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돌아가는 길에, 성혜인은 반승제의 차와 마주쳤다.반승제의 차는 한 골목 길가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차 유리가 누군가에 의해 깨진 상태였다.순간 마음이 덜컹한 성혜인은 서둘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누구도 받지 않았다.그녀는 또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심인우는 오늘 밤 반승제가 직접 운전해 호텔로 돌아갔다고 알려주었다.성혜인은 곧장 차에서 내려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 골목길을 따라 안으로 걸어갔다.골목 깊은 곳은 축축했고, 불빛도 깜빡 거리는 게 몇 년 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바닥에는 쓰러진 몇 명의 남자들과 함께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그걸 본 성혜인은 다리가 나른해졌다. 그러던 그때, 총알 한 발이 그녀를 향해 날아왔다.성혜인은 그대로 굳어져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오자 그녀는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 벽에 기대섰다.총알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쳐지나 등 뒤에 있는 벽에 꽂혔다.놀란 성혜인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특히 총을 든 남자가 반승제라는 걸 발견하고 말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이 이곳에 있을 줄 몰랐다. 그녀임을 알아차렸을 때, 총알은 다행히도 성혜인을 비껴갔다. 그렇지 않았다면 성혜인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큼성큼 걸어와 성혜인을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그녀가 단지 이렇게 많은 시신을 보고 놀란 것이라 여기고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뭐하러 왔어요?”“대표님, 다치신 데 없으시죠?”반승제는 흠칫하며 총을 더욱 꽉 잡았다.‘정말 이상한 여자야. 분명히 이 광경이 매우 무서울 텐데... 바닥은 온통 피고 심지어 자신은 총에 맞아 죽을 뻔했는데, 나한테 다친 데는 없냐고 물어?’보통 사람이 이 광경을 봤다면 일찍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심지어 눈 깜빡하지 않고 살인을 저지르는 반승제를 악마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였다.“이름이 페니라고 했나?”성혜인은
가슴이 차가웠다. 그중 절반이 밖으로 다 드러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다.하지만 그가 또 압박하는 바람에 성혜인은 침을 꼴깍 넘겼다.그녀는 눈을 감았다. 성혜인은 기억을 잃고 누구도 믿지 않는, 심지어 지금 총까지 들고 있는 반승제를 감히 건드릴 수 없었다.가슴에서는 어느새 축축함과 반승제의 이 놀림이 느껴져 왔다.놀란 그녀는 먼 곳을 바라보았지만, 먼 곳에는 한 무더기의 시체가 있어 하는 수 없이 급히 시선을 거뒀다.반승제의 머릿결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났고 등 근육은 잔뜩 성이 난 듯 보였다.그렇게 10분 동안 키스하고 나서야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워 성혜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그녀의 얼굴을 어느새 새빨갛게 변해, 차갑기만 했던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 했다.“전에도 내가 이렇게 키스했어요?”성혜인은 왠지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경헌 씨 말을 기억했던 거구나.’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앞으로는 안 그럴 겁니다.”‘개자식.’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반승제의 뒤를 따랐다. 그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곳을 정리해달라고 부탁하고는, 창문이 깨진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성혜인의 목도리가 현장에 떨어졌지만, 이미 바닥에 있는 피가 묻은 탓에 다시 줍지 않았다.반승제는 그녀를 힐끔 보더니 침을 한번 삼켰다.‘그래도 보는 눈은 있었나 보네, 적어도 입에 침이 마를 정도니까.’그는 긴 손가락으로 핸들을 꽉 잡고는 시선을 거두고 가속페달을 밟았다.성혜인은 밖에 서서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다.‘이런 변태의 낭만적인 자극은 쉽게 사람을 흐리게 만든다니까.’그녀는 등을 뒤로 기대 한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차를 몰고 포레스트로 향했다.10시가 되자, 도라희는 또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성혜인 씨, 인제 보니 정말 나랑 좋게 얘기할 마음이 없나 봐요? 좋아요. 조금 이따 당신 아버지 유골을 하수구에 버리겠어요. 그리고 인터넷에 성혜인 씨
하지만 대다수의 네티즌들은 올바른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았다. 특히 그 녹취록 안에 있는 발길질 소리들로 보아, 안유결이 얼마나 심한 폭력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도라희는 분명 자신이 먼저 바람을 피워놓고, 되레 뻔뻔하게도 안유결이 자신에게 가정폭력을 가했다고 말했다.「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못될수가 있지? 정말 못 들어주겠네. 안 감독님이 너무 안됐어.」「듣는 내가 다 도라희를 한 대 치고 싶네. 안 감독님의 명예, 사업, 돈 모두 가로채 가놓고는 세상밖에 나오지도 못하게 하다니!」「보통 사람이 이렇게 괴롭힘을 당했다면 일찍 자살하고 말았을 거야. 도라희 이 여자 정말 독하네. 퉤! 이름 석 자 올리는 것도 더러워!」인터넷은 곧 욕설로 가득 찼고, 여론은 더욱 거세졌다.한편 도라희는 자신이 또 폭행을 당했다고 게시물을 올렸다. 하지만 이제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사람들은 또 매번 도라희의 드라마가 방영될 때 마다 안유결이 욕을 먹은 일을 떠올렸다. 그녀의 드라마가 전부 가정폭력에 연관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독한 여자! 살길을 내어주지도 않으면서 남을 밟고 올라서려 하다니!」「이런 여자를 만나다니, 안 감독님 재수가 없으셔도 너무 없으시네요!」「도라희는 연예계에서 나가라! 우리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여러분, 우리 도라희의 모든 작품에 보이콧합시다!」「보이콧!」사람들은 연신 도라희에게 욕을 퍼부었고, 놀란 도라희는 감히 집 밖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녀는 서둘러 다른 사람의 핸드폰으로 안유결에게 연락을 취했다.현재 그녀를 구해 줄 사람은 오직 안유결뿐이었다. 여론도 모두 안유결이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그가 직접 나서줘야 이 상황이 가라앉을 수 있었다.“여보, 내가 정말 잘못했어. 너무 극단적으로 행동하지마, 응? 지금 당장 게시물 삭제하고 나한테 유리한 글을 올려. 그리고 지금 당장 재혼해서 앞으로 둘이 행복하게 잘 지내자. 당신 감독 계속하고 싶은거 아니야? 내가 최대한 힘 써서 당신 지지
