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연서가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잘잘못 문제가 아니라, 당신 집안 자체가 우리와 격이 맞지 않아서 그래요. 그때 성혜인이 회장님을 구하는 일이 없었더라면 승제와 엮이는 일이 있었을 것 같아요? 다들 잘 알고 있잖아요.”말 잘하는 소윤도 백연서 앞에서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저 반승제의 마음 하나 사로잡지 못해 성휘와 자신에게 이런 모욕감을 주는 못난 성혜인이 미울 뿐이었다.백연서의 시선에 성혜인이 들어왔다. 여전히 무심하게 서 있는 성혜인의 모습에 화가 더 끓었다. “1년 후에 무조건 이혼해야 한다는 계약서다. 설령 승제가 참지 못하고 널 원한다 해도 넌 고분고분 피임약을 먹어야 해. 성씨 집안은 승제의 아이를 가질 자격이 없을뿐더러, 난 내 손자가 사리사욕에 눈먼 집안에서 태어나는 꼴 못 본다.”도가 지나친 발언에 성혜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어머님. 그래도 어른이시니 어머님과 언쟁하고 싶지 않어요. 전 결혼 생활 3년 동안 투명 인간처럼 지냈다고 확신해요. 반승제 씨와 어떤 불화도 없었고, 어머님이 치욕스러운 말을 하셔도 웃으며 참았다고요. 하지만 오늘 아버지까지 불러서 이러는 건 도가 지나치신 거 아닌가요?”백연서도 스스로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에 겨울이를 보고 나서 화가 치밀어오른 걸 보니, 강아지 때문에 트라우마가 떠오른 듯하다.그때부터 백연서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성혜인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사실, 그녀의 큰아들도 겨울이와 같은 품종의 강아지를 길렀었다. 하지만 큰아들은 이미 6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그녀는 눈을 감았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아들을 반태승이 이런 여자와 엮어두었으니, 불만이 없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성혜인. 그렇게 못 들어주겠으면 반씨 집안에서 2차 융자 가져갈 생각도 하지 마. 호의를 베풀었더니 권리인 줄 아네. 난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 왜? 내가 일부러 당신들 모욕하는 것처럼 들리나 봐?”백연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뱉으며 자신의 가방을
이번 응급조치는 꽤 쉽지 않았다. 결국 5시 반이 되어서야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산소호흡기를 착용한 아버지를 보자 성혜인은 가슴이 아렸다.“선생님. 우리 아빠 많이 안 좋은 건가요?”그동안 회사 일에 치여 한 번도 건강검진을 받지 못했던 성휘는 아플 때마다 진통제로 버티고는 했다.성혜인의 기억에는 엄마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러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는 늘 어느 정도 벌었으면 충분하니 다 같이 사현에서 정원 하나 구입해 꽃 심으며 편안하게 살자고 타일렀다.하지만 아버지에게 시집갈 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주머니 사정은 여의찮아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였다. 자기 아내에게 못 할 짓이라 생각한 성휘는 그 제안을 거절했었다. 부자가 되어 아내와 함께 잘 살고자 하는 원대한 꿈 때문이었다.성혜인은 예전부터 그 부분이 원망스러웠다. 엄마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그렇게 회사가 흑자로 돌아설 때쯤,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반평생 고생만 했지만 호사는 누려보지도 못하고 소윤에게 자리를 내준 셈이 된 것이다.의사가 마스크를 내렸다.“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딸이에요.”다른 의료진들에게 성휘를 병실로 옮길 수 있도록 지시한 후, 자신의 진료실을 가리켰다.“상황이 좀 복잡하네요. 진료실로 가서 얘기합시다.”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갔다. 그녀가 진료실에 도착해 문이 닫자,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간암 말기입니다. 수술도 권해드리지 않는 수준이에요. 1년 정도 남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성혜인은 머리에서 ‘쿵’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환청이 아닌가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말도 안 돼...’“확실한 거예요?”“검사상으로는 그렇습니다. 현재 암세포가 이미 전이된 상태예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서 그렇지 최근 2년 동안 분명 통증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은 진통제 복용하면서 최대한 빨리 입원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절대안정이 필요합니다. 트랜스아미나제 수치가 높은 편인데, 밤샘 문제 때문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반태승을 부축하며 함께 걸었다. 걷던 도중, 반태승은 결국 참지 못하고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한편 성혜인은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머릿속이 하얘진 상태였다.마침 울린 전화벨이 그녀의 정신을 깨웠다.