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순간 가방 속의 그 해파리 도장이 손에 댈 수도 없이 뜨겁게 느껴졌다.임지연은 어찌하여 그런 조직과 엮이게 됐을까?그리고 왜 도움이 필요할 때 이 물건을 유용하게 쓰라고 자신한테 당부했을까?설마 그 극악무도한 사람들을 이용하여 살인이라도 하라는 뜻은 아니겠지? 그건 임지연의 이미지와 너무 맞지 않는다.성혜인이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는 그때, 설우현이 또 이어서 얘기했다.“이 조직은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어요. 그리고 아주 베일에 싸였죠. 정식 명칭은 Bloodkillers, 돈을 받고 대신 일을 해결해 주죠. 돈만 충분하다면 그들은 그 누구의 목숨이라도 빼앗을 수 있어요. 20여 년 전에도 아마 누군가 그들한테 큰돈을 줘 부잣집 일가를 죽이라고 사주했을 거예요.”성혜인은 그의 말을 듣고 몸이 오싹하여 침을 몰래 삼켰다.“그럼, 설우현씨는 무섭지 않아요? 만약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그들한테 돈을 주고 우현 씨의 목숨을 노린다면?”설우현은 가볍게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BKS가 원하는 건 결국 돈이에요. 내가 상대방보다 돈을 더 많이 내면 오히려 돌아서 고용주를 죽일 수도 있죠. BKS를 사주해서 날 죽이려면, 내가 그보다 더 많은 돈으로 내 목숨을 살지 안 살지 생각해야 할 거예요. 내가 그 돈을 기꺼이 낸다면 사주한 그 사람은 죽게 될 테니까.”“그런데 설우현씨 말대로라면, 20여 년 전에 그들이 죽인 건 세계 최고 부자가 아닌가요? 갑부보다 더 돈 많은 사람이 있을 리가요.”“그 갑부 남자는 당시 마흔 명이 넘는 여자가 있었어요. 집안 재산은 진작에 쪼개져 그 남자 손에는 얼마 남지 않았죠. 기타 가족들도 돈을 함께 모으길 원하지 않았으니, 죽임을 당한 건 당연한 일이었어요.”설우현은 이 말을 마치고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얼굴색이 더 덤덤해졌다.“재벌가의 혈육 간의 정은 워낙에 희박해요. 예상하건대 그 일을 사주한 사람은 그 남자의 한 아들이었을 거예요.”성혜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점점 이 해파리 도장이
이건 전형적인 나쁜 남자의 어록이다.반승제는 한순간 눈앞의 이 여자가 자신이 아는 그녀가 맞는가 하는 의문까지 들었다.그는 그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녀 눈빛 속의 작은 흔들림마저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 말을 뱉을 때의 표정은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 마치 그녀의 모든 말이 전부 사실인 것처럼. 그가 무작정 여기에 찾아온 모양새가 우스워지도록 말이다.그는 계속하여 그렇게 성혜인을 쳐다보는데, 두 눈동자는 오래된 우물처럼 깊고 캄캄하고 요동 없이 잠잠하였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사람을 등뼈가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런 기운이 스멀스멀 다가오자, 성혜인은 더는 그를 보지 않고, 묵묵히 앞에 있는 물컵만 주시하였다.백연서의 욕설, 반희월의 불쾌함, 반승혜의 미움까지…반승제의 옆은 온통 가시덤불과 같아, 조금만 제정신을 가진 여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쉽게 알 수 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를 정말로 좋아하는 걸까?그녀는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반승제와 함께 생사를 드나들 때는 그의 강렬한 심장 박동을 느꼈지만, 그것이 구름다리 효과일 수도 있지 않는가.온시환은 반승제가 매우 화낼 줄 알고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수시로 그를 말릴 작정이었다.하지만 반승제는 그저 깊은 눈동자로 성혜인을 바라보더니 한마디 남기고 바로 돌아섰다.“그래, 앞으로 서로 방해하지 않기로 해.”온시환과 서주혁은 그가 자신들의 옆을 지날 때 풍기는 차가운 기운에 몸이 얼어붙는 줄 알았다. 온시환은 얼른 반승제를 따라갔고, 서주혁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서 팔짱을 끼고 성혜인을 흘겨봤다.‘이로써 둘은 끝내 헤어진 건가? 그렇다면 이 여자를 수연이한테 넘겨도 되지 않을까?’서수연은 성혜인한테서 협박받은 후로, 겁이 유난히 많아졌다.반승제가 이후부터 이 여자를 감싸지 않는다면, 서씨 집안에서 맘대로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이내 반승제를 따라갔다.반승제는 온시환의 별실에 와 앉으며, 온시환이 건네주는 술을 들이마
