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응급조치는 꽤 쉽지 않았다. 결국 5시 반이 되어서야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아버지를 보자 성혜인은 가슴이 아렸다.“선생님. 우리 아빠 많이 안 좋은 건가요?”그동안 회사 일에 치여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지 못했던 성휘는 아플 때마다 진통제로 버티고는 했다.성혜인의 기억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러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는 늘 어느 정도 벌었으면 충분하니 다 같이 사현에서 정원 하나 구입해 꽃 심으며 편안하게 살자고 타일렀다.하지만 아버지에게 시집갈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주머니 사정은 여의찮아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자기 아내에게 못 할 짓이라 생각한 성휘는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부자가 되어 아내와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원대한 꿈 때문이었다.성혜인은 예전부터 그 부분이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그렇게 회사가 흑자로 돌아설 때쯤,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반평생 고생만 했지만 호사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소윤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 된 것이다.의사가 마스크를 내렸다.“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딸이에요.”다른 의료진들에게 성휘를 병실로 옮길 수 있도록 지시한 후, 자신의 진료실을 가리켰다.“상황이 좀 복잡하네요. 진료실로 가서 얘기합시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녀가 진료실에 도착해 문이 닫자,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간암 말기입니다. 수술도 권해드리지 않는 수준이에요. 1년 정도 남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성혜인은 머리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환청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말도 안 돼...’“확실한 거예요?”“검사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현재 암세포가 이미 전이된 상태예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렇지 최근 2년 동안 분명 통증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진통제 복용하면서 최대한 빨리 입원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절대안정이 필요합니다. 트랜스아미나제 수치가 높은 편인데, 밤샘 문제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반태승을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걷던 도중, 반태승은 결국 참지 못하고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성혜인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였다.마침 울린 전화벨이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성혜인은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조금 풀어준 뒤에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한참 울리던 전화벨은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끊어졌다.반태승의 전화를 받지 못한 성혜인은 급히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할아버지, 죄송해요. 아빠가 갑자기 입원하셔서 병원에 오는 바람에 공항에 가지 못했어요.”이유를 듣게 된 반태승은 성혜인을 위로했다.“입원이라니, 무슨 일이니? 지금은 좀 괜찮아진 거야? 괜찮다. 오늘 저녁 약속에 오지 말고 아버지 잘 돌봐 드리렴.”성혜인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외삼촌한테 말해야 하나? 아니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시니까...’반씨 집안에는 더더욱 알릴 수 없었다. 반태승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소식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누군가는 고의로 동정을 사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냥 몸이 좀 편찮으셔서 그래요. 아직 주무시고 계시네요. 할아버지, 다음에 죄송한 의미로 선물 사갈게요.”반태승은 허허 웃었다.“할아버지한테 예의 차릴 필요 없다. 나도 선물을 준비했는데, 승제 통해서 전해 주마.”성혜인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급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네, 감사해요, 할아버지.”‘할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성혜인의 목소리에 반태승은 마음이 점점 풀렸다.전화를 끊은 후, 반태승은 상자를 하나 꺼내 반승제에게 건넸다.“혜인이 선물이니 반드시 전해주렴. 혜인이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하네. 난 뭐라 말을 전할 수가 없으니 여유 있을 때 선물 들고 병원에 가봐. 사위면 사위다운 모습을 보여야지.”반태승은 진심으로 성혜인의 소식에 가슴 아파했다