성혜인은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을 움직여 조금 풀어준 뒤에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하지만 한참 울리던 전화벨은 통화 연결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끊어졌다.반태승의 전화를 받지 못한 성혜인은 급히 다시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할아버지, 죄송해요. 아빠가 갑자기 입원하셔서 병원에 오는 바람에 공항에 가지 못했어요.”이유를 듣게 된 반태승은 성혜인을 위로했다.“입원이라니, 무슨 일이니? 지금은 좀 괜찮아진 거야? 괜찮다. 오늘 저녁 약속에 오지 말고 아버지 잘 돌봐 드리렴.”성혜인은 붉어지는 눈시울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간암 말기라는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외삼촌한테 말해야 하나? 아니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으시니까...’반씨 집안에는 더더욱 알릴 수 없었다. 반태승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소식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누군가는 고의로 동정을 사려한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그냥 몸이 좀 편찮으셔서 그래요. 아직 주무시고 계시네요. 할아버지, 다음에 죄송한 의미로 선물 사갈게요.”반태승은 허허 웃었다.“할아버지한테 예의 차릴 필요 없다. 나도 선물을 준비했는데, 승제 통해서 전해 주마.”성혜인은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급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네, 감사해요, 할아버지.”‘할아버지’라고 불러주는 성혜인의 목소리에 반태승은 마음이 점점 풀렸다.전화를 끊은 후, 반태승은 상자를 하나 꺼내 반승제에게 건넸다.“혜인이 선물이니 반드시 전해주렴. 혜인이 아버지가 입원했다고 하네. 난 뭐라 말을 전할 수가 없으니 여유 있을 때 선물 들고 병원에 가봐. 사위면 사위다운 모습을 보여야지.”반태승은 진심으로 성혜인의 소식에 가슴 아파했다
성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그의 전 아내이자 성혜인의 엄마, 임지연을 만났다.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얼마 전 임지연의 기일이었기 때문에 이런 꿈을 꾼 듯했다. 성혜인에게도 미안해졌다. 반승제는 훌륭한 사위지만, 딸이 싫어한다면 딸을 불구덩이에 밀어 넣은 것과 다를 바 없다.사실 성혜인은 어렸을 때부터 걱정 한 번 끼친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딸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소윤의 눈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 과거에는 몇 마디만 해도 고분고분 들었지만, 지금은 몸이 허약해진 상태인 데다 얼마 전 전처의 기일이었다 보니 약해지는 모습을 더 자주 보였다.하지만 예전에 그 여자에게 빼앗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절대 성휘의 딸이 승전고를 울리도록 보고만 있지 않으리라 소윤은 결심했다.“여보, 너무 생각 많이 하지 말아요. 혜인이가 성격이 좋지 못해서 그렇지, 당신은 이미 혜인이에게 충분히 잘했어요. 사돈이 그렇게까지 화내고 있을 때 혜인이가 맞섰으면 사돈도 우리 체면을 이렇게까지 구기지는 않았을 거예요.”백연서를 떠올리자, 성휘는 입을 막고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백연서의 언행은 너무나도 지나쳤다. 하지만 성혜인과 반승제의 결혼으로 600억이라는 융자를 받았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백연서는 성씨 집안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악담을 쏟아낸 것이다.“여보. 혜원이가 당신 생각하는 마음을 봐요. 건강 문제만 아니었어도 벌써 찾아왔을 거예요. 입원했다는 말을 차마 꺼내질 못하겠다니까요. 한이에게도 전화하니 회사 일 너무 걱정 말고 푹 쉬라 하더군요. 한이도 열심히 배울 거예요.”성휘의 안색이 많이 나아졌다. 성혜원과 성한은 그래도 성혜인보다 철이 들었다. 승부욕이 강한 성혜인은 한 번도 성휘에게 의지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라는 존재감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혜인이는 확실히 혜원이만큼 철들지는 않았어.”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성혜인
반승제는 속이 답답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알았어요.”백연서 역시 옆에서 대화 내용을 듣고 있었지만 반태승의 건강을 염려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잠시 후, 반승제가 거실문을 나서자 그녀가 따라나섰다.“승제야, 병원에 정말 가볼 생각이니?”반승제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이미 정원까지 걸어 나왔기 때문에 거실 안에서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며 옅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마치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안 가요.”백연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업신여기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낮에 성휘를 만났어. 그렇게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웬 입원? 할아버지가 귀국하시니 일부러 속이려고 저러는 거야. 참 멋없는 행동을 많이 한다니까. 네가 정말 가면 그들 손에 놀아나는 것밖에 안 돼.”