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시피 반태승은 이번에 아주 큰 결심을 내렸다.“이번 일은 승제 씨한테 맡기고 할아버지는 몸부터 추스르세요.”반태승은 미소를 지으며 성혜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참한 아이가 이젠 더 이상 자기 손주며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또다시 한숨이 나왔다.성혜인은 본능적으로 반태승이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유경아에게 따듯한 차를 내오라고 전했다. 반태승은 그렇게 거의 십분 간 침묵에 잠겨 있다가 말을 꺼냈다.“승제는 나를 따라 부대에서 자라온 아이라 반씨 집안사람들의 손을 탄 적 없다. 그런데도 혼자 해외에 가서 BH그룹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따냈지. 알고 보면 아주 장한 녀석이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속상하구나. 승제는 20살도 안 됐을 때 벌써 수많은 회사를 인수해서 해외를 떠들썩하게 했단다.”반태승은 잠깐 말을 멈추고 차 한 모금 마셨다.“승제는 내가 키워준 정을 봐서 BH그룹을 물려받은 거다. 비록 그 자리는 승우의 것이었지만 난 항상 승제한테 마음이 갔거든. 그러는 한편 불안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승제가 언제 갑자기 미쳐 날뛰면 집안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승제의 고삐는 내가 아직 단단히 잡고 있다. 원래는 그 고삐를 너한테 줄 생각이었지만 둘 다 싫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반태승이 아무에게도 한 적 없을 법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성혜인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이 추측하고 있는 반승제의 자산도 덕분에 짐작이 가는 것 같았다.반승제가 해외에 가서 BH그룹보다 좋은 성적을 따냈다면 분명 BH그룹보다 많은 자산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씨 가문도 그에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다.“제가 알아도 되는 얘기가 맞는지 모르겠네요... 죄송해요, 할아버지. 저희는 진짜 서로한테 조금의 관심도 없어요.”“너를 붙잡으려고 한 말이 아니다. 나는 그저 수다를 떨고 싶었을 뿐이니 부담 갖지 말거라. 승제가 얼마 전에는 큰아버지의 별장을 쓰
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친자 검사 결과를 받았다. 그리고 성휘와 윤단미는 부녀 사이가 맞았다.성혜인은 뒤통수가 야구방망이에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영혼이 가출이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었다.식탁에 차려진 아침 식사는 진작 차갑게 식었다. 별장은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었는데도 냉기가 맴도는 것 같았다.임지연은 성혜인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녀 덕분에 사랑이란 무엇인지 배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성혜인은 아주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을 것이다.자신이 임지연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성혜인은 아주 고통스러웠다. 이는 정신적 지주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감탄했다. 전생에 분명 엄청난 덕을 쌓았기에 임지연의 사랑을 받으며 클 수 있었다고 말이다.눈물로 베개를 적신 과거의 수많은 밤, 성혜인은 임지연의 모습을 떠올리며 겨우 잠들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면이 단단해져서인지 그러는 날이 없어졌다. 임지연을 꿈에서 만난 것도 아주 오래전의 일이 되었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잔인한 현실은 결국 성혜인의 내면세계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임지연의 친딸이 그녀가 그렇게도 미워하던 윤단미라니... 성휘가 먹고 살 걱정 없이 만들어줘야 한다고 당부했던 친딸이 윤단미라니...‘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성혜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병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망스러운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그녀는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생리가 끝나기도 전에 윤단미의 정체를 알게 됐으니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반태승은 이미 윤단미를 감옥에 보내려고 결심한 듯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성휘와 임지연의 친딸이 감옥에 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성혜인은 도무지 짜증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참 안절부절못하다가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반태승은 잠깐 침묵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었다.하지만 성혜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앞으
