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날아온 표창은 파란빛이 돌지 않았지만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겼다.하현은 일순 안색이 변했고 오른발을 디디고 날아올라 바로 입구에 있는 분수대로 표창을 차버렸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표창이 물속에서 터졌다.다행히 물속에서 터져 그 위력은 많이 약해졌다.하지만 방금 하현이 빨리 반응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표창은 그에게 닿는 순간 폭발했을 것이다.하현의 얼굴에 점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하유곤은 온몸에 살인 무기를 감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마구잡이로 공격을 한다는 것이 하현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었다.다행히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무고한 사람들이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하현은 한 걸음 앞으로 걸어나가며 하유곤에게 다가가 그의 가슴을 지긋이 발로 밟았다.“당신이 총을 들고 날 없애려 한다면 차라니 당신을 풀어줄 수 있어. 당신은 워낙 철이 없는 녀석이니까.”“하지만 나이도 어린놈이 심성이 이따위여서야 쓰나? 갖은 방법으로 날 해치려는 건 아무래도 괜찮아. 그렇지만 무고한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되지.”“옛 어르신들이 말씀하시길 세상을 어지럽히려는 자에게는 철저히 기술을 금해야 한다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군.”“당신을 망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도저히 안 되겠어.”말을 하면서 하현의 분노는 점점 더 커져 갔다.그는 정말 하유곤을 눈앞에서 처리할 태세였다.하유곤은 얼굴이 벌게지며 험상궂은 표정을 드러내었다.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서 계속 몸부림만 치고 있었다.“하현, 이 사람은 항도 하 씨 가문 둘째 집안의 하유곤이야. 하현!”하현이 과격한 짓을 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진홍두가 영리하게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당신은 지금 하유곤한테 엄청난 짓을 한 거야. 그 대가가 어떨지 당신 생각이나 해 봤어?”“하문산 어르신은 무도에 심취해 있는 분이셔. 그런데 당신한테 아들이 맞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으실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여인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하유곤이 날 없애려고 한다는 것이지.”여자는 가슴을 가리고 일어섰고 성난 얼굴로 하현을 쏘아보며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당신은 어쨌든 다 큰 어른인데 저 어린 애송이와 뭐 하러 시시콜콜 따지고 그래?”“매너가 너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아무리 그가 백번 잘못했더라도!”“아무리 그가 당신한테 잘못했더라도!”“아직 물정 모르는 젊은이니까 용서해 줄 수 있잖아?”“다 큰 어른이 이제 스물 넘은 청년이랑 싸움질이나 하고 꼬치꼬치 잘잘못을 따지고 있다니!”“부끄러운 줄 알아야지!”“어렸을 때 안 싸워 봤어?”“사고 안 쳐 봤어?”“우리 유곤이는 잘 배운 집에서 자란 아이야!”“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직접 손을 썼든 다른 사람을 시켰든 당신은 손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거야!”“오히려 충격을 받은 쪽은 유곤이라고!”여인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정말로 잘잘못을 가린다면 유곤이 쪽이 아니라 당신한테 잘못이 있는 거야!”하유곤은 자신을 편들어주는 사람이 생기자 금세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미소를 주체하지 못했다.“하현, 어서 이 발 내려놔! 날 놔 달라고! 어서!”“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내 스승님한테 호되게 당할 줄 알아!”하현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며 말했다.“얘가 아직 아이라고?”“적어도 스무 살은 되지 않았어?”“얘가 무슨 애야?”“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놈이 먼저 손을 썼어. 게다가 갖은 수단을 동원해 날 공격했다고!”“결국 이놈이 날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드러눕게 된 걸 지금 내 탓이라고 하는 거야?”“그렇다면 거꾸로 이놈이 날 때려눕혔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건 당연한 거야? 내가 그럴 짓을 해서 그렇게 된 거라고 말할 거냐고?”“요즘 세상에 이렇게 큰 아이가 어딨어?”하현의 말을 들은 여자는 냉소를 지으며
