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비명횡사'라는 조직을 당신이 설립했어?”“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텐푸 쥬시로의 눈동자에 지난날을 돌아보는 듯한 회한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비명횡사'라는 조직은 당시 우리 섬나라가 겪었던 경제 불황 때문에 결성되었어.”“그때 고위층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켜 대하 전장에서 이득을 보겠다는 생각을 했어.”“그러나 상황이 달라졌어. 대하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거지. 지금처럼 강성하지는 않았지만 우리 섬나라가 마음대로 억압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어.”“당시 고위층들은 대하를 무찌르려면 먼저 대하의 총아들을 먼저 제거해야 한다고 결정했어.”“조정에서부터 재계, 명문가, 과학계 등...”“간단히 말해서 그 당시 대하의 거물들이 우리 섬나라의 블랙리스트에 다 올랐어.”“‘비명횡사'의 결성은 대하의 총아들을 제거함으로써 대하의 정치, 경제 등을 급속히 쇠락시키기 위한 것이었지.”“조직의 멤버는 섬나라 5대 문벌, 6대 유파 출신들이었어.”“당시 섬나라 최연소 전신이라 불리던 나도 당연히 고위층에 뽑혀 조직의 수장이 되었지.”하현이 눈에 차가운 빛이 가득 퍼졌다.“그렇군. 20년 전부터 우리 대하에는 미래가 기대되는 총아들이 있었어. 그런데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 등으로 비명횡사했어. 그리고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었지.”“이 모든 게 당신들 작품이란 거지?”“맞아.”텐푸 쥬시로는 군말 없이 깔끔하게 인정했다.“내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지금의 ‘비명횡사'로 이름을 바꾸었지. 이의평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해야 할 일들을 수행했어.”“그 시절 난 대하의 저명한 사람들 오십 명쯤이나 죽였으니 우리의 작전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과거의 ‘위대한 업적'에 대해 말을 늘어놓는 텐푸 쥬시로의 눈에 과거 찬란했던 영광의 빛이 떠올랐다.“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나 닥치는 대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촉망받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었어.”“특정 인물을
”어린 아기를 죽이는 데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냥 교통사고를 낸 거지.”“결국 임무는 성공적으로 끝났고 그렇게 문주의 아들은 죽었어.”“내 마음속 최고 악몽이었어.”“내가 그다지 예의와 염치가 있는 인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린 아기를 죽인다는 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야.”“그래서 그날부터 난 조직을 해체하고 내 본연의 신분을 회복했지.”텐푸 쥬시로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하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럼 누가 하문주의 어린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어?”“말했잖아!”텐푸 쥬시로는 화들짝 놀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천도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었다고!”“이렇게 해야 항도 하 씨 가문에 서로를 물어뜯는 대혼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야!”하현은 조금 의아했다.이 일에는 십중팔구 더 큰 손이 개입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문준이 어린 아들을 잃는 일에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은 바로 장손 하구천이었다.그런데 지금 텐푸 쥬시로는 천도가 스스로 결정한 일이라고 말했다.“증거가 있어?”잠시 침묵하던 하현이 입을 열었다.“있어. 내 목숨만 보장해 준다면 증거를 줄게.”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화제를 바꾸었다.“그럼 이제 세 번째로 넘어가 보자고.”“당신 스승은 항도 하 씨 가문에서 수년간 잠복해 있었어. 도대체 뭘 위해서 그랬던 거야?”“그는 왜 하문준의 어린 아들을 죽이라고 한 거지?”텐푸 쥬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스승님께서 말씀하셨어. 대하에는 10대 최고 가문, 5대 문벌, 4대 초석이 있다고. 시간이 갈수록 그 세력들은 점점 더 강해질 거라고!”“조만간 대하가 세계 정상에 서게 될 날이 올 거라고 하셨어.”“그것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하 내에서 끊임없이 다툼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어.”“그래서 스승님은 항도 하 씨 가문을 택하셨던 거야. 그는 내부적으로 항도 하 씨 가문을 조종하여 항성과 도성이 대하 본토와 가까