성혜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사람이 바랄 걸 바라야죠. 이 말은 나보다는 윤단미 씨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윤단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유리를 힘껏 두드리면서 외쳤다.“야! 이 쓰레기 같은 년아! 난 이런 짓을 하고도 부모님께 사랑받을 수 있지만 넌 아니야! 넌 자기가 어디에서 온 지로 모르지! 잡종! 더러운 잡종! 반승제한테 버림받은 잡종!!!”성혜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수표에 10억이라는 숫자를 적었다.“윤단미 씨는 곧 출국하게 될 거예요. 그리고 평생 귀국을 제한받게 되겠죠. 앞으로 제원에서 만날 일은 없겠네요.”“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데?! 난 아직 지지 않았어!”윤단미는 결국 감정이 격해져서 경찰에 끌려가고 말았다. 성혜인은 비참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마음도 전혀 편하지 못했다.윤단미가 감옥에 가는 것은 단연 최고의 결말일 것이다. 하지만 성혜인은 그녀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풀어줄 뿐만 아니라 정기적으로 돈까지 주게 생겼다. 그러니 오죽 서러웠겠는가?성혜인은 어두운 안색으로 경찰서를 나섰다. 하필이면 이때 그녀는 경찰서 안에 있던 설우현과 마주쳤다.설우현은 회색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성혜인은 코너를 돌다가 그의 품에 부딪혔고 그는 무의식적으로 성혜인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리고 시선을 숙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페니 씨?”“아, 안녕하세요...”성혜인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설우현이 왜 경찰서에 있는지 궁금한 표정으로 말이다. 그녀의 호기심을 보아낸 설우현은 길가에 세워져 있는 차를 가리키면서 말했다.“제원의 도둑들은 참 대담하더라고요. 차 바퀴까지 도둑 맞힐 수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성혜인은 당연히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설우현의 차를 힐끗 봤다. 설우현의 롤스로이스는 바퀴 네 개가 모두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로고까지 뽑힌 것을 보고 그녀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을 뻔했
반승제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그저 덤덤하게 말했다.“반 대표님이 저한테 질렸다고 해서요. 저도 따로 살길을 마련해야죠.”덤덤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는 내용에 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마음이 불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설우현은 업계에서 아주 유명한 카사노바였다. 그리고 그의 직감이 성혜인은 절대 질렸다는 이유로 버림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성혜인이 누군가를 질렸다는 이유로 버리면 모를까...“그런 사람은 신경 쓰지 말아요. 세상에 남자가 반승제 씨밖에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어휴... 큰형이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한 방 먹여주고 싶네.’설우현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을 이었다.“반승제 씨는 해외에 있을 때 겁도 없이 경영 중심지에서 스타트업했어요. 근데 밥그릇을 빼앗기게 생긴 다른 사람이 가만히 있었겠어요? 그래서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지하 격투장에 끌려가게 되었죠.”성혜인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록 지하 격투장에 가본 적은 없지만 부자들이 평소 숨기고 있던 잔혹성을 완전히 드러내는 곳이라는 것은 알았기 때문이다.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설우현이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설우현은 놀리기라도 하는 듯이 말없이 머리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다음은요? 지하 격투장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대요?”설우현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창틀을 톡톡 두드렸다.“지하 격투장은 무법지대에요. 돈 있는 사람이 톱인 셈이죠. 반승제 씨는 그곳에서 빠르게 돈을 모아갔어요. 그리고 지하 격투장 전체를 자기 영역으로 만들었어요. 듣기로는 목숨까지 걸었다고 하던데요.”성혜인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설우현을 바라봤다.반승제가 어떤 사람인지는 성혜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지하 격투장까지 제패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설우현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하는 듯이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눈매는 누가 카