”퍽!”하현은 몸을 숙여 하유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둔탁한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하유곤은 비명을 지르며 하얀 이빨 두어 개와 함께 피가 뿜어져 나왔다.“퍽!”하현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렀고 이번에도 치아 몇 개가 튕겨져 나왔다.“무학의 성지라고?”“항도 하 씨 가문 둘째 아들 하문산의 아들이면 뭐?”“그러면 이렇게 함부로 날뛰어도 되는 거야?”“만약 그렇다면 잘 들어. 이놈은 나한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야.”“당신들이 말하길 이놈이 아직 어린아이라고 했으니 나도 아주 어린아이처럼 취급하면 되겠군.”“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데 당신들이 안 가르치면 내가 가르쳐 주지!”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현은 또 한 번 손바닥을 휘둘러 하유곤의 뺨을 때렸다.연달아 세 대를 맞은 하유곤은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눈이 흐리멍덩해졌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하구봉이 소식을 듣고 달려왔고 이 모습을 보고 버럭 화를 내려다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겠는지 그대로 다물고 말았다.그는 하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터였다.지금 하현의 기분을 거스르는 건 그에게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개자식!”하유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울부짖으며 뒹굴었다.그러자 여자의 얼굴도 울그락불그락해졌다.“개자식!”“당장 우리 유곤이를 풀어줘!”“그렇지 않으면 당신 두고 두고 후회할 거야!”그녀는 이를 갈며 하늘에 맹세하듯 내뱉었다.“나 추이 사람이야. 절대 당신 가만두지 않을 거야!”하유곤도 피를 토하며 한마디 거들었다.“내 스승이 누구인지 알아?”“촉의 공작산장이야!”“감히 날 건드려?! 그건 내 스승님을...”“퍽!”하현의 발이 사정없이 하유곤의 코를 짓밟아 넘어뜨렸다.“협박하는 거야?”“안타깝게도 나한테는 그런 협박 아무 소용없어!”하유곤은 밀려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비명 끝에 그의 코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얼
천도를 죽인 것은 노부인의 얼굴을 때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게다가 항도 하 씨 가문 하문산의 아들 하유곤을 때려눕힌 것은 그들 뒤에 있는 무학의 성지 공작산장의 뒤통수를 때린 것과 같았다.하현은 앞으로 자신에게 벼락같은 복수의 물결이 일 것이라 생각했다.항도 하 씨 가문의 노부인을 비롯해 하문산 등은 자신을 죽이기로 안달이 날 것이다.하현은 하문준과 인사를 나눈 후 출입할 때 몇 사람을 대동하며 경계의 끝을 놓지 않았다.그러나 이틀이 지나도록 항성과 도성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마치 하현의 실력에 오금이 저린 듯 아무도 감히 그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느낌이 싸한 것을 보니 분명 뭔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그러나 하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그는 마리아 병원에 가끔 드나들며 텐푸 쥬시로의 동태를 살피고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양측의 실랑이 끝에 텐푸 쥬시로는 결국 중요한 증거를 몇 가지 실토했다.그의 증거들은 십 년 전 그 일이 섬나라 사람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증명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하구천이 후계자로 급부상한 배경에는 섬나라 사람들의 철저한 뒷받침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하현은 이 증거들을 하문준에게 제출했다.십 년 전 그 일에 관한 모든 것을 완전히 하문준에게 인계한 셈이다.그리고 이로써 하문준은 노부인의 생일에 하구천의 세력을 완전히 누를 수 있게 된 것이다.항도 하 씨 가문 노부인의 생일은 예정대로 다가왔다.항성 전역이 항도 하 씨 가문에 관계된 문양으로 장식되었다.외지에서 활동하던 일부 항도 하 씨 가문들의 자손들과 친척들이 모두 항성에 모여 노부인의 생일을 축하했다.이번 노부인의 생일은 단순한 생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도 잘 알고 있었다.노부인의 생일날 항도 하 씨 가문 큰아들과 넷째 아들의 대결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이것으로 항도 하 씨 가문의 진정한 후계자가 정해진다고 볼 수 있다.그래서
”어머니는 십 년 전 그 일 때문에 몇 년 동안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으셨지.”“이제 십 년 전 일이 어느 정도 밝혀졌으니 마음의 병도 많이 나아지셨을 거야.”“그러니 오늘 분명 모습을 드러내실 거야.”하수진은 눈썹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어머니의 관점으로 볼 때 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아들을 죽였고 그 섬나라 사람들을 뒤에서 조종한 사람이 하구천이니 그가 여기 오도록 하지는 않으실 거야.”“그래서 오늘 이 생신에는 큰 풍파가 몰아칠 수밖에 없어.”하현은 하수진의 말을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당난영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처리한다면 그건 십 년 전 비극을 이미 받아들였다는 뜻이 된다.