지금 도라희는 감히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안유결과 이혼할 당시 그녀가 악을 쓰고 아이의 양육권을 가지려 한 것은, 그 아이가 안유결의 아이가 아닌 그녀가 다른 사람과 낳은 자식이었기 때문이다.그녀의 불륜남은 비서뿐만이 아니었다. 도라희는 안유결 몰래 방탕하게 놀았지만, 고지식한 그는 줄곧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 아이를 안유결에게 넘겨준다면, 그건 곧 증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았다.이제 그녀는 다시 일어날 희망이 사라지게 되었다.그러나 아직 아이를 빌미로 글을 지어낼 수는 있었다.이윽고 도라희는 서둘러 새로운 게시물을 올렸다.「내게 아무리 잘못이 있다고 한들, 아이는? 안유결 당신은 아이의 생사에 대해서 조금도 개의치 않아? 아이는 우리 둘의 아이야. 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관심을 둔 적이 없지. 그러면서 내 사업을 망치려 들다니, 대체 당신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어.」하지만 이 게시물의 댓글 창도 곧 만여 개의 욕설로 도배되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유결은 또 새로운 게시물을 올렸다.「아이는 제 아이가 아닙니다. 당시 몰래 아이의 머리카락을 보관해 친자확인을 해봤거든요. 도라희, 당신 지금 아이를 빌미로 글을 지어내서 내 뺨을 내리치겠다는 거야? 남자로 생겨, 너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고, 너 때문에 진흙탕에도 빠졌는데, 아이마저도 내 아이가 아니었어. 그런데도 너는 결코 네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지.」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안유결은 목이 터져라 욕을 하지도 않고 그저 증거만 내보일 뿐이었다.지금도 그는 도라희의 질책 앞에서 여전히 화를 내지 않았다.그러나 글의 힘은 매우 강했다.많은 사람들은 그가 올린 게시물을 읽고 마음이 시려졌다.그리고 또 도라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이제 모두는 그녀가 다시 일어날 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도라희 본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어 차라리 물건을 챙기고 출국하려 했다.차유하의 부모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들은 차유하가 감옥에 가지 않게 도라
전화가 망설임 없이 끊어지자,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가구를 들이기로 했다.가구 역시 모두 그녀가 직접 고른 것들이었는데, 일찍이 업체와 가격을 상의했었다.그녀는 현장에 있으며 가구들을 어디에 배치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알려주었다.가구를 전부 옮기려면 3일 정도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반승제가 현장에 와서 볼 때면, 네이처 빌리지의 공사 건이 완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성혜인은 한숨을 내쉬었다.3일 뒤, 그녀는 또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가 성혜인을 해고하겠다고 얘기한 뒤로, 3일 동안 한 번도 반승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그녀의 전화를 받았을 때, 반승제는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고, 네이처 빌리지에 가봐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조금 기다려요.”조금만 기다리라는 반승제의 말에 성혜인은 그가 곧 현장에 올 줄 알았다.하지만 그녀가 네이처 빌리지 입구에서 장장 3시간을 기다려 거의 얼음 조각상이 될 뻔하고 나서야 반승제는 모습을 드러냈다.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또 이날 마침 눈이 내려 그는 우산을 들고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입구에 서 있던 성혜인은 추위에 얼어 코끝이 새빨개졌고 몸도 주체할 수 없이 떨렸다.이윽고 반승제는 우산을 접어 차에 넣고는 그녀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갑시다.”추위에 떨며 성혜인은 이를 덜덜 떨었고 발도 굳어진 것 같았다.하지만 반승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성혜인도 힘겹게 그를 따라나섰다.문은 전자식으로 설계된 양문이었다.“대표님, 비밀번호를 설정하셔야 합니다.”말할 때마다 그녀는 추위에 이를 벌벌 떨었다. 볼도 어느새 새빨개진 상태였다.반승제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혜인은 그가 비밀번호를 훔쳐볼까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고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그제야 반승제는 자신의 생일을 비밀번호로 설정했다.집안에 들어서서, 그는 훌륭하게 설계된 내부를 보며 이곳저곳 돌아다녔다.성혜인도 그를 따라 걸었다.“대표님, 마음에 드세요
반승제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그러나 이윽고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큰 힘에 어깨가 부딪혀 그는 옆으로 치우쳐졌다.곁눈질로 보니 차가운 표정의 여자가 그의 옆으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그녀가 일부러 어깨를 친 걸 알아챈 반승제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가 솟아올랐다.그래서 그는 손을 뻗어 성혜인을 확 끌어 잡아당겼다.화가 나긴 성혜인도 마찬가지라 강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두 사람의 몸이 뒤로 젖히더니 함께 소파로 넘어지고 말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의 턱을 잡더니 말했다.“분명히 체면 봐줬을 텐데, 왜 나한테 화풀이야?!”성혜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눈가도 어느새 시뻘게졌다. 그래서 그녀는 반승제를 세게 물었다.반승제는 그녀의 억울한 표정을 보더니 천천히 손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그러자 성혜인은 이 기회를 틈타 그를 확 밀쳐버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10억짜리 수표를 주웠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앞으로는 이런 거래 하지 않을 테니까요.”그녀가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본 반승제는 순간 왠지 모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짜증이 났다. 