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몇 사람들이 반태승을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걷던 도중, 반태승은 결국 참지 못하고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성혜인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였다.마침 울린 전화벨이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성혜인은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조금 풀어준 뒤에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한참 울리던 전화벨은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끊어졌다.반태승의 전화를 받지 못한 성혜인은 급히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할아버지, 죄송해요. 아빠가 갑자기 입원하셔서 병원에 오는 바람에 공항에 가지 못했어요.”이유를 듣게 된 반태승은 성혜인을 위로했다.“입원이라니, 무슨 일이니? 지금은 좀 괜찮아진 거야? 괜찮다. 오늘 저녁 약속에 오지 말고 아버지 잘 돌봐 드리렴.”성혜인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외삼촌한테 말해야 하나? 아니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시니까...’반씨 집안에는 더더욱 알릴 수 없었다. 반태승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소식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누군가는 고의로 동정을 사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냥 몸이 좀 편찮으셔서 그래요. 아직 주무시고 계시네요. 할아버지, 다음에 죄송한 의미로 선물 사갈게요.”반태승은 허허 웃었다.“할아버지한테 예의 차릴 필요 없다. 나도 선물을 준비했는데, 승제 통해서 전해 주마.”성혜인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급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네, 감사해요, 할아버지.”‘할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성혜인의 목소리에 반태승은 마음이 점점 풀렸다.전화를 끊은 후, 반태승은 상자를 하나 꺼내 반승제에게 건넸다.“혜인이 선물이니 반드시 전해주렴. 혜인이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하네. 난 뭐라 말을 전할 수가 없으니 여유 있을 때 선물 들고 병원에 가봐. 사위면 사위다운 모습을 보여야지.”반태승은 진심으로 성혜인의 소식에 가슴 아파했다
성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의 전 아내이자 성혜인의 엄마, 임지연을 만났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얼마 전 임지연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꾼 듯했다. 성혜인에게도 미안해졌다. 반승제는 훌륭한 사위지만, 딸이 싫어한다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사실 성혜인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 한 번 끼친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딸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윤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몇 마디만 해도 고분고분 들었지만, 지금은 몸이 허약해진 상태인 데다 얼마 전 전처의 기일이었다 보니 약해지는 모습을 더 자주 보였다.하지만 예전에 그 여자에게 빼앗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절대 성휘의 딸이 승전고를 울리도록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소윤은 결심했다.“여보,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말아요. 혜인이가 성격이 좋지 못해서 그렇지, 당신은 이미 혜인이에게 충분히 잘했어요. 사돈이 그렇게까지 화내고 있을 때 혜인이가 맞섰으면 사돈도 우리 체면을 이렇게까지 구기지는 않았을 거예요.”백연서를 떠올리자, 성휘는 입을 막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백연서의 언행은 너무나도 지나쳤다. 하지만 성혜인과 반승제의 결혼으로 600억이라는 융자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연서는 성씨 집안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악담을 쏟아낸 것이다.“여보. 혜원이가 당신 생각하는 마음을 봐요. 건강 문제만 아니었어도 벌써 찾아왔을 거예요. 입원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질 못하겠다니까요. 한이에게도 전화하니 회사 일 너무 걱정 말고 푹 쉬라 하더군요. 한이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성휘의 안색이 많이 나아졌다. 성혜원과 성한은 그래도 성혜인보다 철이 들었다. 승부욕이 강한 성혜인은 한 번도 성휘에게 의지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라는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혜인이는 확실히 혜원이만큼 철들지는 않았어.”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혜인
반승제는 속이 답답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알았어요.”백연서 역시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지만 반태승의 건강을 염려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반승제가 거실문을 나서자 그녀가 따라나섰다.“승제야, 병원에 정말 가볼 생각이니?”반승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이미 정원까지 걸어 나왔기 때문에 거실 안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옅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마치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안 가요.”백연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낮에 성휘를 만났어. 그렇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입원? 할아버지가 귀국하시니 일부러 속이려고 저러는 거야. 참 멋없는 행동을 많이 한다니까. 네가 정말 가면 그들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돼.”몸이 좋지 않은 반태승을 이용한다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엄마, 알았어요.”반승제는 자리를 뜨고자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백연서가 한 마디 덧붙였다.“혹여 할아버지가 가보지는 않을까 싶어 네 물건 포레스트로 옮겨 뒀다. 너도 할아버지 상태를 봤으니 알겠지만, 심기 건드는 일은 없어야 해. 