하지만 하수진의 말처럼 오늘은 어쨌든 큰 풍파가 몰아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그래서 하수진은 미리 먼저 밥을 먹어 두자는 것이었다.하수진이 옳았다.지금 든든하게 먹어 두지 않으면 나중엔 아무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두 사람은 재빨리 도시락을 해치운 뒤 물을 마시며 입을 헹궜다.하수진은 태블릿 PC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참! 이상한 게 있어.”“노부인은 원래 당신을 항성과 도성에서 추방하라고 했었어. 게다가 당신 때문에 천도를 잃고 말았어.”“나중에야 모두들 다 알게 되겠지만 천도는 섬나라 사람이었어.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도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어.”“그런데 난 오히려 그게 너무 께름직해.”하현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왜? 노부인이 자신의 생일에 날 죽이려고 할까 봐?”“노부인도 자신의 생일에 불길한 일이 생기는 건 두렵지 않을까?”하수진은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노부인이란 사람은 성격이 도도해서 다른 사람이라면 아마 그런 걸 염두에 두겠지만 노부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거야.”“아버지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대하듯이 당신을 대하라고 했는데 노부인께서 생신날 정말 화를 내신다면 여간 번거로워지는 게 아니야.”하현은 담
”그러는 와중에 하유곤은 우리와 맞은편에 서 있는 운명이 된 거지!”“게다가 하구천은 지금 하구봉 쪽 사람들을 잃었으니 분명 둘째 삼촌과 손을 잡으려 할 거야.”“당신이 하유곤을 짓밟아 버렸으니 설령 그가 나서지 않더라도 하구천이 그를 대신해서 반드시 그의 원한을 갚으려고 할 거야.”“왜냐하면 하유곤을 자기 쪽으로 매수하게 되면 당연히 둘째 삼촌도 매수한 셈이 되니까.”“하유곤은 최근에 항성과 도성에서 힘을 모을 생각을 했을 거야.”“그래서 진홍두가 대신 나서서 당신을 건드린 거야.”“한마디로 말하자면 결코 간단하게 끝날 일이 아니니 각별히 조심해야 해.”하수진은 하유곤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하현에게 누차 위험성을 상기시켰다.정면에 모습을 다 드러낸 상대는 상대하기 쉽지만 정체를 숨긴 상대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하유곤은 항도 하 씨 가문 후계자 자리에 관심 없어?”“하문산 쪽은 무조건 하구천을 지지하는 거야?”하수진의 말을 듣고 하현이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며 물었다.“정말 그럴까?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하구천 쪽도 그렇게 믿을까?”“만약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말이야. 음...”“하구천이 실세일 것 같은 낌새가 보였다면 트러블메이커 하유곤이 아마 제일 먼저 그에게 칼을 들이댔을 걸?”하수진은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전후 사정을 보면 바로 알 일이었다.폭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하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정신을 가다듬기 시작했다.그러나 차량이 항도 하 씨 본가에 가까워지자 하현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입을 열었다.“조심해!”운전기사는 하수진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하현의 말에 운전기사는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거의 동시에 도요타 랜드크루저 한 대가 하수진이 탄 차량 쪽으로 돌진해 오는 것이 보였다.“끼익!”엄청난 굉음이 울렸다.운전기사가 제때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더라면 롤스로이스는 전복되었을 것이다.곧
하유곤은 건방진 얼굴로 다가서며 말했다.“왜? 설마 당신이 내 차를 들이받고 남은 한 손마저 부러뜨리게?”“자! 어디 한번 해 보시지! 능력이 있으면 한번 부딪혀 보시라고!”“감히 손도 대지 못할 거면서 어디서 거들먹거리고 있어?!”말을 하면서 하유곤은 곧장 앞으로 나가 하현의 오른손을 잡으려고 했다.하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손을 뿌리치며 담담하게 말했다.“어서 꺼져. 괜히 생트집 잡지 말고.”“내가 생트집을 잡았다고?!”하유곤이 비웃으며 하현에게 대들려고 하는 순간 뭔가가 휙 훑고 지나가더니 그의 뺨이 얼얼해지며 코와 입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하유곤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건방진 자식이!”“감히 날 또 때려?!”“우리 항도 하 씨 가문을 뭘로 보는 거야!”“사람 살려요!”“여기 어르신들! 당신들이 보고 판단 좀 해 주세요!”하유곤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를 치자 순식간에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하수진은 이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하유곤이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다.대낮에 이렇게 뻔뻔하게 소리치며 하현을 공개적으로 몰아붙이는 꼴이라니!