한 시간 후 하현은 굳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그의 뒤를 따르던 하구봉은 사방이 모두 자기편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긴장이 풀리는 듯 감추고 있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었다.“하현, 방금 텐푸 쥬시로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생각해?”“십 년 전 그 일 말이야. 천도가 정말로 항도 하 씨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한 일일까?”하현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그가 거짓말을 하진 않았을 거야. 어찌 되었건 지금 그는 우리 손아귀에 있고 그의 가장 큰 뒷배도 죽었으니까.”“살아남으려면 우리한테 협조해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십 년 전 일에 대해 거짓말할 필요는 없지.”“그에게 좋을 게 없거든.”하구봉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다 다시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럼 하구천은?”“하구천이 이렇게 빨리 부상할 수 있었던 게 정말로 섬나라 사람들이 뒤를 받쳐 주어서일까?”“만약 이 일이 폭로된다면 항성과 도성, 항도 하 씨 가문에는 큰 지각 변동이 생길 거야.”“지각 변동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거지 뭐.”하현은 냉담한 표정으로 일관했다.“이 일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해결해야 해. 어떤 경우에도 하구천에게 자리를 내어주면 안 돼.”“만약 하구천을 막지 않으면 항성과 도성에는 더 큰 혼란이 닥칠 거야.”예전에 하현은 하구천이 상석에 오르는지 아닌지의 여부는 단지 항도 하 씨 가문 내부 권력 투쟁에 관련된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섬나라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잠복해 있었다는 게 폭로된 지금 하구천의 지위 여부는 항성과 도성, 그리고 대하 남문 전체의 문호와도 관련된 일이 되었다.하구봉은 언짢은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하구천 뒤에 정말 섬나라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들은 하구천을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할 거야.”“그리고 한 가지 더. 텐푸 쥬시로가 말한 건 모두 대략적인 상황일 뿐 세부 사항이나 증거가 없다는 거야.”“십 년 전 일이든 하구천의 일이든 우리는 텐푸 쥬시로의 말만
”그리고 그가 우리한테 자세한 세부 사항과 증거들을 줬다는 건 이미 섬나라 계획을 망치게 하고 섬나라 고위층을 팔아먹은 셈이 돼.”“이런 상황에서 텐푸 쥬시로는 더 이상 섬나라 고위층들의 신임을 얻기 어려워.”“우리가 다시 한번 미끼를 던져서 텐푸 쥬시로가 신당류 사람들을 데리고 다른 5대 유파들과 싸우게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야.”“그때 텐푸 쥬시로가 우리한테 사람을 파견해 달라고 하면 보내주고 총을 보내달라고 하면 보내주면 돼.”“우리는 텐푸 쥬시로를 풀어줄 뿐만 아니라 텐푸 쥬시로가 돌아오게 만들 방법을 강구해야 해.”“섬나라 사람들이 하구천 하나로 우리 대하 정세를 어지럽히려고 했어.”“그럼 우리는 텐푸 쥬시로를 보내는 거지. 벌여 놓은 판에서 누가 더 잘 노는지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그래서 문주께서 아무 이견이 없으시다면 난 정말 텐푸 쥬시로를 풀어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물론 하현은 마음에 있는 말을 다 하지는 않았다.텐푸 쥬시로는 풀려난 이후에 감히 다시 되돌아 그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그러나 하현이 그를 죽이려고 마음먹는다면 그것은 손바닥 한번 휘적거리는 일일 뿐이어서 별로 힘들이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하현 당신은 역시 천 리 밖을 내다보는 눈을 가지고 작전을 짜고 있었군. 이미 승리를 거둔 거나 마찬가지야.”어디 하나 구멍 없이 치밀한 하현의 계획을 듣고 있자니 하구봉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하구봉은 감탄해 마지않는 얼굴로 말했다.“섬나라 사람들이 우릴 상대할 때 쓰던 방법이야. 우린 지금 되갚아 주고 있는 거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어유, 제법인데!하현은 웃으며 하구봉의 어깨를 툭 쳤다.“이제야 당신 아버님 수준으로 올라왔구만!”하구봉은 이 말을 듣고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마침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제야 하구봉은 어정쩡한 표정을 고쳐잡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럼 다른 일 없으면 난 이만 문주께 가서 말씀드릴게.”하
”곤, 바로 이놈이야! 날 계속 괴롭힌 사람이!”“이놈이 우리 친구 무카이 나오토 일가를 죽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오빠를 바깥으로 유랑하게 만든 장본인이야.”“간도 크게시리 내 얼굴을 때린 놈이라구!”“네가 나 대신 좀 혼내줘!”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하현을 노려보았다.“야! 네가 우리 홍두 누나 몸에 손을 댄 놈이야?!”“정말 위풍당당하고 패기가 넘치군!”“능력이 있거든 또 덤벼 보시지! 나랑 곤한테 덤벼 보라고!”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사람을 데리고 와서 껄렁껄렁하게 하현 앞으로 걸어왔다.동시에 그는 가늘고 긴 시가에 불을 붙여 담배 한 모금을 들이마신 뒤 하현의 얼굴에 연기를 가득 뿜었다.“어서 덤벼 봐! 나한테 덤벼 보라고? 날 때려 보시지!”“당신이 능력 있는지 없는지 한번 보여 달라고?”하현은 이 녀석이 진홍두의 총알받이임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어린놈을 괴롭히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뭐? 어린놈?”“이 자식이!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지금 뭐라는 거야?!”하유곤은 자신을 무시하는 하현에게 화가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그는 하현이 어떤 신분이든 상관하지 않는 인물이었다.감히 자신에게 이렇게 도발하는 사람은 반드시 밟아 죽여야 직성이 풀렸다.어찌 되었든 하유곤은 항도 하 씨 가문 둘째 아들 하문산의 외아들이었다.그는 항성과 도성에서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다니며 거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다만 최근에 줄곧 외국으로 유학을 가 있었고 며칠 전 노부인의 생신 때문에 서둘러 귀국한 것이었다.“어서 밟아 버려!”“무슨 일 생기면 이 하유곤이 다 책임질게!”하유곤이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어서 처리해!”“본때를 보여주라고!”화려한 옷을 입은 수십 명의 남녀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그들은 나이가 많지 않아 보였다.아마도 모두 아직 대학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인 모양이었다.그들은 평소에도
