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업무 이메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다음 날, 그는 일찍이 밑으로 내려왔다. 유경아는 서양식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반승제는 거실을 한 번 훑었지만, 이 집 안주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유경아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해명하고자 입을 열었다.“사모님은 어제 좀 피곤하셨는지 깨우지 말라 하시더라고요.”반승제는 곧바로 성휘의 입원 소식이 떠올랐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성휘는 꾀병이 아니었던가?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포레스트에서 보낸 첫날 밤. 3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내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일부러 흥미를 유발하려는 술수인지 감이 안 잡혔다.만약 후자라면, 사람 잘못 봤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반씨 집으로 향한 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점심때 뭐 좀 사서 병원에 다녀와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그 시각 포레스트 안. 반승제가 떠나고 나서야 유경아는 성혜인 방의 문을 두드렸다.성혜인은 진작 세수를 마치고 유경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갔어요?”“네. 방금 가셨어요.”성혜인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사모님. 대표님 어머니 말씀 때문에 숨으시는 거면 제가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볼까요?”“아니에요. 아주머니도 제 사람이니까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전 반승제가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융자로 600억을 받은 일때문에 어머님도 절 싫어하시는 거고요. 그럴 만하죠. 할아버지가 완쾌하시면 곧바로 이혼할 거예요.”유경아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반태승의 선물을 챙겨 본가로 향하려 했다.그 시각 반태승은 홀로 본가에 있었다. 물론 의사와 도우미들도 함께 있었다. 귀국 후 컨디션이 좋았던 반태승은 성혜인을 보는 순간 기쁜
반태승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성혜인의 손을 두드렸다.“말하는 걸 보니, 승제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구나?”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눈으로 웃었다.“네, 있어요.”반태승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그럼 됐다. 걱정 마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다.”성혜인은 반태승에게 더 큰 기대를 주면 안 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의 몸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화제를 돌렸고, 1시간 동안 말벗이 되어주다 본가를 떠났다.본가 입구를 나와 차에 오르려던 그때, 반승혜와 마주쳤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얼굴에 걸친 반승혜는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놀란 듯했다.“페니 씨, 여기서 뭐 해요?”마침 성혜인이 차에 오르는 모습만 목격했을 뿐, 본가에서 나오는 건 보지 못했다. 성혜인은 바로 핑계를 댔다.“그림을 한동안 그리지 않았기도 해서... 영감 좀 얻으려고 와봤어요.”순진한 반승혜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곧이어 짹짹대는 참새처럼 가십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아, 참. 서수연 경찰에서 풀려난 거 알아요? 서수연 오빠가 직접 경찰서로 갔대요. 이번에 망신 제대로 당했죠, 뭐. 서주혁 그 사람도 성격이 별로 안 좋아요. 마주치게 되면 최대한 피해요. 물론 승제 오빠한테 전화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이랑 절대 엮이지 마요.”반승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서주혁도 나쁜 사람인 것 같았다.“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반승혜는 차에서 내리며 지척에 있는 본가를 가리켰다.“전 할아버지 보러 왔어요. 그럼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조만간 정체를 들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할아버지는 성혜인을 불러 반씨 가족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자고 할 게 분명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반씨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야 할 것이다.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반승혜가 다
