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규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반승제의 속셈을 똑똑히 알고 있기에 일부러 더 조용히 배경 역할을 해줬다.반승제가 느긋느긋 과자를 다 먹은 다음에야 성혜인은 서민규에게 물었다.“혹시 커피 있어요?”“그럼요, 제가 내려올게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고 빈 과자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그러자 반승제의 입가에 서린 미소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러다가 그녀를 확 끌어당기며 입을 맞췄다.“너한테 비서 일이 아주 잘 맞는 것 같아...”반승제가 말을 끝내기 바쁘게 문 앞에서 컵을 떨어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성혜인은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손에서 커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로 문 앞에 멈춰 선 서민규의 얼굴에는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조금 전의 장면을 보고 많이 놀란 듯한 반응이었다. 그는 사과하면서 머리를 푹 숙이더니 깨진 컵을 정리하고 나서 부랴부랴 밖으로 나갔다.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반승제가 일부러 키스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 쓸모없는 경쟁의식이다 싶기도 했다.머리를 돌려보니 어느샌가 손안의 서류에 집중한 반승제가 보였다. 마치 서민규가 갑자기 나타날 줄 몰랐다는 듯이 말이다.어찌 됐든 이선과의 만남은 아주 순조로웠다. 인테리어는 네이처 빌리지에 인력을 더해준 덕분에 보름 안에 완공할 수 있다고도 했다.“그럼 우리는 포름알데히드를 테스트할 때 다시 만나요. 페니 씨가 직접 고른 목재로 인테리어 한 거라 큰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 테스트를 준비했어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키더니 이선과 악수했다. 이선은 그녀를 바라보다 말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반승제를 힐끗 봤다.BH그룹으로 돌아간 다음 두 사람은 대표이사실 앞에서 윤단미와 마주쳤다. 윤단미의 모습은 아주 초췌했다. 그녀는 몇억 원의 돈으로 만족하지 못했고 아직도 김경자를 이용해 반승제와 결혼하기를 꿈꾸고 있었다.“승제야...”성혜인은 빠르게 뒤로 물러나 엘리베이터에 들어갔다. 반승제가 말릴 새도 없이 말이다. 그렇게 혼자 남은 반승제는
반승제는 아직도 성혜인이 먼저 떠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가슴이 터질 듯한 불만이었다. 하지만 감정 숨기기에 능했던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에 집중했다. 복수는 일단 저녁으로 미뤄두고 말이다.그렇게 고대하던 퇴근 시간이 된 다음 반승제는 성혜인에게 복수할 새도 없이 반씨 저택에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김경자는 잔뜩 힘 빠진 걸걸한 목소리로 전화 건너편에서 말했다.“승제야,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했다. 내가 이렇게 사과하마.”반승제는 당연히 김경자의 사과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반승우밖에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반승우가 사고를 당한 다음에는 단호하게 집을 나가 6년이나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그런 사람이 잘못한 줄을 알 턱이 있나.’“나한테 네 형이 남긴 물건이 있다. 물건도 볼 겸 오늘 식사를 함께하자꾸나.”김경자의 말에 반승제는 약간 솔깃했다. 그래도 감정 하나 없는 남보다 못한 가족이었기에 직접 만나러 가는 것이 찝찝했다. 이때 전화 건너편에서 백연서의 목소리도 들려왔다.“승제야, 어머님이 너한테 사과하고 싶으시대.”이 말을 들은 반승제의 머릿속에는 오래전의 한 사건이 떠올랐다. 반승우가 납치당하고 반씨 가문이 난리가 났을 적 김경자와 백연서는 울부짖으면서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왜 둘째 놈이 아닌 승우를 데려간 거야! 승우 없이 난 어떻게 살라고...!”특히 김경자가 목 놓아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납치범한테 얘기해서 승제랑 승우를 바꾸자고 해봐! 어차피 둘 다 우리 집안사람이니 값은 같을 거 아니야!”어린 나이의 반승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한쪽에 있었다. 그를 발견한 김경자는 귀가 찢어질 정도의 울음소리를 냈다.“아이고, 승우야! 우리 승우를 어떡하니!”이후 반씨 가문에서는 진짜 납치범과 거래해서 반승제와 반승우를 바꾸려고 했다. 하지만 납치범이 그런 터무니없는 요구를 허락할 리가 난무했다.반씨 가문은 난리가 났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에 반승제는 너무 어렸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배가