”유곤!”하유곤이 하현의 주먹에 맞아 뺨이 날아가는 것을 본 진홍두는 공포에 휩싸이며 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그녀는 오늘 특별히 하유곤을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이런 꼴을 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개자식!”“감히 우리 유곤을 때려!”하유곤은 얼굴을 감싸쥔 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그리고 분노를 뿜어내듯 큰소리로 포효하며 발악했다.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비슷한 수모조차 당한 적 없는 하유곤이었다.지금 눈앞에 일어난 일은 단순히 하유곤의 얼굴을 때린 것이 아니라 그의 자존심과 체면을 짓밟은 행동이었다.순간 하유곤은 분노로 들끓는 얼굴로 땅바닥에 두 동강 난 쌍절곤을 집어 들고 앞으로 돌진했다.“퍽!”하현은 또 한 번 무덤덤한 손놀림으로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하현, 이놈이!”이를 바라보는 진홍두의 눈가에 분노의 경련이 폭풍처럼 몰아쳤다.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하유곤의 얼굴은 더욱 흉악해졌고 그는 분노에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다.양쪽 얼굴에 붉은 손자국이 벌겋게 존재감을 드러낸 모습이 여간 낭패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하현이 휴지를 꺼내 손가락을 닦으며 말했다.“하유곤, 맞지? 항도 하 씨 가문 하유곤!”“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모양이야.”“뭐, 더 이상 따지고 싶은 마음도 없어.”“어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여기는 당신이 입을 놀릴 만한 곳이 아니야.”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하현의 모습에 하유곤은 더욱더 화가 치밀어 올라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지고 있었다.그는 교만과 자부심으로 가득 찬 청년이었다.그 어떤 마음으로도 지금의 심정을 누그러뜨릴 수가 없었다.지금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하현 이놈을 죽이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본때를 보여줘!”“이 개자식!”“당신이 뭔데 나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거야?!”“너따위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저래라 훈계질이냐고?!”“정말 화딱지 나서 미치겠
이번에 날아온 표창은 파란빛이 돌지 않았지만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겼다.하현은 일순 안색이 변했고 오른발을 디디고 날아올라 바로 입구에 있는 분수대로 표창을 차버렸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표창이 물속에서 터졌다.다행히 물속에서 터져 그 위력은 많이 약해졌다.하지만 방금 하현이 빨리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표창은 그에게 닿는 순간 폭발했을 것이다.하현의 얼굴에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유곤은 온몸에 살인 무기를 감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구잡이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 하현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었다.다행히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하현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며 하유곤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을 지긋이 발로 밟았다.“당신이 총을 들고 날 없애려 한다면 차라니 당신을 풀어줄 수 있어. 당신은 워낙 철이 없는 녀석이니까.”“하지만 나이도 어린놈이 심성이 이따위여서야 쓰나? 갖은 방법으로 날 해치려는 건 아무래도 괜찮아. 그렇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지.”“옛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길 세상을 어지럽히려는 자에게는 철저히 기술을 금해야 한다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군.”“당신을 망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말을 하면서 하현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 갔다.그는 정말 하유곤을 눈앞에서 처리할 태세였다.하유곤은 얼굴이 벌게지며 험상궂은 표정을 드러내었다.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서 계속 몸부림만 치고 있었다.“하현, 이 사람은 항도 하 씨 가문 둘째 집안의 하유곤이야. 하현!”