몸이 좋지 않은 반태승을 이용한다는 건 정말 참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엄마, 알았어요.”반승제는 자리를 뜨고자 발을 내디뎠다. 그때 백연서가 한 마디 덧붙였다.“혹여 할아버지가 가보지는 않을까 싶어 네 물건 포레스트로 옮겨 뒀다. 너도 할아버지 상태를 봤으니 알겠지만, 심기 건드는 일은 없어야 해. 할아버지가 정말 가시기라도 하면 너도 가서 얼굴 좀 비추고. 어차피 성혜인은 네 침실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게스트룸에서 묵을 거야. 내가 알아듣게 얘기해 뒀으니 허튼 짓 못 할 거야.”백연서는 성씨 집안을 언급하면서 짜증 난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승제야, 성혜인 그 아이 그래도 예쁘장하게 생겨서 남자들 홀리기 참 쉬운 애야.”반승제는 성혜인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몇 년 동안 성혜인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지내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백연서의 말에 긍정의 사인을 보내지 않았다.백연서는 말이 너무 많은 자신 때문에 반승제의 미움을 살까 싶어 한숨을 내쉬었다.“그때 엄마가 너와 윤단미 사이를 갈라놓는 게 아니었는데... 단미도 다시 돌아온다고 하니 둘이 잘 지
“포레스트에 미리 전화해 둘까요?”“그렇게 하죠.”심인우의 물음에 반승제는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하지만 곧 성혜인과 만날 생각해 표현할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시간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는 반승제와의 약속을 두 번이나 어겼기 때문이었다. 정말 버릇없는 행동이었다.심인우는 휴대폰을 꺼내 포레스트에 전화를 걸었다.유경아는 그의 전화를 받고 화들짝 놀랐다.‘오늘 여기에 오신다고?!’전화를 끊은 그녀는 다급히 도우미들에게 겨울이를 뒷집으로 숨기고 방안 구석구석 전부 소독하게 시켰다. 잠시 후 방에 털 한 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도우미들이 일을 깔끔하게 하는 편이기도 하고, 평일에는 매일 집안 소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30분도 채 되지 않아 모든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유경아는 안도한 듯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때 성혜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전화로 이를 알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휴대폰을 꺼내 드는 순간, 밖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유경아가 황급히 밖으로 나가보니 낯선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마이바흐 차량이었다.반승제가 도착했다!유경아는 급히 휴대폰을 내려놓고 반승제를 맞이했다.“대표님.”반승제는 포레스트에 있는 모든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에게 감정을 표현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고갯짓으로 회답했다.유경아는 더욱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낮에 대표님 어머니께서 대표님 물건들을 보내오시면서 셰프에게도 입맛 관련하여 당부 말씀 전해 놓으셨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회장님께서 사모님을 보필하고자 이곳에 있게 된 가정부입니다.”반승제의 시선이 유경아를 향했지만 어떠한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유경아는 차가운 시선을 느끼고 급히 그를 침실로 안내했다.“이곳이 대표님의 방입니다. 복도 끝이 사모님 방이고요.”반승제는 복도 끝에 시선을 두었다. 확실히 꽤 먼 거리라 서로 방해가 될 것 같지 않아 좋았다.그는
반승제는 미간을 살짝 구겼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몸을 돌려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업무 이메일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다음 날, 그는 일찍이 밑으로 내려왔다. 유경아는 서양식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반승제는 거실을 한 번 훑었지만, 이 집 안주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유경아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해명하고자 입을 열었다.“사모님은 어제 좀 피곤하셨는지 깨우지 말라 하시더라고요.”반승제는 곧바로 성휘의 입원 소식이 떠올랐다. 어젯밤 병원에서 늦게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성휘는 꾀병이 아니었던가?그는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가 차에 몸을 실었다.포레스트에서 보낸 첫날 밤. 3년 동안 보지 못했던 아내는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그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것인지, 일부러 흥미를 유발하려는 술수인지 감이 안 잡혔다.만약 후자라면, 사람 잘못 봤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영원히.반씨 집으로 향한 반승제는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점심때 뭐 좀 사서 병원에 다녀와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그 시각 포레스트 안. 