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당신은 다시 깨어난다 해도 절대 모를 거야.”“당신 실력이 나보다 못하다는 걸.”“내가 진지하게 마음먹고 덤볐더라면 당신은 내 한주먹 거리도 안 돼.”“섬나라 검객의 수준이란 게 겨우 이 정도 수준인 거지.”하현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솔직히 말해서 난 당신네 섬나라 사람들한테 좀 실망했어.”“실력은 얼마 되지도 않으면서 쓸데없는 계략이나 펼치는 게 안타까울 뿐이야.”“그나저나 당신들은 왜 날 이렇게 미워하는 거야? 왜 매번 날 죽이려는 거냐고?”“아쉽게도 당신들 마음대로 되진 않을 거야.”천도는 이를 악물고 하현을 노려보며 말했다.“이놈아, 이번에는 네놈을 죽일 수 없었지만.”“우리 섬나라에는 고수들이 많아.”“끊임없이 몰아치는 우리의 공격을 네놈이 막아낼 성싶으냐?! 천만에!”“네놈은 조만간 곧 죽을 거야!”하현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안타깝지만 당신이 지금 곧 죽을 것 같은데!”말을 마치자마자 하현은 반쯤 무릎을 꿇은 천도를 발로 걷어서 넘어뜨렸다.천도는 또 ‘푸'하고 피를 뿜었다.“개자식!”하 총관 일행은 분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그들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았던 고수가 뜻밖에도 하현에게 발길질을 당해 땅바닥에 널브러질 줄은 몰랐다.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지금 하현이 천도의 신분을 폭로해 버렸지만 하 총관 일행은 죽은 개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이 하현이었으면 했었지 천도가 이럴 지경이 되길 바라지 않았다.“당신의 반란은 여기까지야. 여기서 끝내자고.”하현은 천도의 목을 우지끈 밟았다.“당신을 죽이면 텐푸 쥬시로는 마지막 희망을 잃게 되겠지.”“그러면 아마 텐푸 쥬시로도 순순히 십 년 전 일을 털어놓을 거야.”“그러니까 성가시니까 당신은 이제 그만 가 주어야겠어.”하현은 발밑에 힘을 주려고 몸을 슬쩍 기울였다.그러나 하 총관이 얼굴을 가린 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그만!”“개자식아
하현의 말에 하 총관의 얼굴에는 분노가 들끓었다.“하현, 네놈이 떠벌리기 좋아하고 공명심에 혹할 놈이란 건 진작에 알았지!”“그리고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의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천도 어르신에게 섬나라 스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거야!”“이런 핑계를 대고 겉으로 번지르르한 명분을 얻으려는 수작이잖아!”“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절대 네놈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천도 어르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지껄이지 마!”“그가 정말 섬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을 위해 오랫동안 성심을 다해서 노부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거지 그게 어떻다는 거야?”“노부인이 오랫동안 천도 어르신을 신뢰한다는 게 그가 충직하다는 증거 아니겠어? 아무 문제없다고!”“네놈이 함부로 지껄이면서 천도 어르신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네놈은 대하와 섬나라 국정에도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될 거야!”“그렇게 된다면 네놈이 어떻게 책임을 질 거야?”“게다가 어쩌다 음모와 계략을 써서 네놈이 천도 어르신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네놈의 진짜 실력이 아니야.”“네놈은 그냥 허풍이나 떨고 우쭐하는 놈에 지나지 않아! 분명해!”“날 더 이상 자극하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네놈을 죽을 수도 있다고!”하 총관이 경고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자 하현에게 걷어차인 십여 명의 남자들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왔다.이번에는 그들도 많이 각성했는지 정신이 바짝 든 얼굴들이었다.그들은 몸에 지닌 총을 만지며 안전장치를 풀었다.하현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들 총 앞에서는 당당할 수 없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십여 명이 든 총구가 일제히 하현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천도는 어느새 오만방자한 눈빛으로 돌아와 사납게 웃어젖혔다.“하현, 넌 매우 센 놈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인 것 같군!”“항성과 도성에서는 노부인이 날 비호해 주고 있지. 누가 날 건드릴
