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연은 멀지 않은 곳에 숨어서 주저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자, 그녀는 깜짝 놀라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그 소리에 모두의 시선은 서수연에게 쏠렸다.그녀는 너무 창피한 나머지 황급히 자신을 두드린 사람을 쳐다보았는데 다름 아닌 홍규연이었다.홍규연의 옆에는 약간 잘 생기고 젊어 보이는 한 남성이 서 있었다. 하지만 비주얼은 평균보다 조금 높은 정도라 그다지 놀랍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규연아, 깜짝 놀랐잖아.”“여기 숨어서 뭐해?”이윽고 홍규연의 시선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페니에게 닿았다. 그녀를 보자마자 홍규연은 온몸이 굳어져 무의식적으로 옆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남자는 방우찬이었다.방우찬이 그 “불여우”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보고, 홍규연은 한숨을 돌렸다.한편, 명희정은 계속해서 성혜인을 비꼬았다.“갑자기 생각났는데, 우리 전에 만난 적 있죠?”성혜인은 온몸이 굳어졌다. 사실 그녀도 명희정의 얼굴이 익숙하다고 느꼈지만, 어디서 봤던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명희정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몇 년 전, 제원대 파티에서 서씨 집안이 투자자로 초청을 받았었죠. 그때 한 학생이 무대 뒤에서 급하게 뛰어 내려왔는데, 페니 씨죠?"성혜인은 심장이 누군가의 큰 손에 잡히는 기분이 들었다.당시 제원대에는 여러 투자자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신기섭이었다. 그녀는 성적도 우수하고 외모도 수려해서 투자자들에게 꽃다발을 건네는 임무를 맡았는데, 신기섭은 자신이 잊고 가져오지 못한 물건이 있다며 성혜인을 속여 그녀에게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그 말에 그녀는 신기섭을 따라 무대 뒤로 향했다. 그 결과, 들어서자마자 신기섭은 성혜인에게 달려들었다.그녀는 놀라 몸부림치다가 허겁지겁 사람이 가득한 강당으로 뛰쳐나갔다.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넘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눈치가 빨랐던 투자자들은 그녀가 무대 뒤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단번에 알아챘다.“생각났어요! 파티 무대 뒤에
조금 놀란 그녀가 손수건을 받으려고 손을 내밀자 반승제가 성혜인을 뒤로 끌어당겨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이런 장소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두 남자는 서로 질세라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그들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치하다 보니, 명희정은 도리어 찬 밥 신세가 되고 말았다.성혜인의 손은 반승제에게 꽉 쥐어져 있었고,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그 가면에 떨어졌다.하지만 가면의 남자는 그저 성혜인을 살짝 아래 우로 훑어볼 뿐이었다.성혜인은 그에게서 묘한 친숙함을 느꼈다. 그녀가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자 상대방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반승제는 속은 마치 누군가에 의해 불이 달린 마냥 활활 타올랐다. 뒤이어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성혜인에게 물었다.“이건 또 누구야?!”그는 성혜인이 마치 바람이라도 피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성혜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저도 몰라요.”그녀는 정말로 가면을 쓴 남자에 대해 몰랐고, 단지 친절하게 손수건을 건네주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몰라? 모르는데 손수건을 건네줘? 모르는데 그런 눈빛으로 너를 쳐다봐?!”반승제는 성혜인의 귀에 입술을 갖다 댄 채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페니야, 그 멍청한 척하는 수단은 나한테 더 이상 쓰지 말았으면 좋겠어.”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반승제의 이 틈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하지만 성혜인은 이 일에 대해 정말 결백했다. 그러던 그때, 뒤에서 또 명희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승제야, 저 여자가 나한테 술을 끼얹었는데, 너는 내가 못 따지게 할 작정이니?”자신이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명희정은 또 화가 치밀어 올랐다.“아주머니도 끼얹지 않으셨나요?”반승제는 담담한 말투로 말하며 성혜인의 손을 쥐고 놓지 않았다.“저는 페니와 할 얘기가 있어서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윽고 그는 성혜인의 손을 잡고 한쪽 모퉁이를 향해 걸어갔다.오늘 밤 큰 창피를 당한 명희정은 치밀어 오
