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이따가 오는 도우미에게 들킬까 봐 반승제를 밀쳐냈다.“대표님.”반승제는 성혜인을 놓아주고 그녀의 다리를 붙잡아 살펴보았다.“아까 발로 차인 데는, 정말 괜찮아?”성혜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서수연이 세게 차기는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반승제는 한숨을 돌리더니 이내 그녀를 끌어당겨 드레스를 걷어 올리기 시작했다.성혜인은 그의 다리 위에 앉아 긴장한 채 정원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고는 도우미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 한숨을 돌렸으나 여전히 무섭기는 했다.“별장 안에 아직 사람이 있어요.”그러나 반승제는 이런 것을 상관하지 않았다. 오늘 밤 그녀의 차림새는 매우 예뻤는데 검은색 드레스는 성혜인의 피부를 더욱 하얗게 돋보이게 했다. 게다가 단발머리까지 겹쳐서 그녀는 한층 더 청량하고 세련되어 보였다.하지만 이렇게 차가운 성혜인도 지금은 매우 부드럽게 변해있었다.성혜인은 참지 못하고 가느다란 소리를 내뱉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거절해도 소용없었다.성혜인의 허리를 잡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키스하면서 몸을 움직였다.그러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눈썹은 찌푸린 채 신경 쓰지 않았다.하지만 핸드폰 벨 소리는 마치 그가 받지 않으면 계속 울려댈 것처럼 시끄럽게 굴었다.그러자 성혜인도 그 소리가 시끄러워 참지 못하고 그의 몸에 엎드리며 말했다.“받아요.”반승제는 그녀의 등을 두드리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뒤이어 핸드폰 너머에서는 반태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30분 안에 이리로 와! 그렇지 않으면 대가는 알아서 치러야 할 거야!”비록 기억을 잃었을지라도, 반태승의 위엄은 그의 머릿속에 여전히 존재했다.반승제는 핸드폰을 버리고 성혜인에게 깊은 키스를 하더니 입을 열었다.“이따가 회사로 돌아가서 해외 회의에 참석해야 해. 늦게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성혜인은 이 정도까지 왔는데도 반승제가 의외로 참을 수 있다는 것에 다소 놀랐다. 그러나 사실은 반승제가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을 증
반태승은 연달아 20대나 때린 다음에야 멈춰 섰다. 반승제의 등은 진작 피범벅이 되었고 흐르다 못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기까지 했다.숨을 깊게 들이쉰 반태승은 그런 반승제가 꼴도 보기 싫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쉽게 죽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손을 흔들면서 단호하게 말했다.“밖으로 나가서 무릎 꿇고 있어. 아무도 저 녀석한테 외투를 건네지 마.”한겨울에 반승제는 얇은 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더구나 온몸이 다 상처투성이라, 만약 평범한 사람이라면 무조건 죽을 것이다.집사는 걱정되는 마음에 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반태승은 뜻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었다.“괜찮아. 저 녀석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반승제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가 무릎을 꿇었다. 결국 반태승을 말리지 못한 집사는 거실에서 연신 한숨만 쉬었다.밖에 눈이 펑펑 오는 것을 보고 집사는 직접 우산을 들고 나갔다. 하지만 반태승 못지않게 고집스러웠던 반승제는 이를 거절했다.“도련님, 우산은 쓰셔야 해요. 눈이 옷이 떨어졌다가 녹기라도 하면 무조건 감기 드세요.”반승제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말했다.“됐어요.”집사는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들고 반승제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그는 한겨울의 날씨에 밖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다른 도우미들을 불러서 그를 데려가도록 했다.같은 시각, 반승제가 떠난 다음 성혜인은 축 처진 채로 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차 안에는 아직도 조금 전의 열기가 남아 있었고, 잊을 수 없는 느낌은 몸에 단단히 각인되었다.성혜인은 옷매무시를 정리한 다음에야 차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가며 이성이 약간 돌아오자, 그녀는 이제야 자신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는지 자각했다.‘집을 코앞에 두고 왜 차 안에서...’어이없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성혜인은 집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처음 보는 낯선 도우미였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고 침실로 들어갔다. 온몸이