반승제의 눈꼬리에서 짙은 조소가 느껴졌다.“할아버지, 직접 한 말이에요?”“그럼. 혜인이는 참 기특한 아이야.”한약을 건네준 반승혜는 당장 한마디 하고 싶었다. 기특하다고? 제원에서 반승제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할아버지한테 이런 말까지 하더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반승제는 할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해 분명 알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입 발린 말이겠지만.반승혜는 내일모레가 기대됐다. 도대체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 여자이길래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반승제의 눈빛을 읽은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반승제는 한약을 반태승에게 건넸다.“노력해 볼게요.”예전과 똑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하는지 할아버지는 알 길이 없으니 능청스럽게 넘어가려 했다.“오늘 포레스트에 가봐야겠다. 네 놈이 정말 노력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봐야겠구나.”반승제가 당황하는 장면을 예상했다. 하지만 대답이 의외였다.“네. 가 보셔야죠.”현재 반태승의 몸 상태로는 어디를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저 반승제를 떠보기 위한 말이었다.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반승제의 모습에 반태승은 그의 말을 믿었다.“3년 전 네가 혜인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때도 혜인이는 나에게 볼멘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이번 승혜 생일을 기회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겠구나. 그때 너무 성급하게 결혼식을 하다 보니 혜인이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나중에 나가서 힘든 일 많이 당할 거야.”반태승은 성혜인에게 진심을 다했다. 그 모습에 반승제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반태승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어차피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니까. 성혜인도 그 명성으로 위세를 떨치고 다니지 않았는가.“할아버지가 만족하시면 됐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할아버지 건강이에요.”“오늘 병문안은 다녀왔니?”“이따가 가려고요.”반태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잠시 후, 본가에서 나온 반승제의
“조 사장님, 이미 준비 끝났으니 걱정 마세요. 직접 이쪽으로 오시면 우리의 협력 관계는 바로 성사되는 겁니다.”조희준은 눈을 반짝였다. HS그룹은 국내에서 수년간 굳건하게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다. 절반 이상의 인테리어팀이 HS그룹에서 물건을 가져오기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그들과 협력사가 된다면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알겠습니다. 30분 안에 가겠습니다.”조희준은 헤벌쭉 웃으며 전화를 끊고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곧이어 자신의 아우터를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다.회사 로비에 도착하자, 차를 끌고 온 비서가 조희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조희준 사장님.”그대로 얼어붙은 조희준은 웃음기마저 사라진 채 고개를 돌렸다.성혜인에게서는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전화를 안 받으시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네요. 체결하기로 한 계약은 어떻게 됐나 해서요.”조희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손을 내밀었다.“페니 씨, 왔어요? 프런트에서 얘기를 안 해줬네요.”거짓말이라는 걸 성혜인은 알고 있었지만 어른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사장님. 최근에 제가 새로운 의뢰가 들어와서 급하게 찾아오게 되었어요. 알다시피 반승제 대표님과의 프로젝트고요. 이번 협력은 서로 좋은 일이겠네요.”“페니 씨, 제가 지금 회의 때문에 출장을 가야 해서 시간이 없네요. 제가 출장 갔다 돌아오면 자세히 얘기해 보는 거 어때요?”핑계다. 