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그러나 이윽고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큰 힘에 어깨가 부딪혀 그는 옆으로 치우쳐졌다.곁눈질로 보니 차가운 표정의 여자가 그의 옆으로 지나가는 게 보였다.그녀가 일부러 어깨를 친 걸 알아챈 반승제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화가 솟아올랐다.그래서 그는 손을 뻗어 성혜인을 확 끌어 잡아당겼다.화가 나긴 성혜인도 마찬가지라 강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두 사람의 몸이 뒤로 젖히더니 함께 소파로 넘어지고 말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의 턱을 잡더니 말했다.“분명히 체면 봐줬을 텐데, 왜 나한테 화풀이야?!”성혜인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눈가도 어느새 시뻘게졌다. 그래서 그녀는 반승제를 세게 물었다.반승제는 그녀의 억울한 표정을 보더니 천천히 손에 힘을 풀기 시작했다.그러자 성혜인은 이 기회를 틈타 그를 확 밀쳐버렸다.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10억짜리 수표를 주웠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가 어지러워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걱정하지 마세요, 대표님. 앞으로는 이런 거래 하지 않을 테니까요.”그녀가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본 반승제는 순간 왠지 모를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 짜증이 났다. 더군다나 떠올리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 났다.머리가 어지러웠던 성혜인은 그렇게 비틀거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반승제는 성큼성큼 그녀를 따라나서며 굳은 말투로 말했다.“아픈 것 같은데, 아무한테나 전화해서 데리러 와달라고 해요.”어쨌든 그는 직접 데려다주지 않을 것이었다. 성혜인을 이해득실을 따지지 못하는 여자로 여기고 있으니 말이다.말을 끝마치고 반승제는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누군가 뒤를 따라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성혜인이 창백한 안색으로 문 어구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하는 수 없이 그는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왜 그래요?”성혜인은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며 너무 아파 한
반승제는 몰과 진통제를 들고 몸을 돌렸다. 소파에 축 늘어져 있는 성혜인의 모습을 보고는 묘한 기시감이 들어서 잠깐 멈칫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다.“먹어.”반승제는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성혜인에게 억지로라도 진통제를 먹였다. 하지만 의식이 온전치 않았던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알약을 자꾸만 뱉어냈다.인내심이 금세 바닥 난 반승제는 손가락으로 알약을 잡고 목구멍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성혜인이 헛구역질을 시작한 다음에야 손가락을 빼고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성혜인은 비몽사몽 눈을 떠서 반승제를 바라봤다. 하얀 이마에는 어느새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녀의 타액이 묻은 손으로 자그마한 얼굴을 반이나 가린 것을 보고 반승제는 어쩐지 에로틱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다른 사람의 타액이 피부에 닿았는데도 반승제은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결벽증이 그토록 심한 반승제가 말이다. 그는 황급히 손을 빼내더니 무엇이라도 떠올려 보려고 했다. 하지만 기억이란 떠올리고 싶다고 해서 쉽게 돌아오는 것이 아니었다.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몸이라도 움직이자는 생각으로 반승제는 컵을 들고 성혜인에게물을 먹였다. 자칫 사레에 걸릴 뻔한 그녀는 잠깐 기침하다가 또다시 헛구역질했다. 하지만 알약을 게워 내지는 못했다.반승제는 에어컨을 틀고 담요까지 찾아내서 성혜인에게 덮어줬다.사실 반승제는 지금 다른 사람을 보살필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성혜인이 자신과 특별한 사이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도무지 모르는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의 직감이 그는 아무 여자에게나 곁을 내어줄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고 반승제는 요즘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반씨 가문에 대해 대충 알아본 것만으로도 이미 그를 죽이려 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가 기억을 잃은 뒤로 모두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졌는지라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직면하고도 반승제는 속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가족의
“페니야.”반승제의 부름에 성혜인은 약간 움찔했다. 아무래도 잠든 것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반승제는 편의점 주머니를 그녀의 앞으로 던졌다.“알아서 골라 써.”세상 무심하게 말하고 난 반승제는 다시 노트북을 무릎에 놓고 일하기 시작했다.진통제가 드디어 효과를 보기 시작했는지 통증이 조금 가신 것 같아 성혜인은 몸을 반쯤 일으켜 주머니 안의 물건을 확인했다. 의외로 기저귀형까지 있는 것을 보고는 그녀는 약간 놀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는 속옷을 버리게 생긴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대표님, 혹시 바지를 빌려주실 수 있나요?”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얼굴은 불쾌한 듯 약간 찡그러졌다. 하지만 성혜인의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과 핼쑥한 얼굴을 보니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픈 사람과 이것저것 따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정장 바지 하나 대충 들고나와서 성혜인에게 던져줬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부끄러웠지만 어떻게든 몸을 씻어야 이성적인 생각이 가능할 것 같아 반승제의 바지를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이때 반승제는 갑자기 신경을 곤두세우더니 몸을 확 일으켰다. 성혜인이 화장실로 가는 것을 보고 결벽증이 도졌던 것이다.“설마 내 화장실을 쓰려고?”성혜인은 창백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반승제는 이마의 신경이 다 툭툭 뛰는 것 같아 바로 호텔 로비에 전화를 걸었다. 같은 층의 다른 스위트룸에 사람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실망스러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성혜인은 반승제의 반응도 개의치 않은 채 성큼성큼 화장실로 향해 걸어갔다. 그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어쩐지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는 성큼성큼 성혜인을 따라가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호텔 직원이 데리러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 내 화장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성혜인은 머리를 들어 반승제를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왜요? 저희 화장실에서 한 적도 있는데요?”‘젠장!’갑작스레 알게 된 엄청