하수진은 차에서 내려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현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망설이다 끝내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자신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역시 이런 일에 끼지 않는 것이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들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하현은 여전히 아무런 흔들림 없었고 입과 코가 피범벅이 된 처참한 하유곤의 모습을 바라보며 냉소를 떠올렸다.“하유곤, 하문산의 아들이자 무학의 성지 제자인 당신이 생트집을 잡는 이런 유치한 짓까지 하는 거야?”“당신 창피하지 않아? 내가 다 창피해 죽겠어.”하현은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번에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이것은 하유곤이 오랫동안 계획한 복수임이 틀림없다.특히 그는 노부인의 생신이라는 중요한 이벤트를 택해 단번에 하현을
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 속에서도 하현은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며 하유곤을 향해 뺨을 때릴 듯 손을 올렸다.바로 그때 어디선가 한바탕 소리가 울려 퍼졌다.“실례합니다. 길 좀 비켜 주세요.”군중을 헤치고 몇 사람들이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그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은 하현이 한동안 보지 못했던 도박왕 화풍성이었다.화풍성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화 씨 집안의 아들딸이었다.화옥현, 화소붕 등은 조금 어색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하현을 향해 깍듯이 인사를 했다.화소혜는 환한 미소로 하현의 팔을 껴안으며 말했다.“하현 오빠, 이게 얼마 만이에요?”화풍성은 눈앞에 늘어선 사람들을 쭉 한번 훑어보았다.대충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늙은 여우답게 그는 누군가 고의로 이런 자리를 만든 게 틀림없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다.“마침 어르신 잘 오셨습니다. 오셔서 저 대신 시시비비를 좀 가려 주십시오.”하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얼른 하유곤이 선수를 치며 일어섰고 의분에 가득 찬 모습으로 말을 이었다.“하현이 글쎄 다른 사람 차를 치려고 하는 것도 모자라 날 또 때렸어요.”“완전히 면전에서 날 무시한 거라고요!”“우리 노부인의 체면을 완전히 짓밟은 거나 다름없어요!”하유곤은 괴롭힘당한 사람처럼 보이려 한껏 불쌍한 얼굴로 말했다.그리고 그의 부하들도 덩달아 나서서 하현이 사람을 업신여겨서 죽을 지경이라는 둥 뭐라는 둥 미리 준비한 대사를 읊어 댔다.“하현, 오늘은 큰 경사가 있는 날 아닌가?”“이런 좋은 날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더라도 응어리를 잘 풀어야지.”화풍성은 온화한 표정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하현은 나의 좋은 친구야. 나와 내 가족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어. 이 일은 나를 봐서라도 그냥 넘기면 안 되겠는가?”“물론 자네의 차는 내가 하현을 대신해서 배상하겠네. 망가진 차보다 몇 배 더 가치 있는 것으로 배상하지.”“그리고 위로금 조로 작은 성의도 보이겠네
집복당 후원과 앞뜰을 잇는 긴 회랑.회랑 양옆에는 연못이 있었고 연꽃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금붕어들이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었다.이곳은 비록 오래되었지만 유명한 정원과도 맞먹는 유려한 풍광과 격조가 느껴졌다.아름드리나무가 테두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고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즈넉한 정자, 단단한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바위 정원, 그 사이를 유유히 유람하는 맑고 고요한 물줄기.더운 여름에도 이곳에서는 상쾌하고 서늘한 바람이 일렁거려서 무릉도원과도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가운데 있는 정자에는 흰색 긴 치마를 입고 단정하게 하나로 머리를 묶은 화장기 없는 여자가 있었다.그녀는 손에 나침반을 들고 있었는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었다.그녀의 곁에는 오래된 죽간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촉감으로 글을 읽을 수 있도록 칼로 빼곡하게 글자를 새겨 놓았다.눈이 멀고 온몸에 힘이 빠져도 글과 그림을 향한 열정은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은 것 같았다.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하현의 눈에서는 절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요즘 젊은 여자들 대부분은 겉모습을 꾸미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서 미인이란 미인은 도처에 널렸다.하지만 이렇게 기품 있고 우아한 여자는 찾기 어렵다.“할아버지, 정말 우리 집복당을 팔 생각이세요?”발자국 소리를 들은 듯 뭔가를 눈치챈 황보정이 한숨을 내쉬며 어두운 표정을 말했다.“저는 병에 걸린 것이 아니라 천기를 누설한 업보로 이렇게 된 거라고 말했잖아요?”“조상님들이 물러주신 이 집복당을 판다고 해도 내 병을 고쳐줄 사람을 구할 수 없어요. 다 헛수고라고요.”“그러니까 할아버지, 나중에 죽어서 조상님 뵐 낯도 없어서 전전긍긍하시지 말고 이쯤에서 그만두세요. 제발 부탁이에요.”황보정은 글과 그림에 대한 열정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가장 중요한 착한 마음씨와 효를 심성에 장착하고 있었다.그래서 하현은 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정아, 넌 내 하나밖에