“뭐, 괜찮은 것 같네.”그러자 홍규연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의기양양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저 빌어먹을 년이 좀 꼬시면 어때? 어차피 우찬 오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실패한 거나 다름없는 거지!’성혜인의 시선은 방우찬에게 얼마간 머물렀다. 그녀는 장하리의 핸드폰 배경화면에서 방우찬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기에 홍규연의 옆에 앉아 있는 것이 바로 그라는 것을 알아챘다.‘홍규연이랑 여기까지 와놓고, 장 비서한테 진심이기는 한 건가?’성혜인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 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장하리에게서 온 전화였다.사실 오늘 저녁은 장하리가 데리러 오기로 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반승제가 성혜인에게 하룻밤 같이 있어 달라고 했으니, 오늘 저녁에 아마 그와 차를 타야 할 것 같아 장하리가 데리러 올 필요가 없어졌다.“사장님.”장하리는 잔뜩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오늘 저녁 아마도 휴가 내야 할 것 같아서요.”“왜 그래요?”장하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생리통 때문에요. 오는 길에 너무 아파서 차를 한쪽에 세웠어요.”“어디예요? 제가 바로 찾아갈게요.”“아니에요, 사장님. 그냥 집에 가서 좀 쉬고 싶어요.”성혜인은 바로 승낙했다. 어떤 여자들은 생리통으로 인해 기절하기도 하는데, 장하리가 이런 타입인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장하리는 강해져야 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성혜인에게 말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장하리는 차 안에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떨리는 손으로 방우찬에게 전화를 걸었다.방우찬은 그녀가 전화를 건 것을 보고 온몸이 굳어져서, 옆에 있던 홍규연을 다급히 밀쳐냈다.“규연아, 나 전화 좀 받을게.”방우찬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홍규연은 일부러 그의 손을 잡았다.“오빠 아직도 안 헤어졌어? 빨리 분명하게 말해. 아니면 내가 뭐가 돼? 우리 아빠가 말했지? 오빠가 나랑 같이 있으면 나중에 반드시 좋은 점이 있을거라고.”방우찬은 난감
성혜인은 그 두 사람을 계속 관찰하다가 홍규연이 일부러 그녀의 앞에서 사랑을 과시하는 것 같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래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시선을 거두어 다시 서수연을 바라보았다.혼자 소파에 앉아 있던 서수연은 성혜인을 보고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그러나 곧 그녀는 로비 홀로 들어오는 서주혁을 발견했다.서수연은 단숨에 기운을 차리고 서주혁의 앞에 다가갔다.“오빠, 저 여자 좀 혼내주면 안 돼?”서주혁이 고개를 들자 홀로 앉아 있는 성혜인이 보였다.성혜인은 오늘 끈 드레스를 입었다. 비록 술이 엎질렀지만, 다행히 드레스 넥이 낮아서 성혜인의 목만 더러워졌기에 손수건으로 깨끗이 닦으면 됐다.“오빠, 이 빌어먹을 년이 방금 엄마한테도 망신을 줬어.”서주혁은 성혜인을 향해 걸어갔고, 서수연은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오빠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다시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으로 변했다.서주혁은 이 무리 안 대다수 사람들의 아부를 받는 존재였다. 그는 서씨 집안의 후계자이기도 하고, 또한 위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인재이기도 했다.돈과 권력은 모두가 미친 듯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주혁은 둘 다 겸비된 사람이었다.서수연은 그의 팔짱을 끼고 한쪽 발로 성혜인의 다리를 걷어찼다.“빌어먹을 년! 빨리 그 사진 돌려줘.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오빠가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서주혁이 말릴 겨를도 없이 상황이 벌어졌고, 그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수연은 여전히 서주혁이 자기편인 줄 알고 발을 들어 또 걷어차려고 했지만, 옆에서 갑자기 한 손이 뻗어져 와 그녀를 밀쳤다.그 바람에 서수연은 바로 옆에 있는 샴페인 타워에 넘어졌고, 몇 미터 높이의 샴페인이 순식간에 쏟아져 모두 땅에 깨지고 말았다.깨진 병 조각에 깔려 그녀의 팔에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민 사람을 쳐다보았다. 다름 아닌 반승제였다.그러자 서수연은 이제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지 못하고 울부짖
