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에 혼자 남은 다음 성혜인은 오전 내로 결재해야 하는 서류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편의점에서 대충 삼각김밥이나 사서 때울 생각이었다.이때 성혜인은 방우찬을 발견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50대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팔짱을 끼고 있었다.성혜인은 원래 두 사람과 아는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나가는 길에 여자와 부딪혀 버렸고, 여자는 휘청거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쏟았다.누가 봐도 피해자는 성혜인이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가 그녀의 옷소매를 꽉 들어 잡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말했다.“거기 서! 너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니? 남의 음료수를 쏟았으면 배상해 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옷소매를 붙잡힌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몸을 돌렸다. 고집스럽게 생긴 여자는 반쯤 쏟은 음료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왜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 음료수 배상하라니까! 너 내 아들이 누군지 알아? 내 아들은 곧 재벌가 사위가 될 사람이야! 제원의 재벌가에 몸담을 사람이라고!”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우찬은 아직 계산하느라 이쪽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여자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 과하다 싶을 정도의 메이크업을 했다. 아마 그 세대의 유행인 듯했다.성혜인은 휴지를 뽑아 들고 바지에 흐른 음료수를 닦으면서 말했다.“편의점에서 나가려고 한 저한테 음료수를 쏟은 사람은 그쪽이에요. 잘못을 따지려면 그쪽이 제 바지를 배상해 줘야 하는 것 같은데요.”여자는 손을 들어 성혜인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그러자 성혜인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말했다.“아주머니, 문명사회에 다짜고짜 손부터 올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여자는 심호흡하더니 언성을 높이면서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니? 지금 내가 가난하고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니?”방우찬은 이제야 이쪽 상황을 눈치채고 부랴부랴 다가왔다.“어머니, 무슨 일이에요?”누군가에게 사다 주는 것인 듯 방우찬은 간식거리를 손에 한가득 들고 있었다. 이곳에
성혜인의 안색은 순간 어두워졌다. 마침 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방우찬은 김정순의 허리를 감싸면서 말했다.“어머니, 도착했어요. 여기서는 사장님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저희는 하리만 만나고 바로 가는 거예요.”장하리는 성혜인의 비서이기에 그녀를 만나려면 당연히 사장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마침 휴식 시간이라 낯선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이 시선을 보내왔다.김정순은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래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방우찬의 곁에 가만히 있었다. 장하리는 두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부랴부랴 달려왔다.“오빠.”방우찬이 대답하려는 순간 장하리는 성혜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사장님, 오후에 결제하셔야 하는 서류는 사무실에 뒀어요. 결제가 끝난 다음 다시 저를 불러주시면 임원들께 알릴게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곁눈질로 어두운 안색의 김정순과 미묘한 표정의 방우찬을 힐끗 봤다.방우찬은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장하리에게 물었다.“하리야, 이 사람은...”“이분은 우리 회사 사장님이셔. 어떻게 같이 올라왔어?”성혜인이 조금 전 두 사람의 대화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회에서 홍규연과 다정하게 붙어 있던 모습까지 봤다는 생각에 방우찬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김정순도 어색한 모습으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장하리는 머리를 갸웃하면서 물었다.“사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아니에요. 이분이 바로 전에 말했던 장 비서 약혼자인가 봐요?”성혜인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장하리는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 회사에서 만났기 때문에 약간 어색하기도 했다.“네. 직원분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금방 돌려보낼게요.”“아니에요.”성혜인은 김정순을 힐끗 봤다. 그녀는 조금 전 기고만장하던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이렇게 젊은 여자가 회사 사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장하리에 대한 평가까지 들었다는 생각에 김정순은 문득 불안해졌다. 방우찬이 홍씨 집안에
장하리가 이렇게 나오니 성혜인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발견할 때까지 내버려둬야겠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끄덕였다.“이만 나가 봐요.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돼요.”장하리는 신바람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혜인은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저녁 8시, 성혜인은 드디어 퇴근하고 회사를 나섰다.반승제는 오늘도 성혜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 달간 함께 있어 달라고 하던 사람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한참이나 훑어봤다. 혹시라도 자신이 전화를 놓친 건 아닌가 해서 말이다. 하지만 반승제는 진짜 그녀에게 전화 한 통도 없었다.잠깐 고민하던 성혜인은 먼저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는 반승제가 아닌 심인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심인우 비서입니다.”“심 비서님, 대표님은요?”“대표님은 일주일간 출장 가셨습니다. 아마 다음 주에야 귀국하실 겁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떠나시기 전에 페니 씨한테 네이처 빌리지를 잘 꾸며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주가 설날이라면서요.”