이 말을 듣자마자 성혜인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뭐라고요?”도라희는 피식 웃는 한편 성혜인의 반응에 시름을 놓은 듯 한숨을 쉬었다.“난 충분히 참아줬어요. 당신이 이렇게까지 내 시간을 낭비할 줄은 몰랐죠. 당신만 아니었어도 당신 아버지가 이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성혜인은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빛에 서린 악의는 더욱 선명해졌다. 성휘의 장례식 날 그녀가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유골함이 떠올라서 말이다.“아무튼 당신 아버지의 유골은 나한테 있어요. 장례식 직원이 빼돌려 줬거든요. 당신이 가져간 유골은 들개 몇 마리의 유골일 거예요. 다행히 때려잡은 만큼 무게가 딱 나왔죠. 누가 알았겠어요? 당신이 이렇게까지 고집스러울 줄은요. 이제는 나랑 얘기해 볼 마음이 좀 생겼나요?”도라희는 아주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래도 성혜인은 빠르게 진정했다. 그녀의 함정에 빠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어디에서 얘기할까요?”도라희는 문자로 성혜인에게 주소를 보내줬다.“여기서 만나요. 유하는 식물인간이 돼서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대요. 그러니 이쯤하고 넘어가 주죠. 당신은 성휘 씨의 친딸도 아니라면서요? 100억 원이나 받고 나면 돈도 벌고 좋죠, 뭐. 너무 답답하게 굴지 말자고요.”성혜인은 말없이 핸드폰을 꺼버렸다.도라희는 콧방귀를 뀌더니 자리로 돌아가 일을 계속했다. 마치 조금 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서 숨을 돌렸다. 도라희가 돌아이일 줄은 알았지만 유골을 바꿀 생각을 할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같은 시각, 반승제는 드디어 저택에 도착했다. 저택 안에서는 식사 시간대 특유의 향긋한 밤 냄새가 났다. 문을 열고 거실을 통해 들어가자, 식탁 한가득 차려진 저녁 식사가 보였다.김경자와 백연서는 이미 자리에 앉아 반승제를 기다리고 있었다.“승제야, 아직 밥 안 먹었지? 얼른 와서 앉으렴.”반승제는 외투를 벗어 도우미에게 건네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백연서는 그가 끼고 있는 침향 팔찌를 보고 용
반승제는 바로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핑 돌아서 금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에는 조금 전 먹었던 음식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김경자와 백연서가 태어나서 처음 차린 지각한 생일상에 약을 탔을 줄은 물론 전혀 예상치 못했다.심장이 찔린 듯이 아팠던 반승제는 옷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겨우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저는 윤단미를 좋아하지 않아요. 결혼도 절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형이 살아 있을지도 모르니...”반승제가 말을 끝까지 하기도 전에 김경자가 말머리를 잘랐다.“거짓말하지 말거라. 내가 아직도 모를 것 같더냐? 승우는 절대 살아있을 리가 없어. 이 세상에서 가장 승우가 돌아오길 바라는 사람인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그러니 이만 포기하고 단미한테 도움받아.”반승제는 눈앞이 빙빙 돌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윤단미와 함께하는 미래가 마치 환각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껏 가까이 다가온 윤단미를 쳐내면서 외쳤다.“꺼져!”윤단미는 바닥에 쓰러지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김경자는 눈을 부릅뜨면서 반승제의 멱살을 잡았다.“지금 이게 무슨 뜻이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거니? 네 놈 자식은 나를 할머니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모양이구나!”반승제는 김경자도 쳐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그녀의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저는 할머니를 할머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저를 단 한 번도 손자라고 생각한 적 없죠? 그러니까 승우 형의 그림자보다도 못한 취급을 하겠죠. 저도 살아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저한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반승제는 김경자와 더 이상 얘기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표정도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단호하게 몸을 돌리며 이만 떠나려고 했다.“앞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반승제의 말에 흥분한 김경자는 조용히 의자를 쳐들고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내리쳤다.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백