반승제가 떠나고 나서야 유경아는 성혜인 방의 문을 두드렸다.성혜인은 진작 세수를 마치고 유경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갔어요?”“네. 방금 가셨어요.”성혜인은 곧바로 아래층으로 내려왔다.“사모님. 대표님 어머니 말씀 때문에 숨으시는 거면 제가 회장님께 말씀을 드려볼까요?”“아니에요. 아주머니도 제 사람이니까 숨기지 않고 말씀드릴게요. 전 반승제가 좋아서 결혼한 게 아니에요. 융자로 600억을 받은 일때문에 어머님도 절 싫어하시는 거고요. 그럴 만하죠. 할아버지가 완쾌하시면 곧바로 이혼할 거예요.”유경아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성혜인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반태승의 선물을 챙겨 본가로 향하려 했다.그 시각 반태승은 홀로 본가에 있었다. 물론 의사와 도우미들도 함께 있었다. 귀국 후 컨디션이 좋았던 반태승은 성혜인을 보는 순간 기쁜
반태승은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성혜인의 손을 두드렸다.“말하는 걸 보니, 승제와 아이를 가질 생각이 있구나?”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심 어린 눈으로 웃었다.“네, 있어요.”반태승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그럼 됐다. 걱정 마렴. 아들이든 딸이든 난 다 좋다.”성혜인은 반태승에게 더 큰 기대를 주면 안 될 것 같아 말을 아꼈다.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을 그의 몸이 견딜 수 있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그녀는 적절한 타이밍에 화제를 돌렸고, 1시간 동안 말벗이 되어주다 본가를 떠났다.본가 입구를 나와 차에 오르려던 그때, 반승혜와 마주쳤다. 커다란 선글라스를 얼굴에 걸친 반승혜는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의 등장에 놀란 듯했다.“페니 씨, 여기서 뭐 해요?”마침 성혜인이 차에 오르는 모습만 목격했을 뿐, 본가에서 나오는 건 보지 못했다. 성혜인은 바로 핑계를 댔다.“그림을 한동안 그리지 않았기도 해서... 영감 좀 얻으려고 와봤어요.”순진한 반승혜는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곧이어 짹짹대는 참새처럼 가십거리를 꺼내기 시작했다.“아, 참. 서수연 경찰에서 풀려난 거 알아요? 서수연 오빠가 직접 경찰서로 갔대요. 이번에 망신 제대로 당했죠, 뭐. 서주혁 그 사람도 성격이 별로 안 좋아요. 마주치게 되면 최대한 피해요. 물론 승제 오빠한테 전화하면 도와줄 거예요. 그래도 그 사람이랑 절대 엮이지 마요.”반승혜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서주혁도 나쁜 사람인 것 같았다.“알았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반승혜는 차에서 내리며 지척에 있는 본가를 가리켰다.“전 할아버지 보러 왔어요. 그럼 가 볼게요. 다음에 또 봐요.”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조만간 정체를 들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할아버지는 성혜인을 불러 반씨 가족들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자고 할 게 분명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이 반씨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야 할 것이다.차에 올라타려는 순간, 반승혜가 다
연승혁을 마주했을 때 원아정의 눈가에 잠시 상처받은 기색이 스쳤다.“오빠...”하지만 연승혁은 등을 기대며 차갑게 말했다.“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쓸데없는 감성팔이를 하려는 거라면, 당장 사람 불러서 쫓아낼 테니까.”원아정은 그가 얼마나 냉정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애써 꾸며낸 애잔함도 순식간에 거둬들였다.연승혁이 옆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조용히 자리에 앉은 원아정은 이내 평소의 얼굴빛을 되찾았다.그때 안정숙이 입을 열었다.“마침 승혁이도 있으니, 구은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해보거라.”애초에 원아정은 이 일을 말하려고 온 터였다. 그녀는 냉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좋아요. 오늘 저도 그 얘기를 하려고 왔으니까요.”그녀는 가방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사진 속 남자의 눈매는 연승혁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안정숙과 연승혁 모두 한눈에 알아챘다. 이 남자는 분명 연씨 가문의 핏줄이었다.이미 벼랑 끝에 선 원아정은 더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만약 공지민을 끌어내리지 못한다면 자신이 해외로 쫓겨날 것은 불 보듯 뻔했으니 더 이상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었다.“승혁 오빠, 이 얼굴 잘 보세요. 연씨 가문이 큰 혼란에 휩싸였던 그때, 제가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하시죠? 아버님께서 밖에 아들을 하나 두셨다고요. 물론 그건 아버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모든 게 누군가가 꾸민 계략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머님이 그 일을 평생 떨쳐내지 못하신 이유가 뭔지 아세요? 언니가 실종된 것도 큰 상처였지만 아버님이 다른 여자를 품었다는 사실은 어머님께 용서할 수 없는 배신이었어요. 그 상처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는 한으로 남은 거죠. 