성혜인은 이제야 곧 있으면 설날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성휘는 세상을 뜨고, 서천에 있는 임동원 일가와는 관계를 끊고, 강민지는 집에 가야 하고... 명절이 코앞에 닥치고 나서야 성혜인은 이제 진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래서인지 성혜인은 네이처 빌리지를 꾸며 달라는 반승제의 말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설날에 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어쩐지 요즘 다들 들떠 보인다고 했더니 곧 있으면 휴가네. 다들 설날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게 있겠지?’“알았어요.”전화를 끊은 성혜인은 창밖에서 흩날리는 눈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보낸 설날다운 설날이 언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성휘에 아직 살아 있을 때 설날에 집에 돌아가면 소윤은 성혜인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핑계를 대서 학교 기숙사에 남았다.취직한 다음에
성혜인은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러자 백연서는 더욱 득의양양해서 그녀를 비웃었다.“곧 있으면 설인데, 넌 누구랑 보낼 생각이니? 집안사람을 전부 잡아먹고서 전남편인 승제를 귀찮게 할 생각은 아니지? 만약 BH그룹의 도움이 없었다면 너희 회사는 진작 망했어, 너희 가족은 더러운 기생충일 뿐이라고! 재수 없는 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백연서는 심호흡하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애를 유산하고 나서도 승제한테 들러붙으려 하다니, 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승제는 앞으로도 계속 너를 유산시킬 거야, 승제는 절대 아버지가 되지 않을 거니까!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애초에 내가 죽여버렸어야 해. 부모가 이혼한다는데 어쩌면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감정 없는 괴물 같으니라고... 하늘도 무심하지. 승제를 데려가고 승우를 돌려줬으면 좋겠건만, 흑흑흑...”백연서는 말하면 할수록 점점 더 광기에 서렸다.백연서에게 아픈 곳을 제대로 찔린 성혜인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반승제를 ‘감정 없는 괴물’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약간 속상한 감도 들었다.“반승제 씨도 친아들이 아니던가요?”‘어쩌면 친아들한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백연서는 빨갛게 된 눈으로 머리를 홱 들더니 독기 서린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뭐?!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말 한마디, 걱정 한 번 해주지 않는 놈이면 죽어야 마땅하지! 승우를 죽인 사람도 무조건 그 녀석일 거야! 안 그러면 그 녀석은 대표 자리를 꿈도 못 꿨어!”성혜인이 반승제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백연서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네 어미랑 아주 똑같아! 너 설마 승제를 좋아하니? 유산했던 일은 벌써 잊은 거야? 아이고, 혜인아. 네가 네 몸을 얼마나 천하게 굴리는지 임지연 그년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하하, 역시 내 아들은 대단해. 임지연의
설날을 하루 앞두고 반승제가 돌아올 때가 되었기에 성혜인은 부랴부랴 백화점으로 가서 벽에 걸 만한 장식품을 샀다.지난 일주일 동안 반승제는 한 번도 성혜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신입사원 모집으로 바빠서 그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루빨리 사회로 나온 대학 졸업생을 모집해서 회사의 다음 단계 계획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면접을 보는 와중에도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월세를 주면서 살기로 한 집을 간단하게 인테리어 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은 곧 있으면 설날이라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바빴다.오늘도 반승제가 곧 돌아온다는 심인우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성혜인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할 뻔했다.성혜인이 백화점에서 산 소품을 벽에 건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밖에서는 자동차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도우미들이 저녁 식사를 거의 다 차린 것을 보고 노트북을 닫았다.차에서 내린 반승제는 먼저 정원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가 기대하던 것은 대문부터 설날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최근 몇 년 동안 줄곧 해외에서 지낸 반승제는 제대로 된 설날을 보낸 적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낸 적 없었다.반승우가 죽은 다음에는 기일이 마침 설날쯤이라 김경자와 백연서는 눈물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그래서 가문에는 감히 설날 분위기를 낼 사람이 없었다.반대로 반승우가 살아 있을 때는 모두 그한테만 신경 쓰느라 반승제는 거의 부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래도 부대에서 좋은 식사 한 끼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반승제는 설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이 꾸민 것을 보니 자기 집이 유난히 썰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가슴속에 품고 있던 분노는 이 순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비밀번호를 누르고 출입문을 연 반승제는 마침 밖으로 나오려고 했던 성혜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집에서 입기 편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반승제
