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의 말에 하 총관의 얼굴에는 분노가 들끓었다.“하현, 네놈이 떠벌리기 좋아하고 공명심에 혹할 놈이란 건 진작에 알았지!”“그리고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의 제재를 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천도 어르신에게 섬나라 스파이라는 누명을 뒤집어 씌우는 거야!”“이런 핑계를 대고 겉으로 번지르르한 명분을 얻으려는 수작이잖아!”“그렇지만 똑똑히 들어! 절대 네놈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천도 어르신이 도대체 누구인지 확실한 증거도 없이 함부로 지껄이지 마!”“그가 정말 섬나라 사람이라고 해도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을 위해 오랫동안 성심을 다해서 노부인의 곁을 지킬 수 있는 거지 그게 어떻다는 거야?”“노부인이 오랫동안 천도 어르신을 신뢰한다는 게 그가 충직하다는 증거 아니겠어? 아무 문제없다고!”“네놈이 함부로 지껄이면서 천도 어르신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한다면 네놈은 대하와 섬나라 국정에도 큰 악영향을 끼치게 될 거야!”“그렇게 된다면 네놈이 어떻게 책임을 질 거야?”“게다가 어쩌다 음모와 계략을 써서 네놈이 천도 어르신을 물리쳤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건 네놈의 진짜 실력이 아니야.”“네놈은 그냥 허풍이나 떨고 우쭐하는 놈에 지나지 않아! 분명해!”“날 더 이상 자극하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네놈을 죽을 수도 있다고!”하 총관이 경고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흔들자 하현에게 걷어차인 십여 명의 남자들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왔다.이번에는 그들도 많이 각성했는지 정신이 바짝 든 얼굴들이었다.그들은 몸에 지닌 총을 만지며 안전장치를 풀었다.하현이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들 총 앞에서는 당당할 수 없을 거라고 그들은 생각했다.십여 명이 든 총구가 일제히 하현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고 천도는 어느새 오만방자한 눈빛으로 돌아와 사납게 웃어젖혔다.“하현, 넌 매우 센 놈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인 것 같군!”“항성과 도성에서는 노부인이 날 비호해 주고 있지. 누가 날 건드릴
천도가 죽었다!천도의 얼굴에는 충격과 분노, 원망이 버무려진 복잡한 심경이 그대로 드러났다.그는 이렇게 오랫동안 신분을 숨기고 그 기나긴 세월 동안 치밀하게 계획했던 일이 하현의 손에 속절없이 당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하 총관이 이미 노부인의 이름을 거론하며 누차 경고까지 했다.그래서 천도는 감히 하현이 자신을 어떻게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현은 그 누구의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뜻대로 해 버렸다.누가 이런 광경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섬나라에선 네놈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이 자를 죽이지 않으면 필시 섬나라가 망하게 될 거야!”칼날이 가득 박힌 듯한 그의 눈동자에 분노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울분과 분노뿐만 아니라 나라를 위한 깊은 걱정까지 담겨 있었다.그러다 천도는 마지막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떨구었다.하 총관 곁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시간이 멈춘 듯 깊은 정적이 흘렀다.천도...전설 속에 존재하던 항도 하 씨 가문 최고 고수.오랫동안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신분을 속이고 잠복해 있던 신당류의 종주.일대의 전신!시대의 검객!천도가 이렇게 패하다니!?이대로 죽다니!?게다가 하현의 발에 목이 밟혀 굴욕적인 최후를 맞이하다니!하 총관 일행들은 모두 넋이 나간 듯 멍하니 서 있었다.그들은 자신들의 경고에도 하현이 아랑곳하지 않고 이런 충격적인 결말을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도대체 하현의 이런 배짱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하수진마저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이 없었다.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그녀의 머릿속은 말할 수 없이 복잡해졌다.하현이 천도를 죽였다는 건 노부인과 완전히 척을 지겠다는 의미다.“죽여!”“저놈을 죽이고 천도 어르신의 원수를 갚아라!”하 총관 일행은 너 나 할 것 없이 분노를 씹어 먹은 사람처럼 으르렁거렸다.“어서 쏴! 갈기갈기 찢어 버려!”눈앞에서 한바탕 격전이 벌어질 판이었다.만약 자신