성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의 전 아내이자 성혜인의 엄마, 임지연을 만났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얼마 전 임지연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꾼 듯했다. 성혜인에게도 미안해졌다. 반승제는 훌륭한 사위지만, 딸이 싫어한다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사실 성혜인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 한 번 끼친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딸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윤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몇 마디만 해도 고분고분 들었지만, 지금은 몸이 허약해진 상태인 데다 얼마 전 전처의 기일이었다 보니 약해지는 모습을 더 자주 보였다.하지만 예전에 그 여자에게 빼앗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절대 성휘의 딸이 승전고를 울리도록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소윤은 결심했다.“여보,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말아요. 혜인이가 성격이 좋지 못해서 그렇지, 당신은 이미 혜인이에게 충분히 잘했어요. 사돈이 그렇게까지 화내고 있을 때 혜인이가 맞섰으면 사돈도 우리 체면을 이렇게까지 구기지는 않았을 거예요.”백연서를 떠올리자, 성휘는 입을 막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백연서의 언행은 너무나도 지나쳤다. 하지만 성혜인과 반승제의 결혼으로 600억이라는 융자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연서는 성씨 집안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악담을 쏟아낸 것이다.“여보. 혜원이가 당신 생각하는 마음을 봐요. 건강 문제만 아니었어도 벌써 찾아왔을 거예요. 입원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질 못하겠다니까요. 한이에게도 전화하니 회사 일 너무 걱정 말고 푹 쉬라 하더군요. 한이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성휘의 안색이 많이 나아졌다. 성혜원과 성한은 그래도 성혜인보다 철이 들었다. 승부욕이 강한 성혜인은 한 번도 성휘에게 의지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라는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혜인이는 확실히 혜원이만큼 철들지는 않았어.”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혜인
반승제는 속이 답답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알았어요.”백연서 역시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지만 반태승의 건강을 염려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반승제가 거실문을 나서자 그녀가 따라나섰다.“승제야, 병원에 정말 가볼 생각이니?”반승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이미 정원까지 걸어 나왔기 때문에 거실 안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옅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마치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안 가요.”백연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낮에 성휘를 만났어. 그렇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입원? 할아버지가 귀국하시니 일부러 속이려고 저러는 거야. 참 멋없는 행동을 많이 한다니까. 네가 정말 가면 그들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돼.”몸이 좋지 않은 반태승을 이용한다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엄마, 알았어요.”반승제는 자리를 뜨고자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백연서가 한 마디 덧붙였다.“혹여 할아버지가 가보지는 않을까 싶어 네 물건 포레스트로 옮겨 뒀다. 너도 할아버지 상태를 봤으니 알겠지만, 심기 건드는 일은 없어야 해. 할아버지가 정말 가시기라도 하면 너도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어차피 성혜인은 네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게스트룸에서 묵을 거야.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 뒀으니 허튼 짓 못 할 거야.”백연서는 성씨 집안을 언급하면서 짜증 난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승제야, 성혜인 그 아이 그래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남자들 홀리기 참 쉬운 애야.”반승제는 성혜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성혜인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백연서의 말에 긍정의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백연서는 말이 너무 많은 자신 때문에 반승제의 미움을 살까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엄마가 너와 윤단미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는데... 단미도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둘이 잘 지