“그 주제는 요즘 하도 예민해서 촬영하기 어려워요. 한 명의 팬이 친 사고로 통째로 제한받았으니까요. 그래서 저한테도 그런 대본은 없어요.”배윤수가 말했다. 설우현과 반승제의 앞에서는 그도 허리를 굽히고 공손하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대신 제가 얼마 전 금방 완성한 대본 두 개를 보여드릴까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두 분이 하나씩 받아줬으면 더없이 행복하겠네요.”배윤수는 공손함 뒤로 득의양양함을 숨기고 있었다.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두 사람이 그의 저택으로 직접 찾아온 것만으로 해도 그에게는 엄청난 영광이기 때문이다.배윤수는 모두가 공인한 믿고 보는 작가였다. 그러니 그의 대본은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어서 좋은 대본이 끊길 새도 없었다.설우현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반승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저는 오늘 그냥 얘기를 나눠보러 온 것이라서요. 필요하면 대표님이 둘 다 가져가도 상관없어요.”설씨 가문은 차고 넘치는 게 훌륭한 대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오늘 그냥 인맥을 쌓을겸 배윤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물론 반승제도 마찬가지다. 그도 대본보다는 배윤수와 인맥을 쌓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대본이라면 BH그룹에 주지 못해 안달인 작가가 널리고 널렸으니 말이다.반승제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본을 훑어봤다. 확실히 그의 마음에 쏙 들 정도로 훌륭했다. 그의 곁에 앉아 있던 성혜인도 힐끗힐끗 곁눈질하면서 대본의 총체적인 틀을 파악했다.얼마 후 반승제는 대본을 덮으면서 머리를 돌렸다. 그러다 자칫 성혜인과 코끝이 부딪힐 뻔했다. 대본에 집중하던 성혜인이 어느덧 반승제에게 훌쩍 다가왔던 것이다.반승제는 손가락을 뻗어 성혜인의 머리를 밀어냈다. 제삼자의 각도에서 보기에 두 사람은 마치 사랑싸움 중인 커플 같았다.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자 반승제가 배윤수에게 말했다.“이 대본은 제가 투자할게요. 그리고 다른 대본은 설우현 씨한테 양보할게요.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가면 섭섭하잖아요.”설우
반승제는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훑어보면서 말했다.“넌 예나 지금이나 남자 꼬실 줄밖에 모르는 모양이군.”성혜인은 마찬가지로 차가운 눈빛으로 반승제를 힐끗 노려보면서 말했다.“그게 대표님과 무슨 상관이죠? 제가 대표님을 꼬시는 것도 아니잖아요.”반승제는 순간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 성혜인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는 손이 다 흠칫 떨렸다.“넌 내 비서였던 사람인데 완전히 상관없는 것도 아니지.”“저는 이미 해고당했거든요. 설마 대표님 남 사생활을 염탐하는 취미가 있으신 건 아니죠?”성혜인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 차에 올라탔다. 하지만 차는 시동이 걸리는 대신 경보음만 내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자 바퀴가 펑크 나 있었다.이 동네에는 별장밖에 없어서 택시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보험 회사에 연락하고 나서 택시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려고 했다.뒤늦게 차에 오른 반승제는 성혜인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천천히 따라가며 경적을 울렸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자칫 넘어질 뻔했다. 반승제는 그녀의 곁으로 가서 멈춰서더니 창문을 내리면서 말했다.“택시가 잡히는 곳은 1km 밖에 있어. 걸어서 언제 도착하려고 그래?”반승제는 자기 차에 타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일면서 쌩 멀어졌을 뿐이다.제자리에 멈춰 선 성혜인은 주먹을 꼭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토록 재수 없는 사람은 둘도 없을 거로 생각하면서 말이다.‘이 세상에 남자란 남자는 다 죽고 반승제만 남았다고 해도 거들떠보지 않을 거야!’성혜인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반승제가 갑자기 후진해 왔다. 그리고 성혜인의 곁에 또다시 멈춰 서며 차갑게 말했다.“타.”반승제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말없이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반승제는 한 손을 운전대에 걸친 채 천천히 그녀의 속도에 맞춰 운전했다.침향 팔찌가 있던 자리에는 어느샌가 고급 시계로 대체되었