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난 항도 하 씨 가문을 대신해 오랜 스파이 한 명을 처리했어요.”“고맙다고 하면 그만이지 뭘 이렇게 말들이 많아요.”“정말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못할 줄 알아요?”하 총관은 한기가 가득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하현, 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의 일을 언제 외부인이 이렇게 왈가왈부하게 된 거야?”“우리 항도 하 싸 가문에 함부로 끼어든 결과가 어떨지 네놈이 생각이나 해 봤어?”“얼른 무릎이나 꿇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직접 널 상대해 줄 테다! 그때 가서 날 탓하지나 마!”하 총관은 위협적인 얼굴로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언제부터 하인들이 감히 항도 하 씨 가문을 대표한다 어쩐다 큰소리를 치게 된 거지?”위엄 있고 당당한 목소리였다.순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돌아서서 산길 쪽을 쳐다보았다.말끔한 당나라 복장을 한 하문준이 뒷짐을 지고 유유히 걸어 나왔다.그는 곁에 아무도 대동하지 않고 마치 정원을 산책하듯 여유로운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다.그러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항도 하 씨 가문의 위엄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느껴졌다.그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하현에게 다가와 차가운 눈빛으로 하 총관과 그의 일행들을 훑어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노부인의 체면을 봐서 한 손만 자르는 걸로 하고 그만 꺼져.”“문주 어르신!”하 총관은 이를 살짝 깨물었다.분명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노부인을 등에 업고 항도 하 씨 가문을 호령했었다.그러나 문주 앞에서는 감히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그렇다 하더라도 순순히 손 한 쪽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하 총관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제가 여기 온 것은 노부인의 뜻이었습니다!”“문주 어르신은 노부인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싶으면 따르지 않으셔도 됩니다.”“제 손을 자르시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하지만 정녕 노부인과 척을 질 생각이십니까?”하문준은 담담하게 말했다.“척을 진다?
”네놈이!”하문준이 발을 내디디며 미친 듯이 포효했다.사방 10여 미터의 모래와 자갈들이 흩날렸다.많은 사람들은 문주의 기세에 놀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이 광경을 조심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청삼을 입은 집사들은 총을 든 채 주춤거리며 물러섰고 입가에는 선혈이 가득 고여 있었다.그때 하 총관의 다리에 힘이 쭉 빠지며 순간 그의 무릎이 ‘풀썩’하고 주저앉았다.그는 무릎을 꿇고 싶어서 꿇은 게 아니었다.하문준이 폭발하자 그 기세에 눌려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자 결국 무릎을 내어 놓은 것이었다.항도 하 씨 가문 문주의 기세는 역시 달랐다!어느 것에도 비할 데 없이 강했다!방금 숨을 거둔 천도도 충분히 기세가 강한 사람이었다.하지만 문주가 보여준 기세는 아까 천도가 보여주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하 총관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고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하현은 하문준을 흥미롭게 쳐다보았다.하문준이 비범한 사람이라는 건 분명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자신이 지금까지 문주를 너무 과소평가했음을 그제야 하현을 깨달았다.상위 10대 가문, 5대 문벌, 4대 초석...상위권 권력자들 중 그 누구도 쉬운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오늘 하문준이 나타난 것은 그가 노부인의 체면을 더 이상 세워 주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하문준은 뒷짐을 지고 무릎을 꿇은 하 총관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말해 봐. 하 총관은 왜 이렇게 나한테 무례한 거지?”“죄, 죄송합니다. 문주 어르신!”하 총관은 온몸에 식은땀을 흘렸고 얼굴은 창백하기 짝이 없었다.“제가 어르신께 많은 심려를 끼쳤습니다.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지금 바로 물러가겠습니다!”하 총관은 하문준이 평소에 점잖고 말수가 별로 없는 사람이라 기세를 제압하는 능력은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하문준이 제대로 폭발하자 하 총관은 그동안 자신이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이것은 그가 한평생 갈고닦아도 넘볼 수 없는 격차였다!“문