“포레스트에 미리 전화해 둘까요?”“그렇게 하죠.”심인우의 물음에 반승제는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하지만 곧 성혜인과 만날 생각해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시간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반승제와의 약속을 두 번이나 어겼기 때문이었다. 정말 버릇없는 행동이었다.심인우는 휴대폰을 꺼내 포레스트에 전화를 걸었다.유경아는 그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오늘 여기에 오신다고?!’전화를 끊은 그녀는 다급히 도우미들에게 겨울이를 뒷집으로 숨기고 방안 구석구석 전부 소독하게 시켰다. 잠시 후 방에 털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도우미들이 일을 깔끔하게 하는 편이기도 하고, 평일에는 매일 집안 소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30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유경아는 안도한 듯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때 성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전화로 이를 알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휴대폰을 꺼내 드는 순간,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유경아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낯선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마이바흐 차량이었다.반승제가 도착했다!유경아는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반승제를 맞이했다.“대표님.”반승제는 포레스트에 있는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고갯짓으로 회답했다.유경아는 더욱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낮에 대표님 어머니께서 대표님 물건들을 보내오시면서 셰프에게도 입맛 관련하여 당부 말씀 전해 놓으셨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보필하고자 이곳에 있게 된 가정부입니다.”반승제의 시선이 유경아를 향했지만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유경아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급히 그를 침실로 안내했다.“이곳이 대표님의 방입니다. 복도 끝이 사모님 방이고요.”반승제는 복도 끝에 시선을 두었다. 확실히 꽤 먼 거리라 서로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아 좋았다.그는
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업무 이메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다음 날, 그는 일찍이 밑으로 내려왔다. 유경아는 서양식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반승제는 거실을 한 번 훑었지만, 이 집 안주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유경아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해명하고자 입을 열었다.“사모님은 어제 좀 피곤하셨는지 깨우지 말라 하시더라고요.”반승제는 곧바로 성휘의 입원 소식이 떠올랐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성휘는 꾀병이 아니었던가?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포레스트에서 보낸 첫날 밤. 3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내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일부러 흥미를 유발하려는 술수인지 감이 안 잡혔다.만약 후자라면, 사람 잘못 봤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반씨 집으로 향한 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점심때 뭐 좀 사서 병원에 다녀와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그 시각 포레스트 안. 반승제가 떠나고 나서야 유경아는 성혜인 방의 문을 두드렸다.성혜인은 진작 세수를 마치고 유경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갔어요?”“네. 방금 가셨어요.”성혜인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사모님. 대표님 어머니 말씀 때문에 숨으시는 거면 제가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볼까요?”“아니에요. 아주머니도 제 사람이니까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전 반승제가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융자로 600억을 받은 일때문에 어머님도 절 싫어하시는 거고요. 그럴 만하죠. 할아버지가 완쾌하시면 곧바로 이혼할 거예요.”유경아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반태승의 선물을 챙겨 본가로 향하려 했다.그 시각 반태승은 홀로 본가에 있었다. 물론 의사와 도우미들도 함께 있었다. 귀국 후 컨디션이 좋았던 반태승은 성혜인을 보는 순간 기쁜
반태승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성혜인의 손을 두드렸다.“말하는 걸 보니, 승제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구나?”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눈으로 웃었다.“네, 있어요.”반태승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그럼 됐다. 걱정 마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다.”성혜인은 반태승에게 더 큰 기대를 주면 안 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의 몸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화제를 돌렸고, 1시간 동안 말벗이 되어주다 본가를 떠났다.본가 입구를 나와 차에 오르려던 그때, 반승혜와 마주쳤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얼굴에 걸친 반승혜는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놀란 듯했다.“페니 씨, 여기서 뭐 해요?”마침 성혜인이 차에 오르는 모습만 목격했을 뿐, 본가에서 나오는 건 보지 못했다. 성혜인은 바로 핑계를 댔다.“그림을 한동안 그리지 않았기도 해서... 영감 좀 얻으려고 와봤어요.”순진한 반승혜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곧이어 짹짹대는 참새처럼 가십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아, 참. 서수연 경찰에서 풀려난 거 알아요? 서수연 오빠가 직접 경찰서로 갔대요. 이번에 망신 제대로 당했죠, 뭐. 서주혁 그 사람도 성격이 별로 안 좋아요. 마주치게 되면 최대한 피해요. 