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은 모두 자기만의 콘셉트이 있다.팬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모습도 그들의 콘셉트에 지나지 않고 사적인 상황에서 성품이 어떠한지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해 본 사람만이 안다.송아현의 성질은 다양하여 기분파 콘셉트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그럼, 스캔들을 합리화할 수도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자기 팬으로 만들 수 있다.한서진은 다소 흥분한 모습을 보이며 안경 뒤에 반짝이는 두 눈에서는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그는 가볍게 웃더니 곧장 차에서 내렸다.“성 대표님, 서브 여주로 출연하려고 했던 여배우를 찾으러 가 볼게요. 어떻게든 우리와 손을 잡을 수 있게끔 설득해 보겠습니다.” 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회사로 돌아오자, 포레스트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혜인 씨, 백지영 양은 전에 국내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그때 외국에 있는 명문 예술 학교로 보증 추천되는 학생이 있었는데, 백지영 양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보증 추천 학생의 양손에 갑자기 문제가 생겨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자, 그 자리를 백지영 양이 대신했다고 합니다.”한눈에 봐도 꺼림직한 일이다.“그때 그 보증 추천 학생과 연락을 닿을 수 있는지 한 번 알아보세요.”포레스트의 적지 않은 사람은 모두 어르신이 남긴 것이고 능력도 제법 뛰어나며 충심을 다하는 편이다.전화를 끊고 성혜인은 계속 이 일을 깊숙이 파고들고 싶었지만, 반태승으로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된다.“할아버지.”성혜인은 반태승에게 매우 깍듯하며 반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다.“혜인아, 저녁 먹으러 집으로 오면 안 돼? 전에 약속했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승제하고 밥은 한 끼 먹어야지.”이혼할 때 원수처럼은 헤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하여 성혜인도 반태승의 말에 거절하기 어려웠다.“네.”“그럼, 승제더러 마중 가라고 할게.”“아니에요. 혼자 차 운전해서 가면 돼요.”“어차피 승제도 꼭 지나가는 길이라 괜찮아.”성혜인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백연서에게 그런 일
성혜인은 차에 앉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앞에서 차를 몰고 있는 사람은 심인우이고 반승제는 옆에 앉아 있다.두 사람의 다리는 거의 붙어 있고 얇은 옷감을 넘어 성혜인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차 안의 불빛은 매우 어두우며 지나가는 가로등이 얼굴에 비칠 때마다 그림자가 새겨진다.이처럼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광경에 저도 모르게 넋이 나간다.차를 타서 지금까지 10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성혜인은 주구장창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반승제에게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서서히 무력감을 느끼게 되었다.그는 성혜인이 한쪽 손을 무릎에 놓고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게 된다.다소 짜증이 났는지 뒤로 의자를 젖히며 지그시 눈도 감았다.오른손은 휴대 전화를 꼭 잡고 있고 왼손은 무릎에 놓고 있으며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두 눈을 감은 모습이 조용해 보였다.반승제는 일 분 정도 머뭇거리더니 천천히 손을 내밀어 무릎에 놓여 있는 성혜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온기에 성혜인은 온몸이 굳었고 두 눈을 번쩍 뜨니, 깊은 그의 두 눈을 마주하게 되었다.심장까지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손을 빼려고 했지만, 반승제는 손에 힘을 주었다.성혜인은 애매모호하게 썸을 타거나 교제하는 사람이 아니다.두 사람은 잠자리를 한 적도 있지만, 모두 반승제의 마음에 따라 한 것이고 종래로 지금과 같은 장면이 펼쳐진 적이 없다.성혜인은 다시 손을 빼려고 했지만, 반승제는 놓아주지 않았다.아랑곳하지 않고 거듭 손을 빼려고 하자, 반승제는 깍지를 끼며 더욱 꽉 잡아버렸다.차 안의 온도도 이에 따라 올라가 성혜인은 더워지며 이마에 땀까지 송골송골 맺혔다.회사의 일로 짜증을 너무 부려서인지 어두웠다가 밝았다고 하는 그림자를 지나 반승제를 볼 때마다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듯했다.놀라움이 스쳐 지나갔지만, 반승제는 서서히 다가와 고개를 성혜인의 목에 기대었다.성혜인의 손은 그에게 잡혀 있고 목에는 그의 숨소리로 가득하며 뜨겁기 그지없다.“대표님...”말이