병실 내, 반승혜는 계속 똑같은 악몽을 반복했다.한 남자가 그녀의 몸 위에 엎드려 낄낄대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의 말소리가 쉼 없이 귓가에 울리며 그녀를 괴롭혔다.“네가 반씨 집안사람이지. 전에 널 본 적 있어. 꽤 예쁘게 생겼는데? 살결도 보드랍고 말이야. 어린아가씨, 여기서 그렇게 막 뛰어다니면 대가를 치러야 해.”이것은 그 당시 있었던 실제 장면이었다. 반승혜는 다용도실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이 남자와 부딪혔다.이 남자는 자신이 반씨 집안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그녀는 인질 중에 잘 숨어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납치범이 이미 그녀의 신분을 알고 있을 줄이야.반승혜는 너무 놀라 얼굴색이 하얗게 질려, 마음속으로 성혜인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이 남자의 손아귀에서 구해줬으면 하는 뻔뻔한 생각까지 하였다.인간은 생사에 직면했을 때, 비열해지기 마련이다.그러나 성혜인은 그 자리에 없었고, 남자는 그녀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길 기세였다.그 순간, 그녀는 거대한 생존 욕구가 솟구쳐 오르며, 좀 전에 성혜인이 또 다른 한 남자를 유혹하던 장면이 떠올라, 급기야 남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항상 도도했던 반승혜는 이렇게 굴욕적인 체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예전에 혹시 누가 그녀한테 생존 앞에서는 그 누구든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을 거라고 얘기한다면, 그녀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잔혹하고 잔인한 현실에 마주치기 전까지 그녀는 오로지 서책에서 세상만사를 인식하였으나, 정작 맞닥뜨리게 되니 역시 자신도 죽음이 두려워 절절매는 비열한 겁쟁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알았다.아픔이 두렵고 죽는 것도 두려웠다. 그녀는 간절하게 살고 싶었다.그리하여 그 남자 앞에 선 채, 그녀는 자기 옷을 하나씩 벗었다.방아쇠를 당기려던 남자의 손은 과연 멈추었고, 흥미진진하게 그녀가 발가벗는 모습을 지켜봤다.그러다 흥분된 그 남자는 주저하지 않고 탁자 몇 개를 한데 모아놓고, 혹독하게 그녀한테 욕망을 발산시켰다.반승혜는 계속 울고, 그녀가 울수록 그
“고모, 성혜인 때문이에요. 성혜인이 나를 거기 두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내가 그 남자한테…”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반승혜는 갑자기 목이 메어 말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반승혜가 의식을 잃었을 때, 반희월은 이미 승혜의 검사 보고서를 확인하였다. 하체가 심하게 찢겼다고 한 걸 보면, 그 과정 중에 승혜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승혜야, 네 말은 승제의 전처 성혜인을 가리키는 거야?”반승혜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이불속으로 머리를 틀어박았다.그 모습을 보니, 그녀가 받은 충격이 매우 큰 모양이었다.반희월과 백연서는 눈길을 마주치고는 상대방의 눈빛에서 걱정과 무거운 심정을 보았다.문제는 성혜인이 왜 거기서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백연서는 급히 설명했다.“성혜인의 고향이 바로 서천이에요. 아마 고향에 갈 때 그곳에 잠깐 쇼핑하러 간 모양이에요. 자기가 상처 안 받으려고 승혜를 밀어냈나 봐요. 악독한 년! 아버님은 왜 애초에 그런 여자랑 승제를 결혼시켰는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이혼했는데도, 계속 반씨 집안 이름을 내걸고 밖에서 위세를 부리다니, 참.”이 말을 들으니, 반희월의 눈썹은 잔뜩 일그러졌다백연서는 장담하며 말했다.“이 일은 나한테 맡겨요. 제가 성혜인한테 꼭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반희월은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옆에 앉아 반승혜한테 부드럽게 물었다.“승혜야, 물 좀 마시겠니?”반승혜는 계속 이불을 뒤집어쓴 채 울며 아무한테도 대꾸하지 않았다.백연서는 이 일이 성혜인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고부터, 더는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세상에 무슨 우연이 그렇게 많단 말인가. 성혜인이 거기에 나타난 건 분명 반승제를 따라가서 그를 다시 붙잡으려는 속셈이다.‘흥! 천한 년! 아직도 포기를 안 한 모양이군.’백연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며, 반드시 남모르게 성혜인을 해결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 여자가 다시는 반씨 집안을 내걸고 행세를 부리지 못하도록.백연서는 금방 아이디어가
