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러자 백연서는 더욱 득의양양해서 그녀를 비웃었다.“곧 있으면 설인데, 넌 누구랑 보낼 생각이니? 집안사람을 전부 잡아먹고서 전남편인 승제를 귀찮게 할 생각은 아니지? 만약 BH그룹의 도움이 없었다면 너희 회사는 진작 망했어, 너희 가족은 더러운 기생충일 뿐이라고! 재수 없는 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백연서는 심호흡하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애를 유산하고 나서도 승제한테 들러붙으려 하다니, 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승제는 앞으로도 계속 너를 유산시킬 거야, 승제는 절대 아버지가 되지 않을 거니까!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애초에 내가 죽여버렸어야 해. 부모가 이혼한다는데 어쩌면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감정 없는 괴물 같으니라고... 하늘도 무심하지. 승제를 데려가고 승우를 돌려줬으면 좋겠건만, 흑흑흑...”백연서는 말하면 할수록 점점 더 광기에 서렸다.백연서에게 아픈 곳을 제대로 찔린 성혜인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반승제를 ‘감정 없는 괴물’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약간 속상한 감도 들었다.“반승제 씨도 친아들이 아니던가요?”‘어쩌면 친아들한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백연서는 빨갛게 된 눈으로 머리를 홱 들더니 독기 서린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뭐?!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말 한마디, 걱정 한 번 해주지 않는 놈이면 죽어야 마땅하지! 승우를 죽인 사람도 무조건 그 녀석일 거야! 안 그러면 그 녀석은 대표 자리를 꿈도 못 꿨어!”성혜인이 반승제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백연서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네 어미랑 아주 똑같아! 너 설마 승제를 좋아하니? 유산했던 일은 벌써 잊은 거야? 아이고, 혜인아. 네가 네 몸을 얼마나 천하게 굴리는지 임지연 그년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하하, 역시 내 아들은 대단해. 임지연의
설날을 하루 앞두고 반승제가 돌아올 때가 되었기에 성혜인은 부랴부랴 백화점으로 가서 벽에 걸 만한 장식품을 샀다.지난 일주일 동안 반승제는 한 번도 성혜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신입사원 모집으로 바빠서 그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루빨리 사회로 나온 대학 졸업생을 모집해서 회사의 다음 단계 계획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면접을 보는 와중에도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월세를 주면서 살기로 한 집을 간단하게 인테리어 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은 곧 있으면 설날이라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바빴다.오늘도 반승제가 곧 돌아온다는 심인우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성혜인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할 뻔했다.성혜인이 백화점에서 산 소품을 벽에 건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밖에서는 자동차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도우미들이 저녁 식사를 거의 다 차린 것을 보고 노트북을 닫았다.차에서 내린 반승제는 먼저 정원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가 기대하던 것은 대문부터 설날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최근 몇 년 동안 줄곧 해외에서 지낸 반승제는 제대로 된 설날을 보낸 적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낸 적 없었다.반승우가 죽은 다음에는 기일이 마침 설날쯤이라 김경자와 백연서는 눈물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그래서 가문에는 감히 설날 분위기를 낼 사람이 없었다.반대로 반승우가 살아 있을 때는 모두 그한테만 신경 쓰느라 반승제는 거의 부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래도 부대에서 좋은 식사 한 끼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반승제는 설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이 꾸민 것을 보니 자기 집이 유난히 썰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가슴속에 품고 있던 분노는 이 순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비밀번호를 누르고 출입문을 연 반승제는 마침 밖으로 나오려고 했던 성혜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집에서 입기 편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반승제