물론 승제 오빠한테 전화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이랑 절대 엮이지 마요.”반승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서주혁도 나쁜 사람인 것 같았다.“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반승혜는 차에서 내리며 지척에 있는 본가를 가리켰다.“전 할아버지 보러 왔어요. 그럼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조만간 정체를 들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할아버지는 성혜인을 불러 반씨 가족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자고 할 게 분명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반씨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야 할 것이다.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반승혜가 다
반승제의 눈꼬리에서 짙은 조소가 느껴졌다.“할아버지, 직접 한 말이에요?”“그럼. 혜인이는 참 기특한 아이야.”한약을 건네준 반승혜는 당장 한마디 하고 싶었다. 기특하다고? 제원에서 반승제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할아버지한테 이런 말까지 하더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반승제는 할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해 분명 알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입 발린 말이겠지만.반승혜는 내일모레가 기대됐다. 도대체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 여자이길래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반승제의 눈빛을 읽은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반승제는 한약을 반태승에게 건넸다.“노력해 볼게요.”예전과 똑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하는지 할아버지는 알 길이 없으니 능청스럽게 넘어가려 했다.“오늘 포레스트에 가봐야겠다. 네 놈이 정말 노력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봐야겠구나.”반승제가 당황하는 장면을 예상했다. 하지만 대답이 의외였다.“네. 가 보셔야죠.”현재 반태승의 몸 상태로는 어디를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저 반승제를 떠보기 위한 말이었다.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반승제의 모습에 반태승은 그의 말을 믿었다.“3년 전 네가 혜인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때도 혜인이는 나에게 볼멘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이번 승혜 생일을 기회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겠구나. 그때 너무 성급하게 결혼식을 하다 보니 혜인이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나중에 나가서 힘든 일 많이 당할 거야.”반태승은 성혜인에게 진심을 다했다. 그 모습에 반승제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반태승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어차피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니까. 성혜인도 그 명성으로 위세를 떨치고 다니지 않았는가.“할아버지가 만족하시면 됐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할아버지 건강이에요.”“오늘 병문안은 다녀왔니?”“이따가 가려고요.”반태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잠시 후, 본가에서 나온 반승제의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
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샤워를 마치고 다시 한번 세수를 마치고 나서야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그러나 설우현은 이미 떠난 모양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아침 일찍 설기웅에게 불려가 두 아이를 돌보러 갔다고 한다.순식간에 할 일이 없어진 설연주는 그저 별장 안에 앉아 바깥에 활짝 피어있는 꽃을 바라보며 멍을 때렸다.저녁, 방금 해열제를 먹고 다시 바라보니 정원에는 설우현의 차가 멈춰 세워져 있었다.그리고 설우현은 품에 꽃다발을 안은 채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다정한 눈웃음을 짓고 있었다.순간, 부지런히 움직이던 손길이 멈칫하고 설연주는 먹고 있던 과일을 천천히 내려놓았다.설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설우현이 위층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채 다시 꽃을 안고 외출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잠깐 고민해보던 설연주는 결국 다시 올라가 설우현에게 인사를 건넸다.“오빠, 데이트하러 나가요?”설우현은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몸은 좀 어때? 괜찮아졌어?”“네, 좀 나아졌어요.”그러자 설우현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액셀을 밟았다.설연주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입을 여니 대체 뭘 물어야 할지도 몰랐다.같은 시각, 설우현은 이미 차를 몰고 떠났고 설연주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그녀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그때,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설강민이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지금 어떻게 그 20억을 갚을지 생각 중이라고 한다.“명목상이지만 설연주 씨 친오빠 진짜 너무 멍청한 것 같네요. 이렇게 간단한 사기극에도 속다니... 두팔이 빌려준 20억은 이윤이 이미 30억이 됐어요. 그런데 설준석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안 하고 도리어 두팔에게 또 대출을 받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또 20억을 빌렸죠.”오번의 말을 들어보니 확실히 웃음이 나왔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그럼 설강민은 지