성혜인이 잠에서 깨어난 다음에도 반승제는 자리에 없었다. 하지만 전에도 밤샘 야근은 자주 있었던 일이기에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떠나려고 했다. 그러다가 심인우와 마주치고 우뚝 멈춰 섰다.심인우는 부동산 양도에 관한 서류를 가져왔다. 어젯밤 반승제가 말했듯이 한 달 동안의 시간을 조건으로 성혜인이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말이다.“페니 씨, 이건 대표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 서류입니다.”성혜인은 서류를 힐끗 봤다. 이는 얼마 전 경매에도 나온 적 있는 제원의 중심에 있는 집이었다.이 단지에는 집이 3채만 있었는데 한 층에 4가구, 한 가구에 60 평 정도 되었다. 이곳은 주변 환경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교통도 편리해서 제원에서 살며 꼭 필요한 그런 집이었다. 만약 좋은 관리사무소까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성혜인은 서류를 훑어보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반승제가 자신에게 이런 집을 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대표님이 정말 이 집을 저한테 주신다고 하던가요?”이 집의 가치는 2000억쯤 했다. 반승제도 한참 전에 사놓았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서 지금은 아예 살 수 없는 집이기도 했다.“네, 페니 씨는 여기에 사인만 하면 됩니다.”성혜인은 감히 사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심 비서님, 만약 월세로 친다면 이곳의 가격은 어느 정도 될까요?”심인우는 약간 멈칫했다. 이는 한 평생 편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대단한 선물이었기 때문이다.“월세라면 아마... 한 달에 20억쯤 할 것 같습니다.”“그럼 제가 따로 월세를 내고 사인은 안 할게요. 집은 그럴 능력이 있을 때 돈을 주고 직접 살 거라고 대표님께 전해주세요.”반승제가 주는 집을 받기만 해도 성혜인은 엄청난 부담을 덜 수 있었다. 하지만 성혜인의 고집에 마땅히 할 말이 없었던 심인우는 그저 서류를 들고 떠났다.성혜인은 이렇게 집 문제를 해결하고 회사로 나갔다. 안유결이 촬영 중인 드라마가 방송만 된다면 무조건 대박 날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그녀가 사무실에 들어
사무실에 혼자 남은 다음 성혜인은 오전 내로 결재해야 하는 서류들을 확인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는 편의점에서 대충 삼각김밥이나 사서 때울 생각이었다.이때 성혜인은 방우찬을 발견하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50대로 보이는 여자와 함께 팔짱을 끼고 있었다.성혜인은 원래 두 사람과 아는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필이면 나가는 길에 여자와 부딪혀 버렸고, 여자는 휘청거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쏟았다.누가 봐도 피해자는 성혜인이었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여자가 그녀의 옷소매를 꽉 들어 잡더니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말했다.“거기 서! 너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니? 남의 음료수를 쏟았으면 배상해 주고 가야 할 거 아니야?!”옷소매를 붙잡힌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몸을 돌렸다. 고집스럽게 생긴 여자는 반쯤 쏟은 음료수를 보여주면서 말했다.“왜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 음료수 배상하라니까! 너 내 아들이 누군지 알아? 내 아들은 곧 재벌가 사위가 될 사람이야! 제원의 재벌가에 몸담을 사람이라고!”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방우찬은 아직 계산하느라 이쪽 상황을 모르는 눈치였다.여자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 과하다 싶을 정도의 메이크업을 했다. 아마 그 세대의 유행인 듯했다.성혜인은 휴지를 뽑아 들고 바지에 흐른 음료수를 닦으면서 말했다.“편의점에서 나가려고 한 저한테 음료수를 쏟은 사람은 그쪽이에요. 잘못을 따지려면 그쪽이 제 바지를 배상해 줘야 하는 것 같은데요.”여자는 손을 들어 성혜인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그러자 성혜인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면서 말했다.“아주머니, 문명사회에 다짜고짜 손부터 올리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여자는 심호흡하더니 언성을 높이면서 말했다.“그게 무슨 뜻이니? 지금 내가 가난하고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니?”방우찬은 이제야 이쪽 상황을 눈치채고 부랴부랴 다가왔다.“어머니, 무슨 일이에요?”누군가에게 사다 주는 것인 듯 방우찬은 간식거리를 손에 한가득 들고 있었다. 이곳에