이튿날 아침 반승제는 아직 자고 있던 성혜인을 깨우면서 말했다.“일어나, 장 보러 가자.”새벽까지 시달리고야 잠에 든 성혜인은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았다. 비몽사몽 옷을 입고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반승제의 어깨에 기대 눈을 붙였다.반승제는 성혜인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자세를 잡더니 한 손으로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다른 한 손은 그녀의 머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 있었다.잠시 후 백화점 앞에 도착하자 그들의 앞에 보이는 건 굳게 닫힌 대문밖에 없었다. 심인우도 도착한 다음에야 알아차리고 말했다.“대표님, 백화점은 오전 9시가 되어야 여는 것 같습니다.”아직 아침 7시밖에 되지 않았으니 백화점은 문을 열 리가 난무했다.아주 오랫동안 백화점에 오지 않았던 심인우는 미처 시간 문제를 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침부터 백화점에 온 적 없는 반승제와 성혜인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심인우의 말을 듣자마자 성혜인은 눈을 살짝 뜨더니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대표님, 그럼 저희는 돌아갔다가 다시 나올까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잖아요...”반승제는 머리를 숙여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여기서 기다리지.”성혜인은 반승제의 말투에서 약간의 유치함을 느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단 1초도 기다릴 수 없이 당장 얻고야 말겠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유치함 말이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반승제의 손을 잡았다. 반승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정장 차림에 볼펜을 들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주저 없이 볼펜을 내려놓고 손을 맞잡았다.“왜 그래?”반승제는 자기 손바닥 안에 꼭 들어오는 성혜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녀가 이토록 적극적인 것은 또 처음인지라 약간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어젯밤도 마찬가지다. 성혜인은 줄곧 아래에 깔려서 반승제가 하는 대로 전부 받아줬다. 그러다 문득 그의 등에서 언제 남은 것인지 모를 흉터가 만져지던 것이 떠오른 성혜인은 이참에 물어보려고 했다.하필이면 이때 반승제의 핸
성혜인은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반승제가 더욱 편히 기댈 수 있게 일부러 어깨를 살짝 올리기도 했다. 오전 9시 백화점이 문 열 때까지 말이다.백화점이 개장한 것을 보고 성혜인은 머리를 숙여 반승제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알람 시계를 내재하기라도 한 듯이 어느새 눈을 뜨고 있었다.두 사람이 차에서 내린 것을 보고 심인우는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는 오늘 짐꾼 역할로 따라온 것이었다.설날 분위기를 내고 싶기는 하지만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반승제는 장식품 하나를 볼 때 마다 머리를 돌려 성혜인에게 물었다.“이건 어때?”성혜인은 검색해 본 대로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 싶으면 그냥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게 짐은 어느덧 두 손 가득 불어나고 말았다.어젯밤 설날 맞이 불꽃놀이를 할 시간 두 사람은 침실에 있었기에 반승제는 또 폭죽 코너에 들어서면서 물었다.“폭죽은 어때?”폭죽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래서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승제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으면서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설날에 뭘 사야 하는지 이렇게 잘 알면서 어제는 왜 그랬어? 역시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속이려고 했던 거지?”반승제의 마음속에는 섭섭이 노트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래도 성혜인이 잘못한 건 사실이었기에 그녀는 빠르게 사과했다.“죄송해요.”“다시는 그러지 마.”반승제는 손을 올려 성혜인의 귀를 만지작대더니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후에는 심인우 혼자 모든 물건을 들지 못해서 경호원까지 몇 명이나 불러왔다. 폭죽만 해도 한 트럭이나 되었으니 말이다.쇼핑이 끝난 다음 심인우는 반승제의 앞으로 가서 말했다.“대표님, 폭죽은 제조사에서 특별히 디자인한 순서가 있으니 오늘 저녁 직접 보여드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반승제처럼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전문가를 선택할 게 뻔했다. 