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긴장한 모습으로 주변을 훑어봤다. 만약 유경아가 그녀의 차를 보고 데리러 나온다면 반승제에게 완전히 들켜버리고 말 것이다.개털 알레르기가 있는 반승제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쓰러질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얼른 유경아에게 전화해 겨울이를 숨겨달라고 하려고 했다. 반승제가 겨울이를 만난 적 있어서 숨기지 않으면 또 정체를 들킬지도 몰랐다.성혜인이 휴대전화를 꺼낼 때, 심인우가 반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회장님께서 준비하신 신혼집에 곧 도착합니다. 회장님께서 오시자마자 신혼집부터 검사 하신다고 했습니다.”반승제 뿐만 아니라, 심인우도 성혜인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씨 집안사람은 혼약을 맺은 순간부터 난감한 일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성혜인이 반태승을 구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이런 행패를 부릴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첫 번째 융자도 BH그룹의 도움을 받고, 두 번째 융자도 BH그룹에게 6000억이나 받았다. 게다가 그들은 돈으로 만족하지 않고 얼굴도 모르는 성혜인으로 반승제를 묶어두려고까지 했다.또 반태승은 성혜인에게 무슨 짓을 당했는지 두 사람의 혼인에 아주 진심이었다. 귀국하자마자 신혼집으로 와서 생활의 흔적을 검사하려니 말이다. 부부 사이의 감정은 연기로 때울 수 있지만, 생활의 흔적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승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포레스트 별장에 가본 적 없었고, 그의 물건 또한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을 반태승에게 보인다면 모든 사실을 들켜버리고 만다.심인우는 반승제에게 포레스트 별장의 위치라도 알려주려고 이곳까지 왔다. 안 그러면 그는 평생 자신의 신혼집 위치조차 모르고 살 것이다. 심인우의 설명을 듣고 난 반승제는 역시 표정이 어두워졌다.약 200m 밖에서 포레스트 별장의 외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포레스트 별장은 위치, 디자인, 주변 환경까지 단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곳이었다. 그만큼 반태승은 성혜인을 예뻐했고, 그녀에게 선물하는 모든 것을 신경 써 골랐다.반승제와 심
성혜인은 금방 표정 관리를 하고 태연한 미소를 지었다.“어쩐지 대표님의 사생활을 엿들은 것 같아 당황해서요.”만약 이런 소식을 기자에게 알려주면 반승제가 며칠 동안이나 뉴스 타이틀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기자들도 한창 그의 결혼 소식을 노리고 있으니 말이다.반승제는 BH그룹의 후계자로 가장 젊은 상업 귀재로 평가받는다. 그는 어린 나이에 실리콘밸리에서 이름을 날리고 경영 능력을 인정받아 반태승이 늘 흐뭇해했다. 그의 사생활은 단언컨대 모든 이의 주목을 받고 있다.반승제는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당신은 입이 무거운 사람이라고 믿어.”반승제는 덤덤한 말투로 말하며 창밖의 포레스트 펜션을 바라봤다. 심인우는 그가 들어가려는 줄 알았지만 그는 짧게 한마디만 했다.“최대한 빨리 내 옷을 이곳에 가져다 놔요.”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유턴하더니 성혜인에게 말했다.“혜인 씨, 이제는 댁으로 모셔다드릴게요.”성혜인의 집은 이미 팔렸기에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이 참에 계약서에 사인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답했다.“네, 감사합니다.”“감사 인사는 제가 해야죠.”차 안은 아주 조용했다. 성혜인의 집 아래에 도착했을 때, 반승제의 차는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다.반승제와 심인우는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성혜인은 그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긴 후에야 계약서에 사인하기 위해 부동산에 전화 걸었다. 부동산에서도 그녀의 연락만 기다려 왔기에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 금방 사인을 끝냈다. 이제는 은행에서 돈을 보내주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성혜인은 운전해서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고 유경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밖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아주머니.”유경아는 성혜인의 뒤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사모님, 이게 무슨 일이에요?”“대표님이 들어갈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냥 돌아가셨네요. 제 차 안에 음식이 조금 있는데 집으로 들여가 줘요.”사실 유경아도 반승제를 만난 적 없었기에 아주 긴장하고 있었다.
