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어느새 세한그룹과 계약을 맺는 날이 되었다.윤씨 집안 사람들은 모두 반승제의 응답을 손꼽아 기다렸다.윤단미는 더욱 마음이 급했다. 왜냐하면 반승제에게 준 생일 선물이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 왔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이번 반승제의 태도는 비교적 단호한 것 같았다. 정말로 그녀와 거리를 두려는 것처럼 말이다.이 생각만 하면 윤단미는 목구멍이 불타는 것 같았다.하지만 상관없었다. BH그룹이 세한에 투자만 해준다면 세한그룹은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한편, 반승제도 성혜인의 문자를 내내 기다리고 있었다.한 시간 뒤, 성혜인은 두 장의 이혼합의서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이혼합의서라는 다섯 글자를 본 반승제의 얼굴에는 순간 웃음기가 피어났다.아주 옅게 말이다.그는 곧바로 성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진짜 이혼했어?”그 시각 성혜인은 로즈가든에서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전에 그녀는 이 집에 남자 주인이 있는 거처럼 위장하기 위해 약간의 남성용품들을 놓아뒀었다. 하지만 이제 쓸 일이 없으니 그 물건들을 치우는 것이었다.“네, 대표님은 아직 세한그룹과 계약을 체결하지 않으셨겠죠?”반승제는 핸드폰 너머로 조용히 웃었고, 성혜인은 몇 벌의 남성 셔츠와 슬리퍼를 쓰레기통에 넣었다.그리고 어젯밤 그녀는 서민규에게 두 사람은 더이상 고용 관계가 아니라고 통보했다.서민규는 최근 서천에 있으며 성혜인에게 별 도움을 주지 못했음에도 몇 번이나 600만 원을 받았었다. 원래도 이 사실이 마음에 쓰였던지라 그도 흔쾌히 승낙했다.반승제가 그녀에게 물었다.“어디야?”“로즈가든이요.”성혜인은 전화를 끊고 그 물건들은 1층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졌다.집 입구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밖에 놓인 상자에 웬 값비싼 신발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누가 산 거지? 민지?’이런 섹시한 스타일은 확실히 강민지의 취향이기는 했다. 전에 비슷한 디자인을 신은 걸 본 적 있는 것도 같고 말이다.그녀가 집안에서 정리를 하고 있는데 반승제가 왔다.성혜인은 조금도
집안에는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한참 후, 반승제가 입을 열었다.“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아름답고 희미한 눈매와 눈처럼 차가운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이번에 그는 성혜인을 강압적으로 끌어당기지 않고 좋은 태도로 이야기를 나눴다.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의 앞에 물잔을 밀어 넘기며 말했다.“대표님께서 다른 조건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내 비서가 되어줘. BH그룹이 최근 영화 사업을 하고 있거든, 시환이한테서 들었는데 너도 이쪽 업계에 관심이 있다며?”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온시환의 영화에 투자한 일은 비밀도 아니었다.반승제는 그녀가 준 물잔을 들더니 손끝으로 빙빙 돌렸다. 손목에 있는 첨향 묵주 팔찌는 유난히 보기 좋았다.“입사 서류는 따로 제출하지 않아도 돼. 그냥 나를 따라 BH그룹으로 가면 되니까. 월급은 내가 따로 줄 거야. BH그룹이라는 이름으로 영화계에 있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너한테도 득이 될 거야.”그는 담담하게 말하더니 갑자기 물잔을 내려놓고 그녀의 귓가에 가까이 대며 말했다.“물론 안 한다고 해도 나한테 키스는 해줘야 할 거야.”성혜인의 머릿속은 순간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반승제의 입술은 어느새 그녀의 귓불에 닿아있었다.“싫어?”말투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성혜인은 지금 반승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가장 훌륭한 비서 심인우가 있으므로 그녀가 들어간다 해도 반승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그저 사소한 것밖에는 없었다.그리고 그가 말했듯이, 그녀가 설우현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던 건 영화계의 자원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BH그룹의 신분을 이용한다면 확실히 성혜인에게도 이득이기는 했다.‘키스만 하면 된다고?’반승제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수표 한 장을 꺼내 20억을 써주었다.“이건 두 달 치 비서 월급이야. BH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자원을 가져갈 것인지 그건 네 일이고, 내가 원하는 건 오직 하나, 내가 부르면
반승제는 잘 알고 있었다. 성혜인과 같은 여자에게는 부드러운 타이름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다른 것 말고 키스만 하겠다고 한 발짝 물러나자 그녀는 바로 허락해 줬다.‘결혼한 지 삼 년이나 됐다는 여자가 어떨 땐 키스가 더욱 가슴 떨리게 한다는 것도 모르나?’반승제가 떠나려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따라 나가며 배웅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려다 말고 머리를 돌리면서 말했다.“오후에 내 사무실로 와.”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순간 반승제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문을 다시 열면서 물었다.“결혼반지는 버렸어?”반승제는 성혜인이 결혼반지 때문에 자신에게 화냈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버렸겠거니 하면서 가볍게 입을 뗐다.