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들면 선물로 드릴게요.”반승제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예상 밖의 대답에 반기태는 한참이나 핸드폰을 든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반승제가 성혜인을 잊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그래도 반기태는 계획을 계속 진행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반승제도 허락했으니, 계획을 진행하는 편이 미래 기억을 떠올린 그에게 더욱 큰 고통을 가져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고통은 그가 성혜인에 대한 마음과 정비례할 것이다....호텔에서 나간 성혜인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택시를 잡고 올라타자마자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인해 서서히 잠들었다.어느 순간 차가 세차게 흔들렸고 성혜인은 약간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해주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기사님, 저는...”성혜인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운전기사가 갑자기 차 속도를 높였다. 이제야 이상함을 눈치챈 성혜인은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운전기사가 갑자기 급정거하며 차를 세웠다.성혜인은 관성으로 인해 차량 앞좌석에 머리를 박았다. 그녀가 어리둥절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운전기사는 그녀의 핸드폰을 빼앗아 갔고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 억지로 머리를 들게 했다.짝!뺨을 맞은 성혜인은 머리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제기랄, 가만히 있지 못해?! 또다시 신고하려 들었다가는 병신으로 만들어 버릴 줄 알아!”온몸에 힘이 다 빠졌던 성혜인은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차가운 표정으로 운전기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어폰을 통해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운전기사는 또 중얼중얼 욕설을 내뱉으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같은 시각, 전화를 끊고 난 반승제는 이만 회의를 하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쓰레기통 속에 버려진 정장에 기시감이 들었던 그는 핸드폰을 들고 심인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랑 페니는 어떤 사이였죠?”심인우는 당황한 듯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나요?”“네, 그건 아니었습
성혜인은 아직도 생리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두 명의 도우미에게 이끌려 한 방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반재인은 아직도 산산이 부서진 물건들을 짓밟으며 화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안으로 들어온 여자를 발견한 그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이게 누구야? 나를 이 꼴로 만든 반승제의 여자 아니야?’반재인은 상기된 얼굴로 한쪽에 서 있던 경호원에게 물었다.“반승제는 어떡하고 이 여자를 잡아 왔어?”반재인은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반승제가 기억을 잃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반승제 씨의 머리에 문제가 생겨서 여러 사람을 잊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여자도 포함해서요. 조금 전에는 직접 마음에 들면 선물로 준다는 말까지 했다고 합니다.”반승제의 짧은 말 한마디는 이렇듯 성혜인의 인생을 망쳐버리고 말았다.경호원의 말을 들은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씁쓸한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반승제는 늘 이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마치 보잘것없는 쓰레기라도 되는 듯이... 성혜인은 수도 없이 반승제에게 버림받았었다. 그런데도 가끔 선심 쓰듯 베푸는 친절에 설렜다니, 성혜인은 그런 자신이 너무 우습고 답답했다.이 순간 성혜인의 마음은 결국 차갑게 식고 말았다. 이제는 반승제를 다시 떠올린다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을 것 같았다.반재인은 반승제가 성혜인을 잊었다는 말에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녀의 머리채를 확 잡아당겼다.가만히 서서도 비틀대던 성혜인은 전혀 반항하지 못했다. 머리도 아프고 배도 아픈 것이 진통제를 먹지 않은 것만 같았다.반재인은 성혜인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어서는 소파 앞으로 갔다.“이야~ 나한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 반승제도 참 무심하지, 한때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여자를 내쳐버리다니 말이야.”반재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장난감을 집어 들었다. 이는 남자구실을 못 하는 그를 대신해 먼저 잡혀 온 여
반기태는 당연히 반승제가 이 정도만 하고 멈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반승제를 얕잡아 봐도 한참 얕잡아 봤다. 이 세상에는 반승제가 하지 못할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그는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아 한참 어버버하다가 겨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에게 지시했다.“얼른 페니를 데리고 와! 얼른!”반승제가 미쳐 날뛰도록 내버려 뒀다가는 별장 전체가 폐허로 되어버릴지도 몰랐다. 반기태가 큰마음 먹고 시내에 산 이 값비싼 별장이 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이번 일이 기사화된다면 그는 체면이 구겨져서 감히 외출도 못 할 것 같았다.반승제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트럭을 후진시키며 다른 기둥도 무너뜨리기 위해 힘을 모았다. 기둥이라면 이미 쓰러질 대로 쓰러져 얼마 남지 않았기에 별장이 무너지기까지도 얼마 남지 않은 셈이었다.이때 반승제는 잠깐 멈춰서서 머리를 돌렸다. 성혜인이 두 명의 경호원에게 이끌려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욱 허약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가슴팍의 단추도 몇 개 풀어져 있었다.반승제는 이제야 차 문을 열어 바닥에 자빠져 있는 반기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싸늘한 말투로 짧게 물었다.“누가 페니를 건드렸죠?”반기태는 몸을 후들후들 떨었다. 성혜인을 부축하고 있던 경호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미모에 눈이 멀어 탐하려고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조수석에서 총을 꺼냈다. 권총이 아닌 한 방에 30발을 발사할 수 있는 SG 돌격소총을 말이다. 그러자 반기태는 눈을 크게 뜨며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반승제, 너... 너 쏘기만 해!!”탕탕탕!반기태가 말을 마치자마자 별장에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두 명의 경호원은 가슴팍에 각각 10발씩 맞았다. 신이 와도 살리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반승제는 성혜인의 앞으로 걸어가더니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페니는 제가 데려갈게요.”반승제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총구는 반기태를 향해 있었다.반기태는 몸을 벌벌
