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날 죽여! 하현, 당신은 날 죽일 능력이 있잖아!”자신을 쓰레기라고 부르는 말에 육성수는 험상궂은 얼굴로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육성수 같은 사람에게는 쓰레기 취급을 당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더 처참한 일이었다.하현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입을 열었다.“걱정하지 마, 난 당신을 죽이지 않을 거니까.”“오늘 이렇게 좋은 날 내 근거지에서 사람이 죽어서야 되겠어? 그 얼마나 불길한 일이야, 안 그래?”“다만 죽을죄는 면할 수 있지만 편안하게 살아 있을 수는 없지!”하현은 손을 털며 담담하게 돌아섰다.“그래서 당신은 이제 사지가 다 망가진 거야.”하현의 말이 끝나자마자 조남헌이 음흉하게 웃으며 사람들 속을 헤치고 나와 집법당의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물에 빠진 개를 호되게 두들겨 패는 데는 누가 보더라도 조남헌이 제일이었다.그는 천성적으로 이런 일에 타고났다.“안 돼, 안 돼!”육원미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하현, 하 지회장님. 제 스승님을 대신해 제가 오늘 명령을 전하러 왔어요!”“제 스승님은 용문 집법당의 당주이십니다. 스승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하현은 돌아서며 무덤덤하게 말했다.“할 말이 있으면 뜸들이지 말고 어서 해.”육원미는 재빨리 편지 한 장을 꺼내 펼치며 큰소리로 말했다.“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용문의 대구 지회장 자리에서 자진해 내려오라고 하셨어요. 당신 같은 외부인은 이 자리를 이을 자격이 없다고 하시며 당신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조만간 용문의 대구 지회장을 이어갈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하셨구요.”“당신이 이에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용문을 거스르는 것이며 용문의 백만 자제들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퍽!”“우리 지회장님을 협박해?”조남헌은 앞으로 나와 육원미가 들고 있던 편지를 가로채 갈기갈기 찢고는 육원미를 향해 뺨을 한 대 갈겼다.하현은 조남헌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보다
”여러분, 오늘 일어난 일에 대해 건의할 말이 있거든 얼마든지 하세요. 여러분들의 의견을 착실하게 이행할 생각이니까.”하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조남헌과 진주희는 서로 마주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용문에서 젊은 세대에 속한다.장로회 어쩌고 하는 이야기도 오늘 처음 듣는 얘기였다.이런 마당에 그들이 어떤 의견을 말할 수 있으랴.그러나 왕화천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지회장님,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첫 번째는 지회장님이 친히 무성에 가서 장로회를 만나 석고대죄를 하는 것입니다. 4대 장로가 체면을 중시하는 성격이라는 전언이 있으니 지회장님이 굴복하기만 하면 이 일은 그냥 지나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하현은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화천에게 계속하라고 눈짓했다.왕화천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두 번째, 용문주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용문주 사람들과 4대 장로 사람들이 몇년 전부터 서로 적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잖습니까? 많은 일들이 공개되지 않았을 뿐이지 이미 뒤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대고 있었죠.”“용문주의 지지가 있는 한 4대 장로도 당분간 지회장님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현은 왕화천의 말에 솔깃해하며 말했다.“용문 내부가 두 파로 나뉘었다는 말입니까?”“용문주파와 4대 장로파?”“4대 장로가 권력과 이권을 놓고 용문 주인과 다툴 능력이 됩니까?”왕화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지회장님은 모르시겠지만 4대 장로는 수완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역량이나 인맥, 배경은 모두 용문주와 견줄 만합니다.”“특히 4대 장로는 그 당시에 고생한 공로가 높고 대하 고위층 거물들을 구하기도 했습니다.”“이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용문 내부에 세력을 만들었고 용문주와 맞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그들은 집법당 작은 당주를 도와 그를 용문의 2인자로