이미 다른 기업을 찾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계약 체결을 한 게 아니니 성혜인을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성혜인의 눈빛에 냉기가 스쳐 갔다.“제가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 나서 줄곧 사장님과 협력을 했기 때문에 꽤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더 좋은 협력 파트너를 찾으신 거라면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반승제 대표님도 많이 재촉하고 계세요.”조희준이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신 대표님, 주소 알려주실래요? 이렇게 된 이상 꼭 가야죠.”신이한의 눈가에 미소가 걸렸다. 신이한은 성혜인의 이런 점이 좋았다. 눈치가 빠른 점. 이승주를 손에서 가지고 논 이 여자는 반승제와도 오묘한 사이였다. 이런 여자를 정복하는 것이야말로 재미있었다. “제가 차를 보낼게요, 페니 씨.”한정 빌딩. 차에서 내린 성혜인은 신이한이 흰 정장을 입고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먼 데서 보아도 귀티가 흘러넘쳤다. 성혜인의 두 발이 땅에 닿자 신이한은 꽃다발을 안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페니 씨, 받아요.”성혜인은 일단 받지 않고 웃으며 물었다. “신 대표님은 항상 사업 파트너를 이렇게 대하시나요?”“페니 씨는 사업 파트너 그 이상인걸요. 따라와요. 제가 가장 큰 방을 예약했거든요. 그곳에서 제원의 풍경을 다 볼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거절당했지만 신이한은 전혀 무안해하지 않았다. 홀로 들어설 때 자연스레 꽃다발을 카운터 직원에게 건네 카운터 직원은 아무것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한정 빌딩은 제원에서 아주 유명한 곳이다. 많은 사업가가 사업에 관한 얘기를 할 때 이곳에 자주 모이기도 한다. 게다가 가장 높은 층의 방들은 확실히 제원의 모든 곳을 볼 수 있었다.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소한 것들까지 신경 쓰는 듯했다. 신이한의 시선이 성혜인의 몸매를 슬쩍 훑었다.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차갑지만 매력적이었는데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오히려 잘 어우러져 독특한 기품이 있었다. 신이한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마침 다른 사람들도 다가왔다.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반승제였다. 그 옆에는 서주혁과 서수연, 그리고 도박장에서 봤었던 온시환이었다. 보아하니 그들도 이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반승제는 여전히 고고하고 우아한 귀족 같은 자태였다. 그의 시선이 잠시 성혜인에게로 향했다. 그 찰나의 시선이 조용히 사람을 옥죄고 차갑게 깊숙이
서수연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저번의 일이 가장 창피한 일인 줄 알았는데 지금이 더욱 창피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다. 신이한을 본 서수연은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져 참아왔던 눈물이 그대로 터져버렸다. 성혜인은 미동 없이 눈물이 터져 도망친 서수연을 보며 닫힘 버튼을 눌렀다. 여러모로 유명한 이 남자들과 한 엘리베이터에 앉은 그녀는 긴장한 기색 하나 없었다. 이번에 신이한과 사업에 관해 얘기하기 위해 왔으니 성혜인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다. 신이한은 성혜인의 곁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페니 씨, 오늘 밤 제원에서 엄청나게 큰 불꽃 축제가 있는데 마침 우리 방에서 볼 수 있어요.”성혜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불꽃 축제라니? 확실히 해마다 제원에서는 설날에 불꽃 축제를 하긴 했었다. 온 도시 곳곳에서 불꽃을 볼 수 있을 정도여서 다른 도시에서도 사람이 몰려오곤 했다. 하지만 그 외의 날에 불꽃 축제를 한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꽃다발부터 불꽃까지. 아마도 신이한이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한 수단인 듯했다. 성혜인은 웃으며 얘기했다. “괜찮습니다, 신 대표님. 저는 오늘 조 대표님 회사의 일에 관해 얘기하려고 온 것이니까요.”신이한은 또 거절 당했지만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은 재미없었다. “조 대표님 얘기라, 페니 씨랑 앉아서 천천히 얘기해 보고 싶네요.” 신이한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얘기했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최고층에 도착했다. 이 세 남자도 여기가 목적지였다. 성혜인은 저도 모르게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지만 반승제는 이미 먼저 걸어 나갔다. 복도에는 웨이터들이 서서 예의 바르게 그들을 이미 예약해 놓은 방으로 안내했다. 성혜인 쪽에도 웨이터가 다가왔다. 성혜인의 방 바로 옆이 반승제의 방이었다. 성혜인이 방에 들어서자 입구부터 테이블까지 바닥에 장미가 놓어져 있었다. 이런 뻔한 수작 앞에서 성혜인의 입가가 움찔거렸다. 너무도 뻔했다. 진짜 사업 때문이 아니었