더군다나 떠올리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 났다.머리가 어지러웠던 성혜인은 그렇게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반승제는 성큼성큼 그녀를 따라나서며 굳은 말투로 말했다.“아픈 것 같은데, 아무한테나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해요.”어쨌든 그는 직접 데려다주지 않을 것이었다. 성혜인을 이해득실을 따지지 못하는 여자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말을 끝마치고 반승제는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성혜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문 어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왜 그래요?”성혜인은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며 너무 아파 한
반승제는 몰과 진통제를 들고 몸을 돌렸다.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성혜인의 모습을 보고는 묘한 기시감이 들어서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먹어.”반승제는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성혜인에게 억지로라도 진통제를 먹였다. 하지만 의식이 온전치 않았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알약을 자꾸만 뱉어냈다.인내심이 금세 바닥 난 반승제는 손가락으로 알약을 잡고 목구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혜인이 헛구역질을 시작한 다음에야 손가락을 빼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성혜인은 비몽사몽 눈을 떠서 반승제를 바라봤다. 하얀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의 타액이 묻은 손으로 자그마한 얼굴을 반이나 가린 것을 보고 반승제는 어쩐지 에로틱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다른 사람의 타액이 피부에 닿았는데도 반승제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결벽증이 그토록 심한 반승제가 말이다. 그는 황급히 손을 빼내더니 무엇이라도 떠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란 떠올리고 싶다고 해서 쉽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몸이라도 움직이자는 생각으로 반승제는 컵을 들고 성혜인에게물을 먹였다. 자칫 사레에 걸릴 뻔한 그녀는 잠깐 기침하다가 또다시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알약을 게워 내지는 못했다.반승제는 에어컨을 틀고 담요까지 찾아내서 성혜인에게 덮어줬다.사실 반승제는 지금 다른 사람을 보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혜인이 자신과 특별한 사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무지 모르는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의 직감이 그는 아무 여자에게나 곁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반승제는 요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반씨 가문에 대해 대충 알아본 것만으로도 이미 그를 죽이려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을 잃은 뒤로 모두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졌는지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직면하고도 반승제는 속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가족의
“페니야.”반승제의 부름에 성혜인은 약간 움찔했다. 아무래도 잠든 것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반승제는 편의점 주머니를 그녀의 앞으로 던졌다.“알아서 골라 써.”세상 무심하게 말하고 난 반승제는 다시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일하기 시작했다.진통제가 드디어 효과를 보기 시작했는지 통증이 조금 가신 것 같아 성혜인은 몸을 반쯤 일으켜 주머니 안의 물건을 확인했다. 의외로 기저귀형까지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는 약간 놀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는 속옷을 버리게 생긴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대표님, 혹시 바지를 빌려주실 수 있나요?”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얼굴은 불쾌한 듯 약간 찡그러졌다. 하지만 성혜인의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과 핼쑥한 얼굴을 보니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픈 사람과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정장 바지 하나 대충 들고나와서 성혜인에게 던져줬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지만 어떻게든 몸을 씻어야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할 것 같아 반승제의 바지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이때 반승제는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몸을 확 일으켰다. 성혜인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고 결벽증이 도졌던 것이다.“설마 내 화장실을 쓰려고?”성혜인은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반승제는 이마의 신경이 다 툭툭 뛰는 것 같아 바로 호텔 로비에 전화를 걸었다. 같은 층의 다른 스위트룸에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반응도 개의치 않은 채 성큼성큼 화장실로 향해 걸어갔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어쩐지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성큼성큼 성혜인을 따라가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호텔 직원이 데리러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 내 화장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성혜인은 머리를 들어 반승제를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왜요? 저희 화장실에서 한 적도 있는데요?”‘젠장!’갑작스레 알게 된 엄청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