성혜인은 답답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설계도가 마음에 드시면 바로 인테리어를 시작하게 되는데 다른 분한테 보여주지 않아도 되나요? 임 사장님 말로는 좋아하는 분을 위해 준비하는 집이라면서요. 그 분한테도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반승제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됐어.”성혜인은 급기야 반승제가 윤단미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문이 가짜는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첫날 밤 윤단미의 이름을 부른 걸 봐서는 틀림없을 것이다. 지금은 잠깐 다투거나 했을 수도 있었다.성혜인은 아내로서의 자각은커녕, 반승제의 감정사를 흥미진진하게 추측하기나 했다.“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필요할 때 다시 연락드릴게요.”성혜인이 전화를 끊고 다시 휴식하려 했을 때, 유경아가 와서 노크했다.“사모님, 회장님께서 방금 전화 왔는데 내일 저녁 6시 비행기로 도착하신답니다. 그리고 사모님한테 대표님과 함께 공항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대표님과 함께...?’성혜인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고 가지 않을 핑곗거리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반태승은 그녀를 가장 아껴줬던 사람이고 최근 몇 년 동안에도 친할아버지처럼 지극정성으로 돌봐줬다.성혜인은 심호흡하며 말했다.“알겠어요.”반태승은 아무래도 점심에 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연락한 듯했다. 휴대전화에 신호가 없어서 집으로 전화한 모양인데 지금쯤이면 아마 비행기를 탔을 것이다.반승제와는 어차피 만나야 할 사이이니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그나마 준비할 시간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세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평소와 달리 유난히 조용한 거실에 머리를 드니 소파에 앉아있는 백연서가 보였다.백연서는 온 지 한참 되었는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제 금방 서천에서 돌아와 피곤했던 성혜인은 오래간만에 늦잠을 잤는데 이렇게 딱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성혜인을 발견한 백연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승제는 회의 세 개를 하고도 남을 시간에 넌 이제야 일어
백연서가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잘잘못 문제가 아니라, 당신 집안 자체가 우리와 격이 맞지 않아서 그래요. 그때 성혜인이 회장님을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승제와 엮이는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다들 잘 알고 있잖아요.”말 잘하는 소윤도 백연서 앞에서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반승제의 마음 하나 사로잡지 못해 성휘와 자신에게 이런 모욕감을 주는 못난 성혜인이 미울 뿐이었다.백연서의 시선에 성혜인이 들어왔다. 여전히 무심하게 서 있는 성혜인의 모습에 화가 더 끓었다. “1년 후에 무조건 이혼해야 한다는 계약서다. 설령 승제가 참지 못하고 널 원한다 해도 넌 고분고분 피임약을 먹어야 해. 성씨 집안은 승제의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을뿐더러, 난 내 손자가 사리사욕에 눈먼 집안에서 태어나는 꼴 못 본다.”도가 지나친 발언에 성혜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어머님. 그래도 어른이시니 어머님과 언쟁하고 싶지 않어요. 전 결혼 생활 3년 동안 투명 인간처럼 지냈다고 확신해요. 반승제 씨와 어떤 불화도 없었고, 어머님이 치욕스러운 말을 하셔도 웃으며 참았다고요. 하지만 오늘 아버지까지 불러서 이러는 건 도가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백연서도 스스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에 겨울이를 보고 나서 화가 치밀어오른 걸 보니, 강아지 때문에 트라우마가 떠오른 듯하다.그때부터 백연서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성혜인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사실, 그녀의 큰아들도 겨울이와 같은 품종의 강아지를 길렀었다. 하지만 큰아들은 이미 6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그녀는 눈을 감았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아들을 반태승이 이런 여자와 엮어두었으니, 불만이 없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성혜인. 그렇게 못 들어주겠으면 반씨 집안에서 2차 융자 가져갈 생각도 하지 마. 호의를 베풀었더니 권리인 줄 아네. 난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왜? 내가 일부러 당신들 모욕하는 것처럼 들리나 봐?”백연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뱉으며 자신의 가방을
이번 응급조치는 꽤 쉽지 않았다. 결국 5시 반이 되어서야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아버지를 보자 성혜인은 가슴이 아렸다.“선생님. 우리 아빠 많이 안 좋은 건가요?”그동안 회사 일에 치여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지 못했던 성휘는 아플 때마다 진통제로 버티고는 했다.성혜인의 기억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러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는 늘 어느 정도 벌었으면 충분하니 다 같이 사현에서 정원 하나 구입해 꽃 심으며 편안하게 살자고 타일렀다.하지만 아버지에게 시집갈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주머니 사정은 여의찮아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자기 아내에게 못 할 짓이라 생각한 성휘는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부자가 되어 아내와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원대한 꿈 때문이었다.성혜인은 예전부터 그 부분이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그렇게 회사가 흑자로 돌아설 때쯤,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반평생 고생만 했지만 호사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소윤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 된 것이다.의사가 마스크를 내렸다.“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딸이에요.”다른 의료진들에게 성휘를 병실로 옮길 수 있도록 지시한 후, 자신의 진료실을 가리켰다.“상황이 좀 복잡하네요. 진료실로 가서 얘기합시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녀가 진료실에 도착해 문이 닫자,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간암 말기입니다. 수술도 권해드리지 않는 수준이에요. 1년 정도 남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성혜인은 머리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환청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말도 안 돼...’“확실한 거예요?”“검사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현재 암세포가 이미 전이된 상태예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렇지 최근 2년 동안 분명 통증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진통제 복용하면서 최대한 빨리 입원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절대안정이 필요합니다. 