이튿날 아침 하현의 말이 용문에 퍼졌다.선언과도 같은 하현의 말이 전해지자 사방이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용문 대구 지회 사람들을 제외한 용문의 다른 서른다섯 개 지회들은 하현이 미쳤다고 생각했다.이제 막 부임한 지회장이 저런 큰소리를 치고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다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만도 했다.하현의 선언은 다름 아닌 장로회와 집법당을 건드린 것이었다.이 일은 배짱을 부릴 만큼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하마터면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얼마 되지 않아 무성에 있는 4대 장로 중 한 명이 화가 나서 값나가는 귀중한 찻잔을 그 자리에서 부숴버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집법당에서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 하극상의 주인공인 지회장을 끌어내리려고 준비를 했다.밖이 떠들썩한 와중에 하현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급히 향산 1호 별장으로 돌아갔다.별장에 들어서자마자 설은아와 설유아 두 사람이 초조한 표정으로 거실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설재석도 창백한 얼굴로 손에 든 편지 한 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러는 거야?”하현은 물 한 잔도 마실 겨를 없이 얼른 물었다.“하현,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대. 방금 그놈들이 당신 이름을 대며 이 편지를 당신한테 전해주라고 했어. 만약 당신이 이 편지 내용대로 하지 않으면 우리 엄마를 죽일 거라고 했어.”설은아는 다급하게 말하며 설재석이 들고 있던 편지를 가져와 하현에게 건넸다.편지 봉투에는 최희정이 두 손이 묶인 채 의자에 포박되어 있는 사진도 함께 들어 있었다.사진 속 배경은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도시였다.하현은 사진 속에 보이는 몇 개의 상징적인 건물들을 바라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도성!?”“맞아, 도성이야!”설은아가 사진 속의 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그놈이 말했어. 3일 안에 당신이 혼자 도성으로 가지 않으면 엄마는 바로 죽은 목숨이 될 거라고.”“하현, 이
어두컴컴한 차 안, 하현에게는 꽤 낯이 익은 인물이 앉아 있었다.만약 하현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도 바로 누군지 알아봤을 것이다.차장 안의 남자는 군용 망원경을 들어 하현 일행을 바라보다 아무 감정도 담지 않은 건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도성에 온다는 소식이 과연 틀리지 않았군.”“정해진 대로 하면 되겠어.”“이번에 하현은 섬나라 사람들의 미움을 산 것도 모자라 용문 내부의 사람들한테도 미움을 샀어.”“연경 사람들에게도 미움을 샀고 말이야.”“여기저기서 모두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가 살 수 있을지 어떨지 어디 한번 지켜보자구.”말이 끝나자 어두컴컴한 차창 속 남자는 손짓을 했다.벤츠는 천천히 시동을 걸어 도성의 꽉 막힌 거리로 빠르게 사라졌다....30분 후 하현은 직접 도요타 엘파를 몰고 도성 공항을 빠져나갔다.대구 쪽에는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용문의 일뿐만 아니라 천일 그룹 일, 그리고 신당류의 일 모두 그의 소관이었다.설은아가 초조한 마음으로 제일 먼저 도성에 왔으니 하현은 굳이 오지 않아도 될 법도 했다.하지만 그는 최희정이 생포되어 인질이 된 일은 그 무엇보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다행히 대구 정 씨 집안에는 도성에 지사와 인력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화 한 통이면 모든 게 준비될 수 있었다.그 덕분에 그들이 쓸 차량과 머물 숙소는 이미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하현은 대구 정 씨 집안에서 도성에 사람을 파견해 그들을 수행하겠다는 제안을 안전상의 이유로 완곡히 거절했다.“하현, 그놈들이 왜 우리 엄마를 납치했을까? 게다가 3일 안에 왜 이 도성으로 우릴 오라고 했을까?”설은아는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어 답답한지 연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그녀는 하현이 세자 신분임을 잘 알고 있었고 천일 그룹이 상장하는 일도 겪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하현을 목표물로 했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었다.하지만 왜 최희정을 노렸는지 그녀로서