그리고 어머님께서는 그 여자가 임신한 걸 알고도 가만두지 않으셨어요. 그 여자는 목숨을 건져 간신히 도망쳤고, 결국 아이를 낳았어요. 그 아이가 바로 구은우예요. 그러니까 구은우는 승혁 오빠의 이복동생이라는 말이에요.”연승혁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그는 담배를 꺼내려다 안정숙의 시선을 의식하고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 원아정은 불안감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만약 안정숙이 원진과 상의한다면 그녀는 반드시 해외로 쫓겨날 것이다. 원진은 절대 그녀 편에 서지 않을 터였다.원아정은 서둘러 자신을 위해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공지민 그년 때문에 내 인생은 완전히 끝장났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녀는 곧장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의 정체를 밝혀내라고 시켰건만 돌아온 보고는 실수로 그 사람을 놓쳤다는 것이었다.“뭐? 놓쳤다고?”원아정은 분노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이렇게 계속 끌려다니면 모든 걸 잃고 말 것이다.그녀는 차를 몰고 공지민이 사는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원아정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지금이라도 공지민을 보기만 하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아 그대로 들이받아 죽여버리겠다고.하지만 공지민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원아정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매일 공지민의 집 근처를 돌며 기회를 엿보았다.차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숨겨두고 혹시라도 온시환의 사람들이 눈치챌까 멀리서 관찰했다.하지만 사흘이 지나도록 공지민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고 대신 안정숙이 공지민을 만나러 오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그 광경을 보자 원아정의 얼굴에는 질투가 가득 차올랐다.‘고등학교 때 그렇게 짓밟아 놓았던 공지민이 나를 밟고 올라가다니... 이게 말이 돼?’분노를 삭이며 핸들을 꽉 움켜쥔 그녀의 시야에 드디어 공지민이 나타났다.공지민은 안정숙과 함께 나와 있었다. 안정숙은 공지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했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그 평온한 광경을 바라보는 원아정은 질투에 사로잡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이를 악문 원아정은 다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사람 정체 아직도 못 밝혀냈어? 공지민이 숨겨둔 그 사람 말이야!”“그 집에 배달을 다녀온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여자
온시환은 뒤에서 움직일 만한 세력이 많지 않았기에 드러난 수단만을 써야 했고 그만큼 더 조심해야 했다.무엇보다 이 일에 서주혁이나 반승제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이건 그가 자신의 여자를 위해 스스로 결정한 일이었고 그러기에 자신의 힘만으로 해결해야 했다.물론 만약 상황이 공지민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악화한다면 그때야 비로소 그 둘에게 도움을 청할지도 몰랐다.공지민은 온시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연승혁이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물인지 새삼 깨달았다.온시환은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연씨 가문의 과거와 연승혁이 회색지대 사업을 정리하며 보여준 철저하고도 잔혹한 수완에 대해 천천히 설명했다.공지민은 그저 듣기만 했을 뿐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온시환이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고 했던 이유를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았다.연승혁이 이토록 잔혹하지 않았다면, 아마 먼 옛날에 태어났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으로 불렸을지도 모른다.이어 온시환은 연씨 가문에서 안정숙이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겉보기에는 자애로워 보이는 안정숙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시환의 품에 몸을 완전히 기댄 채 생각했다.온시환의 눈에 그녀는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해 보였을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겠다고 나섰던 그녀가 얼마나 우스웠을까?연씨 가문의 식사 자리에서 온시환의 표정이 단숨에 어두워진 이유도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는 아마도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려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온시환이 정말 그녀를 좋아한다면, 대체 어떤 마음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을까?공지민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요즘 들어 온시환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안도감을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그날 저녁, 연씨 가문에서 또다시 값비싼 선물들이 도착했다. 이번에는 안정숙이 직접 방문하기까지 했다.안정숙은 확고한 의지를 보이며 공지민을 받아들이려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지민아, 이리 와 보렴. 최근에