“닥쳐!”반기훈이 뿜어낸 위압감에 백연서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눈물만 줄줄 흘렸다.병원 복도의 분위기는 아주 무거웠다. 반기훈이 백연서에 대한 증오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이르렀고 그녀가 얼마나 서럽게 울든 악어의 눈물로 느껴졌다. 지금도 그는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여보, 미안해요. 근데 난 절대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백연서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이번만큼은 진짜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녀는 반기훈을 사랑했다. 한평생 사랑해 본 유일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하지만 반기훈은 백연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꼴도 보기 싫은 듯 눈을 감으면서 싸늘하게 말했다.“울 거면 다른 곳에 가서 울어. 시끄러워 죽겠으니까.”백연서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다. 수술실의 전등은 여전히 밝혀져 있었고 정적이 휩싸인 복도에는 부지런히 오가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얼마 후 반태승이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지팡이를 탁 내리치면서 말했다.“아주 황당하기 짝이 없군! 짝이 없어!”반씨 가문에 이런 일이 생겼다는 게 반태승은 너무나도 황당했다. 웃어른이라는 사람이 이런 짓을 벌였으니, 내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랫사람을 엄히 다루던 그만 우스워진 셈이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도라희와의 약속 장소에 거의 도착했다. 하지만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쉽게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성혜인은 핸드폰을 힐끗 봤다. 반승제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반승제는 오늘 백연서와 식사하기 위해 반씨 저택으로 돌아간 모양이었기에 그녀는 애써 신경을 거두며 약속 장소인 카페 안에 들어가려고 했다.이때 심인우가 전화를 걸어온 것을 보고 그녀는 우뚝 멈춰 섰다.“페니 씨, 대표님께서 지금 응급 수술을 받고 있다는데...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대표님 가족들과 식사하러 가신거 아니였나요?”성혜인은 자기 귀를 의심할지언정 심인우의 말을 단번에 믿지 못했다. 그러자 심인우는 잠깐 침묵하다가 자초지종
반태승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 반승혜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승혜야, 넌 먼저 돌아가거라. 그리고 승제는 휴식이 필요하니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말도록 일러두거라.”반승혜는 머리를 끄덕였다. 단순했던 그녀는 자신이 쫓겨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백연서는 진작 경호원에게 끌려갔기에 병원에는 반태승, 반기훈, 그리고 성혜인만 남게 되었다.반태승은 이제야 미간을 꾹꾹 누르면서 진세운에게 물었다.“승제한테 어떤 후유증이 남을 것 같나?”진세운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대답했다.“아직은 모릅니다. 그것도 승제가 깨어나야 알 수 있습니다.”반승제는 병실로 올라갔다. 과다 출혈로 인해 안색은 송장처럼 창백했다.반승제의 침대 곁으로 가서 멈춰 선 성혜인은 어쩔 줄을 몰랐다.“혜인아...”반태승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병실 안에 들어섰다. 입을 열어 성혜인을 부르기는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세 사람은 오후가 될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반승제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반태승은 따듯한 수건으로 반승제의 이마에 맺힌 땀을 정성껏 닦아주는 성혜인을 바라보며 연신 한숨을 쉬었다. 이런 아내를 못 알아본 그도 참 복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오후 네 시, 반승제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의사는 반승제를 검사하다 말고 반태승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무엇이든 먹지 않는다면 반승제가 깨어나기 전에 그가 먼저 쓰러질 것이라면서 말이다.반태승은 의사의 말을 듣기나 했는지 동상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기만 했다. 다행히 반승제는 늦지 않게 깨어났다. 머리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예리한 눈빛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인상을 쓰며 이마를 짚었다.반태승은 빠르게 다가가 반승제에게 물었다.“승제야, 괜찮니?”두통이 심했던 반승제는 인상을 쓴 채로 반태승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목소리를 겨우 짜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할아버지...”반태승은 순간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급기야 눈물을