설은아의 곱상한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그녀는 이제 더 이상 마냥 밝고 곱기만한 숙녀가 아니라 대구 정 씨 집안 아홉 번째 분가의 안주인이었다.인질범들이 최희정을 납치한 배경에 대해 하현이 설명한 것을 듣고 그녀는 자신이 너무 충동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우선 하현에게 이 일을 먼저 맡긴 다음 자신이 나섰다면 최희정을 구할 확률이 더 커졌을 것이다.생각이 이에 미치자 설은아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하현, 내가 너무 성급하게 행동해서 미안해...”하현은 손을 들어 설은아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당신과 난 부부야, 미안하다는 말은 해서 뭐해, 안 그래?”“게다가 장모님이 아무리 나한테 나쁘게 하셨어도 내 장모님이셔.”“비록 장모님이 날 SL 문밖으로 내쫓으려고 하셨지만 내가 이번에 장모님을 구해드리면 SL에 날 남겨둔 것에 조금은 감사하지 않으실까?”하현의 자조적인 말을 듣고 설은아는 쓴웃음을 지었다.설은아는 최희정의 사람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이번에 하현이 최희정을 구한다고 해도 최희정은 아마 조금도 감사하지 않을 것이다.오히려 자신을 이런 곤경에 빠뜨리게 한 탓을 하현에게 퍼부을 가능성이 매우 짙다.설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최희정을 구출하지 못한 지금 상황에서 이런 생각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설은아는 초조한 듯 눈썹을 찡그리며 하현에게 말했다.“하현,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야?”하현은 손가락으로 백미러를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누군가가 우릴 미행하고 있어.”“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뭔가 손을 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인내심이 대단하군.”하현은 말을 마치자마자 붙잡고 있던 핸들을 갑자기 돌려 작은 길로 꺾어 들어갔다.하현의 움직임을 감지한 듯 도성의 카지노 사진이 부착된 두 대의 벤츠 차량이 갑자기 쌩하고 무서운 기세로 쫓아왔다.흑백의 조화라도
”쾅!”하얀색 벤츠는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미친 소처럼 날뛰다가 길가의 펜스를 넘어뜨리고 가지런히 피어 있는 꽃밭을 무참히 뭉개버린 후 끝내 뒤집히고 말았다.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남자 몇 명은 간신히 차에서 기어나왔지만 이미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전투력은 이미 상실한 지 오래되어 보였다.“쾅!”하얀색 벤츠를 처리한 하현은 액셀을 밟아 검은색 벤츠가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하지만 상대의 현란한 핸들링 기술로 검은색 벤츠는 위기의 순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하현은 얼른 차창을 내린 뒤 왼손으로 물잔을 들어 검은색 벤츠 앞유리를 향해 힘껏 던졌다.유리가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파편이 날렸다.검은색 벤츠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며 차는 방향을 잃고 옆 펜스를 들이박았다.그 순간 차량 앞부분에서 불이 나기 시작했다.폭발의 위험성도 다분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선글라스를 낀 남자 몇 명이 비틀거리며 차에서 기어나와 똑바로 서려고 하는데 하현의 차가 다시 그들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닌가!몸을 피할 사이도 없이 비틀거리던 남자 몇 명이 모두 그대로 튕겨져 공중으로 붕 날았다!하현은 쓰러진 남자들 중 한 명에게서 장전된 총과 무전기를 빼앗았다.자세히 보니 남자가 가지고 있던 총탄은 정상 규격보다 훨씬 더 크게 변형되어 있었고 총구의 위치도 훨씬 정교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었다.설은아는 하현이 들고 있던 총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하현, 예전에 군사 잡지에서 이런 거 봤어. 이런 총은 한 방으로도 간단하게 탱크 한 대를 폭발시킬 수 있다고 들었어.”하현도 이런 종류의 총을 잘 알고 있었다.설은아가 어떤 경로로 군사 잡지를 보게 되었는지 순간 궁금하긴 했지만 물어볼 겨를이 없었다.바로 그때 무전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상황 보고, 상황 보고.”상대방이 한 말은 대하어였지만 항성과 도성 사투리가 강하게 섞여 있어서 듣자마자 이 남자가 항성과 도성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하현은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한 장 찍어 어디론가 보낸 뒤 액셀을 밟고 다시 차를 움직였다.“하현, 도대체 그들이 뭘 하려는 걸까?”“단순히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저러는 거라면 우리 엄마는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얘길까?”설은아의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너무 걱정하지 마.”하현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죽지 않는 한 장모님은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오실 거야.”“그들은 나를 상대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장모님을 이용하는 거야.” “하지만 내가 죽으면 장모님도 무사하시지 못할 거야.”“그러니 이제 아무 생각하지 말고 눈앞의 골칫거리부터 해결하자구.”