 증오로 번뜩이는 눈빛의 조연아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배 위야. 동해일 가능성이 크고.”망망대해라 어디가 어딘지 알 순 없었지만 임천시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해라 그렇게 추측한 것이었다.“신수가... 신수가 벌인 짓이야. 네 얼굴 직접 보고 사과하려고 했는데 거기서 추신수 그 자식을 만났어. 그리곤 바로 쓰러졌고.”피 묻은 추연의 옷을 바라보던 조연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이모, 자세한 설명은 안전해지면 그때 해주세요. 지금은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추신수 그 미친 자식이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몰라. 구조정... 이 정도 규모의 배라면 구조 보트 같은 건 있을 거야. 그걸 타고 여기서 벗어나야 해.’하지만 추연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연아야. 난 신경쓰지 말고 너 먼저 가... 이모는 도저히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괜히 따라나서봤자 너한테 짐만 될 거야.”“이모...”“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얼른 가. 이러다간 우리 둘 다 꼼짝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거야.”어느새 추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려왔다.“아니요.”하지만 조연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저 이모 버리고 못 가요.”“어차피 신수 타깃은 내가 아니라 너야. 당장 나한테 무슨 짓을 하진 못할 텐까 너라도 일단... 일단 도망쳐. 그리고 사람들이랑 다시 와서... 날 구해줘.”출혈이 너무 심해서인지 어느새 힘이 빠진 추연은 자꾸만 의식이 흐릿해져만 갔다.“그러니까 어서 가.”그리고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추연은 조연아의 손을 뿌리쳤다.“얼른 가. 얼른!”“그럼... 저 올 때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버텨야 해요. 알겠죠?”조연아가 입술을 깨어물었다.추연 말대로 지금은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릴 때가 아니었다.어떻게든 누구라도 도망쳐 사람들을 불러오는 것, 그게 두 사람 모두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마음을 독하게 먹고 갑판으로 나선 조연아는 한쪽에서 구조 요트를 발견했다.‘저기 있다.’그런 그녀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차가운 총구가 그녀의 뒤통수를 겨누었다.“하, 내가 정말
꽤 규칙적인 흔들림 속에서 조연아는 부스스 눈을 떴다.머리는 지끈거리고 사지에 힘은 풀린 와중에 피 냄새까지 풍겨왔다.칠흑같은 어둠속 나무판 사이 틈으로 흘러드는 빛 한줄기 덕에 조연아는 본인이 어디 있는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여긴 배...잖아?’조연아는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다시 돌이켜보았다.‘이모가 쓰러져있는 걸 발견하고 나서 나도 공격받았어. 아, 이모... 이모는 어디 계시지?’조연아가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잡동사니로 가득 들어찬 방에는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주위를 둘러보던 조연아는 구석에서 날카로운 철편 하나를 발견했다.어두운 이 공간에서 밧줄을 자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도구.힘겹게 꿈틀거리며 조금씩 이동하던 그때, 바깥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헉, 뭐지?’당황한 조연아는 바로 그 자리에 누운 채 아지 깨어나지 않은 척 눈을 질끈 감았다.역시나 다음 순간, 문이 열리고...조연아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는 걸 확인한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이 여자 상당히 발칙한 X이라니까 조심해. 그리고 이 여자 이모는 옆방에 있으니까 종종 들여다보고. 어촌에서 잡아온 여자들이랑 노닥거리지 말고.”“참나. 형님, 저도 사내입니다. 저딴 여자 두 명 상대 못할까 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그럼에도 “형님”이라고 불리는 남자는 당부를 이어갔다.“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 스타엔터 조연아 대표라고. 보통 여자가 아니야.”“대표면 뭐요. 결국 힘없고 약한 여자 아닙니까. 게다가... 얼굴에 몸매도 반반한 것이... 한 번 건드려보고 싶은데요?”“어허. 너만 그러고 싶은 줄 알아? 나도 사실은... 엘리트 여자랑 해보는 건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거든.”역겨운 주제에 배멀미까지 더해져 순간 밀려오는 구역질을 조연아는 억지로 참아냈다.잠시 후, 남자들이 방을 나서자 다시 번쩍 눈을 뜬 조연아는 꿈틀거리며 철조각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으윽...”겨우 철조각에 손이 닿아 손발을 묶은 밧줄을 풀어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