역시나 그는 조금 멀리 떨어져 있던 성혜인을 힐끗 보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저녁에 함께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하, 그동안 괜히 잘해줬네. 지난번 선물한 집만 해도 몇백억이 되는데. 나한테 선물 한 번 준 적 없는 건 그렇다 쳐도, 감히 다른 남자한테 비싼 선물을 줘? 내가 이렇게 잘해 줘도 고마운 줄을 모르지.’반승제는 차가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밖에서 다시 만난 다음 반승제는 성혜인이 한눈에 보아낼 수 있을 정도로 저기압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백화점을 대충 둘러보다가 네이처 빌리지로 돌아갔다.성혜인은 빨간색 장식품을 들고 어디에 걸어야 할지를 망설였다. 모든 열정이 순식간에 식은 반승제는 도와줄 생각도 없이 그냥 가만히 있었다.집안 장식은 역시 같이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재미있는 법이다. 성혜인은 반승제가 심드렁해 있는 것을 보고 자신이 들고 있는 물건이 마음에 안 드는 줄 알고 도우미더러 치워달라고 했다.반승제는 도우미가 진짜 치우려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치우긴 왜 치워?”“대표님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내가 언제?”반승제는 도우미의 손에서 장식품을 건네받고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성혜인은 혹시라도 그가 떨어질까 봐 사다리를 꼭 잡아줬다.빨간색 장식품을 걸고 난 반승제는 머리를 숙이면서 물었다.“어때?”“예뻐요.”역시 집에 빨간색이 더해지니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성혜인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내려왔다. 그리고 지붕의 네 각에 사다리를 옮겨 다니면서 각각 하나씩 달았다.나머지 10여 개의 장식품과 정원을 번갈아 보던 성혜인은 이번에 나무를 가리키면서 말했다.“나머지는 나무에 걸어요.”나무에 10여 개의 장식품을 걸고 나니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아주 예뻤다. 그 모습에 반승제는 마음이 다 따듯해지는 것 같았다.이때 성혜인이 똑같은 장식품들을 다시 들고 왔다. 그리고 두 사람은 동시에 다른 한쪽에 있는 나무에 시선을 돌렸다.“대표님, 이번에는 제가 할게요.”성혜인이 사다리를 타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아래에서 붙잡고 있었다.“조심해.”마지
반승제는 성혜인에게 머리핀을 꽂아준 다음 입가에 짧게 뽀뽀도 했다.“선물이야.”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못한 성혜인은 머리를 숙였다. 반승제는 몸을 일으켰다가 시간이 두 시간이나 지난 것을 발견하고는 말했다.“난 할아버지를 만났다가 집에 다녀와야겠어. 넌 여기에 얌전히 있다가 7시쯤에 출발해.”“네.”성혜인은 발그레한 얼굴로 소파에 앉았다. 마치 달콤한 케이크와도 같은 모습에 반승제는 문득 떠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입에서 듣기 좋은 소리가 날 때까지 괴롭혀주고 싶기도 했다.하지만 반승제는 결국 자제하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래도 아쉬움을 버릴 수 없는지 몇 번이나 머리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지각하지 마, 우리는 7시 반에 만나기로 한 거야.”“알았어요.”반승제는 미소를 짓더니 이제야 시름을 놓고 멀어져갔다.반태승을 만나러 본가에 갔을 때 그는 반승제에게 문도 열어주지 않았다. 두터운 문을 사이 두고 그의 목소리는 유유히 들려왔다.“너만 속을 썩이지 않아도 내가 장수할 거다!”반승제는 어쩔 수 없이 선물을 내려놓고 반기훈을 데리러 갔다. 그는 오늘도 다른 곳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반기훈과 만나고 그가 차에 올라탄 다음에도 딱히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그리고 반기훈은 집에 거의 도착할 때가 되어서야 물었다.“승제야, 머리는 좀 어떠니?”“아직 회복 중이에요.”반기훈은 한숨을 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요즘 밀입국하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더구나. 아직 무슨 목적이 있는지는 모르니, 너도 조심하렴.”반승제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또다시 어색해졌다.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반승제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연서를 발견했다. 오늘을 위해 잔뜩 꾸민 그녀는 반승제를 보는 체도 하지 않고 반기훈을 향해 달려갔다.“여보.”반기훈은 짜증 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백연서는 아직도 기를 쓰고 이혼 합의서에 사인하지 않고 있었