천도가 죽었다!천도의 얼굴에는 충격과 분노, 원망이 버무려진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그는 이렇게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치밀하게 계획했던 일이 하현의 손에 속절없이 당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하 총관이 이미 노부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누차 경고까지 했다.그래서 천도는 감히 하현이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현은 그 누구의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뜻대로 해 버렸다.누가 이런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섬나라에선 네놈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이 자를 죽이지 않으면 필시 섬나라가 망하게 될 거야!”칼날이 가득 박힌 듯한 그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울분과 분노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한 깊은 걱정까지 담겨 있었다.그러다 천도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하 총관 곁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시간이 멈춘 듯 깊은 정적이 흘렀다.천도...전설 속에 존재하던 항도 하 씨 가문 최고 고수.오랫동안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신분을 속이고 잠복해 있던 신당류의 종주.일대의 전신!시대의 검객!천도가 이렇게 패하다니!?이대로 죽다니!?게다가 하현의 발에 목이 밟혀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하다니!하 총관 일행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은 자신들의 경고에도 하현이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충격적인 결말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도대체 하현의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하수진마저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녀의 머릿속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하현이 천도를 죽였다는 건 노부인과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의미다.“죽여!”“저놈을 죽이고 천도 어르신의 원수를 갚아라!”하 총관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분노를 씹어 먹은 사람처럼 으르렁거렸다.“어서 쏴! 갈기갈기 찢어 버려!”눈앞에서 한바탕 격전이 벌어질 판이었다.만약 자신
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난 항도 하 씨 가문을 대신해 오랜 스파이 한 명을 처리했어요.”“고맙다고 하면 그만이지 뭘 이렇게 말들이 많아요.”“정말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못할 줄 알아요?”하 총관은 한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의 일을 언제 외부인이 이렇게 왈가왈부하게 된 거야?”“우리 항도 하 싸 가문에 함부로 끼어든 결과가 어떨지 네놈이 생각이나 해 봤어?”“얼른 무릎이나 꿇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널 상대해 줄 테다! 그때 가서 날 탓하지나 마!”하 총관은 위협적인 얼굴로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언제부터 하인들이 감히 항도 하 씨 가문을 대표한다 어쩐다 큰소리를 치게 된 거지?”위엄 있고 당당한 목소리였다.순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돌아서서 산길 쪽을 쳐다보았다.말끔한 당나라 복장을 한 하문준이 뒷짐을 지고 유유히 걸어 나왔다.그는 곁에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마치 정원을 산책하듯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그러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항도 하 씨 가문의 위엄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졌다.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현에게 다가와 차가운 눈빛으로 하 총관과 그의 일행들을 훑어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노부인의 체면을 봐서 한 손만 자르는 걸로 하고 그만 꺼져.”“문주 어르신!”하 총관은 이를 살짝 깨물었다.분명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노부인을 등에 업고 항도 하 씨 가문을 호령했었다.그러나 문주 앞에서는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그렇다 하더라도 순순히 손 한 쪽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하 총관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제가 여기 온 것은 노부인의 뜻이었습니다!”“문주 어르신은 노부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싶으면 따르지 않으셔도 됩니다.”“제 손을 자르시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하지만 정녕 노부인과 척을 질 생각이십니까?”하문준은 담담하게 말했다.“척을 진다?