하현의 몇 마디에 모든 문제가 줄줄이 해결되었다.손님들은 갑자기 우르르 몰려와서 하현이 자신의 문제도 해결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그들이 믿고 떠받들던 황보동은 한켠에 방치되었다.하현은 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 등을 빠른 속도로 설명하며 근본적인 원인부터 해결책까지 한 번에 술술 늘어놓았다.다들 놀란 표정으로 하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고 문제가 해결되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하현이 붉은 주사 광물을 가지고 각종 부적을 그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이웃들은 모두 집복당에 젊은 신선이 왔다고 말하며 달려 나갔다.심지어 일부 아줌마들은 자기 딸이 몇 년 동안 시집도 못 가는 일까지 하현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섰다.하현은 한 명 한 명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많은 의견과 해결책들을 제시했다.즉석에서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당사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경우도 많았다.소위 풍수지리사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일을 한다.이 과정에서 황보동은 옆에서 하현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그는 들으면 들을수록 표정이 엄숙하고 경건해졌다.하현이 하는 말들은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서로 다 알고 지내는 이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평소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누구보다 황보동이 잘 알고 있었다.하현이 침착하게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황보동의 눈빛은 어느새 그에 대한 경의로 가득 찼다.황보동의 기억 속에 그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은 어린 시절뿐이었던 것 같았다.그래서 하현의 모습을 보자 황보동은 아련한 설렘마저 느끼게 되었다.결국 황보동은 자발적으로 책상 옆으로 가서 하현의 조수로 변신해 부적 그리는 것을 도왔다.“하 대사, 당신이 진정한 대사일세!”손님들이 모두 떠난 뒤에야 황보동은 하현에게 다가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인사했다.“자네는 나를 훨씬 능가하는 재주를 가졌어!”“자네가 이 집복당을 이어간다면 그건 모든 사람들이 복을 얻는 것과 같아!”그의 인생에서 가
하현의 말을 들은 황보동은 미간에 깊게 팬 주름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하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려는 것이 분명했다.하현은 아줌마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아주머니, 앞으로 옷을 입을 때 주의해야 합니다.”“티셔츠를 거꾸로 돌려서 입으면 계속 목을 조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숨쉬기도 힘들고 잠도 푹 잘 수 없습니다!”“그것만 주의하면 십중팔구는 아무 어려움 없이 푹 잘 수 있을 거예요.”“물론 계란은 잘 챙겨 먹어야 합니다.”하현의 말을 듣고 온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모두 어리둥절해져서 아무 말도 못 하다가 잠시 후 엷은 미소가 얼굴에 번지기 시작했다.가만히 눈을 들어 아줌마를 보니 역시나 옷을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이렇게 목을 조르고 있으니 당연히 호흡이 곤란해지고 밤에 잠도 잘 수 없었을 것이다.황보동은 이 아줌마보다 하현이 더욱 궁금해졌다.황보동은 일단 아줌마에게 부적을 써서 건네주었고 이윽고 두 번째 손님이 다가왔다.두 번째 손님은 팔십이 넘은 노인이었는데 머리가 좀 헝클어져 있었고 미간에 약간 거뭇거뭇한 빛이 돌았다.몸에는 약취가 풍겨서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황보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나침반을 꺼내 잠시 바라본 뒤 담담한 눈빛으로 하현을 쳐다보았다.“자네, 이분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말해 보게.”하현은 노인을 유심히 쳐다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이 노인은 아마 며칠 전에 외출할 때 개똥을 밟았고 실수로 또 시궁창에 빠졌을 겁니다.”“그로부터 며칠 동안 운이 없게도 외출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재해를 입었습니다.”“물만 마셔도 이가 시릴 지경일 겁니다.”“요즘 아주 운이 나쁜 일 연속이었을 거예요.”“해결책은 간단합니다.”“집으로 돌아가 목욕재계하고 사흘 밤낮으로 쉬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그리고 앞으로 외출할 때는 하늘만 쳐다보지 마세요.”“척추에 문제가 있으면 의사를 찾아가 물리치료를 해야 합니다. 하늘만 쳐다본다고 병이