트랜스아미나제 수치가 높은 편인데, 밤샘 문제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반태승을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걷던 도중, 반태승은 결국 참지 못하고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성혜인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였다.마침 울린 전화벨이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성혜인은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조금 풀어준 뒤에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한참 울리던 전화벨은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끊어졌다.반태승의 전화를 받지 못한 성혜인은 급히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할아버지, 죄송해요. 아빠가 갑자기 입원하셔서 병원에 오는 바람에 공항에 가지 못했어요.”이유를 듣게 된 반태승은 성혜인을 위로했다.“입원이라니, 무슨 일이니? 지금은 좀 괜찮아진 거야? 괜찮다. 오늘 저녁 약속에 오지 말고 아버지 잘 돌봐 드리렴.”성혜인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외삼촌한테 말해야 하나? 아니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시니까...’반씨 집안에는 더더욱 알릴 수 없었다. 반태승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소식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누군가는 고의로 동정을 사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냥 몸이 좀 편찮으셔서 그래요. 아직 주무시고 계시네요. 할아버지, 다음에 죄송한 의미로 선물 사갈게요.”반태승은 허허 웃었다.“할아버지한테 예의 차릴 필요 없다. 나도 선물을 준비했는데, 승제 통해서 전해 주마.”성혜인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급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네, 감사해요, 할아버지.”‘할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성혜인의 목소리에 반태승은 마음이 점점 풀렸다.전화를 끊은 후, 반태승은 상자를 하나 꺼내 반승제에게 건넸다.“혜인이 선물이니 반드시 전해주렴. 혜인이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하네. 난 뭐라 말을 전할 수가 없으니 여유 있을 때 선물 들고 병원에 가봐. 사위면 사위다운 모습을 보여야지.”반태승은 진심으로 성혜인의 소식에 가슴 아파했다
성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의 전 아내이자 성혜인의 엄마, 임지연을 만났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얼마 전 임지연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꾼 듯했다. 성혜인에게도 미안해졌다. 반승제는 훌륭한 사위지만, 딸이 싫어한다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사실 성혜인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 한 번 끼친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딸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윤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몇 마디만 해도 고분고분 들었지만, 지금은 몸이 허약해진 상태인 데다 얼마 전 전처의 기일이었다 보니 약해지는 모습을 더 자주 보였다.하지만 예전에 그 여자에게 빼앗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절대 성휘의 딸이 승전고를 울리도록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소윤은 결심했다.“여보,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말아요. 혜인이가 성격이 좋지 못해서 그렇지, 당신은 이미 혜인이에게 충분히 잘했어요. 사돈이 그렇게까지 화내고 있을 때 혜인이가 맞섰으면 사돈도 우리 체면을 이렇게까지 구기지는 않았을 거예요.”백연서를 떠올리자, 성휘는 입을 막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백연서의 언행은 너무나도 지나쳤다. 하지만 성혜인과 반승제의 결혼으로 600억이라는 융자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연서는 성씨 집안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악담을 쏟아낸 것이다.“여보. 혜원이가 당신 생각하는 마음을 봐요. 건강 문제만 아니었어도 벌써 찾아왔을 거예요. 입원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질 못하겠다니까요. 한이에게도 전화하니 회사 일 너무 걱정 말고 푹 쉬라 하더군요. 한이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성휘의 안색이 많이 나아졌다. 성혜원과 성한은 그래도 성혜인보다 철이 들었다. 승부욕이 강한 성혜인은 한 번도 성휘에게 의지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라는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혜인이는 확실히 혜원이만큼 철들지는 않았어.”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혜인
반승제는 속이 답답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알았어요.”백연서 역시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지만 반태승의 건강을 염려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반승제가 거실문을 나서자 그녀가 따라나섰다.“승제야, 병원에 정말 가볼 생각이니?”반승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이미 정원까지 걸어 나왔기 때문에 거실 안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옅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마치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안 가요.”백연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낮에 성휘를 만났어. 그렇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입원? 할아버지가 귀국하시니 일부러 속이려고 저러는 거야. 참 멋없는 행동을 많이 한다니까. 네가 정말 가면 그들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돼.”몸이 좋지 않은 반태승을 이용한다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엄마, 알았어요.”반승제는 자리를 뜨고자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백연서가 한 마디 덧붙였다.“혹여 할아버지가 가보지는 않을까 싶어 네 물건 포레스트로 옮겨 뒀다. 너도 할아버지 상태를 봤으니 알겠지만, 심기 건드는 일은 없어야 해. 할아버지가 정말 가시기라도 하면 너도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어차피 성혜인은 네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게스트룸에서 묵을 거야.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 뒀으니 허튼 짓 못 할 거야.”백연서는 성씨 집안을 언급하면서 짜증 난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승제야, 성혜인 그 아이 그래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남자들 홀리기 참 쉬운 애야.”반승제는 성혜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성혜인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백연서의 말에 긍정의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백연서는 말이 너무 많은 자신 때문에 반승제의 미움을 살까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엄마가 너와 윤단미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는데... 단미도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둘이 잘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