반기훈이 백연서의 뺨을 때린 순간 거실에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어차피 반기훈에게 맞는 것도 처음이 아니었기에 백연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울기 시작했다.반승제는 담담하게 소파에 앉아서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긴 반승제가 어릴 적부터 만나기만 하면 싸우던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려 아직 따듯할 때 한 모금 마신 반승제는 곁에 서 있던 도우미에게 물었다.“식사는 언제쯤 할 수 있어요?”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태연한 아들을 보고 백연서의 울음소리는 더 쩌렁쩌렁해졌다. 하지만 도우미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울어대는 그녀가 반기훈은 창피하기만 했다.“울 거면 나가서 울어. 식사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백연서는 바닥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반기훈은 한숨을 쉬면서 반승제를 바라봤다. 약간 미안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승제가 머리를 다친 다음에야 그는 자신이 반승제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알아차렸다.“승제야.”반기훈이 입을 열자 반승제는 찻잔을 내려놓으면서 먼저 말했다.“무슨 일 있으면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반기훈은 원래 사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승제가 얘기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보고서는 금방 다시 입을 다물었다.주방에서는 아직도 백연서의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머리가 울렸다. 그래서 반기훈은 아예 외투를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난 이만 돌아가야겠다.”집에서 밥 먹을 바에는 부하직원들과 먹는 것이 훨씬 편하겠다고 반기훈은 생각했다. 이때 백연서가 그의 말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 나왔다.“여보, 가지 마요. 나 이젠 안 울게요. 오늘만이라도 같이 식사해요, 그래도 설날이잖아요.”백연서는 결국 타협을 선택했다. 그녀는 반기훈과 싸우는 것보다도 무시당하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기훈의 눈빛에는 여전히 증오밖에 없었다.그래도 백연서의 말에 약간 설득이 된 듯 반기훈은 무의식적으로 반
차는 두 시간을 거쳐 반기훈의 직장인 군사 지역에 도착했다. 다섯 걸음에 한 명씩 보초 서고 있는 이곳은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반승제의 차도 반기훈이 창문을 내려 얼굴을 보여준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반승제는 귀찮게 검사받지 않도록 그냥 반기훈에게 걸어서 들어가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때 반기훈이 먼저 예상 밖의 제안을 했다.“내 사무실에서 차라도 한잔하자.”반승제는 어쩔 수 없이 반기훈을 따라 그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의 책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는 가족사진이 놓여있었다. 백연서도 함께 있는 그들의 가족사진 말이다.가족사진을 찍은 기억이 전혀 없었던 반승제는 액자를 들어 올려 유심히 바라봤다. 반기훈은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보고 좋으면서도 아닌 척 표정 관리하면서 아예 앨범을 가져왔다.“네 사진이라면 전부 여기에 있어. 부대에 있을 적의 사진도 있고, 아버지한테 벌 받고 쫓겨났다가 자칫 쓰러질 뻔했을 때의 사진도 있지.”반승제는 물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벌 받는 듯 무릎 꿇고 있는 사진을 보니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부대에서 지내던 기억도 마치 꿈처럼 희미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반기훈은 책상 앞에 앉아서 반승제가 앨범을 펼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반승제는 반승우의 사진을 발견하고 손을 흠칫 떨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의 첫인상은 아주 부드러웠다.반승제가 차가운 겨울바람이라면 반승우는 따듯한 봄바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사람 마음을 살 줄 알았던 반승우는 줄곧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아왔다.이때 반기훈의 비서는 커피 두 잔을 타서 한 잔은 반기훈의 앞에, 다른 한 잔은 반승제의 앞에 내려놓았다.“너랑 승우는 사이가 아주 좋았어. 네가 부대에 있을 때도 자주 면회 하러 갔을 정도로.”“정말이에요?”반승제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그래, 승우는 너를 아주 소중한 존재로 여겼던 기억이 나는구나.”반승제는 느릿느릿 앨범을 끝까지 살펴봤다. 마지막은