“마음에 들면 선물로 드릴게요.”반승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예상 밖의 대답에 반기태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든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반승제가 성혜인을 잊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래도 반기태는 계획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반승제도 허락했으니, 계획을 진행하는 편이 미래 기억을 떠올린 그에게 더욱 큰 고통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통은 그가 성혜인에 대한 마음과 정비례할 것이다....호텔에서 나간 성혜인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택시를 잡고 올라타자마자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서서히 잠들었다.어느 순간 차가 세차게 흔들렸고 성혜인은 약간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기사님, 저는...”성혜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운전기사가 갑자기 차 속도를 높였다. 이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성혜인은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갑자기 급정거하며 차를 세웠다.성혜인은 관성으로 인해 차량 앞좌석에 머리를 박았다.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운전기사는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갔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머리를 들게 했다.짝!뺨을 맞은 성혜인은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제기랄, 가만히 있지 못해?! 또다시 신고하려 들었다가는 병신으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온몸에 힘이 다 빠졌던 성혜인은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표정으로 운전기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폰을 통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운전기사는 또 중얼중얼 욕설을 내뱉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같은 시각, 전화를 끊고 난 반승제는 이만 회의를 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정장에 기시감이 들었던 그는 핸드폰을 들고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랑 페니는 어떤 사이였죠?”심인우는 당황한 듯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나요?”“네, 그건 아니었습
성혜인은 아직도 생리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명의 도우미에게 이끌려 한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반재인은 아직도 산산이 부서진 물건들을 짓밟으며 화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안으로 들어온 여자를 발견한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이게 누구야? 나를 이 꼴로 만든 반승제의 여자 아니야?’반재인은 상기된 얼굴로 한쪽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물었다.“반승제는 어떡하고 이 여자를 잡아 왔어?”반재인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반승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반승제 씨의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여러 사람을 잊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여자도 포함해서요. 조금 전에는 직접 마음에 들면 선물로 준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반승제의 짧은 말 한마디는 이렇듯 성혜인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말았다.경호원의 말을 들은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씁쓸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반승제는 늘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마치 보잘것없는 쓰레기라도 되는 듯이... 성혜인은 수도 없이 반승제에게 버림받았었다. 그런데도 가끔 선심 쓰듯 베푸는 친절에 설렜다니, 성혜인은 그런 자신이 너무 우습고 답답했다.이 순간 성혜인의 마음은 결국 차갑게 식고 말았다. 이제는 반승제를 다시 떠올린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반재인은 반승제가 성혜인을 잊었다는 말에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가만히 서서도 비틀대던 성혜인은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픈 것이 진통제를 먹지 않은 것만 같았다.반재인은 성혜인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서는 소파 앞으로 갔다.“이야~ 나한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 반승제도 참 무심하지, 한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여자를 내쳐버리다니 말이야.”반재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이는 남자구실을 못 하는 그를 대신해 먼저 잡혀 온 여