말하는 동안에도 하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계속 백미러를 주시했다.앞서가던 도요타 자동차 선루프가 열리며 금발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그는 RPG 발사기를 메고 하현이 타고 있는 자동차를 겨냥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이건 네 할아버지 몫이야!”하현은 순식간에 얼굴빛이 검붉어졌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차는 한쪽으로 쏠리며 아슬아슬하게 상대의 일격을 피했다.“펑!”거대한 굉음이 대지를 들썩이며 울렸고 전방의 도로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움푹 패었다.마치 세상의 종말이 온 것처럼 사방이 불길에 휩싸였다.설은아는 거의 정신을 놓을 지경이 되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그녀는 요 며칠 동안 많은 정쟁과 암투를 보아왔지만 이렇게 살벌한 장면은 처음 목격했다.상대가 이렇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흉악한 방법을 써서 사람을 죽이려고 할 줄은 몰랐다!혹시라도 방금 그 폭격에 그들의 차가 당하기라도 했다면 하현과 설은아는 시신의 형체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하현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도성은 다른 곳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이런 폭격기까지 동원해 사람을 죽이려 하다니!이 지방의 세력은 도대체 어디까지 포악무도할 수 있단 말인가!하현은 원
도성 송산 빌리지.이곳은 산을 등지고 바다를 끼고 있었고 멀리 항성을 바라보는 빅토리아 항이 있어 진정한 부자동네라 일컫는 곳이었다.부자동네의 이름에 걸맞게 호화로운 별장들이 즐비하였다.어떤 별장도 수백억 이상의 가치가 있어 일반인들에게는 방문할 엄두도 나지 않는 곳이었다.카지노의 도시 도성 안에서도 가장 치안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었고 출입도 무척 엄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하현은 베란다에 서서 빅토리아 항을 바라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방금 샤워를 마치고 나온 설은아는 담요를 꺼내 베란다로 나와 하현의 몸에 살포시 걸쳐 주었다.“하현, 밤바람이 차.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때?”하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자신의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들어 설은아의 몸에 걸쳐 주었다.“난 춥지 않아. 오히려 당신이 조심해야지. 절대 감기 걸리면 안 돼.”“당신 이번에 도성에 온 거 말이야. 장모님 일로만 온 거 아니지, 그렇지?”설은아는 순간 눈빛이 살짝 흔들렸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했다.“맞아. 내가 이번에 도성에 온 또 다른 목적은 장부를 조사하기 위해서야.”“정용이 자리에 있을 때 항성에 합법적인 카지노를 열었어.”“외부인이 도성에서 단독으로 카지노를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정용은 도박왕의 넷째 아들과 합작했지.”“그런데 정용이 죽은 후 정 씨 집안의 아홉 번째 지부에 매달 입금된 돈은 그전에 비해 1%에도 못 미쳤어.”“이전에 사람을 보내 장부를 확인해 보려고 했지만 보낸 사람마다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그래서 내가 이번에 직접 도박왕의 넷째 아들을 만나보려고 해.”하현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지금까지 이 여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설마 이것이 성장의 대가란 말인가?설은아도 그제야 자신이 실언한 것을 알아차렸다.차가운 밤바람 속에 설은아와 하현은 침묵 속에 서로의 눈을 피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잠시 후
허탈해하는 하현의 표정을 살피며 설은아가 입을 열었다.“하현, 뭘 선물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당신이 우리 결혼기념일을 기억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하현은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하현, 오늘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한 것은 더 이상 우리의 과거 일을 언급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서였어.”“김탁우와의 사이는 이미 멀어졌어.”“엄마 기분이 좀 나아지면 내가 직접 말씀드릴 거야.”“당신이랑 재혼할 거라고.”“그러니 더 이상 우리 엄마랑 싸우지 마, 알았지?”설은아는 하현을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게다가 그녀는 간민효를 마주했을 때 하현을 빼앗길까 봐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다.하현은 쓴웃음을 지었다.