”제가 사기꾼일까 봐 집복당의 이름을 빌려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셨던 거죠.”“그래서 이천억이란 금액을 불러 절 놀래켰고요.”“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있다고 한다면 돈이 부족하지 않다는 얘기가 되니 안심할 수 있는 거죠.”“만약 제가 이천억을 낼 수 없다면 대사님의 손녀를 구하려고 할 테고요. 혹시라도 제가 구한다면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가 되니 집복당의 새 주인이 되어도 걱정할 일이 없는 거죠.”“한마디로 황보대사님이 매우 고심하고 계시다는 뜻이고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결국 대사님 같은 분은 스스로 최소한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게 있는 겁니다. 돈 때문에 그 도리를 저버릴 수는 없었던 거죠.”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황보동을 바라보았다.풍수를 보러 온 십여 명의 손님들이 하현의 말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어쩐지 평소 붙임성 좋고 환하게 사람들을 대하던 황보대사가 이상하리만큼 싸늘하게 대하더라니, 이런 이유가 있었던 거로군!하현의 말을 듣고 황보대사의 의도를 간파한 간민효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떠올렸다.그녀도 분명 황보동의 인품을 믿고 싶었던 게 틀림없었다.“이보게.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도 능력이지만 풍수지리사는 입만 번지르르하다고 되는 게 아니야. 진짜 실력이 좋아야 하는 거야.”“만약 자네가 입만 번지르르한 사기꾼이라면 남을 살리고 도와주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입 조심하지 않으면 목숨도 잃을 수가 있어.”황보동은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그러니까 내 일 방해하지 말고 어서 썩 꺼져!”말을 하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나침반을 내려놓고 붉은 종이를 꺼내 부적을 쓰려고 했다.“제 추측이 맞다면...”하현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대사님은 이 아줌마가 악습에 깊이 마음을 다쳤다고 판단해 이 부적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 차분하게 마음을 진정시키라고 할 겁니다.”나침반을 든 황보동의 손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하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현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지만 황보동은 냉담한 눈빛으로 얼굴도 들지 않고 매몰차게 말했다.“우리 집복당은 시장에서 파는 허드레 물건이 아니야. 이천억! 다른 가격으로는 안 팔아!”“어때? 살 거야? 말 거야?”차갑고 매마른 말투였다.하현은 눈동자를 살짝 움츠렸다.상대는 분명 뭔가 못마땅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간민효는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뜨고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황보대사님, 우리 장사꾼들은 신용을 중시합니다.”“정직이 천하를 이긴다는 말이 있습니다!”“제 기억이 맞다면 어제 분명 이백억에 하기로 한 것 같은데요?”“왜 갑자기 이천억이 된 거죠?”“전 이미 유명한 부동산 전문가를 고용해 이곳에 대한 평가를 꼼꼼히 진행했어요.”“이곳은 많아 봐야 백오십억 정도의 값어치가 있어요. 손볼 곳도 너무 많고요.”“어르신이라 아주 후하게 쳐서 이백억을 제시한 거예요.”“제 호의를 무시한 채 이렇게 얼토당토않는 가격을 제시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않습니까?”간민효는 돈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함부로 버릴 만큼 많지는 않았다.특히 황보동은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하지도 않았다.“이백억은 어제 가격이고.”“이천억은 오늘 가격이야.”“집복당은 우리 황보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건물이야. 내가 원하는 만큼 받아야 팔 수 있어.”“당신이 아무리 부동산 전문가를 대동해 감정을 했다고 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물론 당신이 돈을 내지 않고 사고 싶다고 하면 그것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내 손녀만 치료해 준다면 공짜로도 줄 수도 있어.”황보동은 차가운 표정으로 입을 열면서 뭔가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들어온 아줌마에게 무엇 때문에 왔냐고 물었다.아줌마는 최근 밤마다 악몽을 꾸고 낮에는 숨이 턱턱 막혀서 생활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그녀의 설명을 들은 황보동은 나침반을 꺼내 빙빙 돌리며 계속 미간을 찌푸렸다.황보동이 자신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간민효도 화가 나기
