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의 앞에 앉아 있었던 서주혁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이젠 보기만 해도 반응이 오는 거야?”반승제는 언제부턴가 꽉 잡고 있던 주먹을 풀면서 열기를 식히려는 듯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머리를 들어 샹들리에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눈가는 갑작스러운 열기로 인해 아직도 발그레했다.‘술맛이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약을 탔는 줄 알았겠군...’...같은 시각.성혜인은 머리를 숙인 채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페니라고 해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대해줘요.”여자는 안경 너머 성혜인을 힐끗 보더니 곧바로 다시 머리를 숙였다.이때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와서 주문을 기다렸다. 성혜인은 메뉴판을 여자 앞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예진 씨 먼저 먹고 싶은 걸 골라요.”박예진은 겨우 머리를 들어 메뉴판을 힐끗 봤다. 가장 싼 축에 속하는 세트 메뉴도 120만 원씩 하는 것을 보고는 놀란 나머지 속눈썹이 다 파르르 떨렸다.“페니 님, 저희... 다른 식당에 가면 안 될까요?”박예진은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안경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그 찰나의 순간에 성혜인은 박예진의 목에서 졸린 적 있는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본 척 무덤덤하게 말했다.“오늘은 제가 사는 자리이니 걱정하지 말고 앉아요. 우리 아직 대본 얘기도 해야 하잖아요.”성혜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약간 진정된 듯 박예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입술은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가격에 적지 않게 놀란 모습이었다.성혜인은 오늘 반승제의 곁에서 함께 봤던 대본을 떠올리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저 오늘 배 작가님 댁에 갔었어요. 그곳에서 작가님의 대본을 보게 되었는데 엄청 재미있더라고요. 주인공이 피치 못할 운명으로 살인범이 된 내용인데 BH그룹의 눈에 들어서 스릴러 드라마로 만들어질 거래요. 모든 회차가 다 재미있어서 성공은 떼놓은 당상인 것 같던데요.”대본 얘기가 나오자
낮에 성혜인을 천 리 밖으로 내보낼 것처럼 굴던 반승제가,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전부 내쫓고 둘만의 자리를 만들었다.성혜인은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지 못했지만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자리에 앉은 후, 반승제가 그녀에게 물었다.“서주혁이 너 결혼했다던데?”반승제의 친구들은 그가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성혜인이 그의 아내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서주혁은 여전히 페니를 유부녀로 알고 있었다.“이혼했습니다.”그러자 반승제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왜 이혼했는데?”“이건 대표님과 상관없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끝마친 성혜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반승제의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녀의 얼굴은 마치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이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설 수 있는 거야?!’반승제도 전혀 숨기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성혜인을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말했다.“너를 비서로 삼으면서, 내가 아무런 조건도 대지 않았나?”성혜인은 흠칫 온몸이 굳어버렸다. 조건이 있었겠지 왜 없었겠는가.침대에 오르지 않는다고 했을 뿐, 반승제가 키스하려 들면 성혜인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는 철저한 사업가라,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비서 훈련도 받지 않았는데... 예전의 내가 그냥 곁에 남겨뒀다고? 무슨 계략이 있었던 게 아닐까?’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푹 내렸다. 본능적으로 끓어오른 욕정에 눈가는 어느새 새빨개졌다.“비서 일은 얼마나 했어?”성혜인의 침묵은 이미 그에게 답을 준 것과 같았다. 분명히 조건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 조건이 남녀 사이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는걸.