다른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다만 최희정은 아마 두 사람의 재혼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하현이 그리 강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최희정이라는 여자는 혼자서 모래폭풍도 무찌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두 사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박하는 어느새 설 씨 집안에 도착했다.하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먼저 들어가. 난 요즘...”“내려! 여긴 당신 집이야!”설은아는 억지로 하현을 차에서 끌어내렸다.“오늘 밤 여기서 자.”하현은 한숨을 내쉬며 설은아의 손에 이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집안에 들어가니 식탁에는 이미 음식이 그득하게 차려져 있었다.최희정과 설재석 외에 그들의 양아들 이영산과 며느리 장리나도 함께 모여 있었다.네 사람이 82년산 라피트를 마시며 얼굴이 볼그레한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십여 개의 선물 상자가 쌓여 있었는데 그중 몇 개의 상자에는 김 씨 가문 로고가 박혀 있었다.김탁우가 방문한 것이 틀림없었다.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하현이 나타나자 최희정의 낯빛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자네, 여긴 어쩐 일이야?”“와서 밥 먹어.”로열 회관의 일로 설재석은 여전히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하 대사가 아니었다면 당신은 아마 지금쯤 감옥에서 죽었을 거야!”“당신한테 하루의 시간을 주겠어! 우리 왕 씨 가문의 돈 일억을 갚지 않으면 바로 경찰서에 신고할 거야!”“감옥에 들어갈 준비나 하라고!”“그럼 그만 꺼져!”왕부인이 다시 손을 휘둘러 우소희의 얼굴을 날려 버렸다.망했다!완전히 망했다!우소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가리며 끊임없이 통곡했다....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은아는 하현의 차에 앉아 의문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다.“도대체 우소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어떻게 하다가 왕 씨 가문에 일억을 빚진 거냐고?”하현은 담담하게 말했다.“왕 씨 가문 딸 왕자혜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는데 마침 내가 그녀를 구해 주게 되었어...”설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 당신이 어떻게 사람을 구해? 당신이 의술을 알아?”하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모르지. 난 단지 차에서 그녀를 빼내서 폭발하기 직전의 차에서 구해 준 것뿐이야...”“그때 마침 우소희가 구급차 간호사로 왔는데 내가 한 일을 자신이 한 것으로 둔갑시켜 공을 가로챘지.”“그래서 왕 씨 가문에선 고마움의 뜻으로 그녀에게 일억을 준 거야.”“나중에 왕문빈의 부인이 진실을 알게 되었고 우소희의 잘못이 드러났지.”“하지만 부인은 우선은 딸의 부상이 더 염려되어서 잠시 우소희 일은 따지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 뜻밖에도 우소희가 그 돈을 먹고 튈 줄은 몰랐지.”“게다가 그 돈으로 사기를 쳐 돈 많은 거물을 낚은 거야...”하현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그렇게 된 거구나.”설은아는 그제야 모든 걸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어쩐지 우다금 모녀가 휘룡만 집을 산다며 뛰어다니더라니.”“우소희가 아주 눈먼 거물을 잘 속인 거였군!”하현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다만 안타깝게도 운이 조금 모자랐던 거야. 여기서 부인을 만났으니.”“집도 날아가고
”저는 왕 사장님이 주신 휘룡만 1호를 보러 왔습니다.”하현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런데 휘룡만의 문턱이 이렇게 높은 줄은 몰랐습니다. 매니저가 다짜고짜 절 도둑놈으로 몰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왕 사장님이 저한테 뭐라고 해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하현의 말을 듣고 왕문빈의 부인은 눈꺼풀이 펄쩍 뛰었다.그녀는 순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손을 휘둘러 남자 매니저의 얼굴을 때렸다.“퍽!”“개자식! 눈이 멀었군!”“하 대사님은 우리 왕 씨 가문 귀빈이야!”“그런데 도둑이라니?!”“네가 뭔데 함부로 그딴 소리를 해?!”“경찰에 신고를 한다고?”“감옥에 가둔다고?”“죽고 싶은 거야?”“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옳고 그름도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사람을 얕보는 당신 같은 직원은 필요없어!”왕문빈의 부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하현이 누구인가?왕자혜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다.