설우현은 자신의 잡혀버린 소매와 설연주의 눈빛을 번갈아 보았다.한 치의 빛깔도 없이 캄캄하기만 했다.당황스러울 정도로 낭패한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나 어디 안 가. 물 따라올게.”“물 안 마셔도 돼요. 목 안 말라요.”그러나 그녀의 입술은 핏발이 보일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잠시 생각에 잠긴 설우현은 이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설연주의 몸은 여전히 조금씩 떨고 있었고 설우현을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그때, 도우미 아주머니가 문밖에 찾아왔다. 설연주의 목소리가 워낙 날카로워 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그러자 설우현은 침대 옆에 앉은 채, 도우미에게 말을 건넸다.“미지근한 물 한 잔과 해열제 한 알 주세요.”설연주의 열은 여전히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정말 의사의 말대로 너무 긴장한 상태였을지도 모른다.잠시 후, 도우미는 설우현의 말을 따라 재빨리 물을 가져다 놓고는 약을 설우현의 손바닥 위에 놓아주었다.이윽고 설우현은 설연주의 턱을 치켜들고 약을 먹여주었다.그러나 설연주는 입을 벌리고 있을 뿐 약을 삼키려 하지 않았다.몇 초간 머뭇거리던 설우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손끝을 그녀의 입에 넣고는 목 가장 깊은 곳에 약을 대었다.이에 설연주는 결국 마지못해 약을 삼키게 되었고 설우현은 또다시 물컵을 그녀 앞에 놓아두고 턱을 잡더니 천천히 물을 먹여주었다.물이 목구멍을 따라 흘러내리며 설연주는 저도 모르게 기침을 두 번 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그렇게 물 반 컵을 마신 후에야 설우현은 물컵을 옆에 있는 협탁 위에 내려놓았다.“이제 그만 자.”“오빠, 제발 가지 말아요.”설연주는 마치 가지 말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계속하여 그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하지만 설우현은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그저 웃겼다. 이제 정말 익숙해지기라도 한 걸까. 설우현이 정말 설연주의 오빠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실하
현재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그렇게 많은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병에 걸린 적이 몇 번 없었는데 이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건강은 점점 악화하여가기만 했다.그저 평생 행복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가?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남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덩달아 마음이 약해진 오번도 다시 한번 그녀에게 당부해주었다.“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 하면 안 돼요. 이번에 설우현이 날 놓아준 건 전부 서주혁의 얼굴을 봐서였다고요. 다음부터는 도와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만히 있자고요. 어차피 지금 김현서는 두팔 쪽에 있고 설강민은 사채업자들한테 걸렸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빚은 졌다는 사실이 설준석의 귀에 들어갈 거예요.”찌릿찌릿 쑤시는듯한 통증에 설연주가 손을 들어 태양혈을 주물렀다.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설연주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오번 씨, 그거 알아요? 요즘 계속 꿈을 꾸는데 꿈만 꾸면 비싼 카펫 위에서 기어 다니는 내 모습이 보여요. 그래서 가끔 생각해요.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생활이 과연 현실일까? 갖은 노력을 다해 설씨 가문에 들어온 게 정말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을까?”“설연주 씨...”“하지만 이제 알 것 같아요. 전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정승후는 이미 무너졌으니 다음은 설강민, 그리고 다음은 김현서, 마지막은 두팔까지...”오번이 미간을 찌푸렸다. 두팔을 상대한다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두팔의 세력은 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대했으니까.“이번에는 고마웠어요. 끝까지 저 지켜줬잖아요. 앞으로 다시는 설씨 가문에 손을 대지 않을 거니까 오번 씨도 계속 저한테 소식만 전해줘요.”“그래요.”전화가 끊기고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아무리 뒤척여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설우현도 언젠가 성혜인에게 생길뻔한 일이 그녀와 관련