그는 그저 담담하게 밥을 먹을 뿐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 반승제는 성혜인이 내민 손을 망설임 없이 뿌리치기도 했다.성혜인은 그의 앞에서 일부러 윤단미를 언급해보았지만,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보름이 지난 후 오늘, 반승제는 드디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고 성혜인은 그를 도와 퇴원 절차를 밟았다. 그러고 나서 그녀가 병실에 돌아왔을 때, 그는 이미 정갈하게 옷을 차려입은 뒤였다.보름 사이, 반승제의 안색은 매우 좋아졌다.옷 소매를 정리하고 있던 반승제는 자신의 손목에 있는 침향 묵주 팔찌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누가 선물한 것인지 떠오르지 않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성혜인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이윽고 반승제는 그 팔찌를 빼며 물었다.“나 이거 언제부터 끼고 있던 거예요?”“보름 전부터요. 대표님께서 받은 생일선물입니다.”그러자 반승제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손끝으로 침향 묵주를 어루만졌다.곁에 서 있던 성혜인은 갑자기 처음 반승제와 마주쳤을 때도 그가 이렇게 차가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다.다만 나중이 되어서 그는 그녀의 몸매에 반했는지, 그녀와의 키스에 빠져들며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었다.좋아하는 몸 앞에서 반승제는 거칠고 무지막지했다.그러나 이제 그는 더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전 기억도 잃어버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세우고 다시 냉정한 사람으로 돌아갔다.짧았던 그 시간은, 반승제의 단순한 일탈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성혜인은 반승제가 살펴본 자료들을 정리해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그렇게 병원 아래 큰 쓰레기통을 지나갈 때,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침향 묵주 팔찌를 망설임 없이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으로 묵묵히 걸어갔다.침향 묵주 팔찌가 그의 손을 떠나 쓰레기통에 떨어질 때, 성혜인의 심장도 팔찌와 함께 그 속으로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는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반승제는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다 고개를
방문을 나서던 성혜인은 마침 심인우와 마주쳤다.“페니 씨, 어디 가세요?”그는 이미 호텔에서 성혜인과 만나는 것이 익숙해졌다.성혜인은 빙긋 미소를 짓더니 대답했다.“저 해고당했어요.”“...”“심 비서님, 의사가 그러는데 대표님 아직은 큰 자극 받으시면 안 된대요. 그러니 업무상 일도 천천히 전해주세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잠시 대표님한테 얘기하지 마시고요.”심인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녀를 위로했다.“대표님은 그저 머리를 다친 것 때문에 잠시 이러시는 겁니다.”성혜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구치는 난처함과 그 속에 조금 섞여 있는 억울함은 감출래야 감출 수가 없었다.“먼저 돌아가 보겠습니다.”심인우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포레스트에 돌아온 후, 성혜인은 소파에 앉아 멍을 때렸다. 손등은 여전히 빨갛게 된 채 말이다.피부가 얇았기 때문에 가볍게 때려도 빨갛게 되기 일쑤였다.보름 사이, 윤단미는 반태승에 의해 이미 감옥에 들어간 뒤였고 누구에게 사정해봐도 그녀를 봐주는 사람은 없었다.김경자는 제원을 떠났다. 백연서는 애처롭게 반기훈에게 빌며 줄곧 이혼을 거부하고 버티는 중이었다. 이 난리에 백씨 집안사람들도 출동했지만, 사건이 확실히 도리에 어긋난 일이라는 걸 자신들도 잘 아는 모양이었다. 두 집안의 갈등은 여전히 식을 줄 몰랐다.하지만 이러한 일들에 반태승은 더 관여하지 않았고, 오직 반승제가 깨어날 수 있는지 없는지에만 관심을 가졌다.현재 반승제는 비록 깨어나긴 했지만, 머리에 이상이 생겨 나중에 더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성혜인은 등을 뒤로 기대더니 다른 한 손으로 빨갛게 된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눈가는 조금 촉촉해진 것 같았다.‘바보같은 놈.’그때, 밖에서 누군가 들어오더니 자료들을 그녀의 앞에 놓았다.“성혜인 씨, 이건 도라희, 안유결 이혼의 진실입니다. 도라희 씨가 불륜남과 집에서 바람을 피우고 있었는데 안유결 씨가 그 장면을 목격했