주 씨 가문 귀빈이자 풍수의 대가, 무도의 고수였고 심지어 자신도 그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를 해야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감히 매니저 따위가 하현을 건드려?살기가 싫은 건가?왕문빈의 부인은 가까스로 하현의 용서를 얻은 상태였다.하현이 자칫 기분이 언짢기라도 한다면 왕문빈이 자신을 내칠 수도 있었다.남자 매니저는 일그러진 얼굴을 가리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모님, 어떻게 저한테...”“촥!”왕문빈의 부인은 또 한 번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꺼지라고!”“못 들었어?”“내가 다시 한 번 말해야 알겠어?”“내가 직접 널 끌어내야 속이 시원하겠어?!”남자 매니저는 얼굴을 가린 채 아무 반박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혹시라도 반박했다간 어떤 지경이 될지 그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는 왕문빈의 부인이 어떤 스타일인지 익히 잘 알고 있었다.순간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하물며 하현이 정
”그가 훔쳤든 아니든, 내가 여기 있는 한 그는 훔친 겁니다!”“왕 사장님 머리가 어떻게 되셨더라도 절대 휘룡만 1호를 파실 분이 아닙니다!”“두 분이 솔직히 인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용서할 기회를 드리죠!”“그렇지 않으면 정말 경호원을 불러 경찰서로 데리고 가라고 할 거예요!”남자 매니저는 색기가 가득 흐르는 눈빛으로 설은아를 바라보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음흉한 속내를 슬쩍 비쳤다.설은아는 기겁하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그러자 남자 매니저는 더욱 불쾌한 얼굴로 말했다.“여사님, 제가 여사님 얼굴을 봐서 특별히 두 분께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안 그러면 두 분도 같이 경찰서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쓸데없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고요.”“공범으로 몰려 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남자 매니저가 이렇게 말하자 우소희는 순간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설은아, 우리 모두 피차 내막을 잘 아는 사람들이잖아?”“체면 때문에 일부러 하현한테 이런 뻔뻔한 일을 시킬 필요는 없는 거 아니야?”설은아는 그녀의 말에 기절할 뻔했다.“뭐라고?”이때 하현이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휘룡만 1호는 내가 산 게 아닌 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주운 것도 아니에요.”“훔친 건 더더욱 아니고요.”“왜냐하면 왕 사장님이 저한테 주신 거니까요.”이 말을 들은 설은아는 약간 어리둥절해하며 믿기 어려워하는 표정을 지었다.“무슨 소리예요?”“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냐고요?!”“왕 사장님이 당신을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어떻게 천억짜리 집을 당신한테 주냐고요?!”남자 매니저는 하현의 말을 듣고 ‘피식’하고 냉소를 흘리며 얼굴 가득 혐오의 빛을 띠었다.“당신은 정말 날 바보로 아는군요!”예쁘장한 여자 영업사원들도 모두 경멸하는 눈빛으로 하현을 노려보았다.나이도 많지 않은데 허풍이나 떨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이다.우소희도 입을 삐죽거리며 시큰둥한
하현은 이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말했다.“이 집은 내가 산 것이 아닙니다...”“뭐라고요?”하현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 매니저가 눈에 한기를 가득 머금은 채 하현을 노려보았다.“이 카드키, 훔친 거죠?”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눈이 동그래졌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하현을 바라보았다.훔친 거라고?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훔친 카드키를 들이밀며 자신이 이 집을 산 거라고? 돌았나?!방금까지 하현을 우러러보던 사람들의 눈빛은 갑자기 돌변했다.그들은 방금 하현을 그런 눈으로 본 자신들을 탓하며 3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생겼다.설은아는 이 말을 듣고 얼굴빛이 살짝 변하며 약간 걱정스러운 듯 하현을 쳐다보았다.하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남자 매니저를 바라보았다.“방금 당신이 한 말, 꼭 책임져야 합니다.”“책임이라고요?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는지 제대로 알려드리죠!”남자 매니저는 손가락을 튕겨서 경호원 몇 명을 불렀다.“휘룡만 1호는 우리 휘룡만에서 가장 귀한 물건입니다!”“이 집은 외부에 판매된 적이 없었고 저당 잡힌 것도 없습니다!”“이곳은 왕문빈 사장님의 개인 별장입니다!”“카드키도 분명 왕 사장님 손에 있을 겁니다!”“그런데 그게 어떻게 외부인인 당신 손에 있단 말이죠?!”“설마 오다가 주웠다고는 말하지 마세요!”“오다 주운 게 휘룡만 1호 카드키라니요?!”“어서 말해 봐요! 이 카드키, 왕 사장님한테서 훔친 겁니까?”“솔직히 말하면 관대하게 처리해 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당장 관청에 신고해서 당신을 감옥에 처넣어 버리고 말 겁니다!”남자 매니저는 위엄 있는 얼굴로 속사포처럼 하현을 향해 퍼부었다.이로써 그는 자신이 꽤 성공한 사람처럼 느껴져 우쭐해졌다.데릴사위를 호통쳤을 뿐만 아니라 설은아 같은 미녀 앞에 꽤나 멋진 모습을 보일 수 있어서였다.가장 중요한 것은 왕문빈이 잃어버린 카드키를 되찾았다는 것이다.엄청난 공로임에 틀림없다!어쩌
