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의 눈빛은 매우 포악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주위를 한 바퀴 뒤졌으나 성혜인의 행방을 발견하지 못해 결국 다시 내려가기로 했다.하지만 겨울이는 주인을 찾지 않으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겨울아.”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가자. 지금 안 가면 너 여기 버릴 거야.”겨울이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는데 하늘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는 탓에 털이 전부 홀딱 젖어버렸다. 겨울이가 아무리 반승제를 좋아한다 해도, 이번만큼은 꿈쩍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겨울이와 반승제는 서로 잠시간 대치를 벌였다. 얼마 안 지나 결국 반승제가 먼저 타협하기로 했다.그는 자신의 양복을 벗어 겨울이를 감싸고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갔다.‘주인이 나한테 성질을 부리면 됐지, 이제 그 개도 내 머리 위에 올라타려고 하네.’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고, 짜증도 나고 화도 났지만, 겨울이가 단지 자신의 주인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개들은 때때로 충성을 표현하는 방식이 매우 서투르다.많은 개는 주인이 죽은 후에도 묘비에서 잠을 잔다.그들은 죽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한다. 단지 입을 열 수 없을 뿐.반승제가 아래로 내려갈 때, 마침 심인우가 차를 몰고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대표님, 혜인 씨는 별장에 없습니다.”‘혜인이한테 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크군.’“주변의 모든 CCTV를 찾아봐요. 땅을 모두 뒤진다 해도 반드시 찾아내야 합니다!”심인우는 이미 그의 말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분부한 지 오래였다. 지금으로서 그는 알레르기가 있는 반승제가 겨울이를 안고 있는 게 심히 걱정될 뿐이었다.반승제는 조심스럽게 겨울이를 차에 싣고 자신도 따라 탔다.네이처 빌리지로 돌아와, 겨울이는 집에 들어가지 않고 내내 밖에 앉아 비를 맞았다.하지만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홀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성혜인의 소식을 기다렸다.샤워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겨울이는 여전히 입구에 앉아 있었다. 마치 성혜인이 돌아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려는 것처럼 말이다.반승제
현장의 사람들도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이 어찌 감히 반승제를 홀로 이곳에 둘 수 있겠는가.하지만 반승제는 손을 들어 손목의 시계를 쳐다보기만 했다.“다들 지진 감시국에서 안전하다고 할 때 다시 오세요.”“하지만 대표님...”그러나 반승제는 이미 길을 떠나고 있었다.결국 다른 사람들은 겨울이를 목줄에 묶어 하나둘 헬리콥터에서 내려온 줄을 잡았다....정신을 차린 성혜인의 귀에는 물이 똑똑 떨어지는 주변의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하도 고요해도 그 소리는 유난히 더욱 또렷이 들렸다.그녀는 앞으로 가려고 노력했지만, 동굴은 너무 어두웠고 산소마저 약간 부족한 정도였다.“콜록콜록.”두어 번 기침하자 메아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여긴 어디지?’눈앞에 물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자신이 한 동굴에 있고 사방에 CCTV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더듬더듬하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발을 다친 탓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그때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배현우가 준 물건, 어디에 있어?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는 네가 여기에 평생 갇혀 죽게 만들 거야.”소리는 카메라가 있는 방향에서 나왔는데, 아마 그녀를 납치한 사람일 것이다.성혜인은 이곳보다 더 무서운 검은 방에 갇혀 있은 적이 있다. 그 방안에는 뱀도 있었고 지네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긴 어둠만 있을 뿐, 적어도 사람의 두피를 저리게 만다는 동물은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벽을 따라 길을 찾기 시작했다.그러나 꽉 막힌 공간인지 사방에는 문이 없었고 그 목소리는 아직도 묻고 있었다.“그 물건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로즈 가든에도 없고, 포레스트 안에 있는 거야? 아니면 다른 곳에 숨겨 뒀어?”성혜인은 로즈가든의 빽빽한 감시 카메라가 생각나자 등에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었다.‘이 사람인가? ’하지만 그녀는 아직 이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도대체 당신 누구야?”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이내 목소리는 사라졌으며 주변은 고요해졌다.성혜인은