단지 그녀가 직접 말하기 어려웠을 뿐이다.‘역시 몸으로 이 자리를 얻은 거였네.’“아직도 한 달 반 정도 남았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승제는 그녀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겨 안았다.불편했던 성혜인이 곧바로 일어나려 하자 반승제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안 해봤다면 배워. 지금은 이 방법밖엔 없으니까.”이런 방면에 있어 조심스러운 성혜인에 비하면, 반승제는 상당히 개방적인 편에 속했다.성혜인은 눈을 감더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얼버무리며 말했다.“여보, 나 지금 너무 좋아.”반승제는 흠칫 몸이 굳어버리더니, 시선을 내려 그녀를 쳐다보았다.‘미친! 어떻게 내 비서가 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군!’심지어 그는 욕을 뱉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참아내고 그녀의 뒤통수를 세게 잡아 긴 키스를 했다.모든 것이 끝난 후, 그는 한편에 있는 티슈를 뽑아 성혜인의 손가락을 닦아주었다.차 창문이 조금 열리자 내부와 바깥공기가 서로 뒤섞였다.성혜인은 감히 반승제를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틈 사이로 바깥의 찬 바람이 불어와 더운 기운이 조금 가시는 듯 했다.반승제는 일단 보통 티슈로 깨끗이 닦은 다음, 알코올 티슈로 손가락 하나하나를 닦았다.마치 값비싼 예술품을 닦듯이 말이다.분명하지 않았음에도, 성혜인은 이런 모호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었다.그녀가 자신의 손가락을 거두려고 하는데, 때마침 반승제가 직접 놓아주었다.‘참 재미있는 비서야.’반승제는 한 번도 여자에게 이렇게 함으로써 큰 만족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다.하지만 그녀가 결혼했던 몸이라는 게 떠오르자, 그는 조금 혐오감이 들기도 했다.반승제는 심한 결벽증이 있지 않은가.원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조롱하는 말을 몇 마디 던져주고 싶었다. 예를 들면 “능숙하네, 예전에 많이 해봤나 봐?” 같은 말을 말이다.그러나 성혜인은 고개를 틀어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긴 속눈썹, 피를 떨군 듯 빨개진 얼굴, 그녀는 부드러운 게 한입 베어 물면 마치 과일처럼 달 것 같았다.그렇게 반승제는 조롱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차 안에서 그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너무 빠르게 뛰는 탓에 반승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심장은 곧 가슴을 뚫고 터져 나올 것 같았다.매우 낯선 느낌에
의사는 진찰 결과가 확실히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다소 어이가 없었다.“아마 반 대표님은 그 여성분께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계시나 봅니다. 그래서 긴장되는 것일 수 있어요.”반승제의 표정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돌팔이 의사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밖으로 나가다 때마침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진세운과 마주쳤다.진세운은 그를 아래 우로 훑어보며 물었다.“어때?”하지만 반승제는 그를 무시한 채 쓱 지나가 버렸다.진세운은 그제야 반승제가 기억을 잃어 자신이 누군지 알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챘다.하는 수 없이 진세운은 방 안으로 들어가 의사에게 물었다.“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머리 부상에 의한 후유증 외에는 아주 건강하네.”그의 말에 진세운은 조금 의아해졌다. 반승제가 직접 병원에 찾아올 정도면 분명히 몸에 불편을 느껴서일 테니 말이다.“증상은 어떻답니까?”의사는 갑자기 말을 하지 않고 몇 초 동안 망설이더니, 비로소 우물쭈물 한마디를 뱉었다.“진 선생, 내가 보기에 이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에서 비롯된 증상과 비슷하네. 심장이 빨리 뛰고, 긴장한 탓에 손바닥에 땀이 나고, 아마도 너무 흥분해서 약간 어지러운 것일 수도 있어.”그러자 진세운은 살짝 눈썹을 추켜올리며 피식 웃었다.“승제가 어떻게 말하던가요?”“반 대표님은 그냥 나가셨어. 이걸 믿지 못하는 모양이셔.”정말 믿을 수 없는 반응이었다. 좋아한다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감정 아닌가?‘승제가 이런 감정조차 모른다고?’그 시각, 반승제는 이미 병원을 떠난 뒤였다. 바깥의 찬 바람이 몸에 닿자, 그는 갑자기 많이 좋아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반승제는 담배 한 대를 꺼내 피우려고 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조금 전 성혜인이 안겨준 즐거움에 잠겨 있었다.