하현이 과격한 짓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진홍두가 영리하게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당신은 지금 하유곤한테 엄청난 짓을 한 거야. 그 대가가 어떨지 당신 생각이나 해 봤어?”“하문산 어르신은 무도에 심취해 있는 분이셔. 그런데 당신한테 아들이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여인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하유곤이 날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지.”여자는 가슴을 가리고 일어섰고 성난 얼굴로 하현을 쏘아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은 어쨌든 다 큰 어른인데 저 어린 애송이와 뭐 하러 시시콜콜 따지고 그래?”“매너가 너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아무리 그가 백번 잘못했더라도!”“아무리 그가 당신한테 잘못했더라도!”“아직 물정 모르는 젊은이니까 용서해 줄 수 있잖아?”“다 큰 어른이 이제 스물 넘은 청년이랑 싸움질이나 하고 꼬치꼬치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니!”“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어렸을 때 안 싸워 봤어?”“사고 안 쳐 봤어?”“우리 유곤이는 잘 배운 집에서 자란 아이야!”“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직접 손을 썼든 다른 사람을 시켰든 당신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거야!”“오히려 충격을 받은 쪽은 유곤이라고!”여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정말로 잘잘못을 가린다면 유곤이 쪽이 아니라 당신한테 잘못이 있는 거야!”하유곤은 자신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생기자 금세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미소를 주체하지 못했다.“하현, 어서 이 발 내려놔! 날 놔 달라고! 어서!”“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내 스승님한테 호되게 당할 줄 알아!”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얘가 아직 아이라고?”“적어도 스무 살은 되지 않았어?”“얘가 무슨 애야?”“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놈이 먼저 손을 썼어. 게다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날 공격했다고!”“결국 이놈이 날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눕게 된 걸 지금 내 탓이라고 하는 거야?”“그렇다면 거꾸로 이놈이 날 때려눕혔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당연한 거야? 내가 그럴 짓을 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할 거냐고?”“요즘 세상에 이렇게 큰 아이가 어딨어?”하현의 말을 들은 여자는 냉소를 지으며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
”해결되었으면 됐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세상 일에 대해 그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어떤 일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사소한 일들은 소꿉놀이 같아서 정말로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다른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지.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간민효는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듯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현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우리 금장 간 씨 가문의 다른 하찮은 일보다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어차피 우린 연대한 사이잖아?”“참, 당신의 풍수관이 생기면 내가 첫 고객이 되고 싶어...”하현은 웃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내가 뭘 얼마나 잘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해?”간민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연, 인연이야...”“이 일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 같은데...”하현은 간민효의 말을 듣고 눈꺼풀을 펄쩍거리며 얼굴빛이 붉어졌다.“자, 장난치지 말고 당신이 선택한 곳부터 둘러보자고.”하현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고 이 모습을 본 간민효는 빙긋 웃으며 하현의 팔짱을 끼고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차에 타고 있던 나박하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 당연히 설은아에게 바로 고자질해야 했다.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미 하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주인 격인 그를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나박하가 고민에 빠진 그 시각 하현 일행은 이미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집복당 안 넓은 부지 앞쪽에는 큰 홀이 있고 한쪽에는 서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는 각종 풍수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뒤편에는 사랑채 몇 개와 커다란 마당이 있었다.다만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했지만 내부는 꽤나 낡아 보였고 바닥의 청석도 파손된 곳이 적지 않았다.종이로 칠한 창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아서 괴기스러운 영화를 찍거나 스릴러물을 촬영하기 딱이라는 생각마저