반승제는 얼굴을 찡그리며 문을 닫았다. 이 벽에 나타난 문은 모두 이런 절벽으로 통하는 함정이었다.‘혹시 숨어있는 문이 존재하는 건가?’그때, 그의 귓가에 성혜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반승제!”반승제는 순간 멈칫하며 이내 한 방향으로 걸어갔다.“혜인아.”이곳으로 꺾어 들어간 후, 반승제는 성혜인의 뒷모습을 보았다.얼른 몇 걸음 빨리 갔지만, 다음 순간에 총이 그를 겨눴고 곧이어 총알이 발사되었다.다행히 반사신경이 빠른 덕분에 총알은 반승제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그러고는 다시 성혜인이 있던 곳을 바라봤더니, 어느새 사람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반승제는 이내 어두운 눈빛으로 그림자가 있던 곳을 쫓아갔다.성혜인은 구덩이 안에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위에 있던 문이 열리며 불이 켜졌고, 곧이어 밧줄 하나가 내려왔다.그러자 성혜인은 눈빛을 반짝이며 서둘러 밧줄은 허리에 묶었다.누군가가 그녀를 끌어올리고 있었다.지면에 이르자 그녀는 가슴에 핏자국이 묻은 반승제를 보았다.그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벽에 난 흔적을 가리켰다. “이건 내가 만든 표시야. 이걸 따라가.”그것은 올바른 기억을 하기 위해 그가 가슴의 피를 이용해 만든 표시였다.올바른 길을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그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성혜인은 그의 이런 허약한 모습을 보고, 두 손으로 서둘러 반승제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대표님은 괜찮아요?”반승제는 그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누군가 네 목소리를 흉내 내더라. 그래서 내가 찾아서 죽였어”“일단 아무 말도 하지 말아요.”성혜인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손에 든 총을 주웠지만, 총알은 이미 비어있었다.악전고투를 치른 게 분명해 보였다.손이 덜덜 떨리는 상황에서 그녀는 감히 반승제의 가슴에 있는 상처를 살피지 못했다.‘상처가 마침 심장 쪽에 있는 것 같은데... 죽기 전에 지금
지면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통로 위에 돌이 떨어지기 시작했다.성혜인은 악바리로 버티며 반승제를 일으켜 피할 곳을 찾으려 했다.하지만 통로의 바닥은 완전히 깨끗해 탁자, 의자 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으며 가끔 나타나는 문은 열어보면 낭떠러지와 연결되는 곳이었다.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는 사실에 성혜인은 식은땀이 절로 났다.‘대표님이 이 길에서 표시를 남기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표시를 따라 가장 바깥쪽으로 나가자 땅이 더 심하게 흔들렸다.그때, 앞에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문이 나타났다.이 산속은 들어갈 수만 있고 나갈 수는 없다.문을 하나 두고 바로 밖이 있었지만, 만약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하지 않으면,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한 영원히 이곳에 갇히게 된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인 것이다.반승제는 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이내 성혜인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의 손에 묻은 핏자국이 온통 그의 몸에서 흐른 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반승제는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통증 때문에 흘린 땀이 머리카락 전체를 젖힐 정도였다.그러나 그는 마치 이것이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성혜인을 꼭 껴안았다.“혜인아, 조심해!”그가 재빨리 성혜인을 밀쳐내자 머리 위에서 순식간에 큰 돌이 떨어져 반승제의 머리를 쳤다. “반승제!”성혜인은 자신의 몸에 있는 옷감을 찢어내 그의 다친 곳을 막았다.그러나 피는 아무리 해도 멈추지 않았다.말도 안 되게 떨리는 손끝으로 성혜인은 반승제의 머리에 난 상처를 감싸고 문을 두드렸다.“문 열어! 문 열어!”여전히 땅이 흔들리고 있었고 아무런 가림막도 없어 낙석이 언제 굴러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그녀는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세게 닦아내고 계속 비밀번호를 입력했다.“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셨습니다...”“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하셨습니다...”“앞으로 한 번의 기회가 남았습니다...”성혜인의 손끝이 더 심하게 떨렸다. 그때, 반승제가 희미한 목소리로 성혜인을 불렀다.“혜인아...”
