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윤희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아끼는 아들을 감옥에 보낸 그녀는 절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성혜인은 요즘 윤희선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었다. 윤희선이 봤던 것과 똑같은 검사 결과가 그녀의 앞에 놓였을 때는 그녀도 윤희선 못지않게 놀랐다. 윤단미가 윤씨 가문의 자식이 아닐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윤씨 가문은 친자 검사 결과로 인해 완전히 뒤집어졌다. 집안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윤단미에게 그들의 시선은 하나하나의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엄서향의 옷을 잡으면서 말했다.“엄마, 빨리 설명해 봐요! 제발 거짓말이라고 설명 좀 해보라고요!”엄서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자 검사 결과를 뒤엎을 만한 변명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단미는 자신이라도 변명을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뺨을 맞고 입을 꾹 다물었다.“꺼져! 네 더러운 어미랑 같이 당장 우리 집안에서 꺼져!”윤단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얼굴을 감쌌다. 그녀가 윤씨 가문에 쏟아부은 모든 노력이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정당했기 때문이다.“아빠...”“나는 네 아빠가 아니다!”윤정무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집안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했으니 그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윤희선은 아직도 비꼬는 표정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엄서향은 임신 못해요! 윤단미는 엄서향의 자식도 아닌 완전한 잡종이라고요. 이건 엄서향의 건강검진 결과에요. 낙태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임신 능력을 잃었다고 하죠. 윤단미는 도대체 어디에서 주워 온 자식인지 상상도 하기 싫네요.”윤단미는 눈앞이 핑 돌아서 자칫 쓰러질 뻔했다. 이때 엄서향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윤정무의 다리를 잡았다.“여보, 우리가 지금껏 같이 살아온 정을 봐서라도 제발 쫓아내지 말아줘요.”윤정무는 단호하게 엄서향을 차버렸다. 그리고 분노가 서린 발걸음으로 쿵쿵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다른 집안사람들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윤단미 모녀를 바라봤다.난생처음 느껴보는 수
윤단미가 읽기만 하고 답장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성혜인은 덤덤하게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윤단미가 맛볼 비극은 아직 한참 남았기에 급해 할 것은 없었다.윤단미가 크루즈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한 일과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일,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윤단미를 수백 번 죽인다고 해도 그녀는 속이 후련하지 않을 것 같았다.성혜인은 성모 마리아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는 무엇이든 당한대로 갚아주는 사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 오후 또 BH그룹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윤단미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너 딱 기다려! 딱 기다려!!!」성혜인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윤단미가 윤씨 집안사람이 아니라는 소식은 금방 반승제의 귀에도 흘러들어갔다.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온시환이었다.“백마왕자처럼 멋지게 나타날 순간은 바로 지금이야, 승제야.”반승제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 진세운이 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윤단미 씨가 윤씨 집안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식 들었어? 혹시 설씨 집안사람은 아닐까 해서 난 설 회장님이랑 친자 검사를 해볼 생각이야.”진세운은 이미 윤단미의 출신을 조사할 준비를 끝냈다. 그래도 반승제에게 말은 해놓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넌 진짜 개입 안 할 거야? 너만 개입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와줄 텐데?”반승제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성혜인으로 가득했다.“난 할 만큼 했어.”세한그룹은 BH그룹을 이용해 수많은 돈을 모았다. 하지만 반승제는 줄곧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 더구나 그는 윤단미와 만나면서 천문학적인 금액의 선물도 해왔다.세한그룹의 임원진에 똑똑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절대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해의 부동산 사건만 해도 그랬다.같은 시각, 윤단미는 김경자와 만나 직접 하소연 했다. 원래도 윤단미의 출신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던 김경자는 그녀가 윤씨 가문의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더니 조용히 반승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반승제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반승제의 어깨를 넘어 창문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제원의 도시 풍경과 함께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졌다.얼마 후 반승제는 성혜인을 훌쩍 안아 올리더니 책상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힘껏 키스를 퍼부으며 옷을 벗기려고 했다.“승제 형~”이때 임경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미친...!”임경헌은 눈을 가리면서 몸을 홱 돌렸다. 성혜인도 몸을 파르르 떨면서 부랴부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얼굴은 창밖의 노을보다도 붉게 물들었다.성혜인은 반승제도 임경헌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반승제의 사무실과 연결된 휴게실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몸에서는 열이 나다 못해 김까지 나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임경헌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더니 눈을 가리고 있는 손 틈으로 주변을 관찰했다. 