휘룡만 1호?!그 가치가 천억이라고?하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벼락을 맞은 듯 멍해졌다.방금까지도 싸움에서 이긴 수탉처럼 의기양양했던 우다금은 설은아가 손에 든 카드키를 보며 온몸이 굳어 버렸다.우소희는 자신의 뺨을 때리며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한 뒤 설은아를 쳐다보았다.우소희의 눈빛에는 부러움과 질투로 이글이글 타올랐다.스스로 상류층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오건우조차도 이 순간에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천억짜리 선물이라고?그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농담을!자신의 몸값을 다 쳐도 살 수 없는 액수였다!설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이게 휘룡만 1호라고?”하현이 담담하게 말했다.“맞아. 휘룡만 1호.”“당신 주려고 준비했어. 결혼 3주년 기념 선물이야.”하현의 말을 듣고 주변에 있던 많은 분양사 직원과 손님들이 몰려들었다.모두들 귓속말로 서로 속삭이며 하현을 한껏 우러러보았다.다들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저렇게 쉽게 천억을 들여 집을 산 사람은 처음 보았다.이것이 진정한 토호의 모습이 아닌가!하현을 얕잡아 보던 우소희는 순간 억지로 웃음을 쥐어짰다.“설은아, 하현이 어떤 사람인지 우린 모르지만 혹시 당신도 잘 모르는 거야?”“저 사람 혼자 힘으로 천억을 덥석 내놓는다고? 허! 그렇담 암퇘지도 나무에 올라갈 수 있겠군!”우다금도 옆에서 이를 갈며 거들었다.“맞아. 하현은 데릴사위야. 한 달 동안 네가 준 용돈으로 빌붙어 사는 사람이잖아?!”“그런데 어떻게 휘룡만 1호를 살 수 있단 말이야? 농담 좀 그만해! 정말 지겨워!”“분명히 인터넷에서 카드키 하나 사 가지고 너한테 준 걸 거야!”“우리 앞에 보여 주려고 말이야!”“설은아, 내가 사람 된 도리로 하나 가르쳐 줄게.”“사람이 아무리 허풍을 떨고 싶어도 체면까지 내팽개치면 안 되지.”우다금은 세상 물정에 해박한 어른인 양 하현을 꾸짖었다.“하현, 내가 꼭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지만 사람이 이렇게
하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쳐다보았다.오건우는 왠지 얼굴이 화끈화끈거리며 통증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이를 악물고 은행 카드를 테이블 위에 내놓았다.“살게요! 내가 사요!”“전액 현금으로!”“이걸로 하겠습니다!”오건우는 49호를 가리켰다.더 비싼 집은 도저히 그의 능력 밖이었다.특가 주택 정도는 그의 능력으로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다.그러자 분양 직원은 함박미소를 띠며 말했다.“네, 그럼 수속 도와드리겠습니다.”일사천리로 구매 계약서가 준비되었고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다.“오건우, 당신 정말 대단해! 날 이렇게 사랑하다니!”우소희는 터져 나오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계약서를 들고 오건우의 얼굴을 감싸안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정말 사람 하나는 잘 골랐어!이렇게 비싼 집을 사 주다니!이게 웬 떡이야!오건우의 마음속에 그녀를 향한 사랑이 이렇게 크게 자리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하지만 오건우는 이 계약으로 거의 이백억을 탕진하게 되어 유동자금은 모두 없어져 버렸다.그는 화류계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하지만 우소희가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졌으니 앞으로 인맥은 비길 데 없어 넓어질 것이다.우소희가 왕문빈의 딸을 구해 주었다니 인정상 왕문빈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그것만으로도 우소희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자신이 우소희와 결혼하기만 한다면 우소희의 인맥이 곧 자신의 인맥이 된다.그렇게 되면 자신도 당당하게 왕문빈 앞에 얼굴을 내밀 수 있게 되고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일만 남게 된다.그 순간을 상상하니 지금 아무리 불쾌하고 떨떠름해도 오건우는 충분히 참을 수 있었다.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그의 얼굴 위에 이내 환한 미소가 번졌다.우다금 모녀는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원래 그녀는 이십억짜리 집이라도 사면 설 씨 집안에 충분히 체면이 서게 된다고 생각했었다.그런데 지금