그녀의 심장은 갑자기 미친 듯이 뛰었지만, 홍수는 이미 휩쓸려 오고 있었다.산꼭대기에서 산사태, 큰비와 지진까지... 그야말로 악몽이 아닐 수 없다....의식을 차린 성혜인은 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성혜인 씨는 곧 깨어날 겁니다.”“혹시 머리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요?”“아니요. 그냥 뇌진탕이에요. 깨어난 첫 며칠은 잠깐 현기증이 날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반승제 씨는요?”“반승제 씨는 아직 중환자실에서 관찰하고 있습니다. 오늘만 잘 넘기면 괜찮을 겁니다.”반승제의 이름을 들었을 때, 성혜인은 갑자기 매우 긴장되었다.그는 심한 부상을 입었다. 이미 가슴과 머리에 부상을 입은 데다 산사태에까지 휩쓸렸으니 말이다.‘정말 괜찮은 거 맞아?’심장이 시큰거리고, 홍수에 떠밀려 가기 전 했던 키스가 생각났다. 가벼운 듯 또 무거운 것이, 그 어떤 말보다도 강한 힘이었다.성혜인은 입을 벌리고 무언가 말하려고 했지만 힘이 없었다.저녁에 깨어났을 때, 그녀는 하얀 천장을 보았다.병상 옆에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강민지가 서 있었다.강민지는 그녀가 깨어나는 것을 보고 놀라서 서둘러 성혜인을 끌어안았다.“혜인아, 이게 무슨 일이야. 간호사들이 네 이름을 말했을 때, 나 너랑 동명이인이 실려 온 줄 알았어. 근데 네가 입원했을 줄이야!”성혜인과 강민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 모두 바쁜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민지야.”그녀는 기침을 두 번 했는데, 가슴이 눌려 있어 말하기가 좀 힘들었다.“천천히 말해. 아직 말할 수 없다면 하지 말고.”강민지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조용히 말했다.“오전에 반 회장님께서 막 가셨는데, 내가 듣기로는 너를 밤새워 지키셨대. 나도 그냥 끝에 있다가 회장님이 가신 후에야 온 거야.”반태승이 자신의 병상 앞에 이렇게 오래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성혜인은 갑자기 매우 미안했다.‘안 그래도 몸이 불편하신 분인데 이번에 대표님이 또 그렇게 됐으니... 또 충격을 받으실까 걱정이네.’“민지야, 반
바로 옆 병실인 반승제의 병상 앞에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온시환도 있고 서주혁도 있고 진세운도 있다.반씨 집안사람들도 몇몇 병문안을 왔지만 오랫동안 지켰던지라 지금은 모두 돌아간 상태였다.그리고 그것들은 사실 대부분 진심이 아니다.지금 반승제와 한성 그룹의 맞대결은 이미 보름이나 지나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또 일을 생겨버렸으니 사람들은 모두 그가 이 대결에서 패할 것이 분명하다고 여겼다.아마도 반승제가 퇴원할 때 그는 이미 BH 그룹의 대표가 아닐 것이라며 말이다.곧이어 수술이 잡혀있던 진세운은 흰 가운을 입고 현장에 서 있는 두 사람을 한 번 보았다.“승제는 아마 며칠이 지나야 깨어날 거야. 그러니 여기서 계속 지킬 필요 없어.”그들은 모두 반승제가 이번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이 모든 게 성혜인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안다.그녀가 누군가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그는 성혜인을 구하러 급히 갔다.온시환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고 했으나 진세운의 눈빛에 제지당했다.“병원에서는 금연이야.”그러자 온시환은 입술을 살짝 잡아당기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그럼 나가서 피면 되잖아.”사실 세 사람 모두 반승제의 상황에 놀랐다. 부상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그렇게 진세운과 온시환은 모두 떠났고, 이곳에는 순식간에 서주혁만 남게 되었다.그때, 어디서 소식을 듣고 왔는지 모를 라미연이 와서 반승제가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코끝이 시릴 정도로 울어댔다.“흑흑... 대표님. 대표님 꼭 빨리 나아지셔야 해요. 저랑 아이 모두 대표님이 필요하다고요.”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서주혁은 그 말을 듣자 눈썹을 살짝 치켜뜨고 위아래로 라미연을 훑어보았다.그러나 반승제의 연애사에 대해 그는 사실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단지 이 여자가 반승제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것이 의외일 뿐.‘허허,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승제는 결벽이 있어 여자도 함부로 안 만나는데.’서주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팡이는 3m 정도 멀어져 갔다.성혜인은 지팡이를 주우려 하던 손을 움츠리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그러자 서주혁은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고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성혜인 역시 그의 기에 눌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서주혁 씨, 왜 이러시죠?”