사람들 속에 있던 온시환은 두 사람이 싸울 것 같아지자 곧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이고, 형제들끼리 왜 이래, 됐어 됐어, 사람들이 보고 있잖아.”서주혁은 정말로 반승제와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그는 서수연을 들쳐업고 자리를 떠났다.그리고 온시환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고개를 돌리자 그는 반승제가 여전히 성혜인을 감싸고 있는 것을 보고 또 한숨을 쉬었다.“이제 너 서씨 집안 쪽이랑 사이 틀어질 것 같은데.”서씨 집안과 반씨 집안의 관계는 줄곧 매우 좋았다. 때문에 만약 서주혁이 반태승에게 이를 알린다면, 반승제는 또 한바탕 꾸중을 듣게 될 것이다.그 말을 듣자 성혜인도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만약 반씨 집안과 서씨 집안이 소란을 피운다면, 제원은 틀림없이 뒤집힐 것이니 말이다.그녀는 반승제의 정장 한쪽을 꼭 잡고 있었다. 보아하니 약간 긴장한 모양이었다.그러자 반승제는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온시환을 노려보았다.“페니 놀라게 하지 마.”온시환은 얼굴을 찡그렸다.‘어딜 봐서 놀랄 게 있다는 거야, 이게 사실인데.'오늘 밤 반승제가 한 짓은 서씨 집안의 얼굴을 때리는 것과 다름없었다.두 집안은 모두 제원에서 이름 있는 집안이라, 아마 무리 내에는 곧 소문이 날 것이다.게다가 명희정의 일까지 더하면, 반태승 쪽에서 알게 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끌고 그대로 현장을 떠났다.그리고 온시환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눈썹을 살짝 추켜올렸다.‘왜 승제가 기억을 잃은 후에 페니를 더 의식하는 것 같지? 속박이 사라져서 더 본심을 따르는 건가? 예전과 달리 입만 산 것도 아니고 말이야.'물론 지금도 반승제는 입만 산 모습을 가끔 보여주기는 했다. 단지 오래 지속되지 않을 뿐.반승제는 성혜인을 자신의 차에 태웠다.그녀는 오늘 밤 일어난 모든 일을 되새기며 참지 못하고 물었다.“회장님께서 대표님을 찾아오지 않으실까요?”반승제는 고개를 저으며 가속페달을 밟았다.그러나 사실, 서씨 집안 쪽
성혜인은 이따가 오는 도우미에게 들킬까 봐 반승제를 밀쳐냈다.“대표님.”반승제는 성혜인을 놓아주고 그녀의 다리를 붙잡아 살펴보았다.“아까 발로 차인 데는, 정말 괜찮아?”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서수연이 세게 차기는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반승제는 한숨을 돌리더니 이내 그녀를 끌어당겨 드레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긴장한 채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도우미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한숨을 돌렸으나 여전히 무섭기는 했다.“별장 안에 아직 사람이 있어요.”그러나 반승제는 이런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밤 그녀의 차림새는 매우 예뻤는데 검은색 드레스는 성혜인의 피부를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단발머리까지 겹쳐서 그녀는 한층 더 청량하고 세련되어 보였다.하지만 이렇게 차가운 성혜인도 지금은 매우 부드럽게 변해있었다.성혜인은 참지 못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뱉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거절해도 소용없었다.성혜인의 허리를 잡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키스하면서 몸을 움직였다.그러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눈썹은 찌푸린 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핸드폰 벨 소리는 마치 그가 받지 않으면 계속 울려댈 것처럼 시끄럽게 굴었다.그러자 성혜인도 그 소리가 시끄러워 참지 못하고 그의 몸에 엎드리며 말했다.“받아요.”반승제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뒤이어 핸드폰 너머에서는 반태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30분 안에 이리로 와! 그렇지 않으면 대가는 알아서 치러야 할 거야!”비록 기억을 잃었을지라도, 반태승의 위엄은 그의 머릿속에 여전히 존재했다.반승제는 핸드폰을 버리고 성혜인에게 깊은 키스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이따가 회사로 돌아가서 해외 회의에 참석해야 해. 늦게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성혜인은 이 정도까지 왔는데도 반승제가 의외로 참을 수 있다는 것에 다소 놀랐다. 그러나 사실은 반승제가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증