애초에 결혼반지라는 것이 없었던 성혜인은 주저 없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네.”“오후에 보자.”반승제는 미소를 머금고 엘리베이터를 닫았다. 그리고 성혜인은 그제야 집으로 돌아갔다.반승제는 바로 세한그룹에 연락해 더 좋은 파트너를 찾았다고 알렸다. 세한그룹은 그 즉시 난리가 났고 윤단미는 그에게 전화를 몇 통이나 걸었는지 모른다.그는 한참 후에야 수락 버튼을 눌렀고 전화 건너편에서는 윤단미의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승제야, 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번 투자가 세한그룹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 정말 왜 이러는 건데, 너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핸들을 잡고 있는 반승제의 눈빛은 아주 차가웠다. 그리고 더욱 차가운 말투로 윤단미에게 말했다.“네가 형 일로 거짓말한 순간부터 우리는 끝이었어.”윤단미는 몸을 흠칫 떨었고 안색은 삽시에 창백해졌다. 반승제가 다 알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반승제도 노트가 불에 탔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야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가 반승우의 일로 거짓말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윤단미는 한참 울다가 끝내 성혜인까지 언급하고 말았다.“예전에는 내가 무슨 실수를 하든 용서해
성혜인은 윤희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아끼는 아들을 감옥에 보낸 그녀는 절대 가만히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성혜인은 요즘 윤희선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었다. 윤희선이 봤던 것과 똑같은 검사 결과가 그녀의 앞에 놓였을 때는 그녀도 윤희선 못지않게 놀랐다. 윤단미가 윤씨 가문의 자식이 아닐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윤씨 가문은 친자 검사 결과로 인해 완전히 뒤집어졌다. 집안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윤단미에게 그들의 시선은 하나하나의 비수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엄서향의 옷을 잡으면서 말했다.“엄마, 빨리 설명해 봐요! 제발 거짓말이라고 설명 좀 해보라고요!”엄서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자 검사 결과를 뒤엎을 만한 변명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윤단미는 자신이라도 변명을 해보려고 했지만 결국 뺨을 맞고 입을 꾹 다물었다.“꺼져! 네 더러운 어미랑 같이 당장 우리 집안에서 꺼져!”윤단미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얼굴을 감쌌다. 그녀가 윤씨 가문에 쏟아부은 모든 노력이 피가 섞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부정당했기 때문이다.“아빠...”“나는 네 아빠가 아니다!”윤정무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외쳤다. 집안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런 창피를 당했으니 그는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윤희선은 아직도 비꼬는 표정으로 불난 집에 부채질했다.“엄서향은 임신 못해요! 윤단미는 엄서향의 자식도 아닌 완전한 잡종이라고요. 이건 엄서향의 건강검진 결과에요. 낙태를 너무 많이 한 나머지 임신 능력을 잃었다고 하죠. 윤단미는 도대체 어디에서 주워 온 자식인지 상상도 하기 싫네요.”윤단미는 눈앞이 핑 돌아서 자칫 쓰러질 뻔했다. 이때 엄서향이 드디어 정신을 차리고 윤정무의 다리를 잡았다.“여보, 우리가 지금껏 같이 살아온 정을 봐서라도 제발 쫓아내지 말아줘요.”윤정무는 단호하게 엄서향을 차버렸다. 그리고 분노가 서린 발걸음으로 쿵쿵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다른 집안사람들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윤단미 모녀를 바라봤다.난생처음 느껴보는 수
윤단미가 읽기만 하고 답장하지 않은 것을 보고 성혜인은 덤덤하게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윤단미가 맛볼 비극은 아직 한참 남았기에 급해 할 것은 없었다.윤단미가 크루즈에서 그녀를 죽이려고 한 일과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일, 그리고 그동안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를 생각하면 윤단미를 수백 번 죽인다고 해도 그녀는 속이 후련하지 않을 것 같았다.성혜인은 성모 마리아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녀는 무엇이든 당한대로 갚아주는 사람이었다.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 오후 또 BH그룹에 다녀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윤단미가 그녀에게 답장을 보냈다.「너 딱 기다려! 딱 기다려!!!」성혜인은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윤단미가 윤씨 집안사람이 아니라는 소식은 금방 반승제의 귀에도 흘러들어갔다. 소식을 알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온시환이었다.“백마왕자처럼 멋지게 나타날 순간은 바로 지금이야, 승제야.”반승제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잠시 후 진세운이 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윤단미 씨가 윤씨 집안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소식 들었어? 