설은아의 말을 들은 하현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김탁우가 감쪽같은 위장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설은아는 그의 과거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하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뭐, 어쨌든 우린 재혼할 거니까.”“남자들을 많이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왜? 다른 뛰어난 사람을 보면 내가 홀딱 빠져 버릴까 봐 걱정되어서 그래?”설은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간민효랑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난 다른 남자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일이 이렇게 흘러 버렸는데 자신이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설은아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는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자자, 질투하지 마.”“내가 한 번 본 남자한테 사랑에 빠질 여자로 보여?”“김탁우는 오늘 밤 나한테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온 것뿐이라고.”“그러니 당신도 다른 여자들과는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렇지 않았다가 내가 알기라도 하면 당신 곤란해질 거야.”“어쨌든 우린 아직 이혼한 사이니까!”말을 마친 설은아는 하현을 향해 말로 주먹을 한 방 날리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하현은 이 광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지금 누구도 두려운 사람이 없었다.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한 여자 앞에서는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게다가 이 여자는 지금 이 기회를 빌려 자신과 다른 여자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에 경고장까지 날리며 그를 압박했다.이런 생각이 들자 하현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이튿날 아침 하현은 일어나서 설은아와 얘기라도 좀 나눠 보려고 했다.하지만 설은아는 어제 일은 다 잊은 듯 씨익 웃으며 일이 있다고 말한 뒤 홀연히 집을 나섰
소란은 여기서 끝났다.하현은 임수범과 이산들을 더 이상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그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의 기세를 제압하는 것이었다.자신의 앞에 놓인 곤궁한 처지를 헤치고 운명을 바꿔 나가는 일은 오로지 나박하가 감당할 몫이었다.소란스러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던 왕인걸은 등줄기에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현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 순간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가 있다.소란이 끝난 후 왕인걸은 임수범 일행을 내쫓고 하현과 나박하의 테이블에 반찬 몇 가지를 더 제공해 준 뒤 나박하의 멤버십 기간을 1년 연장해 주었다.오늘 밤 그는 완벽하게 하현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고 할 수 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인걸의 어깨를 툭 건드릴 뿐이었다.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왕인걸의 마음은 충분히 흡족했다.식사가 끝나자 하현은 나박하에게 자신을 설 씨 집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다음 날 다시 와서 적당한 가게를 찾는 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설은아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설은아의 성격상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다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마세라티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설은아의 차 문을 멋스럽게 열어주며 에스코트했다.이 과정에서 그는 설은아와 어떤 신체 접촉도 없었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걸었다.하현의 시선을 눈치챈 듯 남자는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돌아섰다.하현의 눈동자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때 갑자기 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항성에서 원가령과 약혼을 하려다가 자신에게 뺨을 얻어맞은 김탁우였던 것이다!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마도 성형을 한 뒤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