한번 경험해보니, 더욱 맛보고 싶은 즐거움이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히 예전의 기억을 잃어버렸는데, 이상하게도 부대에 있을 적의 기억은 아주 또렷이 남아있었다.한 무리의 남성들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이 떠난 후, 그녀는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으로 배윤수의 뒤를 따랐다.배윤수는 올해 50세로 더는 젊은 나이가 아니었다. 구레나룻의 머리카락도 모두 희게 변했다.사무실 가는 길에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모두들 깍듯하게 배윤수에게 인사를 했다.그러나 배윤수의 개인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그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턱으로 의자를 가리키며 박예진에게 앉으라는 표시를 줬다.박예진은 올해로 22살로 대학교 3학년 학생이 되었다.그녀는 천천히 한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고, 두려움에 두 다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아까 페니 씨 만나러 갔지? 대본은 줬어?”“줘... 줬습니다.”말을 끝마친 박예진은 어깨를 한껏 움츠렸다. 배윤수를 감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자 배윤수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손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예진이 뭐 다른 말은 하지 않았겠지?”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박예진은 놀래 흠칫 떨었다.“아뇨, 아무것도 안 말했습니다.”배윤수는 피식 웃더니 이내 몸을 숙여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넌 아직 최고가 아니야. 페니는 대단하다고 할 인물이 아니라 영화계에 큰바람을 일으키지는 못할 거야. 대본 주니까 그쪽에서 뭐래?”박예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페니 씨는 그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저더러 다시 수정하라 했어요.”배윤수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콧방귀를 꼈다.“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겠지. 내가 대본을 준 건 그저 설씨 가문 아들 체면을 봐서 어쩔 수 없이 준거니까. 넌 그저 대충 수정하고 보내면 돼, 네가 고친 게 마음에 안 들도록 말이야.”말을 끝마친 다음, 그는 자신의 손을 박예진의 다리에 올려놓았다.그러자 그녀는 또 한 번 흠칫 떨었다.배윤수는 그녀가 이토록 자신을 무서워하는 모습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다리에서 손을 거둬 다시 그녀의 목덜미에 대고, 계속 아래로 내려가 어깨뼈를 만졌다.“예진이 최근 살 좀 빠진 것 같네, 돌아가서 몸보
박예진의 집은 가난했다. 그녀가 성주대에 합격한 후, 부모님은 시골에서 상경해 그녀와 함께 제원에서 지냈다.그들은 성주대와 10km 떨어진 동네에서 살았다.시골에 있던 집은 일찍 팔았다. 그녀의 아버지 박주완은 마침 그를 원하는 학교를 찾았고, 어머니인 김애은은 시골에서 그 지역의 채소를 갖고 오느라, 두 사람은 매일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히 보냈다.박예진은 어려서부터 철이 들어 줄곧 학업에 매진해왔다.성주대에 합격한 그해, 그녀가 다닌 고등학교에서는 오랫동안 현수막을 걸어두기도 했다.박주완의 엄격한 교육에 그녀는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라났다.박예진의 용돈은 매일 4000원을 넘지 않았는데, 이건 부모님이 세운 기준이었다.그러나 피임약 한 알의 가격이 거의 이 정도라, 점심과 등하교 교통비를 제외하면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집에 돌아온 박예진은 집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김애은은 여전히 부엌에서 바삐 돌아치고 있었다. 집은 고작 9평 남짓이었는데 하나는 거실, 하나는 주방 이렇게 두 개의 공간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겨우 몸을 돌릴 수 있는 작은 화장실 하나가 더 달린 구조였다.“엄마, 저 6000원만 주시면 안 돼요?”그녀는 부엌 한편에 서서 조심스레 이 요구를 제기했다.프라이팬 위의 감자를 뒤집고 있던 김애은은 이 말을 듣자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또 돈 가져가서 뭐 하게? 아침에 이미 4000원 줬잖아? 우리 윗집 사람들, 그 집 딸도 대학생이라던데 매일 2000원만 갖고 다닌다더라. 듣자 하니 요즘 대학교 학식 가격도 싸서 2000원이면 배불리 먹을 수 있다던데.”“예진아, 너도 종일 다른 사람들과 비교 말고 부모의 어려움을 이해해야 해. 우리 집은 그런 조건이 없어. 비길 거면 공부로 비겨. 너를 학교에 보내기 위해서, 우리 세 식구 모두 제원에 오기 위해서, 텃밭이며 집이며 전부 팔았어. 이게 다 너를 위한 거니 말 좀 들으렴.”자리에 서 있던 박예진은 어딘가가 몹시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이어 박주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연락해보니 역시 배 교수님이 받으시더라고. 