염정아는 그들의 집에서 제원까지 오려면 거리가 엄청나게 멀었고 동생은 멀리 외출한 적이 없어서 표는 어디서 어떻게 사고 차는 또 어떻게 타야 되는지도 모를 텐테 그냥 애교부리며 농담한다고 생각했다.“내가 말했지. 내가 갈거닉가 그때까지 집에서 애들 잘 돌보라고. 안 그럼 나 화낼거야. 알지? 화내면 널 버릴 수도 있다는걸.”동생이 살면서 제일 무서운 일은 염아정에게 버림받는 일이었고 그 말에 당황한 표정을 하며 대답했다.“아니야, 나 집에서 애들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절대 버리면 안 돼.”염정아는 전화기 너머로 동생의 당황함을 눈치채고 다시 달래기 시작했다.”말만 잘 들으면 안버릴테닉가 걱정하지 마.”“알았어. 나 누나 말 잘 들어. 진짜 잘 들을 거야.”전화를 끊은 후, 화가 치밀어 오른 원아정은 바로 동생의 뺨을 세차게 후려쳤다.원아정은 동생을 통해 염정아를 불러내여 공지민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어 내려 했지만 동생은 그렇게 통화를 끊어버렸다.동생은 뺨을 맞고도 이유를 몰랐고 감히 되받아치지도 못했다.원아정은 힘들게 이 남자를 불러 제원까지 데리고 온 것만 해도 억울함에 미칠것 같았는데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니 더 화가 치밀었다.원아정은 점점 화가 치밀어 올랐고 계속하여 염정아의 동생을 위협했다.“누나한테 다시 전화 걸어 꼭 나오라고 해요. 안 그러면 나도 당신 상관 안 할 거예요. 이렇게 큰 제원에서 누나한테 연락 안 하면 당신은 먹지도 못하고 길바닥에서 그대로 죽어 버릴 수 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누나도 영원히 못 볼 거 아니에요.”동생은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누나한테서 버림받는 것이 더 두려워서 더는 연락 하지 않기로 했다.원아정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바로 저절로 염정아에게 전화를 걸었다.염정아는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아까 물어보지 못한 말부터 했다.“너 누구 휴대전화로 연락한 거야? 왜 번호가 틀려?”원아정은 음험하고 악독한 소리로 말했다.“염정아, 잘 들어. 네
아래층 마트 이모는 몇 년 동안 줄곧 그들 남매를 돌봐 주었고 염정아가 사람을 시켜 동생을 데리고 제원에 오라고 한다니 살짝 의심은 생겨 걱정 되었지만 원아정의 깔끔한 옷차림을 보더니 돈이 모자랄 같지는 않았고 게다가 지적장애인 사람을 데려다 할 수 있는 것도 없을 테고 하물며 염정아의 친구이기도 하여 안심되었다.“이모, 이건 우리 집 열쇠에요. 제가 없는 동안 우리 집에 들러 애들 밥해줄 수 있어요?”마트 이모는 염정아가 좀 전에 집에 돌와왔을 때 물건도 많이 사들였고 돈 씀씀이가 큰 것으로 보아 제원에서 많은 돈을 벌어 동생을 데려다 이틀 정도 놀아 주려고 하는 거로 생각하여 이 상황이 잘못되진 않은 것 같았다.“그래, 알았어. 근데 갔다 일찍 돌아와야 해.”“네, 고마워요 이모.”동생은 조금 모자라지만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그는 인사를 마치고 옷 두 벌을 챙겨 원아정을 따라 떠났다.그들은 자가용으로 움직였고 동생은 처음 길을 떠나 보는 거라 물음이 끊기질 않았다.원아정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했고 그런 동생을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누나가 왜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벌어 올 수 있는지 생각 안 해요? 당신을 집에 두고 밖에서 다른 남자랑 있는 거잖아요. 당신은 바보라서 침대에서 만족하게 해줄 수 없으니 나가서 다른 정상적인 남자를 찾은 거 아니에요? 그 남자랑 있으면서 당신을 바보라고 비아냥거렸을지도 모르잖아요.”동생은 원아정의 말뜻은 전혀 몰랐지만, 염정아는 절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찾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원아정의 말을 듣고 동생은 더 이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창가에 기대어 빠르게 움직이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입가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원아정은 누나가 바람 피고 있다는 말까지 하며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웃고 있는 동생을 보니 바보인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이튿날 밤이 되자 그들이 앉은 차는 드디어 제원에 도착했다.원아정은 다시 거지로 위장해야 하기에 동생더러 같이 거지 옷차림을 하게 하고 여