천도가 숨을 거둔 날 오후.하현은 항성에 있는 마리아 병원에 나타났다.이곳은 항성에서 가장 유명한 개인병원이자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첨단 장비와 우수한 의료 기술 때문에 유명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항도 하 씨 가문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서 관리가 용이하다는 것이었다.이 지역을 관리하는 주체는 항도 하 씨 가문 호위대였고 하구봉이 그 책임자였다.텐푸 쥬시로는 항성으로 끌려온 후 줄곧 반쯤 혼수상태에 있었다.하구봉은 마리아 병원의 최상층을 텐푸 쥬시로의 특별 관리 구역으로 사용했고 얼마나 많은 호위대들이 배치되었는지 모르지만 파리 한 마리도 여기서 날아갈 수 없을 만큼 경계가 삼엄했다.하현이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동자가 얼마나 많은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이들 눈동자에서는 말할 수 없는 적개심과 분노가 녹아들어 있었다.누굴 찾고 말고 할 것 없이 이 사람들이 바로 섬나라에서 유명한 저격수들임을 하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신당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신당류가 비싼 돈을 주고 고용한 킬러들이었다.물론 그 배후에는 5대 문벌과 5대 유파가 이들을 조종하고 있을 것이다.그러나 여기는 항성이고 텐푸 쥬시로가 하현의 손에 있기 때문에 이 쥐새끼 같은 사람들은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다.하현은 쥐새끼 같은 사람들이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문 앞에 서서 하구봉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하구봉은 왠지 주위의 음산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하현을 보자마자 하구봉은 쓴웃음을 금치 못하며 다가와 말했다.“하현, 내가 요 며칠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하구천과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서 항성과 도성에서 날 못 쫓아내 안달이라고!”“가장 힘든 건 텐푸 쥬시로를 지키는 거야. 그를 지키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하루에 최소 50명 이상의 섬나라 사람들이 덤벼든다니까.”“닌자, 킬러, 음양사, 검객... 아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이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하현, 농담하지 마!”“우리가 텐푸 쥬시로의 스승이 누구인지 모르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아니, 설령 우리가 안다고 해도 텐푸 쥬시로는 한 세대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전신이자 최고의 검객이라고.”“이런 사람을 어떻게 24시간 이내에 데려올 수가 있어?”“그리고 당신은 항성을 떠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처리했다는 거야?”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그를 찾아낸 것이 아니라 그가 오늘 아침에 제 발로 날 찾아왔어. 그래서 난 처리했을 뿐이야.”“텐푸 쥬시로의 스승은 당신도 아는 사람이야.”“그는 바로 노부인 곁에서 여러 해 동안 잠복해 있던 천도야.”‘천도'라는 두 글자를 듣게 되자 하구봉은 약간 어리둥절해했다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천도는 노부인의 가장 가까운 사람 중의 한 명이며 노부인의 눈 밖에 난 사람들을 수도 없이 해결한 사람이었다.그리고 천도는 하구천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고 하구천 진영에서 빼어난 실력을 가진 전신이었다.그런데 하현이 지금 뭐라고 말하는 건가?천도가 바로 신당류의 종주라고?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던 하구봉은 계속 의아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나한테 거짓말할 필요 없어.”하현은 하구봉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이전에는 천도라는 스파이가 있어서 이런 일을 할 때 조금 조심스러웠을 수 있어.”“하지만 이젠 천도도 죽었으니 섬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텐푸 쥬시로의 입을 비틀어 십 년 전 그 일의 진상을 알게 될까 무척 두려울 거야.”“그래서 그들은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텐푸 쥬시로를 구출하려 하거나 그를 해치울 거야.”“지금 밖에 적어도 백 명은 넘게 깔렸어.”“마음을 단단히 먹어.”“이 일을 잘 처리한다면 그건 어마어마한 공로가 될 거야.”“알겠어. 호위대는 며칠 안에 모두 출동할 거야.”하구봉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텐푸 쥬시로가 노부인의 생신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이