반기태는 당연히 반승제가 이 정도만 하고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반승제를 얕잡아 봐도 한참 얕잡아 봤다. 이 세상에는 반승제가 하지 못할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아 한참 어버버하다가 겨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에게 지시했다.“얼른 페니를 데리고 와! 얼른!”반승제가 미쳐 날뛰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별장 전체가 폐허로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반기태가 큰마음 먹고 시내에 산 이 값비싼 별장이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이번 일이 기사화된다면 그는 체면이 구겨져서 감히 외출도 못 할 것 같았다.반승제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트럭을 후진시키며 다른 기둥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기둥이라면 이미 쓰러질 대로 쓰러져 얼마 남지 않았기에 별장이 무너지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었다.이때 반승제는 잠깐 멈춰서서 머리를 돌렸다. 성혜인이 두 명의 경호원에게 이끌려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욱 허약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가슴팍의 단추도 몇 개 풀어져 있었다.반승제는 이제야 차 문을 열어 바닥에 자빠져 있는 반기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싸늘한 말투로 짧게 물었다.“누가 페니를 건드렸죠?”반기태는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성혜인을 부축하고 있던 경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미모에 눈이 멀어 탐하려고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조수석에서 총을 꺼냈다. 권총이 아닌 한 방에 30발을 발사할 수 있는 SG 돌격소총을 말이다. 그러자 반기태는 눈을 크게 뜨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반승제, 너... 너 쏘기만 해!!”탕탕탕!반기태가 말을 마치자마자 별장에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경호원은 가슴팍에 각각 10발씩 맞았다. 신이 와도 살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페니는 제가 데려갈게요.”반승제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총구는 반기태를 향해 있었다.반기태는 몸을 벌벌
얼마 지나지 않아 반기범은 기다리고 있던 보고를 받았다.“알아냈습니다. 반승제 씨가 대형 트럭으로 반기태 씨의 별장을 부수고 경호원 두 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반기범은 우아한 자태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음산한 눈빛의 첫째 반기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승제가 형님한테 총을 쏘지는 않았고?”반기범은 당연히 오늘이 반기태의 제삿날이 될 줄 알았다. 그래도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 근데 오줌 지릴 정도로 겁먹고 회장님한테 이르러 갔답니다.”“허허, 감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다니...”반기태의 멍청함에 반기범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반태승을 찾아가는 건 자신이 지은 죄를 밝히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더구나 반태승은 반승제의 광기 서린 성격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그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반씨 가문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반승제는 애초부터 가족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미친놈이었다. 반태승이 아직 살아있기에 그나마 귀공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반태승이 돌아간 다음에는 아마도 그의 광기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반승제에 비해 반기범은 반승우를 더욱 좋아했다. 그는 부드러운 사람이었기에 다음 계획을 계산해 내기 아주 쉬웠다. 하지만 반승제는 다르다. 그는 언제나 변수에 변수를 잇는 선택만 해왔다.반승제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100%의 확신이 없으면 절대 나서서는 안 되기도 했다.같은 시각, 반기태는 다른 별장으로 가서 바지를 갈아입고 부랴부랴 반태승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굳게 닫힌 대문을 그를 위해 열리지 않았다.집사는 아주 가벼운 얘기라도 하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했다.“회장님께서 앞으로 손님은 안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엎지른 물은 스스로 닦으라고 하십니다. 잠자는 늑대를 건드렸으면 살집이 물어뜯길 각오를 해야 한다면서 말입니다.”보다시피 반태승은 기억을 잃은 반승제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반씨 집안사람
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시선은 자연스레 성혜인의 목으로 향했다. 그녀가 반항하지 못할 때 그냥 죽여버릴 생각으로 말이다.하지만 꿈속에서 나쁜 일이라도 당하고 있는지 눈초리를 파르르 떠는 성혜인의 모습을 보니 분노도 금세 식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이만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침실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고요한 밤은 빠르게 지나고 어느덧 아침이 왔다.성혜인은 반승제가 깨어난 다음에도 깨지 않았다. 스케줄대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반승제는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고 호텔을 떠났다.성혜인은 반승제가 떠난 지 한 시간이 되어서야 서서히 눈을 떴다. 어젯밤의 기억은 짧은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지만 반승제가 결국 와줬다는 것은 기억에 남았다.하지만 반승제보다 더욱 인상 깊었던 건 7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이던 순간이다. 욕망에 휩싸인 남자들의 눈빛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서 한참이나 토했다. 피부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고 구역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은 탓에 토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물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반승제의 호텔방에 한시라도 남아있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부랴부랴 포레스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 핸드폰에 새 전화번호를 만들도록 지시하고 속이 따듯해지는 영양죽까지 먹었다.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기 방에서 샤워하고 난 성혜인은 해가 질 때까지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깨난 다음 진통제 한 알을 더 먹고 나서야 생리통이 진정된 것 같았다.초저녁, 성혜인은 회사로 향했다. 안유결의 사건이 아직도 인터넷에서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고 있었다.성혜인은 어느덧 안유결이라는 훌륭한 감독과 온수빈이라는 훌륭한 배우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S.M이 아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순리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훌륭한 대본만 있으면 되었다.“감독님, 저희가 대학로 근처에서 투자자를 찾는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