반승제의 앞에 앉아 있었던 서주혁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이젠 보기만 해도 반응이 오는 거야?”반승제는 언제부턴가 꽉 잡고 있던 주먹을 풀면서 열기를 식히려는 듯 외투를 벗었다. 그리고 머리를 들어 샹들리에를 바라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눈가는 갑작스러운 열기로 인해 아직도 발그레했다.‘술맛이 조금이라도 달랐으면 약을 탔는 줄 알았겠군...’...같은 시각.성혜인은 머리를 숙인 채 앞에 앉아 있는 여자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자기소개를 했다.“저는 페니라고 해요. 괜찮으니까 편하게 대해줘요.”여자는 안경 너머 성혜인을 힐끗 보더니 곧바로 다시 머리를 숙였다.이때 직원이 메뉴판을 들고 와서 주문을 기다렸다. 성혜인은 메뉴판을 여자 앞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예진 씨 먼저 먹고 싶은 걸 골라요.”박예진은 겨우 머리를 들어 메뉴판을 힐끗 봤다. 가장 싼 축에 속하는 세트 메뉴도 120만 원씩 하는 것을 보고는 놀란 나머지 속눈썹이 다 파르르 떨렸다.“페니 님, 저희... 다른 식당에 가면 안 될까요?”박예진은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안경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툭 떨어졌다.그 찰나의 순간에 성혜인은 박예진의 목에서 졸린 적 있는 듯한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못 본 척 무덤덤하게 말했다.“오늘은 제가 사는 자리이니 걱정하지 말고 앉아요. 우리 아직 대본 얘기도 해야 하잖아요.”성혜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약간 진정된 듯 박예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입술은 아직도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처음 보는 가격에 적지 않게 놀란 모습이었다.성혜인은 오늘 반승제의 곁에서 함께 봤던 대본을 떠올리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저 오늘 배 작가님 댁에 갔었어요. 그곳에서 작가님의 대본을 보게 되었는데 엄청 재미있더라고요. 주인공이 피치 못할 운명으로 살인범이 된 내용인데 BH그룹의 눈에 들어서 스릴러 드라마로 만들어질 거래요. 모든 회차가 다 재미있어서 성공은 떼놓은 당상인 것 같던데요.”대본 얘기가 나오자
낮에 성혜인을 천 리 밖으로 내보낼 것처럼 굴던 반승제가, 갑자기 다른 사람들을 전부 내쫓고 둘만의 자리를 만들었다.성혜인은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알지 못했지만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자리에 앉은 후, 반승제가 그녀에게 물었다.“서주혁이 너 결혼했다던데?”반승제의 친구들은 그가 자신의 아내와 이혼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성혜인이 그의 아내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서주혁은 여전히 페니를 유부녀로 알고 있었다.“이혼했습니다.”그러자 반승제가 눈썹을 추켜올리며 물었다.“왜 이혼했는데?”“이건 대표님과 상관없는 문제인 것 같은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말을 끝마친 성혜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반승제의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고, 그녀의 얼굴은 마치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이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이렇게 설 수 있는 거야?!’반승제도 전혀 숨기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성혜인을 아래 우로 훑어보더니 말했다.“너를 비서로 삼으면서, 내가 아무런 조건도 대지 않았나?”성혜인은 흠칫 온몸이 굳어버렸다. 조건이 있었겠지 왜 없었겠는가.침대에 오르지 않는다고 했을 뿐, 반승제가 키스하려 들면 성혜인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그는 철저한 사업가라, 이익이 없으면 움직이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비서 훈련도 받지 않았는데... 예전의 내가 그냥 곁에 남겨뒀다고? 무슨 계략이 있었던 게 아닐까?’반승제는 시선을 아래로 푹 내렸다. 본능적으로 끓어오른 욕정에 눈가는 어느새 새빨개졌다.“비서 일은 얼마나 했어?”성혜인의 침묵은 이미 그에게 답을 준 것과 같았다. 분명히 조건이 있었으며, 더 나아가 그 조건이 남녀 사이의 일과 관련된 것이라는걸.단지 그녀가 직접 말하기 어려웠을 뿐이다.‘역시 몸으로 이 자리를 얻은 거였네.’“아직도 한 달 반 정도 남았습니다.”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승제는 그녀를 잡아 자신의 품으로 확 끌어당겨 안았다.불편했던 성혜인이 곧바로 일어나려 하자 반승제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 아래로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