하현은 갑자기 머리가 저릿해져 와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흥!”난처해하는 하현의 모습을 보고 간민효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집복당은 금정에서 이미 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한때 금정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곳이었어.”“옛날에는 이곳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았고 다들 어마어마한 재력과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내가 어릴 때는 태어나는 것 자체가 뭔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안타깝게도 지금 집복당의 주인인 황보동은 한동안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지 않고 과학의 길만 좇았지.”“그러다가 나중에 그의 아들이 사고를 당해 아무도 이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게 되자 다시 돌아왔어.”“하지만 그의 풍수지리술은 그의 조상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형편없어서 결국 점점 몰락하게 되었지.”“10여 년 동안 이곳에 드나든 사람은 대부분이 이 근처 오래된 이웃뿐이야.”“첫째는 가까이 있으니까 오는 것이고 둘째는 가끔 좋은 날과 길일을 보는 데는 아주 뛰어난 풍수지리술이 필요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야. 셋째는 아주 싸다는 매력 때문이지.”“다만 이렇게 되었어도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아서 아마 결국 사라질 거야.”“참, 반년 전 황보동의 유일한 손녀이자 집복당의 9대 계승자, 황보정이 갑자기 두 눈을 잃고 온몸에 힘이 빠졌지 뭐야.”“황보정은 집복당을 계승할 만큼 풍수지리사의 자질이 뛰어났어. 그래서 집복당의 영광을 재현할 가능성이 높았다고 해.”“금정 일부 명문가들도 관심을 가졌고.”“그런데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출사를 했을 때 갑자기 실명하게 되었어. 온몸에 힘이 쭉 빠져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봤지만 어떤 원인도 찾을 수가 없었지.”“집복당 일가가 여러 해 동안 천기를 누설한 결과라는 말도 있어.”“황보동도 풍수지리술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원인을 찾을 수가 없었대.”“그래서 지금 황보동도 많이 낙담한 상태야.”“이 집복
”해결되었으면 됐어.”하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세상 일에 대해 그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어떤 일에 개입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이런 사소한 일들은 소꿉놀이 같아서 정말로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다른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지.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간민효는 마음의 응어리가 풀린 듯 홀가분한 모습으로 하현에게 다가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우리 금장 간 씨 가문의 다른 하찮은 일보다 당신과의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어차피 우린 연대한 사이잖아?”“참, 당신의 풍수관이 생기면 내가 첫 고객이 되고 싶어...”하현은 웃으며 말했다.“장난치지 마.”“내가 뭘 얼마나 잘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해?”간민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이 말했다.“내가 말하고 싶은 건 인연, 인연이야...”“이 일은 당신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 같은데...”하현은 간민효의 말을 듣고 눈꺼풀을 펄쩍거리며 얼굴빛이 붉어졌다.“자, 장난치지 말고 당신이 선택한 곳부터 둘러보자고.”하현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고 이 모습을 본 간민효는 빙긋 웃으며 하현의 팔짱을 끼고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차에 타고 있던 나박하는 고민에 빠진 모습이었다.이런 상황을 보고 당연히 설은아에게 바로 고자질해야 했다.하지만 문제는 그가 이미 하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주인 격인 그를 배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나박하가 고민에 빠진 그 시각 하현 일행은 이미 집복당 안으로 들어갔다.집복당 안 넓은 부지 앞쪽에는 큰 홀이 있고 한쪽에는 서재가 있었으며 그 안에는 각종 풍수 설비가 갖춰져 있었다.뒤편에는 사랑채 몇 개와 커다란 마당이 있었다.다만 이곳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듯했지만 내부는 꽤나 낡아 보였고 바닥의 청석도 파손된 곳이 적지 않았다.종이로 칠한 창문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많아서 괴기스러운 영화를 찍거나 스릴러물을 촬영하기 딱이라는 생각마저