성혜인의 안색은 순간 어두워졌다. 마침 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방우찬은 김정순의 허리를 감싸면서 말했다.“어머니, 도착했어요. 여기서는 사장님과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저희는 하리만 만나고 바로 가는 거예요.”장하리는 성혜인의 비서이기에 그녀를 만나려면 당연히 사장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마침 휴식 시간이라 낯선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보고 여러 사람이 시선을 보내왔다.김정순은 작은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기는 했지만 그래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방우찬의 곁에 가만히 있었다. 장하리는 두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부랴부랴 달려왔다.“오빠.”방우찬이 대답하려는 순간 장하리는 성혜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사장님, 오후에 결제하셔야 하는 서류는 사무실에 뒀어요. 결제가 끝난 다음 다시 저를 불러주시면 임원들께 알릴게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곁눈질로 어두운 안색의 김정순과 미묘한 표정의 방우찬을 힐끗 봤다.방우찬은 불안한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장하리에게 물었다.“하리야, 이 사람은...”“이분은 우리 회사 사장님이셔. 어떻게 같이 올라왔어?”성혜인이 조금 전 두 사람의 대화뿐만 아니라, 미술 전시회에서 홍규연과 다정하게 붙어 있던 모습까지 봤다는 생각에 방우찬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김정순도 어색한 모습으로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분위기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장하리는 머리를 갸웃하면서 물었다.“사장님,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아니에요. 이분이 바로 전에 말했던 장 비서 약혼자인가 봐요?”성혜인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장하리는 머리를 끄덕였다. 처음 회사에서 만났기 때문에 약간 어색하기도 했다.“네. 직원분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금방 돌려보낼게요.”“아니에요.”성혜인은 김정순을 힐끗 봤다. 그녀는 조금 전 기고만장하던 모습은 어디에 갔는지 머리를 푹 숙이고 있었다.이렇게 젊은 여자가 회사 사장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장하리에 대한 평가까지 들었다는 생각에 김정순은 문득 불안해졌다. 방우찬이 홍씨 집안에
장하리가 이렇게 나오니 성혜인도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직접 발견할 때까지 내버려둬야겠다고 생각하고 머리를 끄덕였다.“이만 나가 봐요. 오늘은 일찍 퇴근해도 돼요.”장하리는 신바람이 나서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성혜인은 무거운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저녁 8시, 성혜인은 드디어 퇴근하고 회사를 나섰다.반승제는 오늘도 성혜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한 달간 함께 있어 달라고 하던 사람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한참이나 훑어봤다. 혹시라도 자신이 전화를 놓친 건 아닌가 해서 말이다. 하지만 반승제는 진짜 그녀에게 전화 한 통도 없었다.잠깐 고민하던 성혜인은 먼저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 건너편에서는 반승제가 아닌 심인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심인우 비서입니다.”“심 비서님, 대표님은요?”“대표님은 일주일간 출장 가셨습니다. 아마 다음 주에야 귀국하실 겁니다. 그리고 대표님이 떠나시기 전에 페니 씨한테 네이처 빌리지를 잘 꾸며달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주가 설날이라면서요.”성혜인은 이제야 곧 있으면 설날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는 것도 말이다.성휘는 세상을 뜨고, 서천에 있는 임동원 일가와는 관계를 끊고, 강민지는 집에 가야 하고... 명절이 코앞에 닥치고 나서야 성혜인은 이제 진짜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래서인지 성혜인은 네이처 빌리지를 꾸며 달라는 반승제의 말이 따듯하게 느껴졌다. 심지어 설날에 할 일이 생겨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어쩐지 요즘 다들 들떠 보인다고 했더니 곧 있으면 휴가네. 다들 설날에 먹을 음식을 준비하게 있겠지?’“알았어요.”전화를 끊은 성혜인은 창밖에서 흩날리는 눈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보낸 설날다운 설날이 언젠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성휘에 아직 살아 있을 때 설날에 집에 돌아가면 소윤은 성혜인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핑계를 대서 학교 기숙사에 남았다.취직한 다음에