할아버지가 정말 가시기라도 하면 너도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어차피 성혜인은 네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게스트룸에서 묵을 거야.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 뒀으니 허튼 짓 못 할 거야.”백연서는 성씨 집안을 언급하면서 짜증 난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승제야, 성혜인 그 아이 그래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남자들 홀리기 참 쉬운 애야.”반승제는 성혜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성혜인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백연서의 말에 긍정의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백연서는 말이 너무 많은 자신 때문에 반승제의 미움을 살까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엄마가 너와 윤단미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는데... 단미도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둘이 잘 지
“포레스트에 미리 전화해 둘까요?”“그렇게 하죠.”심인우의 물음에 반승제는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하지만 곧 성혜인과 만날 생각해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시간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반승제와의 약속을 두 번이나 어겼기 때문이었다. 정말 버릇없는 행동이었다.심인우는 휴대폰을 꺼내 포레스트에 전화를 걸었다.유경아는 그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오늘 여기에 오신다고?!’전화를 끊은 그녀는 다급히 도우미들에게 겨울이를 뒷집으로 숨기고 방안 구석구석 전부 소독하게 시켰다. 잠시 후 방에 털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도우미들이 일을 깔끔하게 하는 편이기도 하고, 평일에는 매일 집안 소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30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유경아는 안도한 듯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때 성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전화로 이를 알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휴대폰을 꺼내 드는 순간,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유경아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낯선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마이바흐 차량이었다.반승제가 도착했다!유경아는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반승제를 맞이했다.“대표님.”반승제는 포레스트에 있는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고갯짓으로 회답했다.유경아는 더욱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낮에 대표님 어머니께서 대표님 물건들을 보내오시면서 셰프에게도 입맛 관련하여 당부 말씀 전해 놓으셨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보필하고자 이곳에 있게 된 가정부입니다.”반승제의 시선이 유경아를 향했지만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유경아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급히 그를 침실로 안내했다.“이곳이 대표님의 방입니다. 복도 끝이 사모님 방이고요.”반승제는 복도 끝에 시선을 두었다. 확실히 꽤 먼 거리라 서로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아 좋았다.그는
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업무 이메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다음 날, 그는 일찍이 밑으로 내려왔다. 유경아는 서양식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반승제는 거실을 한 번 훑었지만, 이 집 안주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유경아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해명하고자 입을 열었다.“사모님은 어제 좀 피곤하셨는지 깨우지 말라 하시더라고요.”반승제는 곧바로 성휘의 입원 소식이 떠올랐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성휘는 꾀병이 아니었던가?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포레스트에서 보낸 첫날 밤. 3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내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일부러 흥미를 유발하려는 술수인지 감이 안 잡혔다.만약 후자라면, 사람 잘못 봤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반씨 집으로 향한 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점심때 뭐 좀 사서 병원에 다녀와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그 시각 포레스트 안. 반승제가 떠나고 나서야 유경아는 성혜인 방의 문을 두드렸다.성혜인은 진작 세수를 마치고 유경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갔어요?”“네. 방금 가셨어요.”성혜인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사모님. 대표님 어머니 말씀 때문에 숨으시는 거면 제가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볼까요?”“아니에요. 아주머니도 제 사람이니까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전 반승제가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융자로 600억을 받은 일때문에 어머님도 절 싫어하시는 거고요. 그럴 만하죠. 할아버지가 완쾌하시면 곧바로 이혼할 거예요.”유경아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반태승의 선물을 챙겨 본가로 향하려 했다.그 시각 반태승은 홀로 본가에 있었다. 물론 의사와 도우미들도 함께 있었다. 귀국 후 컨디션이 좋았던 반태승은 성혜인을 보는 순간 기쁜