말로는 우리 예진이 성적이 아주 좋대. 줄곧 1등을 놓치지 않는다면서 말이야. 배 교수님도 많이 보살펴주시는 것 같은데 쟤가 어떻게 나쁜 물이 들겠어. 우리 집에도 어렵사리 성주대 학생이 나왔잖아. 나는 야근하는 것도 막 기쁘지 뭐야? 최근 심사가 잦아서 많이 힘들긴 하지만, 동료들이 예진이가 성주대 학생이라는 말을 듣고 모두 부러워하더라고. 나중에 졸업하면 분명히 큰돈을 벌 수 있을 거야, 우리 예진이는.”그 말을 들은 박예진은 몸에 무형의 족쇄가 채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벽을 짚고 천천히 쪼그려 앉아 울려고 했다.그러나 하필이면 그때, 김애은이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보고는 또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밖에서 뭐 해? 네 아빠도 이미 돌아오셨는데 왜 아직도 꾸물거리고 있어? 이따가 그 6000원 어떻게 쓸 건지 잘 말해봐.”박예진은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칠흑같이 어두운 복도에서 그녀가 문을 닫자, 틈새로 새어 나오던 불빛도 서서히 사라져갔다.그렇게 그녀는 불이 켜진 ‘상자’ 속에 갇혀 방향을 잃었다....아침 일찍 깨어난 성혜인은 대충 아침을 먹고 가방을 들어 집 문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해 사무실 의자에 앉자, 심인우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페니 씨, 대표님께서 돌아오라네요...”어젯밤 결재한 서류를 막 보낸 성혜인은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올랐다.“대표님 무슨 병 있는 거 아니에요?! 심 비서님, 저 정말 농담 하는 거 아닙니다. 한번 정신병원에 데려가 보세요. 대표님이 머리를 다치시더니 바보가 된 게 틀림없어요!”심인우는 놀라 손을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의 통화가 스피커 모드로 켜져 있어 성혜인의 욕설은 훤히 다 들렸다.심지어 한글자 한글자 너무 똑똑하게 들려, 사무실에서는 메아리가 울렸다.심인우는 서둘러 성혜인에게 눈치를 줬다.“페니 씨, 이곳으로 돌아오는 건 사실
심인우는 마음속으로 미리 그녀의 명복을 빌며 고개를 저었다.“안 좋은 것 같아요.”성혜인은 흠칫 몸을 떨더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제가 한 말... 대표님께서 다 들으셨나요?”“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들으셨어요.”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울며 겨자 먹기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안에 혼자 앉아있던 반승제는 그녀가 온 것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성혜인은 사무실 책상 앞으로 걸어가 불안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대표님.”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불같이 타오르던 반승제의 화는 갑자기 물 한 바가지를 끼얹은 듯 사그라들었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오늘 성혜인의 차림새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짧은 무스탕, 쭉 뻗은 청바지에 하이힐로 평범하게 차려입었다. 아마 길거리에 있는 아무나 잡아 세워도, 그녀보다 더욱 섹시하게 차려입었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몸매가 너무 뛰어난 탓에 성혜인은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평범하게 걷는 것도 심지어는 관능적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걷는 것 같았다.그가 아무 말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성혜인도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반승제는 손에 있던 빈 컵을 앞으로 밀더니 담담하게 말했다.“커피 한 잔 타와.”그러자 성혜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이게 다야? 노발대발할 줄 알았더니?’그녀는 서둘러 빈 컵을 들고 꼭대기 층에 있는 탕비실로 향했다.커피를 타고 갖고 갔을 때, 그는 이미 해외 미팅을 진행하고 있었다.성혜인은 커피를 한편에 놓고 소파로 가 앉았다.해외 미팅을 끝마친 반승제는 뒤이어 BH그룹 내부 회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성혜인도 반승제가 그 시나리오를 촬영하려 한다는 것을 대충 알아챘다.그녀는 단지 400억 원을 투자할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이런 거 보면, 전혀 기억 상실한 사람 같지 않단 말이야...’회의가 끝난 후, 반승제는 몸을 일으켜 한쪽에 있는 서류 가방을 그대로 성혜인에게 던졌다.“나랑 접대하러 가자.”“대표님, 저...”“계약 종료까지 아직 한 달여나 남았어. 아직 시간 안 됐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