차가운 바람에 달아오른 얼굴이 조금 식혀지기까지 그리 힘들지 않았다.정신이 들고 나니 반승제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일부러 성혜인을 괴롭히고 목적에 도달하고 나서 일 처리를 시작한 건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조금 전에 일만 하고 있던 성혜인에게 복수하려고 그랬던 것일까?성혜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하지만 반승제의 표정은 진지하기 그지없고 정말로 급한 업무가 있어 보인다.울분이 터지지만, 고개를 떨구고 업무에 집중하려고 노력했으나, 시선은 자꾸만 반승제의 손으로 가게 된다.성혜인은 모델보다도 예쁜 그의 손을 좋아한다.아니 더욱 정확하게 짚어 말하자면, 반승제는 온몸 구석구석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얼굴도 몸매도 가장 은밀한 곳도 완벽 그 자체이다.여자를 데리고 놀만한 자질은 충분하나 성혜인은 그에게 농락당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복잡한 마음을 가다듬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에 차는 어느새 고택 앞에 이르렀다.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고 성혜인은 먼저 차에서 내렸으며 반승제는 그 뒤를 따랐다.문이 열리자마자 반태승이 지팡이를 짚고 거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이 보였다.“할아버지.”반태승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성혜인은 문뜩 빈손으로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었다.다음에 찾아뵙게 하면 선물을 준비해 오겠다고 말하려고 하던 참에, 반승제가 하인에게 트렁크에서 선물을 내리라고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반승제는 심지어 반태승에게 둘이 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할아버지, 저하고… 저희가 준비한 선물입니다.”그는 하마터면 혜인이라고 부를 뻔했다.만약 혜인이라고 뱉게 된다면 아마 성혜인의 눈총을 받게 될 것이다.그런 일로 창피함을 당하기 싫어 반승제는 우리라고 했다.미리 선물을 준비해 온 반승제의 모습에 다소 의외였지만, 난처한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여 오히려 다행이었다.반태승은 고택 안으로 선물이 끊임없이 옮겨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만약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
반태승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심지어 반승제를 쫓아내고 성혜인하고만 저녁을 먹고 싶었다.그러나 가장 원하는 것은 두 사람이 화해하는 것이다.비록 두 사람을 합치려고 애쓰지 않겠다고 성혜인에게 약속한 적은 있지만, 반승제야말로 친손자이니 무엇보다 손자에게 가장 좋은 임자가 생기를 원한다.하여 비아냥거리며 딱 한 마디만 던지고 위층을 가리켰다.“서씨 가문 어르신이 나더러 산수화 한 폭만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혜인아, 승제야, 둘이 같이 그려 봐. 저녁 식사까지 아직 2시간 정도 있으니, 같이 그리면 금방 될 거야.”성혜인은 주영훈의 제자이며, 주영훈이 가장 능한 분야도 바로 한국화이다.둘은 같이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아주 예전에 서천에 있을 때, 성혜인은 반승제가 그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으며 심지어 자기와 이해하는 점이 같다는 것을 발견했었다.반태승이 이러는 이유도 아마 두 사람을 합치기 위해서 일 것이다.알고 있으면서도 성혜인은 거절하기 힘들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그러자 반태승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서재에 이미 준비해 두었다. 승제가 내 서재 위치를 알고 있으니 같아 가 보거라. 서재에서 그리면 되고 다 그리고 나면 사람을 불러 거두라고 하마.”반승제는 반태승의 정성에 저버리지 않고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성혜인도 하는 수 없이 뒤따라 올라갔다.그녀는 반태승의 서재에 와서 본 적이 있었고 평범한 인테리어의 벽에는 거의 책으로 도배되어 있었다.중간에 테이블은 엄청나게 크며 화지가 세팅되어 있고 그 위에는 낙관도 쓰여 있었다.서씨 가문 어르신에게 줄 선물이 틀림없어 보였다.성혜인은 옆에서 필요할 물감들을 유심히 보았는데, 이번에 그릴 그림은 한국화이고 물감은 거의 다 한색 계열이다.옆에 붓걸이에는 화필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데, 미리 준비해 둔 것이 맞다.하지만 성혜인은 무엇을 그려야 할지 몰라 저도 몰래 반승제를 바라보았는데, 마침 반승제도 성혜인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 주위의 환경은 고풍스럽기 그