얼마 지나지 않아 반기범은 기다리고 있던 보고를 받았다.“알아냈습니다. 반승제 씨가 대형 트럭으로 반기태 씨의 별장을 부수고 경호원 두 명을 사살했다고 합니다.”반기범은 우아한 자태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음산한 눈빛의 첫째 반기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승제가 형님한테 총을 쏘지는 않았고?”반기범은 당연히 오늘이 반기태의 제삿날이 될 줄 알았다. 그래도 약간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네. 근데 오줌 지릴 정도로 겁먹고 회장님한테 이르러 갔답니다.”“허허, 감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다니...”반기태의 멍청함에 반기범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가 반태승을 찾아가는 건 자신이 지은 죄를 밝히는 것과 다름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더구나 반태승은 반승제의 광기 서린 성격을 아주 높게 평가했다. 그를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반씨 가문에 남아 있을 필요도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반승제는 애초부터 가족이란 무엇인지 모르는 미친놈이었다. 반태승이 아직 살아있기에 그나마 귀공자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반태승이 돌아간 다음에는 아마도 그의 광기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반승제에 비해 반기범은 반승우를 더욱 좋아했다. 그는 부드러운 사람이었기에 다음 계획을 계산해 내기 아주 쉬웠다. 하지만 반승제는 다르다. 그는 언제나 변수에 변수를 잇는 선택만 해왔다.반승제와 같은 사람이야말로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사람이었다. 100%의 확신이 없으면 절대 나서서는 안 되기도 했다.같은 시각, 반기태는 다른 별장으로 가서 바지를 갈아입고 부랴부랴 반태승을 만나러 갔다. 하지만 굳게 닫힌 대문을 그를 위해 열리지 않았다.집사는 아주 가벼운 얘기라도 하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했다.“회장님께서 앞으로 손님은 안 만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엎지른 물은 스스로 닦으라고 하십니다. 잠자는 늑대를 건드렸으면 살집이 물어뜯길 각오를 해야 한다면서 말입니다.”보다시피 반태승은 기억을 잃은 반승제가 얼마나 다루기 어려운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반씨 집안사람
반승제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시선은 자연스레 성혜인의 목으로 향했다. 그녀가 반항하지 못할 때 그냥 죽여버릴 생각으로 말이다.하지만 꿈속에서 나쁜 일이라도 당하고 있는지 눈초리를 파르르 떠는 성혜인의 모습을 보니 분노도 금세 식었다. 그래서 반승제는 이만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침실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고요한 밤은 빠르게 지나고 어느덧 아침이 왔다.성혜인은 반승제가 깨어난 다음에도 깨지 않았다. 스케줄대로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친 반승제는 그녀를 신경 쓰지도 않고 호텔을 떠났다.성혜인은 반승제가 떠난 지 한 시간이 되어서야 서서히 눈을 떴다. 어젯밤의 기억은 짧은 영상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많은 부분이 삭제되었지만 반승제가 결국 와줬다는 것은 기억에 남았다.하지만 반승제보다 더욱 인상 깊었던 건 7명의 남자에게 둘러싸이던 순간이다. 욕망에 휩싸인 남자들의 눈빛보다 더 역겨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결국 화장실로 달려가서 한참이나 토했다. 피부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았고 구역질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밥을 먹지 않은 탓에 토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신물밖에 없었는데도 말이다.반승제의 호텔방에 한시라도 남아있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부랴부랴 포레스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 핸드폰에 새 전화번호를 만들도록 지시하고 속이 따듯해지는 영양죽까지 먹었다.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기 방에서 샤워하고 난 성혜인은 해가 질 때까지 깊은 잠을 잤다. 그리고 깨난 다음 진통제 한 알을 더 먹고 나서야 생리통이 진정된 것 같았다.초저녁, 성혜인은 회사로 향했다. 안유결의 사건이 아직도 인터넷에서 엄청난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이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고 있었다.성혜인은 어느덧 안유결이라는 훌륭한 감독과 온수빈이라는 훌륭한 배우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S.M이 아직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 순리롭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훌륭한 대본만 있으면 되었다.“감독님, 저희가 대학로 근처에서 투자자를 찾는 작
성혜인은 휴지를 뽑아서 반승혜에게 건네줬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내치고 말았다.“승제 오빠는 아직도 페니 씨가 누군지 모르죠? 사람 속이는 거 재밌어요? 오빠를 불륜남으로 만드니까 재밌냐고요! 두 사람 이혼까지 했다면서 오빠가 알게 될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 아니, 페니 씨는 애초에 자기 생각밖에 안 했죠? 그러니까 오빠 몰래 이런 빅엿을 준비했겠죠... 역시 성씨 집안사람은 하나같이 이기적이네요.”반승혜는 흐느끼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성혜인도 뒤따라 나가기는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에 가로막혀 결국 쫓아가지 못했다.반승혜는 오늘 큰 용기를 내서 성혜인을 찾아온 것이었다. 원래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정리했었지만, 사무실 문을 열어 낯선 모습의 그녀와 마주한 순간 수치심이 확 솟아올라 이성이 가출하고 말았다.그녀는 차에 돌아간 다음에도 한참이나 흐느꼈다. 