그날 밤, 온시환의 사람들이 염정아가 머물던 집 주변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원아정의 사람들이 이미 철수했음을 확인했다. 그 즉시 염정아를 온시환의 별장으로 안전하게 옮겼다.염정아는 전과 다름없이 방에서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음식을 먹을 때조차도 방에서만 해결했다.공지민은 염정아를 제원으로 불러오기 전까지 그녀가 이렇게 협조적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특히, 이번에는 염정아가 외부인의 이상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원아정이 그녀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공지민은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정아야, 이번에는 네가 그 배달원의 이상함을 눈치챈 덕분이야.”염정아는 그릇 안의 음식을 먹으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나는 너에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어.”공지민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으며 말했다.“아니야, 넌 한 번도 내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염정아는 눈빛이 반짝이며 놀란 듯 공지민을 쳐다보았다. 이내 그녀는 천천히 손에 든 것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지민아, 난 그저 네가 구은우의 복수를 끝낸 뒤엔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나도 한때 복수심에 사로잡혀 살았어. 그때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곤 했지.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미친 사람처럼 살았어. 하지만 어느 순간 생각했어. 이렇게 짧은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그리고 깨달았지. 나는 너무 나약했고, 도망칠 용기도 반항할 용기도 없었어. 괴롭힘을 당해도 그냥 참기만 했고. 사람은 참을수록 더 고통스러워진다는 걸 그땐 왜 몰랐을까?”염정아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공지민은 그녀를 천천히 안으며 말했다.“난 모르겠어. 복수가 끝난 후엔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때 가봐야 알 것 같아.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염정아는 별장에 들어오면서 온시환을 보았다.그녀의 눈에 온시환은 매우 훌륭한 남자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공지민을 바라보는 눈에는 온통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속 조사해.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요즘은 다들 섣부른 행동 하지 말라고.”잠시 후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항상 하는 말이지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라.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지만 목숨을 잃으면 아무 의미가 없으니까.”옆에 서 있던 부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명령을 받들었다.연승혁은 옆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공허했다.과거 연씨 가문이 회색지대 사업을 했을 때는 항상 목숨이 위태로웠다. 하지만 사업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합법적으로 전환한 이후 몇 년 동안 연씨 가문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그의 뒤를 캐고 있다는 사실에 불쾌하면서도 묘한 흥미를 느꼈다. 연승혁은 타고난 모험가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그래, 누군지 한번 보자고.’연승혁은 문득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떠올렸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이름을 언급했었다.‘구은우?’하지만 연승혁은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람을 죽여왔기에 그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하찮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일 뿐이었다.그는 다시 담배를 피우며 옆 사람에게 말했다.“뭔가 소식이 들어오면 바로 알려.”“알겠습니다, 형님.”배는 여전히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한편, 제원에서 원아정은 연씨 가문을 떠난 뒤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그녀는 공지민에게 복수하기로 결심했다. 공지민이 더 이상 제원에서 발붙일 수 없게 만들 작정이었다.차에 올라탄 그녀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집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어?”“아가씨, 우리가 10시간 동안 지켜봤지만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밖에서 음식을 배달한 것 같습니다.”원아정은 화를 내며 버럭 소리쳤다.“밖에서 배달 음식이 들어갔다고? 너희들 머리는 장식이야? 배달원으로 위장해서 안을 확인할 생각도 못 해? 도대체 내가 왜 너희들을 고용한 거야!”전화를 끊은 뒤 그들은 그제야 원아정의 말에 따라 배달원으로 위장해 염정아가 머무