반승제와의 일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와 서수연 사이의 트러블 때문일까?서주혁은 아니꼬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특별한 외상은 없었고 그저 발에만 부상을 입은 반면, 반승제는 그녀와 달리 중환자실에서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하였다.“승제가 혜인 씨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병실 문 앞까지 와 놓고선 안 들어가요?”서주혁이 성혜인 한테 까칠하게 구는 이유는 반승제 때문이었다.“승제 씨를 보살피는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안에서 반승제의 아이를 가진 라미연은 슬프게 울고 있었다.성혜인의 말을 들은 서주혁은 표정이 굳어지더니 갑자기 그녀를 벽에 밀어붙였다.“승제가 혜인 씨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저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였을지도 몰라요.”목이 졸린 그녀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성혜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서주혁의 생김새는 반승제와는 달랐다. 반승제는 부드러운 카리스마의 소유자라면 서주혁은 인정사정없는 냉철한 사람이었다.제원에는 서주혁에 관한 소문은 별로 없었고 굳이 따지자면 반승제 외 몇몇 사람들과 친분이 있고 건달들과 가까이한다는 것이었다.서주혁은 그야말로 인간미라고는 조금이라도 없는 냉정한 사람이었다.그에게 목이 졸린 성혜인은 고통스러웠지만 아무런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그러자 서주혁은 화를 억누르며 그녀의 목에 있던 손을 풀어주고는 이곳이 병원이란 사실을 망각한 채 담뱃불을 붙였다.지나가던 간호사들이 말리려 했지만 그의 험상궂은 얼굴에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그럼 혜인 씨는 승제한테 마음이 없는 건가요?”“대표님은 그다지 저를 맘에 들어 하지 않을 겁니다.”성혜인은 목을 만지며 말했다.이윽고 서주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이틀 뒤, 반승제가 깨어났다.하얀 천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고 여자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반승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손을 들어 이마를 만지려던 순간 반태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래서 우리 승제가 진짜 그 여자를 임신시켰단 말이야? 언제 적 일인데? 아무 여자나 들쑤시고 다니더니, 이 자식 깨어나기만 해봐 아주 그냥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 것이야.”이 말을 들은 반승제는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머리가 더 아파오는것 같았지만 그는 계속 자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반태승은 지팡이를 짚고 손자의 병상 옆에 있었고 라미연도 울음을 그치고 안절부절 해하며 앉아있었다.반태승은 그녀의 몸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언제쯤 일이에요? 아가씨는 언제부터 우리 손자를 알게 되었어요?”라미연은 반태승이 사회적으로 명망이 높은 것을 알기 때문에 그에게 밉보일 행동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상상치도 못한 인물을 접한 그녀는 이것이 자신이 출세할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녀는 그날 반승제와 네이처 빌리지에서 만난 이유를 반태승에게 알려주었다.하지만 매사에 철두철미한 그는 라미연의 말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는지 심인우더러 네이처 빌리지의 CCTV를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그 동시, 반태승은 옆에 서 있는 의사에게도 물었다.“배 속에 아이도 친자 검사를 할 수 있나요?”그의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반태승은 두 손으로 지팡이를 꼭 잡더니 이내 담담한 말투로 말하였다.“그럼 친자확인을 진행하죠. 만약 진짜 우리 반씨 가문의 핏줄이라면 당연히 재산의 일부를 물려주겠지만 우리 가문의 핏줄이 아니라면...”그 뒤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반태승의 뜻을 알 수 있었다.진짜 핏줄이 아니라면 라미연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기에 그녀는 자신의 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원래 겁이 많았던 라미연은 반태승의 말에 두려움을 느껴 떨고 있었다. 그러고는 도와달라는 눈빛으로 온시환을 쳐다보았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