경찰서에서 나온 온시환은 마침내 밖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사실 그는 공지민을 다시 찾아가 그녀한테 복수를 그만두라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 복수에 집착했다가 염정아와 염정아 동생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말해주고 싶었다.하지만 공지민이 건드린 건 연씨 가문이기에 그녀의 미래 운명은 염정아보다 훨씬 더 비참할 것이었다.온시환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고 너무 오랫동안 경찰서 앞에 서 있다 보니 허벅지가 마비될 정도였다.과거의 그는 상류층에 속해 있어서 인간성의 복잡성과 인정의 차고 따뜻함을 깊이 느낀 적이 없었다. 염정아의 일을 통해 그는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꼭 설명이 필요한 건 아니고 당사자가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느꼈다.다만 온시환은 이제 정말 지쳤고 그는 그저 공지민이랑 오랫동안 함께 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공지민은 마음속에 너무 많은 것들을 품고 있었고 오랫동안 원한으로 가득 차 있었다.공지민도 TV 뉴스를 통해 교통사고가 난 사람이 염정아의 동생이란 걸 알았다. 그녀는 매우 걱정스러웠고 염정아의 동생이 왜 제국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그녀는 서둘러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었고 바람 쐬러 나가겠다고 전했다.연승혁은 그녀가 나가면 온시환의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봐 걱정됐고 그로 인해 지금 진행 중인 게임도 끝나버려서 그한테 불리할까 봐 단박에 거절했다.하지만 몇 시간 후 공지민은 울먹이면서 또다시 연승혁한테 전화를 걸었다.“고등학교 때 친구가 방금 뉴스에 나왔어요. 기억이 조금 돌아온 것 같아요. 흑흑, 걔가 사람을 죽였대요. 오빠, 걔 만나러 가야 돼요. 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걔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요?”염정아의 동생이 죽은 다음 염정아가 원아정을 죽인 걸 봐서 염정아 동생의 죽음이 원아정과 관련이 있는 게 분명했고 염정아가 원아정한테 복수하려고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이 높았다.공지민의 울음소리를 들은 연승혁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바로 동의하지 않고 사람을 시켜서 오늘의 뉴스를 조사해
염정아는 주삿바늘을 뽑아버리고 병실 문을 나섰다. 밖에는 두 명의 경호원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온시환의 사람들이었고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왔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보호 받을 필요가 없었다.경호원이 그녀에게 물었다.“염정아 씨, 어디 나가시려고요?”“여기가 너무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내려가려고요.”경호원들은 그녀를 보호하러 온 것이지 감시하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하지만 염정아는 진짜 바람 쐬러 나간 게 아니라 병원에서 나온 후 바로 원아정을 찾아 나섰다. 동생이 죽은 것에 대한 증오와 원아정을 찾아내서 무조건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복수의 불꽃이 가슴속에 계속해서 타올랐다.염정아는 30분 동안 거리를 헤매다가 하늘나라에 있는 동생이 도운 건지 정말 원아정을 찾아냈다.오늘의 원아정은 더 이상 부잣집 딸의 옷차림이 아닌 수수한 옷차림에 머리는 부스스하고 지저분한 모습이었지만 염정아는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한눈에 알아봤다. 그녀는 백화점 밖에서 오고 가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람들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원아정을 못 찾을 만했다. 자신의 체면을 그렇게 중히 여기던 원아정이 거지의 모습으로 가장 번화한 상권에 나타날 줄은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염정아는 멀지 않은 곳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다가 칼을 사 들고 원아정을 향해 걸어갔다.원아정은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감지 못했고 마음속으로는 연승혁의 부하들이 평생 자신을 찾지 못할 거라고 기뻐하고 있었다.하지만 곧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외쳤다.“원아정.”아직 반응하지 못한 원아정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하자 누군가가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꽂았다.피가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염정아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칼을 뽑았다가 분노에 휩싸여 다시 원아정의 몸을 향해 찔렀다.