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당신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당신 뒤에 퇴로가 있는지 없는지부터 살펴야겠지.”“왜냐하면 당신은 스스로가 철저히 고립되었다는 걸 알아야 입을 열 사람이니까.”하현의 말에 텐푸 쥬시로는 눈동자를 설핏 움츠렸다.“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최 모르겠군.”“아무 의미 없는 말이야.”하현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난 단지 당신한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오늘 아침에 내가 사람을 한 명 죽였거든.”“그 사람 이름이 천도라고 하더군.”천도라는 두 글자가 하현의 입에서 나오자 텐푸 쥬시로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켰다.그는 발이 묶인 상태였기 때문에 순간 몸이 튕겨졌다.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텐푸 쥬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다른 사람이 알려줬더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하지만 당신이 그렇다고 하니 난 믿을 수밖에 없어.”“그런데 스승님의 신분이 어떻게 노출되었지?”하현은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날 이길 수 없어. 바람을 맞받아치는 기술을 보였으니 자연스럽게 노출된 거지.”텐푸 쥬시로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스승님은 20년 넘게 항도 하 씨 가문에 잠복해 있었어. 그동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칼솜씨를 연마했어.”“그런데 지금 보니 스승님은 결국 성공을 하지 못했군그래.”“스승님이 이미 돌아가셨으니 지금 밖에선 날 죽이려는 사람이 아주 득실득실하겠군, 안 그래?”하현이 옅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왜 사람들은 당신을 구하려고 하지 않지?”텐푸 쥬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스승님이 계셨다면 아마 난 사람들에게 가치가 있는 존재였겠지.”“그러나 스승님은 정체가 탄로 난 채 돌아가셨어.”“그러니 내가 이곳에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난 그들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된 거야.”“날 죽이는 게 여러모로 간단하겠지.”“내가 죽어 버리면 많은 일들이 그냥 미궁에 빠지게
하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비명횡사'라는 조직을 당신이 설립했어?”“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텐푸 쥬시로의 눈동자에 지난날을 돌아보는 듯한 회한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비명횡사'라는 조직은 당시 우리 섬나라가 겪었던 경제 불황 때문에 결성되었어.”“그때 고위층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켜 대하 전장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생각을 했어.”“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어. 대하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거지. 지금처럼 강성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섬나라가 마음대로 억압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어.”“당시 고위층들은 대하를 무찌르려면 먼저 대하의 총아들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결정했어.”“조정에서부터 재계, 명문가, 과학계 등...”“간단히 말해서 그 당시 대하의 거물들이 우리 섬나라의 블랙리스트에 다 올랐어.”“‘비명횡사'의 결성은 대하의 총아들을 제거함으로써 대하의 정치, 경제 등을 급속히 쇠락시키기 위한 것이었지.”“조직의 멤버는 섬나라 5대 문벌, 6대 유파 출신들이었어.”“당시 섬나라 최연소 전신이라 불리던 나도 당연히 고위층에 뽑혀 조직의 수장이 되었지.”하현이 눈에 차가운 빛이 가득 퍼졌다.“그렇군. 20년 전부터 우리 대하에는 미래가 기대되는 총아들이 있었어. 그런데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 등으로 비명횡사했어. 그리고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지.”“이 모든 게 당신들 작품이란 거지?”“맞아.”텐푸 쥬시로는 군말 없이 깔끔하게 인정했다.“내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지금의 ‘비명횡사'로 이름을 바꾸었지. 이의평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해야 할 일들을 수행했어.”“그 시절 난 대하의 저명한 사람들 오십 명쯤이나 죽였으니 우리의 작전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과거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말을 늘어놓는 텐푸 쥬시로의 눈에 과거 찬란했던 영광의 빛이 떠올랐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촉망받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어.”“특정 인물을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