전에는 성혜인에 대한 감정을 제대로 보고 싶지 않았고 조사하기도 귀찮아 그로 인해 잘못을 많이 했다.최근 들어 성혜인 사촌 오빠의 일로 두 사람 사이는 한 걸음 더 멀어졌으니, 지금 반승제를 상대하지 않는 것도 마땅하다.갑작스러운 그의 동작과 말에 성혜인은 온몸이 굳었지만, 곧장 반승제의 손을 밀었다.들고 있는 붓에 먹물이 화지에 튈까 봐 힘껏 밀지는 못했다.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섬세함이 생명이라 자칫 잘못하면 그림 전체를 망칠 수 있다.“반승제 씨, 심심하면 저 좀 방해하지 말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든지 해요.”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성혜인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아무리 말해도 듣지를 않자, 아예 신경 쓰지 않고 남은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똑똑.”노크 소리가 들려왔는데, 아마 하인이 마실 물을 갖다 주러 왔을 것이다.성혜인은 얼른 반승제를 밀어 버렸지만, 반승제는 껌딱지처럼 다시 달라붙었다.예전부터 그녀는 반승제에게 아이다운 심성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고집이 세고 기분이 오락가락하며 외부 사람에게 더없이 차갑다.“놔요.”반승제는 뒤에서 성혜인을 안고 있었는데, 아쉬워하며 손을 떼고 옆에 있는 의자로 갔다.그러고 나서 성혜인이 하인에게 소리를 냈다.“들어 오세요.”역시나 하인이 맞았고 쟁반에 차 두 잔을 들고 있다.“승제 도련님, 혜인 아가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회장님께서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차 두 잔이 테이블에 가지런히 놓이고 하인은 인사를 마치고 물러났다.성혜인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을 깨끗이 씻고 좀 큰 붓으로 바꾸고 싶었는데, 반승제가 또다시 다가왔다.“도와줄게.”반승제는 이미 사용한 붓을 빼앗아 옆에 있는 맑은 물로 씻기 시작했다.성혜인도 더 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 다른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그러다가 옆에 인기척이 있는 걸 느끼게 되었는데, 곧 그림자도 시선으로 들어왔다.반승제가 다시 다른 붓으로 옆에서 돕기 시작한 것이다.다른 부분을 떠나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아니에요.”성혜인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여기서 할아버지와 이야기도 나누고 그래요.”말을 마치고 성혜인은 주저 없이 대문으로 향해 걸어갔다.그러자 반승제는 양복 외투를 들고 빠르게 따라갔다.성혜인은 정말로 돌아갈 때도 그와 한 차로 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대문 밖으로 나가고 보니 자기 차를 몰고 온 것이 아니기에 지금 눈앞에는 반승제의 차와 고택의 차밖에 없다.둘 다 싫다면 성혜인은 걸어서 돌아가야만 한다.이 구역에는 택시가 단 한대도 없기 때문이다.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반승제는 외투를 성혜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는 참이어서 밖은 좀 쌀쌀했다.“그냥 입고 있어. 바래다줄게.”거절을 용납하지 않는 말투였다.성혜인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조수석에 앉았다.반승제가 직접 운전을 했는데, 엑셀을 밟자마자 전화가 울렸다.차를 몰아야 하기에 그는 발신자 번호도 체크하지 않고 스피커를 눌렀다.“여보세요.”그러자 여전히 애교가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 오빠, 나 안 보고 싶어? 왜 전화 한 통이 없어? 난 오빠 보고 싶단 말이야.”처음으로 걸려 오는 전화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반승제는 전화를 단번에 끊어버리고 곁눈질로 성혜인을 바라보았다.성혜인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조금 전에 걸려온 전화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하지만 반승제는 해석하느라 바빴다.“아마 스팸 전화일 거야. 모르는 사람이야.”성혜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만 하고 말았다.“네.”반승제는 양손으로 핸들을 꼭 잡고 조용하고 외지고 조용한 곳에 정차했는데, 주위에는 그들 말고 아무것도 없었다성혜인은 순간 경계심을 불러일으켰으나, 차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뭐 하자는 거예요?”반승제는 좌석을 뒤로 당겼고 앞자리에 공간이 제법 많이 생기게 되었다.그는 단번에 성혜인을 확 끌어당겨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네? 그게 다야? 너 진짜