인제야 알았다.오늘 밤 그녀한테 죄를 묻고 싶은 사람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백연서였다.백연서는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3년 전, 얘랑 우리 아들이 결혼할 때, 우리 아들이 얘가 싫어서 해외에서 3년씩이나 안 돌아왔어요.”백연서가 화제를 꺼내자 현장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여기저기 귓속말을 나누기 시작했다.“맞아요. 승제 도련님이 외국에 나갈 때 큰 소란이 있었어요.”“결혼식도 없고, 듣기로는 혼인 신고도 자기가 혼자 가서 했다고 하데요.”“3년씩이나 외면당하다니, 얼마나 난감했을까.”백연서는 자신이 꺼낸 화두가 의논을 일으키니 냉소를 지었다.“승제가 귀국하고 나서도 나의 이 전 며느리는 단념을 못하고 곳곳에서 승제를 쫓아다녀요, 자존심도 없이. 그리고 무슨 수단을 썼는지 애가 생겼는데, 결국 애도 지키지 못했어요. 이젠 포기한 줄 알았는데 여전히 승제의 뒤꽁무니만 맨날 따라다녀요, 무슨 그림자도 아니고. 승제가 그렇게 싫어하는데 계속 쫓아다니네요.”그제야 모두는 백연서가 이번 다과모임을 만들게 된 목적이 성혜인을 모욕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녀들이 성혜인을 보는 눈빛은 순식간에 경멸로 변했다. 천한 신분으로 높은 집안에 애써 들어온 것도 모자라, 버림을 받고도 계속 뻔뻔스럽고 귀찮게 매달리는 여자라니.백연서는 사모님들 중에서 꽤 잘나가는 편이었다. 그녀의 설명을 듣고 사모님들이 점점 더 치열하게 토론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사실 상류사회도 일반인의 생활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인간성이 복잡하다. 다만 그녀들은 돈이 평생 써도 다 못 쓸 만큼 많을 뿐이다.그들은 일찌감치 집안을 위해 아들딸을 낳고, 인생이 더 부러울 것 없이 원만하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보기 싫은 것이 누군가 자신의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었다.백연서는 그녀들의 그런 심리를 잘 알고 오늘 이 자리를 만들었다.“제가 얘한테 여러 번 말했어요. 우리 아들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얘랑은 불가능하다고요. 우리 승제도 얘를 계속 거절하는데, 이 여자가 너무나 앞뒤 안 따지고
백연서의 눈에는 성혜인이 숨 쉬는 것조차도 반승제를 유혹하려는 것으로 보였다.이 천한 계집애는 또한 임지연의 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은 성혜인의 잘못이다. 성혜인이 패가망신을 당하거나 죽거나 혹은 제원에서 영원히 떠나기만 한다면, 자신과 반기훈의 혼인 생활은 만회할 수 있다고 그녀는 믿는다.백연서는 반기훈을 너무 사랑했다. 그와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알고 지냈고, 심지어 아기 때부터 정한 혼사였고 소꿉친구였는데, 그깟 중도에 튀어나온 년보다 못할 게 뭐란 말인가!보디가드는 성혜인을 캄캄한 방으로 데려가 그녀를 가두었다.여기는 범인을 벌하기 위한 곳이었던 같은데, 손을 뻗어도 보이지 않을 만큼 빛이 하나 없이 어두웠다.성혜인은 손으로 더듬거리며 벽 쪽으로 다가가 기대었다. 그러다 그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런 어두컴컴한 곳에서 그런 소리까지 나니 왠지 소름 끼쳤다그러다 그녀의 손은 나른하면서도 차가운 생물체를 만졌고, 뒤늦게 그것이 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아!”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방이 너무 큰 탓인지, 그녀의 소리가 메아리로 다시 방안에 울려 더 공포스러웠다.어둠 속에서 그녀의 주변에는 알지 못할 각종 동물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가끔 그녀의 발 옆으로 기어 지나가기도 했다.성혜인은 쪼그리고 앉아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그러나 방이 너무 어두웠다. 어둠은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 쉬웠다.밖에서 백연서는 아직도 사모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을 다 보내고 난 후 그녀는 반승혜한테 전화를 걸었다.반승혜는 아직도 정신적 파탄의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백연서의 전화를 받을 때도 입술이 떨고 있었다.“승혜야, 내가 성혜인을 붙잡아 컴컴한 방에 가두었다. 그리고 그 방에 뱀도 집어넣었으니, 아마 1주일 정도 가두면 놀라 죽을 거야. 이만하면 너 대신 복수를 한 셈이야.”반승혜는 그 말을 듣자, 온몸이 굳어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비록 그녀가 당당하게 살기 위하여