반승제는 태연한 자태로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임경헌은 황급히 도망가는 성혜인을 힐끗 바라보면서 말했다.“형, 아무리 페니 씨랑 죽고 못 산다고 해도 그렇지! 대낮에 사무실에서 이러는 건...”“무슨 일이냐니까.”임경헌은 순간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지 잊어버렸다. 반승제가 성혜인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즘의 반승제는 너무 반승제 답지 않았다.임경헌은 한참 진정하고 나서야 원래 하려던 말이 떠올라 천천히 말했다.“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연락했대요. 그리고 직접 찾아가서 싸우기까지 했대요. 승우 형이 살아있다면서요. 덕분에 집안 꼴이 아주 엉망진창이에요.”반승제는 김경자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반승우에 한해 김경자와 백연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승우만 돌아올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아마 반씨 가문을 팔아버려야 한다고 해도 흔쾌히 허락
반승제는 묵묵히 맞고 있다가 반태승이 기침을 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일단 건강부터 신경 쓰세요.”반태승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지팡이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오늘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반태승은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반승제가 정말 떠나려는 것을 보고 반태승은 지팡이로 그의 등을 툭툭 찌르면서 말했다.“승우 일은 조사할 만하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하지 말거라. 나한테는 살아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니까. 네 어머니랑 할머니는 태초부터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니 신경 쓸 것 없다.”반승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할아버지는 건강만 신경 쓰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내가 너와 혜인이를 맺어준 이유는 혜인이가 단순한 아이이기 때문이야. 이것저것 욕심내지 않고 네 곁에 함께 있어 줄 만한 아이란 말이지. 너도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지 않겠냐.”반태승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반대로 그의 말이 유언처럼 느껴진 반승제를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할아버지, 저는 이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그 아이도 네가 좋다 하던?”사실 반태승은 무심하게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에야 겨우 대답했다.“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아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잖아요.”백연서에게서는 미치광이의 성질을, 반기훈에게서는 집착스러운 성질을, 부대에서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성질을 배웠다. 하지만 유독 사랑에 관해서는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말문이 막혔던 반태승은 손을 흔들며 반승제를 보냈다. 그가 차에 올라탄 다음 성혜인은 말없이 페달을 밟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약간 기묘했다. 반승제는 평소대로 담배를 꺼냈다가 성혜인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넣었다.“페니야.”마침 신호등
성혜인은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밖으로 나가 다른 잠옷을 꺼냈다. 이번에 반승제는 장난치지 않고 얌전히 잠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녀를 향해 머리를 까딱하며 말했다.“들어가서 씻어.”에어컨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성혜인은 춥지 않았다. 그래도 반승제가 건네는 셔츠를 받아서 들며 욕실로 들어갔다.혹시라도 반승제가 갑자기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성혜인은 꼼꼼하게 문까지 잠그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가 자신의 욕실을 남에게 내어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반승제의 결벽은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지라 전혀 모르고 있었다.성혜인은 반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욕실을 나섰다. 거실에서는 반승제가 회의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반승제의 셔츠를 걸쳤다. 그녀의 옷은 속옷을 포함해 샤워하면서 씻은 탓에 셔츠 안은 텅 비어 있었다.성혜인이 나온 것을 발견한 반승제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눈치를 줬다. 노트북 곁에는 반승제가 직접 정리한 회의 내용이 있었다. 이는 원래 비서의 업무였지만 그녀는 샤워하느라 놓쳐버리고 말았다.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던 성혜인은 빠르게 자리를 잡고 회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의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따로 정리해 심인우에게 메일로 보내주고 나서 반승제에게 말했다.“네이처 빌리지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서요. 저는 내일 오전에 BK사의 대표님과 만나야 해요. 그리고 공사가 끝나는 날짜도 확인해야 해요.”성혜인은 손으로 한쪽 팔을 잡은 채로 말했다. 속옷을 입지 않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이다. 반승제는 물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대표님은 같이 가실 필요는 없어요. 공사가 끝나는 날짜는 제가 따로 전달해 드릴게요. 그리고 결과물도 제가 먼저 확인한 다음에 보여드릴게요.”“아니, 나도 같이 갈래.”반승제는 덤덤하게 말하