반태승은 연달아 20대나 때린 다음에야 멈춰 섰다. 반승제의 등은 진작 피범벅이 되었고 흐르다 못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숨을 깊게 들이쉰 반태승은 그런 반승제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쉽게 죽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손을 흔들면서 단호하게 말했다.“밖으로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 아무도 저 녀석한테 외투를 건네지 마.”한겨울에 반승제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더구나 온몸이 다 상처투성이라,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죽을 것이다.집사는 걱정되는 마음에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반태승은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괜찮아. 저 녀석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반승제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결국 반태승을 말리지 못한 집사는 거실에서 연신 한숨만 쉬었다.밖에 눈이 펑펑 오는 것을 보고 집사는 직접 우산을 들고 나갔다. 하지만 반태승 못지않게 고집스러웠던 반승제는 이를 거절했다.“도련님, 우산은 쓰셔야 해요. 눈이 옷이 떨어졌다가 녹기라도 하면 무조건 감기 드세요.”반승제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말했다.“됐어요.”집사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들고 반승제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그는 한겨울의 날씨에 밖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다른 도우미들을 불러서 그를 데려가도록 했다.같은 시각, 반승제가 떠난 다음 성혜인은 축 처진 채로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차 안에는 아직도 조금 전의 열기가 남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느낌은 몸에 단단히 각인되었다.성혜인은 옷매무시를 정리한 다음에야 차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며 이성이 약간 돌아오자, 그녀는 이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는지 자각했다.‘집을 코앞에 두고 왜 차 안에서...’어이없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성혜인은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처음 보는 낯선 도우미였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온몸이
성혜인이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반승제는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전에도 밤샘 야근은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심인우와 마주치고 우뚝 멈춰 섰다.심인우는 부동산 양도에 관한 서류를 가져왔다. 어젯밤 반승제가 말했듯이 한 달 동안의 시간을 조건으로 성혜인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말이다.“페니 씨, 이건 대표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 서류입니다.”성혜인은 서류를 힐끗 봤다. 이는 얼마 전 경매에도 나온 적 있는 제원의 중심에 있는 집이었다.이 단지에는 집이 3채만 있었는데 한 층에 4가구, 한 가구에 60 평 정도 되었다. 이곳은 주변 환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교통도 편리해서 제원에서 살며 꼭 필요한 그런 집이었다. 만약 좋은 관리사무소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성혜인은 서류를 훑어보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자신에게 이런 집을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대표님이 정말 이 집을 저한테 주신다고 하던가요?”이 집의 가치는 2000억쯤 했다. 반승제도 한참 전에 사놓았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서 지금은 아예 살 수 없는 집이기도 했다.“네, 페니 씨는 여기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성혜인은 감히 사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심 비서님, 만약 월세로 친다면 이곳의 가격은 어느 정도 될까요?”심인우는 약간 멈칫했다. 이는 한 평생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대단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월세라면 아마... 한 달에 20억쯤 할 것 같습니다.”“그럼 제가 따로 월세를 내고 사인은 안 할게요. 집은 그럴 능력이 있을 때 돈을 주고 직접 살 거라고 대표님께 전해주세요.”반승제가 주는 집을 받기만 해도 성혜인은 엄청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의 고집에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심인우는 그저 서류를 들고 떠났다.성혜인은 이렇게 집 문제를 해결하고 회사로 나갔다. 안유결이 촬영 중인 드라마가 방송만 된다면 무조건 대박 날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그녀가 사무실에 들어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