반승제가 기억을 되찾자마자 바로 진실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반승제가 계속 성혜인에게 속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이때 반승혜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성혜인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었다.「미안해요, 승혜 씨. 저도 마음 같아서는 알려주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어요.」‘찌질한 변명이야...’성혜인의 문자를 보고 나니 반승혜는 더욱 정떨어지는 것 같았다.그동안 두 사람은 여러 번 만났었다. 반승혜가 성혜인에게 ‘새언니’의 뒷담화를 한 횟수만 해도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분명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겠지? 본인 앞에서 뒷담화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반승혜는 결국 서러움이 터져 목 놓아 울었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미간을 누르며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 안에 들어선 장하리는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보고 바로 위로 삼아 말을 걸었다.“사장님, 제가 점심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요?”“대본 일은 어떻게 됐어요?”“조금 전 이미 알아보러 갔으니, 지금쯤 직원들이 성원예대에 도착했을 거예요.”성주대학교의 예술대학은 영화의 요람이라
보다시피 반태승은 이번에 아주 큰 결심을 내렸다.“이번 일은 승제 씨한테 맡기고 할아버지는 몸부터 추스르세요.”반태승은 미소를 지으며 성혜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참한 아이가 이젠 더 이상 자기 손주며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성혜인은 본능적으로 반태승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유경아에게 따듯한 차를 내오라고 전했다. 반태승은 그렇게 거의 십분 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말을 꺼냈다.“승제는 나를 따라 부대에서 자라온 아이라 반씨 집안사람들의 손을 탄 적 없다. 그런데도 혼자 해외에 가서 BH그룹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따냈지. 알고 보면 아주 장한 녀석이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속상하구나. 승제는 20살도 안 됐을 때 벌써 수많은 회사를 인수해서 해외를 떠들썩하게 했단다.”반태승은 잠깐 말을 멈추고 차 한 모금 마셨다.“승제는 내가 키워준 정을 봐서 BH그룹을 물려받은 거다. 비록 그 자리는 승우의 것이었지만 난 항상 승제한테 마음이 갔거든. 그러는 한편 불안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승제가 언제 갑자기 미쳐 날뛰면 집안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승제의 고삐는 내가 아직 단단히 잡고 있다. 원래는 그 고삐를 너한테 줄 생각이었지만 둘 다 싫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반태승이 아무에게도 한 적 없을 법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성혜인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추측하고 있는 반승제의 자산도 덕분에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해외에 가서 BH그룹보다 좋은 성적을 따냈다면 분명 BH그룹보다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씨 가문도 그에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제가 알아도 되는 얘기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저희는 진짜 서로한테 조금의 관심도 없어요.”“너를 붙잡으려고 한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수다를 떨고 싶었을 뿐이니 부담 갖지 말거라. 승제가 얼마 전에는 큰아버지의 별장을 쓰
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친자 검사 결과를 받았다. 그리고 성휘와 윤단미는 부녀 사이가 맞았다.성혜인은 뒤통수가 야구방망이에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영혼이 가출이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식탁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진작 차갑게 식었다. 별장은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냉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임지연은 성혜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녀 덕분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성혜인은 아주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자신이 임지연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성혜인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이는 정신적 지주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감탄했다. 전생에 분명 엄청난 덕을 쌓았기에 임지연의 사랑을 받으며 클 수 있었다고 말이다.눈물로 베개를 적신 과거의 수많은 밤, 성혜인은 임지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겨우 잠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면이 단단해져서인지 그러는 날이 없어졌다. 임지연을 꿈에서 만난 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잔인한 현실은 결국 성혜인의 내면세계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임지연의 친딸이 그녀가 그렇게도 미워하던 윤단미라니... 성휘가 먹고 살 걱정 없이 만들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던 친딸이 윤단미라니...‘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성혜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망스러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생리가 끝나기도 전에 윤단미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반태승은 이미 윤단미를 감옥에 보내려고 결심한 듯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성휘와 임지연의 친딸이 감옥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성혜인은 도무지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참 안절부절못하다가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반태승은 잠깐 침묵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앞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