성혜인은 몸이 순간 굳어버렸다. 그러자 백연서는 더욱 득의양양해서 그녀를 비웃었다.“곧 있으면 설인데, 넌 누구랑 보낼 생각이니? 집안사람을 전부 잡아먹고서 전남편인 승제를 귀찮게 할 생각은 아니지? 만약 BH그룹의 도움이 없었다면 너희 회사는 진작 망했어, 너희 가족은 더러운 기생충일 뿐이라고! 재수 없는 년,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백연서는 심호흡하더니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애를 유산하고 나서도 승제한테 들러붙으려 하다니, 너 정말 단단히 미쳤구나? 승제는 앞으로도 계속 너를 유산시킬 거야, 승제는 절대 아버지가 되지 않을 거니까! 그 애는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애초에 내가 죽여버렸어야 해. 부모가 이혼한다는데 어쩌면 가만히 있을 수가 있니? 감정 없는 괴물 같으니라고... 하늘도 무심하지. 승제를 데려가고 승우를 돌려줬으면 좋겠건만, 흑흑흑...”백연서는 말하면 할수록 점점 더 광기에 서렸다.백연서에게 아픈 곳을 제대로 찔린 성혜인은 심장이 너무 아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따라 반승제를 ‘감정 없는 괴물’이라고 말하는 걸 들으니 약간 속상한 감도 들었다.“반승제 씨도 친아들이 아니던가요?”‘어쩌면 친아들한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지...?’백연서는 빨갛게 된 눈으로 머리를 홱 들더니 독기 서린 말투로 말했다.“그래서, 뭐?! 내가 집안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말 한마디, 걱정 한 번 해주지 않는 놈이면 죽어야 마땅하지! 승우를 죽인 사람도 무조건 그 녀석일 거야! 안 그러면 그 녀석은 대표 자리를 꿈도 못 꿨어!”성혜인이 반승제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보고 백연서는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으면서 말했다.“네가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구나! 네 어미랑 아주 똑같아! 너 설마 승제를 좋아하니? 유산했던 일은 벌써 잊은 거야? 아이고, 혜인아. 네가 네 몸을 얼마나 천하게 굴리는지 임지연 그년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하하, 역시 내 아들은 대단해. 임지연의
설날을 하루 앞두고 반승제가 돌아올 때가 되었기에 성혜인은 부랴부랴 백화점으로 가서 벽에 걸 만한 장식품을 샀다.지난 일주일 동안 반승제는 한 번도 성혜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신입사원 모집으로 바빠서 그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하루빨리 사회로 나온 대학 졸업생을 모집해서 회사의 다음 단계 계획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면접을 보는 와중에도 성혜인은 반승제에게 월세를 주면서 살기로 한 집을 간단하게 인테리어 해야 했다. 그래서 지난 일주일은 곧 있으면 설날이라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바빴다.오늘도 반승제가 곧 돌아온다는 심인우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성혜인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할 뻔했다.성혜인이 백화점에서 산 소품을 벽에 건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밖에서는 자동차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도우미들이 저녁 식사를 거의 다 차린 것을 보고 노트북을 닫았다.차에서 내린 반승제는 먼저 정원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그가 기대하던 것은 대문부터 설날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이었는데도 말이다.최근 몇 년 동안 줄곧 해외에서 지낸 반승제는 제대로 된 설날을 보낸 적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보낸 적 없었다.반승우가 죽은 다음에는 기일이 마침 설날쯤이라 김경자와 백연서는 눈물을 쏟아내기에 바빴다. 그래서 가문에는 감히 설날 분위기를 낼 사람이 없었다.반대로 반승우가 살아 있을 때는 모두 그한테만 신경 쓰느라 반승제는 거의 부대에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래도 부대에서 좋은 식사 한 끼 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만족스러웠다.반승제는 설날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이 꾸민 것을 보니 자기 집이 유난히 썰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가슴속에 품고 있던 분노는 이 순간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비밀번호를 누르고 출입문을 연 반승제는 마침 밖으로 나오려고 했던 성혜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집에서 입기 편한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반승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