온시환이 완벽하게 변장한 탓에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고 그렇게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공지민은 계속 별장에 머물러 있었고 매일 연승혁의 안부를 물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통화 너머로 공지민은 연승혁이 지금 많이 초조해진 것을 느꼈으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공지민은 항상 자신의 계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이 그렇게 빨리 찾아왔고 무정하게 무너뜨리게 할 줄은 몰랐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줄곧 원아정을 찾고 있었고 그와 원진이 원아정을 해외로 보내겠다고 한 후 원진의 부하들도 그녀를 찾고 있었다.하지만 원진은 원아정이 죽든 살든 별다른 관계가 없었기에 큰 신경을 써서 찾은 것은 아니였다.원아정은 항상 거지들 속에 숨어 지냈고 그동안 훔친 휴대전화를 사용하고 있어 아무도 찾을 수 없었다.원아정은 기억 속에 있는 몇 개의 번호에 연락하여 일일이 도움을 청했고 다행히 정보도 얻어 냈다.그것은 당시 공지민에 의해 숨겨져 있던 사람이 발견되었고 그 별장으로 배달하던 배달원이 또 다른 곳에서 염정아를 보았다는 것이다.소식을 들은 원아정은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염정아의 집으로 향했다.그 배달원은 제원에서 배달하다가 며칠 전에 돌아왔는데 마침 식당에서 또다시 염정아가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전했다.원아정의 거지 차림에 배달원은 약간 꺼림칙했지만 그래도 손 크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그 별장에 몇 번이나 배달해서 얼굴을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 그녀가 일부러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 보여 부잣집 도련님의 내연녀일 거로 생각했어요.”배달원의 말을 듣고 원아정은 바로 돈 주고 사람 찾아 염정아의 정보를 알아봤다.알아본 데 의하면 염정아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고 심지어 아주 가난한 사람이었다.그런데 왜 공지민은 제원에서 염정아를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자, 원아정은 자신이 찾아낸 정보 자료들을 정리해 보다가 다
온시환은 바로 인사를 건네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가서 요리사의 일을 거들었지만, 눈길은 항상 거실에 있는 공지민 한테로 향했고 채소를 다 씻었을 때 공지민은 혼자 위층으로 올라가고 있었다.온시환은 주방 사람들에게 핑곗거리를 대고 공지민 뒤를 따라 올라갔다.온시환은 변장에 가발까지 쓰고 렌즈 색마저 바꿔버린 자신을 공지민이 알아보지 못하자 그녀의 손목을 잡고 귓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불렀다.“지민아.”공지민은 멈춰 선 대로 낯선 얼굴을 보며 몇 초 동안 뜸 들이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온시환?”“응, 나야.”온시환은 카메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하기 시작했다.“너 연승혁의 별장에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혹시 다른 계획이라도 있는데 나한테 말해주지 않은 거니?”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온시환을 잊은 것도 아니였다.그녀가 여기 별장에 들어오게 된 것도 이상우에게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공지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 연승혁을 죽이고 구은우의 복수를 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애초에 온시환의 얼굴의 점이 구은우를 닮은 것도, 가슴에서 뛰고 있는 심장도 구은우의 심장이 었기에 온시환과 밤을 보낼수 있었고 그에게 잘해 준것도 구은우를 느끼고 싶은 작은 위로의 감정이었을 뿐이었다.이제 공지민은 연승혁에게 복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레 온시환과의 관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온시환이 먼저 갖은 방법을 다해 찾아 올 줄은 몰랐다.“지민아, 너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거야? 무슨 계획이라도 있으면 공유하자고 하지 않았어? 연승혁이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너도 잘 알고 있자나. 니가 지금 어떤 생각으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랑 함께 돌아가야 해. 내가 보호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온시환이 같이 나가려고 공지민의 손을 끌어당겼지만, 공지민은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그런 공지민의 행동에 온시환은 당황스러웠지만 그녀의 냉정한 눈빛을 보니 더욱 당황스러웠다.“온시환 씨, 이제 돌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