”네놈이!”하문준이 발을 내디디며 미친 듯이 포효했다.사방 10여 미터의 모래와 자갈들이 흩날렸다.많은 사람들은 문주의 기세에 놀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이 광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청삼을 입은 집사들은 총을 든 채 주춤거리며 물러섰고 입가에는 선혈이 가득 고여 있었다.그때 하 총관의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순간 그의 무릎이 ‘풀썩’하고 주저앉았다.그는 무릎을 꿇고 싶어서 꿇은 게 아니었다.하문준이 폭발하자 그 기세에 눌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결국 무릎을 내어 놓은 것이었다.항도 하 씨 가문 문주의 기세는 역시 달랐다!어느 것에도 비할 데 없이 강했다!방금 숨을 거둔 천도도 충분히 기세가 강한 사람이었다.하지만 문주가 보여준 기세는 아까 천도가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하 총관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하현은 하문준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하문준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자신이 지금까지 문주를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그제야 하현을 깨달았다.상위 10대 가문, 5대 문벌, 4대 초석...상위권 권력자들 중 그 누구도 쉬운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오늘 하문준이 나타난 것은 그가 노부인의 체면을 더 이상 세워 주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하문준은 뒷짐을 지고 무릎을 꿇은 하 총관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말해 봐. 하 총관은 왜 이렇게 나한테 무례한 거지?”“죄, 죄송합니다. 문주 어르신!”하 총관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고 얼굴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제가 어르신께 많은 심려를 끼쳤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지금 바로 물러가겠습니다!”하 총관은 하문준이 평소에 점잖고 말수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 기세를 제압하는 능력은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문준이 제대로 폭발하자 하 총관은 그동안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이것은 그가 한평생 갈고닦아도 넘볼 수 없는 격차였다!“문
천도가 숨을 거둔 날 오후.하현은 항성에 있는 마리아 병원에 나타났다.이곳은 항성에서 가장 유명한 개인병원이자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첨단 장비와 우수한 의료 기술 때문에 유명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항도 하 씨 가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관리가 용이하다는 것이었다.이 지역을 관리하는 주체는 항도 하 씨 가문 호위대였고 하구봉이 그 책임자였다.텐푸 쥬시로는 항성으로 끌려온 후 줄곧 반쯤 혼수상태에 있었다.하구봉은 마리아 병원의 최상층을 텐푸 쥬시로의 특별 관리 구역으로 사용했고 얼마나 많은 호위대들이 배치되었는지 모르지만 파리 한 마리도 여기서 날아갈 수 없을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하현이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동자가 얼마나 많은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이들 눈동자에서는 말할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가 녹아들어 있었다.누굴 찾고 말고 할 것 없이 이 사람들이 바로 섬나라에서 유명한 저격수들임을 하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신당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신당류가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킬러들이었다.물론 그 배후에는 5대 문벌과 5대 유파가 이들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여기는 항성이고 텐푸 쥬시로가 하현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 쥐새끼 같은 사람들은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다.하현은 쥐새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문 앞에 서서 하구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하구봉은 왠지 주위의 음산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하현을 보자마자 하구봉은 쓴웃음을 금치 못하며 다가와 말했다.“하현, 내가 요 며칠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하구천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서 항성과 도성에서 날 못 쫓아내 안달이라고!”“가장 힘든 건 텐푸 쥬시로를 지키는 거야. 그를 지키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하루에 최소 50명 이상의 섬나라 사람들이 덤벼든다니까.”“닌자, 킬러, 음양사, 검객... 아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이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하현, 농담하지 마!”“우리가 텐푸 쥬시로의 스승이 누구인지 모르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아니, 설령 우리가 안다고 해도 텐푸 쥬시로는 한 세대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전신이자 최고의 검객이라고.”“이런 사람을 어떻게 24시간 이내에 데려올 수가 있어?”“그리고 당신은 항성을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처리했다는 거야?”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그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가 오늘 아침에 제 발로 날 찾아왔어. 그래서 난 처리했을 뿐이야.”“텐푸 쥬시로의 스승은 당신도 아는 사람이야.”