거대한 좌절감에 숨까지 막혀왔다.“몰라요.”성혜인의 대답에 반승제는 또다시 문득 차분해졌다.그는 성혜인을 지그시 바라보며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그제야 숨이 쉬어지면서 성혜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그럼, 나랑 해보자.”긴장이 풀리자, 목소리까지 한껏 부드러워졌다.“대표님은 사실 저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성혜인은 반승제가 콧방귀를 뀌는 것을 들었다.밤거리의 등불은 그리 밝지 않지만, 하얀 피부로 타고나서 어두운 거리에서도 빛이 났다.반승제는 고개를 떨구고 주위에 행인이 있든 없든 아랑곳하지 않고 지그시 성혜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부드럽기 짝이 없다.“성혜인, 내가 널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너 스스로가 부정하고 싶은 거야. 내가 널 아무리 좋아한다고 말해도 넌 가장 끝에서 날 부정하고 있어. 나를 대면하고 싶어 하지 않고 우리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외면하고 싶은 거야. 나를 뿌리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래서 조금 전에 성혜인이 했던 말은 자기에게 하는 말이라고 간주하면 된다.반승제는 우습기도 하고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했다.“내가 널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야.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거였어.”성혜인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핸드폰을 보더니 핑계를 찾았다.“많이 늦었어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몸을 돌렸지만,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고 덧붙였다.“너한테 반지 준 남자 누구야? 그 남자 좋아하는 거지? 사실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거 아니야? 나하고 결혼한 이유도 단지 너희 가문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잖아. 나하고 자는 것도 내가 널 만족시킬 수 있어서 자는 거잖아.”“성혜인, 너 생각보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 내가 널 찾아가지 않으면 넌 절대 날 찾아올리가 없어. 내가 좋아한다고 수천 번이나 말해도 넌 항상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
성혜인은 반승제의 손을 뿌리쳤다.전에 똑같은 말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혜인아, 앞으로 너에게만 잘해줄게.”그 사람은 성혜인에게 이렇게 말했었는데, 결말은 그렇지 않았다.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항했었고 그 사람과 연애하고 싶었었다.그 사람은 성혜인의 반골이며 소리 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살며시 성혜인의 꽃다운 청춘에 스며들었다.지금 반승제에게서 똑같은 말을 들으면서 순간 착각이 들어 저도 몰래 주위를 훑어보았다.“대표님, 많이 늦었네요. 어서 돌아가 보세요.”반승제는 또 한 번 거절당했다.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지폈다.“응. 담배 한 대만 피우고.”성혜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서둘러 병원으로 들어갔다.대문으로 들어가려던 참에 고개를 돌려 반승제를 한 번 바라보았다.그는 지금 차에 기대어 있는데, 서 있는 위치도 기가 막히다.절반은 밝고 다른 절반은 어두우며 손가락 사이에 희미한 담배 불빛이 번쩍이고 있다.반승제도 고개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혜인은 그에게 들킬까 봐 얼른 고개를 돌려 안으로 걸음을 재촉했다.…한서진의 병실 안에서 송아현은 이미 두 시간이나 울었다.“아저씨, 제가 잘못했어요. 미안해요.”한서진은 지금 팔에 깁스를 했고 실려 왔을 때는 손이 부러진 상태였다.송아현은 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울부짖었고 한서진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괜찮아.”“이게 어떻게 괜찮아요? 모두 제 잘못이에요. 그 여자만 때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을 텐데, 그 여자 배경이 엄청 나다고 들었어요.”송아현은 침대에 앉아 있었는데, 그만 참지 못하고 한서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한서진은 그만 온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부드러운 한 곳이 자꾸 한서진의 팔에 닿았기 때문이다.하지만 아직도 울고 있는 송아현이라 일부러 그런 거 같지는 않다.송아현은 인제 의젓한 성인이고 두 사람은 서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하여 한서진은 단호하게 송아현을 밀쳐버리며 눈살을 찌푸렸다.“아현아, 이 일은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