안정숙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그게 무슨 뜻이니?”원아정은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아, 할머니. 정말 모르신다면 승혁 오빠를 불러보세요. 저도 그냥 한 번 해본 소리니까요. 어차피 지금은 공지민이라는 친손녀를 얻으셨으니 제 말은 믿지도 않으실 테고요. 제가 할 말은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아정아, 너 나를 원망하는 거니?”원아정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나갔다.안정숙은 지팡이를 꽉 쥐며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녀의 뒤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어르신, 아정 씨는 아마 결혼식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너무 무례했습니다.”안정숙은 옆에 있던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차분히 말했다.“아정이가 뭘 원망할 자격이 있나. 그날 일을 문제 삼지 않은 것만으로도 내가 충분히 관대했던 거야. 저 아이는 단지 체면만 구긴 거지. 하지만 지민이는 그날 목숨을 잃을 뻔하지 않았나. 역시나 반성할 줄 모르고, 저 아이를 집안에 들이지 않길 정말 잘했어.”가정부는 그녀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로했다.“어르신, 보시는 눈이 정확하십니다. 아정 씨는 확실히 그런 그릇이 아니죠.”설령 공지민과 관련된 일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도, 원아정이 연씨 가문에 들어오면 결국 문제만 일으키게 될 것이다.최근 공지민과 관련된 일로 안절부절못하던 안정숙은 원아정의 말이 떠올라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혹시 그 당시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던 건 아닐까?그녀는 즉시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는 이미 바다에 나가 있었다. 최근 거래에 문제가 생겼고 돌아오려면 사흘이 걸릴 거라고 했다.“할머니, 사흘 후에 찾아뵙겠습니다.”안정숙은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음 한구석이 계속 불안했다.그녀는 결국 직접 공지민을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직접 그녀를 만나야만 마음의 불안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연승혁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원아정은 마치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그녀는 황급히 액셀을 밟아 한적한 도로 위에 차를 멈췄고 주변 교통경찰이 다가왔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확실한 정보야?”“확실해. 연씨 가문에서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했어. 혹시 연승혁이 너를 차단해서 SNS에 올린 글을 못 본 거 아니야?”이 말은 원아정의 정곡을 저대로 찔렀다. 연승혁은 정말 그녀를 차단했다.원아정은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전화를 끊고 바로 안정숙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나 안정숙도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그녀는 직감했다.그래서 안정숙이 그렇게 공지민을 신경 쓴 거였다. 심지어 내 결혼식도 취소하면서까지...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그래서 그랬던 거구나!’원아정은 마치 하늘이 자신에게 터무니없는 장난을 치는 것만 같았다.설마 결혼식장에서 안정숙이 공지민을 알아본 걸까?‘망할!’그녀는 속으로 수없이 욕을 퍼부었지만 상황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연승혁과의 관계는 이제 완전히 끝났고 그녀는 자신이 공지민에게 했던 말들이 떠올라 소름이 돋았다.‘공지민이 나에게 복수한다면 어떡하지?’그녀는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안 돼.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해.’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구은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원아정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내가 왜 구은우를 잊고 있었지? 구은우를 죽인 건 연승혁 아니었나? 공지민이 이제 연씨 가문의 사람이 됐다면 당연히 복수를 원하지 않을까?’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너무 우연 아닌가?’공지민이 정말 연씨 가문의 사람일까?혹시 공지민이 연승혁에게 접근해 구은우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이 모든 걸 계획한 건 아닐까?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단순히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원아정은 갑자기 연승혁과 공지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떠올랐다.이 생각이 들자