“그 여자가 감정을 어떻게 대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에요.”반승제는 손에 들고 있던 컴퓨터를 닫고 시계를 보니 잠잘 시간이었다. 하지만 왠지 계속 불안해하며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책을 꺼내 보려고 했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새벽 1시에 그는 다시 옷을 입고 직접 운전해서 로즈가든으로 갔다. 로즈가든에는 몇 개의 등이 켜져 있었고 그는 창문을 조금 열고 멍하니 담배를 피웠다. 절반 정도 피더니 핸드폰을 꺼내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반승제는 등을 뒤로 젖히고 두 눈은 앞을 보며 한밤중에 왜 이곳으로 왔는지 의아해하며 그런 자신을 비웃으며 차를 돌렸다. 운전하는 도중에 SY그룹 앞에 왔는데 그는 성씨 집안에 관심이 없었기에 여기가 성씨 집안 건물인 줄도 몰랐다.회사 앞에서 어떤 여자가 불안한 표정으로 전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장하리였는데 성혜인과 연결이 되지 않아 걱정되었다. 오늘은 S.M의 드라마가 개봉하는 첫날이고 시청률도 기록을 경신해서 이 좋은 소식을 성혜인에게 전하려고 했지만, 오후부터 시작해서 열 번 넘게 전화를 걸어도 성혜인의 전화는 여전히 응답이 없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성혜인은 분명 장하리와 같이 시청률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장하리가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들었을 때 옆에 주차해 있는 고급 차를 발견했는데 열린 창문으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반승제의 옆모습을 봤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성혜인에게서 반승제의 이름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비록 이혼은 했지만 부부 관계를 맺은 적이 있었기에 장하리는 가까이 다가가서 정중하게 불렀다.“반 대표님.”반승제는 그때 핸들 위에 손을 올리고 음악을 듣고 있다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는데 장하리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저기, 오늘 사장님께 여러 번 전화했는데도 소식이 없어요. 무슨 일이 있는지 걱정돼서요.”“사장님?”“네, 성혜인 사장님이요. 반 대표님 전부인
성혜인은 구석에 앉아 여전히 이마로 벽을 부딪히고 있었는데 이제 힘이 풀린 채 기계적으로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남자도 뱀과 지네들이 무서웠는지 천천히 성혜인 쪽으로 다가가서 그녀를 데리고 나오려고 했다. 그가 성혜인을 붙잡자, 그녀는 소리를 치며 힘 있게 밀쳤다. 성혜인은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디든 여기보다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남자는 뱀들이 있는 곳에 넘어졌고 너무 무서워서 비명을 질렀는데 그 소리에 성혜인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남자에게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바닥에 힘차게 박아서 기절시켰다.성혜인은 밖으로 나갔지만 하루 종일 굶은 탓에 위가 경련을 일으켰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백연서가 남자의 편리를 봐주느라 경호원들을 철수시켰던 것이다. 덕분에 성혜인은 몇 번씩 넘어지면서 작은 길을 따라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감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걸어가다가 별장의 녹색 길에 넘어졌는데 눈 앞에 가죽 구두가 나타났다. 설우현은 눈앞에 나타난 여자를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페니?”성혜인은 손을 뻗어 그의 정장 바지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잡았다.“살려줘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기절했다.설우현은 오늘 백연서의 초대를 받고 반씨 저택에 왔다. 설씨 가문은 워낙 세력이 막강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그더러 제원에 좀 더 머물면서 제원의 귀족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고 했는데 마침 설우현이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아버지의 의도는 잘 모르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백연서는 어제 다과회를 열었고 오늘은 작은 파티를 조직했는데 좀 있다가 깜짝 이벤트가 있다고 했다. 백연서는 무자비하고 비겁하게 일을 준비했는데 이번에 성혜인과 경호원의 일이 들키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들이 간통했다고 할거고, 그래서 성혜인이 제원에서 더 이상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려고 했다. 또한 성혜인의 처참한 모습을 백연서는 그녀가 이미 미쳤다고 할 것이고 때문에 전 시어머니 별장에서 남자와 간통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현장을 확인하고 믿게 할 예정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