“그는 바로 노부인 곁에서 여러 해 동안 잠복해 있던 천도야.”‘천도'라는 두 글자를 듣게 되자 하구봉은 약간 어리둥절해했다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천도는 노부인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한 명이며 노부인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을 수도 없이 해결한 사람이었다.그리고 천도는 하구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고 하구천 진영에서 빼어난 실력을 가진 전신이었다.그런데 하현이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건가?천도가 바로 신당류의 종주라고?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하구봉은 계속 의아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한테 거짓말할 필요 없어.”하현은 하구봉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이전에는 천도라는 스파이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할 때 조금 조심스러웠을 수 있어.”“하지만 이젠 천도도 죽었으니 섬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텐푸 쥬시로의 입을 비틀어 십 년 전 그 일의 진상을 알게 될까 무척 두려울 거야.”“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텐푸 쥬시로를 구출하려 하거나 그를 해치울 거야.”“지금 밖에 적어도 백 명은 넘게 깔렸어.”“마음을 단단히 먹어.”“이 일을 잘 처리한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공로가 될 거야.”“알겠어. 호위대는 며칠 안에 모두 출동할 거야.”하구봉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텐푸 쥬시로가 노부인의 생신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당신 뒤에 퇴로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펴야겠지.”“왜냐하면 당신은 스스로가 철저히 고립되었다는 걸 알아야 입을 열 사람이니까.”하현의 말에 텐푸 쥬시로는 눈동자를 설핏 움츠렸다.“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군.”“아무 의미 없는 말이야.”하현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난 단지 당신한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오늘 아침에 내가 사람을 한 명 죽였거든.”“그 사람 이름이 천도라고 하더군.”천도라는 두 글자가 하현의 입에서 나오자 텐푸 쥬시로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는 발이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순간 몸이 튕겨졌다.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텐푸 쥬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른 사람이 알려줬더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하지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 난 믿을 수밖에 없어.”“그런데 스승님의 신분이 어떻게 노출되었지?”하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날 이길 수 없어. 바람을 맞받아치는 기술을 보였으니 자연스럽게 노출된 거지.”텐푸 쥬시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스승님은 20년 넘게 항도 하 씨 가문에 잠복해 있었어. 그동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칼솜씨를 연마했어.”“그런데 지금 보니 스승님은 결국 성공을 하지 못했군그래.”“스승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지금 밖에선 날 죽이려는 사람이 아주 득실득실하겠군, 안 그래?”하현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왜 사람들은 당신을 구하려고 하지 않지?”텐푸 쥬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스승님이 계셨다면 아마 난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는 존재였겠지.”“그러나 스승님은 정체가 탄로 난 채 돌아가셨어.”“그러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난 그들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거야.”“날 죽이는 게 여러모로 간단하겠지.”“내가 죽어 버리면 많은 일들이 그냥 미궁에 빠지게
진홍민이 적반하장의 자세를 보이자 하현은 그녀를 상대하기조차 싫어졌다.하지만 진홍민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하현을 문밖으로 내쫓을 태세를 보였다.그때 황보동이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홍민아, 진정해. 함부로 이러지 마!”황보정도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언니, 나 괜찮아.”“괜찮다니?”“마침 내가 왔기에 망정이지 내가 아니었다면 넌 이미 죽은 목숨이 되었을 거야!”진홍민은 거만한 얼굴로 황보동의 손을 뿌리치며 하현 앞으로 걸어갔다.뺨이라도 한 대 때릴 듯 그녀의 행보는 거셌다.“개자식! 지난번 일은 아직 계산도 안 했어!”“우리 오빠의 일을 다 망쳐 놓고 이제는 감히 내 사촌동생한테까지 손을 쓰려고 해?”“흥! 사는 게 귀찮아?”“퍽!”하현이 손을 쓰기도 전에 옆에 있던 간민효가 갑자기 한 발짝 내디디며 손바닥으로 진홍민을 후려갈겼다.“하현한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야! 죽고 싶어?”간민효의 노기 어린 말투와 간 씨 가문이라는 신분에 진홍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분명 간민효를 잘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방금 진홍민의 관심은 온통 하현에게 쏠려 있어서 옆에 있던 간민효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간민효가 왜 거기에 있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거친 숨을 씩씩거렸지만 진홍민은 감히 간민효에게 뭐라고 대거리를 할 수가 없었다.진홍민은 얼굴을 가리고 표독스럽게 말했다.“이모할아버지, 보셨죠?”“감히 내가 한마디했다고 사람을 때리다니!”“이런 사람을 가만히 두면 안 되잖아요?!”지금 진홍민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초조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다.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만약 정말로 하현이 황보정의 문제를 해결한다면?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눈독을 들이던 집을 엄한 놈이 차지하면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현이 정말로 이백억 집을