남자가 전화를 한 상대는 오혜수였다. 지금 그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의 보스뿐이니까.전화를 받은 오혜수는 여전히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오번? 너 퇴직한 거 아니니? 왜 아직도 전화해.”오번은 남자의 암호명 순위일 뿐이다. 전에 오혜수의 곁을 따라다닐 때 해킹을 담당하며 얻은 암호명이다.그 후 제원시에서 미움을 사는 바람에 플로리아로 건너와 자신의 기술로 용돈 벌이를 하는 것이다.비록 전에 충분히 많은 돈을 벌어두었지만 돈이란 아무리 많아도 상관없으니 더 벌면 안될 것도 없었다.“보스, 이번에 저를 구하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주혁과 장하리를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 설우현 도련님께 잡혀 왔는데 번거로우시겠지만 도련님께 전화 좀 해 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오늘 당장 두 다리를 잃을 것 같습니다.”오번이 서주혁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설우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이번 일이 서주혁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아하니 남자는 그저 서주혁이 대신 나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한편, 오혜수는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서주혁을 알고 있는 건 맞지만 서주혁도 아직 장하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세워줄 이유가 없었다.“보스, 저를 구하지 않으면 오늘 정말 다리가 부러질 겁니다.”“닥쳐. 그러게 멀쩡히 잘 있는 설씨 가문을 왜 건드려?”오혜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 부잣집 자제들과 접점이 생기는 것이었다.그러나 오번 역시 상황이 급한지라 또 몇 번이나 거짓 울음을 터뜨리면서 꼭 구해주러 오라고 몇 번이고 당부한 뒤에야 전화를 끊었다.전에 제원에 있을 때 장하리의 행방을 감추는 것을 도운 적이 있기에 지금 오번이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장하리와 서주혁뿐이었다.설우현은 휴대폰을 낚아챈 뒤 바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이 아닌 유심히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겁에 질린 오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감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5분 후, 누군가가 설우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설우현은 싸늘한 말투로 다시 한번 그녀를 밀어냈다.“꺼져. 선 넘지 마.”설연주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설우현에게 밀려 푹신푹신한 소파에 주저앉으니 순간 지그시 감은 두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혹시 자신의 힘이 너무 셌던 건 아닌지 하는 마음에 설우현이 양미간을 찌푸리며 설연주를 바라보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솔직히 설연주는 이미 너무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게다가 설우현은 소위 말하는 여동생과 그렇게 가까이 지내서는 안 됐다.그녀를 뒤로하고 설우현은 곧바로 옆에 앉아 컴퓨터를 켜 자신이 투자한 프로젝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모든 프로젝트는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한 시간이 지나고 그는 소파 변두리에 아슬아슬하게 누워있는 설연주를 발견했다.그러나 설우현의 각도에서는 그녀의 흰 옆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설우현이 천천히 다가가 설연주를 바로 눕혀주었다.정말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약간의 카리스마에 매혹적인 기질을 갖고 있어 설령 가장 무난한 옷을 입더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여우로 보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녀의 여우처럼 길게 찢어진 눈은 말로 이룰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고 그 눈동자에 서러운 감정이 서리니 자꾸 마음이 약해지는 기분이 들었다.설우현은 마침내 왜 자신이 그녀를 싫어할 수가 없었던 건지 알게 되었다. 솔직히 설우현은 얼빠였던 것이다.바로 눕히고 막 손을 빼려던 참이었다.그런데 그때, 설연주가 그의 큰 손바닥에 뺨을 대고 비비적거리는 것이 아니겠는가.자리에 얼어붙어 있던 찰나 설우현은 자신의 손끝이 촉촉하게 젖어있는 것을 느꼈다. 확인해보니 다름 아닌 설연주의 눈물이었다.꿈속에서는 매일 울고 있으면서 깨어있을 땐 그 누구보다 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설우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담요를 다시 덮어주고 설우현은 아예 그녀를 안아 들어 위층으로 올라갔다.이곳에 설연주고 살던 방이 있는데 그녀를 침대로 내려놓자 더웠던 모양인지 바로 담요를 걷어버렸다. 옷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벙어리는 이제 영원히 그녀에게 답을 줄 수 없었다.흐릿한 의식 속, 설연주는 천천히 잠자리에 들었고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그러나 흐리멍덩한 와중에도 후회되진 않으냐는 물음은 꿈속에서 천만 번이고 반복되었다.그런 쓰레기를 구해준 게 후회되진 않냐고, 그딴 쓰레기를 위해 그녀의 창창한 미래를 내바친 것이 후회되진 않냐고...온몸이 불타오르는 듯 뜨거웠다. 머릿속에는 벙어리의 필체와 벙어리와 수화로 대화를 나누던 모습이 아른거렸다.시간도 참 빠르지. 설연주가 여전히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을 때, 벙어리는 지금쯤 두 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한편, 막 차를 멈춰 세웠는데 옆에서부터 설연주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리자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설연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심지어 설연주는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그 모습에 설우현은 손을 뻗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턱을 살짝 꼬집었다.“입 벌려.”그러나 설연주는 여전히 별 반응이 없었다. 입술에 붉은 핏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그 순간, 설우현이 갑자기 힘을 주더니 손가락 하나를 뻗어 그녀의 이가 계속 맞물리지 않도록 입안에 집어넣었다.“설연주, 일어나.”여전히 눈가에 맺혀있는 눈물을 뒤로하고 설연주가 희미하게 두 눈을 떴다.무언가가 자신의 혀끝에 와 닿는 것만 같았다.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혀를 말아 그 무언가를 감쌌고 순간 온몸이 굳어진 설우현이 그녀를 밀어냈다.“정신이 들어?”등이 시트 위에 쾅 하고 부딪히며 통증이 살짝 밀려왔지만 이제 정말 정신이 들었다.“오빠.”정신을 차린 설연주는 힘없이 옆에 기대어 안전벨트를 풀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렸다.설우현은 축축이 젖어있는 자신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이내 옆에 있던 휴지를 뽑아 손가락을 닦았다.차에서 내린 후 설우현은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갔지만 시간이 지나도 설연주는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뒤돌아보니 그녀는