반태승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성혜인의 손을 두드렸다.“말하는 걸 보니, 승제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구나?”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눈으로 웃었다.“네, 있어요.”반태승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그럼 됐다. 걱정 마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다.”성혜인은 반태승에게 더 큰 기대를 주면 안 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의 몸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화제를 돌렸고, 1시간 동안 말벗이 되어주다 본가를 떠났다.본가 입구를 나와 차에 오르려던 그때, 반승혜와 마주쳤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얼굴에 걸친 반승혜는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놀란 듯했다.“페니 씨, 여기서 뭐 해요?”마침 성혜인이 차에 오르는 모습만 목격했을 뿐, 본가에서 나오는 건 보지 못했다. 성혜인은 바로 핑계를 댔다.“그림을 한동안 그리지 않았기도 해서... 영감 좀 얻으려고 와봤어요.”순진한 반승혜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곧이어 짹짹대는 참새처럼 가십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아, 참. 서수연 경찰에서 풀려난 거 알아요? 서수연 오빠가 직접 경찰서로 갔대요. 이번에 망신 제대로 당했죠, 뭐. 서주혁 그 사람도 성격이 별로 안 좋아요. 마주치게 되면 최대한 피해요. 물론 승제 오빠한테 전화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이랑 절대 엮이지 마요.”반승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서주혁도 나쁜 사람인 것 같았다.“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반승혜는 차에서 내리며 지척에 있는 본가를 가리켰다.“전 할아버지 보러 왔어요. 그럼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조만간 정체를 들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할아버지는 성혜인을 불러 반씨 가족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자고 할 게 분명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반씨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야 할 것이다.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반승혜가 다
반승제의 눈꼬리에서 짙은 조소가 느껴졌다.“할아버지, 직접 한 말이에요?”“그럼. 혜인이는 참 기특한 아이야.”한약을 건네준 반승혜는 당장 한마디 하고 싶었다. 기특하다고? 제원에서 반승제의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할아버지한테 이런 말까지 하더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반승제는 할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해 분명 알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입 발린 말이겠지만.반승혜는 내일모레가 기대됐다. 도대체 얼마나 낯짝이 두꺼운 여자이길래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반승제의 눈빛을 읽은 그녀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반승제는 한약을 반태승에게 건넸다.“노력해 볼게요.”예전과 똑같은 대답이다. 하지만 어떻게 노력하는지 할아버지는 알 길이 없으니 능청스럽게 넘어가려 했다.“오늘 포레스트에 가봐야겠다. 네 놈이 정말 노력하고 있는지 두 눈으로 봐야겠구나.”반승제가 당황하는 장면을 예상했다. 하지만 대답이 의외였다.“네. 가 보셔야죠.”현재 반태승의 몸 상태로는 어디를 갈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저 반승제를 떠보기 위한 말이었다.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하는 반승제의 모습에 반태승은 그의 말을 믿었다.“3년 전 네가 혜인이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때도 혜인이는 나에게 볼멘소리 한 번 한 적이 없다. 이번 승혜 생일을 기회 삼아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수 있겠구나. 그때 너무 성급하게 결혼식을 하다 보니 혜인이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나중에 나가서 힘든 일 많이 당할 거야.”반태승은 성혜인에게 진심을 다했다. 그 모습에 반승제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반태승의 뜻을 거역할 수도 없었다.어차피 명목상의 부부일 뿐이니까. 성혜인도 그 명성으로 위세를 떨치고 다니지 않았는가.“할아버지가 만족하시면 됐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할아버지 건강이에요.”“오늘 병문안은 다녀왔니?”“이따가 가려고요.”반태승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잠시 후, 본가에서 나온 반승제의
“조 사장님, 이미 준비 끝났으니 걱정 마세요. 직접 이쪽으로 오시면 우리의 협력 관계는 바로 성사되는 겁니다.”조희준은 눈을 반짝였다. HS그룹은 국내에서 수년간 굳건하게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기업이다. 절반 이상의 인테리어팀이 HS그룹에서 물건을 가져오기 때문에 낮은 가격으로 그들과 협력사가 된다면 떼돈을 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알겠습니다. 30분 안에 가겠습니다.”조희준은 헤벌쭉 웃으며 전화를 끊고 비서에게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곧이어 자신의 아우터를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다.회사 로비에 도착하자, 차를 끌고 온 비서가 조희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조희준 사장님.”그대로 얼어붙은 조희준은 웃음기마저 사라진 채 고개를 돌렸다.성혜인에게서는 여전히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전화를 안 받으시니 여기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네요. 체결하기로 한 계약은 어떻게 됐나 해서요.”조희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급히 손을 내밀었다.“페니 씨, 왔어요? 프런트에서 얘기를 안 해줬네요.”거짓말이라는 걸 성혜인은 알고 있었지만 어른들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사장님. 최근에 제가 새로운 의뢰가 들어와서 급하게 찾아오게 되었어요. 알다시피 반승제 대표님과의 프로젝트고요. 이번 협력은 서로 좋은 일이겠네요.”“페니 씨, 제가 지금 회의 때문에 출장을 가야 해서 시간이 없네요. 제가 출장 갔다 돌아오면 자세히 얘기해 보는 거 어때요?”핑계다. 이미 다른 기업을 찾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계약 체결을 한 게 아니니 성혜인을 붙잡아 둘 생각이었다.성혜인의 눈빛에 냉기가 스쳐 갔다.“제가 이 업계에 발을 들이고 나서 줄곧 사장님과 협력을 했기 때문에 꽤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더 좋은 협력 파트너를 찾으신 거라면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그래야 저도 대비를 할 수 있으니까요. 반승제 대표님도 많이 재촉하고 계세요.”조희준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