원아정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언제 발각되었고 또 왜 이토록 처참하게 죽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도착했고 당시 CCTV를 확인한 결과, 남성 피해자가 소형차에 치인 뒤 뒤따라오던 트럭이 남성을 깔아뭉갰고 남성이 트럭 차대에 끼어서 몇 킬로미터를 끌려가다가 트럭 뒤를 따르던 차량이 핏자국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경적을 울려 트럭 운전기사를 멈추게 했다.트럭 운전기사는 너무 놀라서 머리가 멍해졌고 계속 자신이 사람을 쳤다고 여겼는데 CCTV를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주요 책임은 아니었지만 그도 연대 책임을 져야 했다.곧바로 누군가가 사망자의 가족한테 연락하려고 했지만 사망자의 몸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의 가족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경찰도 난감한 상황에 빠져 사망자의 교통사고 보도를 TV로 방송하고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을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같은 시각 염정아는 계속해서 동생을 찾고 있었고 흐려진 하늘을 바라보며 그녀는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고 두려웠다.두 시간 후 온시환의 부하가 마침내 소식을 전해왔는데 바로 차에 치여 사망한 남자의 가족을 찾는 뉴스 보도였다.익숙한 옷을 본 염정아는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옷은 동생의 옷이었고 그녀가 사준 거였다.“어디에 있어요? 동생 만나러 가야 해요! 꼭 가야 해요!”그녀는 심한 충격에 기절할뻔했지만, 동생의 곁으로 갈 때까지 이 악물고 버텼다.시신은 병원 영안실로 옮겼는데 머리 빼고는 온전한 데 하나도 없었고 염정아는 시신을 보자마자 기절해 버렸다.온시환은 깜짝 놀라서 그녀를 급히 응급실로 데려갔다.염정아는 아주 긴 꿈을 꿨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괴롭힘을 당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자 부모님은 그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뿐이었다.그녀가 슬픔에 잠겨 울고 있을 때 바보 동생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서 막대 사탕을 건네줬다.막대 사탕은 동생이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었고 그때 그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불렀다.“누나.”염정아는 동생을 미워했고 항상 동생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
사실 원아정은 염정아를 잊고 있었는데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꺼내자 그녀에 대한 기억이 조금 떠오르긴 했다.공지민이 나타나기 전에 확실히 다른 사람을 괴롭힌 적 있긴 했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염정아는 심호흡하고 말했다.“나랑 지민 언니는 동병상련의 관계일뿐이고 내 집안 사정이 어려울 때 지민 언니가 도와주고 돈도 줬어. 내가 제국에서 일하고 싶다고 해서 지민 언니가 날 데려온 거고 날 숨기려고 한 게 아니야. 난 단지 집에서 수공업을 하고 있었을 뿐이야.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대학도 못 가고 하니 학력도 없고 인맥도 없어서 돈을 벌려면 할 수 있는 게 수공업뿐이었으니까.”원아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지만 그 외에는 염정아가 또 무슨 쓸모가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염정아의 집안은 너무 평범했고 심지어 부모님도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의 곁에는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다섯 명의 자녀뿐이었다.원아정의 눈에는 혐오감이 감돌았고 특히 길가에 불쌍하게 웅크리고 있는 염정아의동생을 봤을 때 혐오감이 더욱 깊어졌다.하필이면 이때 염정아의 동생이 일어서면서 원아정한테 물었다.“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죠?”그는 더 이상 제국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가장 중요한 건 누나를 화나게 했으니 혹시나 누나가 평생 그를 안볼까 봐서 걱정이었다.동생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억울함이 가득했고 빨리 집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고 싶었다.원아정은 자신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면서 고생했는데 결국 아무런 정보도 얻지 못하자 염정아의 동생을 순순히 보내드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끊임없는 차량이 왔다 갔다 하는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저기 안으로 들어가서 걸어 다니다 보면 누군가 널 집으로 데려다줄지도 몰라. 저거 봐, 차가 저렇게 많은데 너희 집 방향으로 가는 차가 당연히 있지 않겠어? 널 집까지 데려다줄 사람도 무조건 저기 있을 거야.”염정아 동생의 눈에는 순간 희망의 빛이 반짝였고 그녀의 말을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