점점 멀어져가는 설우현의 자동차를 바라보며 설연주는 또다시 천천히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갔다.그러나 몇 분 후, 멀어져 가던 자동차가 다시 돌아오고 설우현은 끝내 참지 못한 듯 설연주를 향해 외쳤다.“차에 타. 네가 병에 걸려 죽어버리면 아버지가 또 나한테 뭐라 하실 거 아냐.”곧 설연주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로 조수석에 올라탔다.차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매고 싶었지만 오랜 고열로 인해 설연주는 이미 모든 힘이 빠져버리고 말았다.몇 번을 시도해도 안전벨트 하나 매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설우현은 인내심이 바닥났는지 별다른 생각 없이 바로 몸을 기울여 그녀를 대신하여 안전벨트를 잡아당겨 매어 주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설우현의 몸에서 은은한 향을 맡게 되었는데 그건 남성용 향수로 대나무의 향기와 매우 흡사했다.설연주가 고개를 돌려 설우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설우현은 여전히 차가운 얼굴을 한 채 안전벨트를 매어준 뒤 말없이 액셀을 밟았다.이리저리 흔들리는 와중에 설연주는 갑자기 잊고 있던 옛일을 떠올렸다.설연주 역시 줄곧 외로웠던 건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좋은 친구 한 명이 있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벙어리었고 매일 간단한 수화 몇 개만 그릴 줄 알았다.하지만 주위에는 수화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고 이에 설연주는 특별히 수화를 배우러 가 그와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벙어리는 매우 똑똑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은 전공은 아니었고 컴퓨터 전공이었다.컴퓨터 전공은 당시 학교 최고의 전공으로 졸업한 뒤 연봉 1억은 시작에 불과했다.그때 설연주는 항상 벙어리에게 컴퓨터 학과가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다며, 나중에 졸업하면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며 놀려주곤 했었다.그러나 벙어리는 끝내 졸업을 하지 못했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물에 빠진 설강민을 구해주다가 벙어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설강민은 김현서가 그를 구해주었다가 착각하며 그녀에게 단념하게 된 것이다.물론 김현서도 이 모든 것을 자연스레 받
앞으로 성혜인에게 또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참에 근원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알겠습니다, 도련님.”전화가 끊기고 설우현은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그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상대로부터 답장이 왔다.“도련님, 저희가 류소영 씨 휴대폰을 뒤져 발견한 문자 메시지가 있는데 아마 이 문자 메시지를 보고 자극을 받아 성혜인 아가씨에게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는 경호원에게 막혔고 두 번째에 어쩔 수 없이 정승후에게 찾아간 것 같습니다.”“그 발신 번호... 누구야?”“해커로 추정됩니다. 아주 깊게 숨었더군요.”“아무리 깊게 숨어도 찾아내. 대체 어떤 놈이 배후에 숨어있는지 난 반드시 알아내야겠어.”“알겠습니다. 하루만 시간을 더 주시면 바로 그 해커를 눈앞에 가져다드리겠습니다.”이 일만 확실히 밝혀진다면... 적어도 설씨 가문 현재의 세력이 성혜인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 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설우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대화를 마치고 설우현은 또 침대에 누워있는 설연주를 바라보았다.오랜 시간의 고열로 인해 설연주의 이마는 이미 땀범벅이 되었고 손은 여전히 설우현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아무리 힘을 주어 떼어놓으려고 해도 쉽사리 떨어지지 않으니 결국 설우현도 그녀를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서 깬 설연주는 옆에 앉아 눈을 감고 안정을 취하고 있는 설우현을 바라보았다.잘생긴 얼굴에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니 설우현은 수없이 많은 전 여자친구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설우현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연애할 때만큼은 모든 이에게 마음을 다했던 좋은 남자친구였던 모양이다.열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지만 왠지 이제 설우현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오빠.”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설우현을 부르자 언제 잠자리에 들었냐는 듯 설우현은 바로 눈을 뜨고 죽을 들여오라며 다른 사람에게 당부했다.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