설은아의 말을 들은 하현은 잠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김탁우가 감쪽같은 위장으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설은아는 그의 과거에 대해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뭐라고 말을 하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뭐, 어쨌든 우린 재혼할 거니까.”“남자들을 많이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왜? 다른 뛰어난 사람을 보면 내가 홀딱 빠져 버릴까 봐 걱정되어서 그래?”설은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은 간민효랑 그렇게 붙어 다니면서 난 다른 남자랑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거야?”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일이 이렇게 흘러 버렸는데 자신이 설명을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하현의 표정을 살피던 설은아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운이 감돌았다.그녀는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자자, 질투하지 마.”“내가 한 번 본 남자한테 사랑에 빠질 여자로 보여?”“김탁우는 오늘 밤 나한테 사람을 소개해 주려고 온 것뿐이라고.”“그러니 당신도 다른 여자들과는 접촉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렇지 않았다가 내가 알기라도 하면 당신 곤란해질 거야.”“어쨌든 우린 아직 이혼한 사이니까!”말을 마친 설은아는 하현을 향해 말로 주먹을 한 방 날리고 곧장 방으로 들어갔다.하현은 이 광경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지금 누구도 두려운 사람이 없었다.모든 것을 다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그러나 한 여자 앞에서는 자신도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게다가 이 여자는 지금 이 기회를 빌려 자신과 다른 여자 사이의 애매모호한 관계에 경고장까지 날리며 그를 압박했다.이런 생각이 들자 하현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이튿날 아침 하현은 일어나서 설은아와 얘기라도 좀 나눠 보려고 했다.하지만 설은아는 어제 일은 다 잊은 듯 씨익 웃으며 일이 있다고 말한 뒤 홀연히 집을 나섰
소란은 여기서 끝났다.하현은 임수범과 이산들을 더 이상 압박할 생각이 없었다.그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의 기세를 제압하는 것이었다.자신의 앞에 놓인 곤궁한 처지를 헤치고 운명을 바꿔 나가는 일은 오로지 나박하가 감당할 몫이었다.소란스러운 상황을 계속 지켜보고만 있던 왕인걸은 등줄기에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현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 순간이었다.그렇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가 있다.소란이 끝난 후 왕인걸은 임수범 일행을 내쫓고 하현과 나박하의 테이블에 반찬 몇 가지를 더 제공해 준 뒤 나박하의 멤버십 기간을 1년 연장해 주었다.오늘 밤 그는 완벽하게 하현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고 할 수 있다.하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인걸의 어깨를 툭 건드릴 뿐이었다.간단한 동작이었지만 왕인걸의 마음은 충분히 흡족했다.식사가 끝나자 하현은 나박하에게 자신을 설 씨 집안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다음 날 다시 와서 적당한 가게를 찾는 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설은아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설은아의 성격상 중요한 일이 아니면 그다지 외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하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그때 문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렸다.곧이어 마세라티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덩치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운전석에서 내려 설은아의 차 문을 멋스럽게 열어주며 에스코트했다.이 과정에서 그는 설은아와 어떤 신체 접촉도 없었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걸었다.하현의 시선을 눈치챈 듯 남자는 그가 있는 곳을 향해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돌아섰다.하현의 눈동자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그때 갑자기 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항성에서 원가령과 약혼을 하려다가 자신에게 뺨을 얻어맞은 김탁우였던 것이다!그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마도 성형을 한 뒤 완전히 회복한 것 같았다!그리고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