이튿날 아침 반승제는 아직 자고 있던 성혜인을 깨우면서 말했다.“일어나, 장 보러 가자.”새벽까지 시달리고야 잠에 든 성혜인은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았다. 비몽사몽 옷을 입고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반승제의 어깨에 기대 눈을 붙였다.반승제는 성혜인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잡더니 한 손으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머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다.잠시 후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그들의 앞에 보이는 건 굳게 닫힌 대문밖에 없었다. 심인우도 도착한 다음에야 알아차리고 말했다.“대표님, 백화점은 오전 9시가 되어야 여는 것 같습니다.”아직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백화점은 문을 열 리가 난무했다.아주 오랫동안 백화점에 오지 않았던 심인우는 미처 시간 문제를 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침부터 백화점에 온 적 없는 반승제와 성혜인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심인우의 말을 듣자마자 성혜인은 눈을 살짝 뜨더니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대표님, 그럼 저희는 돌아갔다가 다시 나올까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잖아요...”반승제는 머리를 숙여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여기서 기다리지.”성혜인은 반승제의 말투에서 약간의 유치함을 느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단 1초도 기다릴 수 없이 당장 얻고야 말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 말이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반승제의 손을 잡았다. 반승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정장 차림에 볼펜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볼펜을 내려놓고 손을 맞잡았다.“왜 그래?”반승제는 자기 손바닥 안에 꼭 들어오는 성혜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가 이토록 적극적인 것은 또 처음인지라 약간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어젯밤도 마찬가지다. 성혜인은 줄곧 아래에 깔려서 반승제가 하는 대로 전부 받아줬다. 그러다 문득 그의 등에서 언제 남은 것인지 모를 흉터가 만져지던 것이 떠오른 성혜인은 이참에 물어보려고 했다.하필이면 이때 반승제의 핸
성혜인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반승제가 더욱 편히 기댈 수 있게 일부러 어깨를 살짝 올리기도 했다. 오전 9시 백화점이 문 열 때까지 말이다.백화점이 개장한 것을 보고 성혜인은 머리를 숙여 반승제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알람 시계를 내재하기라도 한 듯이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린 것을 보고 심인우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는 오늘 짐꾼 역할로 따라온 것이었다.설날 분위기를 내고 싶기는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반승제는 장식품 하나를 볼 때 마다 머리를 돌려 성혜인에게 물었다.“이건 어때?”성혜인은 검색해 본 대로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싶으면 그냥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짐은 어느덧 두 손 가득 불어나고 말았다.어젯밤 설날 맞이 불꽃놀이를 할 시간 두 사람은 침실에 있었기에 반승제는 또 폭죽 코너에 들어서면서 물었다.“폭죽은 어때?”폭죽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승제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으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설날에 뭘 사야 하는지 이렇게 잘 알면서 어제는 왜 그랬어? 역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속이려고 했던 거지?”반승제의 마음속에는 섭섭이 노트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성혜인이 잘못한 건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사과했다.“죄송해요.”“다시는 그러지 마.”반승제는 손을 올려 성혜인의 귀를 만지작대더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에는 심인우 혼자 모든 물건을 들지 못해서 경호원까지 몇 명이나 불러왔다. 폭죽만 해도 한 트럭이나 되었으니 말이다.쇼핑이 끝난 다음 심인우는 반승제의 앞으로 가서 말했다.“대표님, 폭죽은 제조사에서 특별히 디자인한 순서가 있으니 오늘 저녁 직접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반승제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전문가를 선택할 게 뻔했다. 역시나 그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성혜인을 힐끗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저녁에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하, 그동안 괜히 잘해줬네. 지난번 선물한 집만 해도 몇백억이 되는데. 나한테 선물 한 번 준 적 없는 건 그렇다 쳐도, 감히 다른 남자한테 비싼 선물을 줘? 내가 이렇게 잘해 줘도 고마운 줄을 모르지.’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밖에서 다시 만난 다음 반승제는 성혜인이 한눈에 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저기압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백화점을 대충 둘러보다가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갔다.성혜인은 빨간색 장식품을 들고 어디에 걸어야 할지를 망설였다. 모든 열정이 순식간에 식은 반승제는 도와줄 생각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집안 장식은 역시 같이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심드렁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이 마음에 안 드는 줄 알고 도우미더러 치워달라고 했다.반승제는 도우미가 진짜 치우려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치우긴 왜 치워?”“대표님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내가 언제?”반승제는 도우미의 손에서 장식품을 건네받고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혹시라도 그가 떨어질까 봐 사다리를 꼭 잡아줬다.빨간색 장식품을 걸고 난 반승제는 머리를 숙이면서 물었다.“어때?”“예뻐요.”역시 집에 빨간색이 더해지니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성혜인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내려왔다. 그리고 지붕의 네 각에 사다리를 옮겨 다니면서 각각 하나씩 달았다.나머지 10여 개의 장식품과 정원을 번갈아 보던 성혜인은 이번에 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나머지는 나무에 걸어요.”나무에 10여 개의 장식품을 걸고 나니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아주 예뻤다. 그 모습에 반승제는 마음이 다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이때 성혜인이 똑같은 장식품들을 다시 들고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다른 한쪽에 있는 나무에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이번에는 제가 할게요.”성혜인이 사다리를 타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아래에서 붙잡고 있었다.“조심해.”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