”어머! 오건우, 200억이잖아?”우소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 오건우에게 온몸을 기대어 애교를 부렸다.“당신 같은 부자한테 200억은 껌이잖아. 나 이 집 갖고 싶어!”우소희는 영리한 여자였다.오건우라는 황금거위를 이용해 거액의 집 한 채를 꿀꺽 삼키고 싶었던 것이다.어쨌든 그녀는 지금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겸비한 돈 많은 여자이지 않은가!그녀가 왕문빈 부부에게 체면이 깎인 일은 현재 병원 내부에서만 알고 있으며 온라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여전히 여신격의 의사로 알고 있다.겉모습이 꽤나 예쁘장한 우소희는 왕문빈의 일억을 가지고 고급 장소에 출입하며 재벌 2세들의 관심을 끌었다.수많은 추파 속에 오건우를 선택한 우소희는 목적한 바를 이루기 위해 그를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그래야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게 된다.오건우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가 새파랗게 변했다.그러나 그도 체면을 의식하며 깊은 숨을 들이마신 뒤 가식적인 모습으로 사진을 몇 번 찍어 누군가에게 보냈다.오건우의 입에서 ‘어우, 와’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우소희, 방금 우리 집 풍수지리사에게 특별히 물어봤어.”“그런데 이 집은 보기에는 위치도 좋아 보이고 멀끔해 보이지만 결함이 굉장히 많다고 해.”“바람길의 입구에 위치해 있어서 교살과 노살을 막고 있대.”“그러니까 말이야. 이 집은 다른 사람들의 재난을 막아주고 있는 형상이어서 들어가서 살게 되면 병들고 아플지도 모른대.”“우리 대사님 말씀에 따르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 말고 다른 집이 있는지 둘러보자.”“가격대가 다 이렇게 비슷비슷한가요?”오건우는 분양 직원에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그 의미는 분명했다.더 저렴한 물건이 없냐는 뜻이었다.직원은 오건우의 눈짓에 웃으며 말했다.“손님, 이미 이 가격도 싼 거예요.”“이 집은 도로 입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특가를 진행하는 거예요.”“48호 가격은 250억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됐어! 소희야, 다른 사람 상처에 소금 뿌리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좋지 않은 행동이야!”이때 공작새처럼 차려입은 우다금이 나서서 원만하게 수습하려는 척 단아한 표정을 지었다.“하현이 단지 체면이 깎일까 봐 한번 해 본 소리일 뿐이야.”“우리야 이런 일이 많으니 스스로 감정을 통제할 수 있지만 저런 사람들이야 남하고 비교될까 봐 더 잘난 척하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겠어?”“게다가 우린 지금 상류층 사람이야. 저런 데릴사위랑 실랑이를 할 필요가 뭐 있어?”“격 떨어져!”“그러니까 얼른 집이나 보자고. 빨리 수속 밟아야 하잖아?”“저런 사람과 실랑이를 하다가 좋은 집을 놓치면 우리만 손해지!”우다금은 빈정거리면서 분양 단지를 설명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려 흡족한 눈빛으로 대형 분양 단지들을 바라보았다.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절대 이런 집을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예비 사위 오건우도 이런 큰집에 헛돈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그저 칠팔십 평짜리 방 세 개 정도 되는 집이라도 살 수 있다면 감지덕지일 것이다.“자, 설은아. 하현. 당신들은 먼저 돌아가.”“우리는 집을 산 후에 개인 모임이 있어서 식사도 해야 해.”“그곳은 너무 고급스러운 자리라 여러 명을 데리고 가긴 좀 안 맞거든. 함부로 데려갔다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엄한 말이라도 하면 곤란하잖아, 안 그래?”하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설은아가 끌고 나오는 바람에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설은아는 돼먹지도 않은 우다금 모녀와 더는 화를 내며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느꼈다.아무런 의미없는 실랑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만약 최희정이 가라고 그녀를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아마 설은아는 죽어도 오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오건우는 설은아가 이렇게 떠나게 될까 봐 노심초사했다.자신의 부를 과시할 기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오건우는 헛기침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우소희, 당신이 골라 봐. 마음에 드는 거 있는지 보자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