간민효 일행은 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이 회랑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화려한 옷을 입은 남녀들 중 무도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선두에 서 있는 것이 하현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체구가 약간 왜소했지만 얼굴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 묻어났다.자세히 보니 그의 생김새가 장천중과 비슷했다.황보동을 본 젊은 남자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황보대사님, 안녕하세요.”다만 인사를 하는 그의 표정에는 오만한 기운이 가득 풍겼다.“진홍민, 만세당 사람들을 데려왔구만?”황보동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젊은 남자를 잠시 위아래로 훑어본 뒤 입을 열었다.“당신이 장 대사의 손자, 장용호인가?”장용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황보대사님, 기억력이 아주 좋으십니다. 그저 몇 년 전에 우연히 만났을 뿐인데 절 기억하시다니요!”그러자 진홍민이 희미한 미소를 내걸며 입을 열었다.“이모할아버지, 장용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그는 풍수지리로는 금정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예요!”“무엇보다 최근 내공이 훨씬 더 강하고 깊어졌어요!”“내가 정이를 생각해서 특별히 모셔온 사람이라고요.”여기까지 말한 진홍민의 눈동자에 의미심장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이 친구한테 정이를 한번 보라고 해 보세요. 어차피 지금은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황보동은 오만한 미소로 당당하게 서 있는 장용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솔직히 말하자면 자네 할아버지가 이미 손을 써 보았다네.”“하지만 실력이 모자라서 더는 어떻게 할 수 있다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했네.”“그리고 자네, 할아버지의 재주를 90% 이상을 전수받았다고 해도 아마 내 손녀를 치료할 수는 없을 거야.”황보동은 자신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내가 이미 하 대사를 불렀거든.”“하 대사가 나서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황보동은 분명 만세당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금정 제일의 풍수사라 불리는 장천중은 아무것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우리 집을 산다고요?”황보정은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할아버지,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에요?”황보동은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바로 좀 전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아무리 총명한 황보정이라고 해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반신반의하던 그녀는 하현의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숨결과 목소리를 들어 보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그런데 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제압한 풍수대사라고?무슨 그런 농담을?!하지만 황보정은 평소 도도한 할아버지의 성품으로 봤을 때 하현이 정말 능력이 뛰어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할아버지의 눈에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이 스치자 황보정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다.하현은 더 이상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안녕하세요. 하현이라고 합니다.”황보정은 하현에게 말했다.“하 대사님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다만 하 대사님은 절대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전 이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저는 천기를 누설해서 이런 벌을 받았어요.”황보정은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천기누설? 그래서 벌을 받았다고요?”하현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담하게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부담 느끼지 않으니까요.”황보정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뜸을 들였다가 입을 열었다.“하현, 그게 무슨 뜻이에요?”하현은 온화한 얼굴로 말했다.“그러니까 내 말은 이건 업보나 벌이 아니라는 거예요. 내가 해결할 수 있다는 거죠.”황보동은 하현의 말을 듣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하 대사, 정말 할 수 있겠는가?’예전 같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것이다.심지어 무당이 아닌가 의심했을 것이다.국내외 내로라하는 대사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결과는 처참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그런데 하현에게 방법이 있다고?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하지만 하현이 조금 전까지 보인 행동으로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