반 회장은 아직 신기섭이 해온 더러운 일들을 몰랐다. 만약 알았다면 신씨 가문을 없애려 들 것이다. 게다가 신기섭은 성혜인을 건드리려 했으니. 신이한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성혜인이 그대로 얘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았다. 이건 성혜인의 협박이라는 것을. 만약 신이한이 계속해서 성혜인과 맞서서 반승제의 일을 지연시키면 성혜인은 반 회장한테 가서 신기섭이 성혜인을 덮치려 했던 일을 얘기할지도 몰랐다. 그때가 되면 신씨 가문은 가루가 되어 사라질 것이었다. 신이한은 성혜인이 이런 패를 숨기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열린 입술 사이로 겨우 말 한마디를 뱉어냈다. “제가 페니 씨를 너무 얕잡아 봤네요.”그저 고고한 척하는 여자인 줄 알았더니만 진짜로 뒷배가 있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신이한은 반승제가 3년 전 결혼했다는 사실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 소문 중의 부인이 지금 신이한 눈앞에 있다니, 게다가 신이한과 신기섭은 이미 그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신이한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어리석게 느껴져 속이 좋지 않았다. 미간을 문지른 그가 얘기했다. “페니 씨 뒤에 반 회장님이 계시니 저도 이젠 몸 좀 사려야겠군요. 그나저나 남편이 바로 옆 방에 있는데 저랑 단둘이 이곳에 들어오다니, 담도 크네요.”성혜인은 그제야 와인을 한 입 마시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저한테 반승제 씨는 그저 반 대표님일 뿐이에요, 모르는 사람처럼 지내기로 계약했으니까요. 저는 먼저 계약을 깨지 않습니다.”대화 도중 웨이터가 노크하고 그들의 저녁을 가져왔다. 신이한이 오늘 시킨 건 커플 세트였다. 게다가 아주 예쁜 선물까지 준비했다. 원래 오늘 밤 성혜인을 가지려고 했는데 그 위험한 생각은 접어야 할 것 같았다. “페니 씨, 오늘 시킨 음식은 다 여기 셰프의 신상 메뉴예요. 옆방에 어떤 사람들인지 봤죠? 이런 음식 먹을 기회 흔치 않으니 다 먹고 가요.”성혜인은 더 이상 따지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신이한의 바람기는 그녀와 상관이
신이한의 방과는 달리 이 방의 분위기는 다소 사무적이었다. 게다가 늘 그들을 위해 남겨놓은 방이라서 그런지 인테리어마저 반승제의 스타일이었다. 이 빌딩은 반씨 가문의 것이었다. 제원에서 유명한 건물들은 거의 다 반씨 가문의 것이었다. 성혜인의 마음이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다니, 반승제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가 생각했다. ‘여자들이 이런 것을 좋아한다고?’온시환은 서주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주혁아, 너는 모르겠지만 페니 씨가 승제를 좋아하거든. 저번에 도박장에서도 200억을 나한테 주면서 승제 앞에서 잘 보이려고 애쓰더라. 쯧, 자그마치 200억인데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주더라니까.” 반승제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눈짓으로 온시환의 말을 막았다. “밥이나 먹어.”온시환의 말 몇 마디가 반승제의 평정심을 깨뜨렸다. “왜, 널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이랑 있으니까 질투라도 나나봐?”온시환은 은근히 성혜인이 마음에 들었다. 그 얼굴이며 몸매 하며 제원에서 놓고 얘기해도 손에 꼽힐 정도였다. 윤씨 가문의 윤단미라는 사람보다 몇 배는 나았다. “승제야, 너 어차피 집에 있는 그 사람이랑 이혼할 거라면 페니 씨는 어때? 아니면 진짜 윤단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야? 그애는 이미 꿈을 좇으러 멀리 떠났고 그때의 너희들은 너무 어렸었어.”서주혁이 작게 마른기침을 해서 온시환에게 신호를 주었다. 온시환도 자기가 쓸데없는 얘기까지 꺼냈다는 것을 깨닫고 얼른 술잔을 들고 한입 마셨다. 마침 반승제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리고 옆방에서 성혜인의 핸드폰도 울렸다. 성혜인은 핸드폰의 이름을 보고 신이한에게 얘기했다. “죄송해요,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랑 반승제 씨의 사이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어차피 이혼할 거니까 많은 사람이 알면 안 좋거든요.”신이한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성혜인의 말투에는 반승제에 대한 미련이 전혀 없었다. 신이한은 그런 점이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