왠지는 모르겠지만 반승제는 성혜인과 끌어안을 때마다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고, 만족스럽고,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그런 느낌 말이다.두 사람은 같은 바디 워시를 썼기 때문에 체향 또한 비슷했다. 비록 이런 상황에서 한데 끌어안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둘 다 이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괜히 신선한 느낌이 들었다.성혜인이 무릎에 앉자마자 반승제는 그녀의 옷자락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침향 팔찌가 살에 닿을 때마다 그녀는 몸을 흠칫흠칫 떨었다.그녀의 몸매는 아주 뛰어났다. 평소 보수적인 옷만 입은 탓에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다. 살이 있을 곳은 있고 없을 곳은 없는 것이 반승제는 첫날밤부터 엄청난 만족감을 느꼈다. 비록 인정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깊어진 밤, 환한 전등이 호텔 방을 비췄다. 거실에는 한 쌍의 남녀가 부둥켜안고 있었다. 남자의 몸집이 너무 큰 탓에 여자는 어느 때보다도 작아 보였다.반승제는 그 자세대로 한참 키스하다가 머리를 들었다. 눈가에는 말로 이루 설명하지 못할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빛에 깜짝 놀란 성혜인은 황급히 시선을 돌려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페니야, 네 가족들은 어때? 너한테 잘해줘?”‘만약 좋은 사람들이라면 서민규와 같은 불륜 상습범한테 시집보내지 않았겠지...’반승제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물었다. 처음으로 성혜인의 가족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대답했다.“나름대로 잘해줘요.”“그건 부족한 부분도 있다는 말인가?”“제가 말하고 싶을 때 다시 알려드릴게요.”반승제는 갑자기 성혜인을 안은 채로 몸을 일으키더니 침실로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성혜인은 몸부림을 치면서 물었다.“키스만 한다면서요?”“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그냥 잠만 자는 거야.”“별로 믿음이 안 가는데요.”손만 잡고 자자는 유형의 남자의 말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주 전형적인 거짓말이기 때문이다.반승제는 머리를 숙여 당황한 기색의 성혜인을 바라보더니 그녀를 더욱 힘껏
같은 시각, 교외의 별장에는 몇 명의 남자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보스, 저희가 갖은 방법을 써봤는데도 침입하지 못했습니다. 반태승 회장님이 직접 배치한 경호원이 너무 치밀해서 애초에 돌파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반태승은 사령관으로 부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그가 직접 배치한 경호는 완벽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전문가도 감히 침입할 엄두를 못 낼 정도로 말이다.가장 중요한 것은 포레스트에 도우미가 아주 적다는 것이다. 대부분 도우미가 삼 년 이상 근무했을 뿐만 아니라 유경아가 매일 체크하기 때문에 도우미를 이용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했다.10여 명의 도우미를 제외하고 난 나머지 사람은 전부 경호원이었다. 그것도 반태승이 직접 교육한 충성스러운 경호원 말이다. 그들이 찾는 물건이 포레스트에 있다고 해도 침입은 불가능하고 성혜인이 가지고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가면을 쓴 남자는 가장 중간에 있는 빨간 의자에 앉아 괴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자들을 바라봤다.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쨍그랑 깨져버렸다.가면남의 손에서는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남자들을 직시했다. 싸늘한 눈빛에 남자들은 너나없이 머리를 숙였다. 이때 한 사람이 용기 내서 말했다.“보스, 성혜인 씨를 납치하는 건 어떨까요?”말을 마치자마자 총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제안한 남자가 힘없이 툭 쓰러졌다. 가면남은 연기가 나고 있는 총구를 닦으면서 가볍게 말했다.“그게 가능하면 진작 물건을 찾아왔겠지. 당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가면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시체 곁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오만한 자태로 미간의 정중앙을 명중당하고 쓰러진 남자를 바라봤다.“성혜인 씨가 다치지 않는 전제하에서 조사해 줘. 서주혁이 벌써 노트를 의심하기 시작했으니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지난번의 노트는 성혜인이 보냈다는 걸 가면남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서주혁을 속이기 위해 모든 흔적을 지웠다. 덕분에
반희월은 차가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쏘아봤다. 마치 그녀가 희대의 구미호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페니 양은 잠깐 나가줄래? 내가 승제랑 할 말이 있어서.”성혜인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닫기도 전에 반희월의 속사포 질문을 들었다.“너 정말 저 디자이너랑 계속 만날 생각이니? 설씨 가문의 딸은 어떡하고?”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어이없는 기분도 들었다. 지난번 설우현도 설씨 가문의 딸에 대해 언급한 적 있었지만 그는 그녀와 아예 모르는 사이였다.“난 어제 우현이랑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너 설씨 가문의 딸이랑 연락하고 지낸다며? 설씨 가문의 딸이 얼마나 사랑받고 자란 줄 알아? 성혜인처럼 대했다가는 설씨 가문에서 너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성혜인은 여기까지 듣고 문을 닫았다. 반승제의 생일 파티에 그녀도 함께 있었기에 당연히 설우현이 어떤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설씨 가문은 반씨 가문도 비하지 못할 정도의 재벌가이니 그런 집안의 딸을 소홀히 대했다가는 큰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몰랐다.사무실의 방음 효과가 아주 좋았기에 성혜인은 더 이상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반대로 반승제는 자신이 설씨 가문의 딸과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고 설명하고 나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고모, 저 이제 회의하러 가야 해요.”“승제야, 페니를 잘 관찰해. 시커먼 속내가 있는 여자가 분명하니까. 너를 위해 이혼한 것도 분명 네 재력과 권력을 탐내서일 거야.”이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던 반승제는 서류를 들면서 또다시 화제를 돌렸다.“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BK사도 다녀와야 해요.”반승제의 방어적인 태도에 반희월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사무실에서 나선 다음은 성혜인만 죽어라 노려봤다.멀지 않은 곳에 있던 성혜인은 반희월이 나온 것을 보고 금방 다가갔다. 그러자 반희월이 분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의 뺨이라도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잡혀 허공에 멈춘 손은 아무리 기를 써도 움직이지 않았다.비서실 직원들은 흥미진진한 표정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