안정숙은 깊은 한숨을 쉬며 연승혁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자. 네가 지민이를 잘 지켜봐.”연승혁은 안정숙과 함께 밖으로 잠시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그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원아정이었다.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이내 전화를 차단해 버렸다.원아정은 화가 치밀었다. 최근 연승혁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 아침에는 SNS에 올려 자신과 완전히 연을 끊겠다고 공표하기까지 했다.그녀는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만 같아 분노와 절망에 휩싸였다.‘이게 다 공지민 때문이야!’원아정은 즉시 자신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공지민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고가 들어왔다.“아가씨, 공지민이 오늘 외출해서 쇼핑 중입니다.”“주소를 보내요.”원아정은 바로 차를 몰아 그 장소로 향했다. 그녀는 쇼핑몰에서 공지민을 발견했다.공지민은 아직도 다리에 깁스를 하고 있었고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강민지가 함께 있었다.강민지는 공지민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전환 겸 바람이라도 쐬게 하려고 그녀를 불러냈다.공지민은 목발을 짚고 느린 걸음으로 걸으며 한 시계 매장을 지나던 중 눈길을 멈췄다. 한정판 시계를 보며 염정아에게 선물로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얼마 전 자신이 가진 40억을 전부 염정아에게 넘겨주고 정작 자신에겐 한 푼도 남기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아침 온시환이 그녀에게 카드를 건넸다. 카드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돈이 들어 있었다.연씨 가문에서 보낸 선물들에 자극받은 탓인지, 공지민은 보상의 의미로 염정아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매장 직원에게 시계를 꺼내 보여달라고 했다.강민지는 옆에서 시계를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정말 예쁘다! 피부 톤이랑도 잘 어울려요. 게다가 다이아까지 박혀 있어서 완전 고급스럽네요.”공지민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시환 씨가 오늘 아침에
공지민은 연승혁의 말을 듣고 속으로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차분한 표정을 유지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혈육의 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지만 연승혁은 그와 상관없이 여전히 친근하고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온시환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연승혁은 쉬운 상대가 아니야. 항상 경계해야 해.’공지민은 이 순간에도 그의 말에 따라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연승혁은 손에 든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미소를 지었다.“누나, 마음이 바뀌면 나한테 연락해요. 이건 내 전화번호예요.”그는 카드 한 장을 꺼내 옆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개인 번호예요.”공지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가 떠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테이블 위에 놓인 카드를 바라보았다.카드는 별다른 장식 없이 간단했고 확실히 개인적인 물건처럼 보였다.그녀는 카드를 가방에 넣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연승혁의 의도가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상황을 지켜보며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연승혁이 집 밖으로 나가 차에 오르자마자 전화가 걸려 왔다. 상대는 그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그는 운전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최근에 재미있는 걸 발견해서 가끔 들러서 장난 좀 치고 있어.”전화기 너머에서 상대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들리는 말로는 누나를 찾았다고 하던데, 그게 진짜야?”“그래, 진짜야.”연승혁은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손으로 전화를 받으며 대답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연씨 가문으로 데려올 거야.”상대는 의아한 듯 반문했다.“승혁아, 근데 너 태도가 좀 이상한데? 그동안 네가 누나를 찾은 건 할머니를 위해서였잖아. 설사 누나를 찾았다고 해도 이렇게 적극적일 이유는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흥미를 보이는 거야?”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정말 흥미로운 여자거든.”상대가 무언가 더 말하자 그는 가볍게 욕을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차를 몰아 연씨 가문 저택에 도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