혹시 설씨 집안사람은 아닐까 해서 난 설 회장님이랑 친자 검사를 해볼 생각이야.”진세운은 이미 윤단미의 출신을 조사할 준비를 끝냈다. 그래도 반승제에게 말은 해놓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넌 진짜 개입 안 할 거야? 너만 개입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도와줄 텐데?”반승제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성혜인으로 가득했다.“난 할 만큼 했어.”세한그룹은 BH그룹을 이용해 수많은 돈을 모았다. 하지만 반승제는 줄곧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 더구나 그는 윤단미와 만나면서 천문학적인 금액의 선물도 해왔다.세한그룹의 임원진에 똑똑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절대 이런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연해의 부동산 사건만 해도 그랬다.같은 시각, 윤단미는 김경자와 만나 직접 하소연 했다. 원래도 윤단미의 출신에 약간의 불만이 있었던 김경자는 그녀가 윤씨 가문의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더니 조용히 반승제의 앞으로 걸어갔다. 반승제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반승제의 어깨를 넘어 창문을 바라봤다. 창밖에는 제원의 도시 풍경과 함께 아름다운 노을이 펼쳐졌다.얼마 후 반승제는 성혜인을 훌쩍 안아 올리더니 책상에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쥔 채 힘껏 키스를 퍼부으며 옷을 벗기려고 했다.“승제 형~”이때 임경헌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무실 문을 열었다가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 섰다.“미친...!”임경헌은 눈을 가리면서 몸을 홱 돌렸다. 성혜인도 몸을 파르르 떨면서 부랴부랴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얼굴은 창밖의 노을보다도 붉게 물들었다.성혜인은 반승제도 임경헌도 감히 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반승제의 사무실과 연결된 휴게실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몸에서는 열이 나다 못해 김까지 나는 것 같았다.반승제는 다시 의자에 앉으면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임경헌은 조심스럽게 몸을 돌리더니 눈을 가리고 있는 손 틈으로 주변을 관찰했다. 반승제는 태연한 자태로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무슨 일이야?”임경헌은 황급히 도망가는 성혜인을 힐끗 바라보면서 말했다.“형, 아무리 페니 씨랑 죽고 못 산다고 해도 그렇지! 대낮에 사무실에서 이러는 건...”“무슨 일이냐니까.”임경헌은 순간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러 왔는지 잊어버렸다. 반승제가 성혜인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할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즘의 반승제는 너무 반승제 답지 않았다.임경헌은 한참 진정하고 나서야 원래 하려던 말이 떠올라 천천히 말했다.“할머니가 할아버지한테 연락했대요. 그리고 직접 찾아가서 싸우기까지 했대요. 승우 형이 살아있다면서요. 덕분에 집안 꼴이 아주 엉망진창이에요.”반승제는 김경자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 반승우에 한해 김경자와 백연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승우만 돌아올 수 있다면 두 사람은 아마 반씨 가문을 팔아버려야 한다고 해도 흔쾌히 허락
반승제는 묵묵히 맞고 있다가 반태승이 기침을 그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의 등을 토닥였다.“일단 건강부터 신경 쓰세요.”반태승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지팡이를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꺼져!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오늘 하루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반태승은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반승제가 정말 떠나려는 것을 보고 반태승은 지팡이로 그의 등을 툭툭 찌르면서 말했다.“승우 일은 조사할 만하면 하고, 아니다 싶으면 하지 말거라. 나한테는 살아 있는 사람이 가장 중요하니까. 네 어머니랑 할머니는 태초부터 마음가짐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니 신경 쓸 것 없다.”반승제는 머리를 끄덕이면서 다시 한번 강조했다.“할아버지는 건강만 신경 쓰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내가 너와 혜인이를 맺어준 이유는 혜인이가 단순한 아이이기 때문이야. 이것저것 욕심내지 않고 네 곁에 함께 있어 줄 만한 아이란 말이지. 너도 언제까지 혼자 살 수는 없지 않겠냐.”반태승은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반대로 그의 말이 유언처럼 느껴진 반승제를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할아버지, 저는 이제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그 아이도 네가 좋다 하던?”사실 반태승은 무심하게 물은 것이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어두운 표정으로 침묵에 잠겼다. 그리고 한참 지난 후에야 겨우 대답했다.“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좋아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잖아요.”백연서에게서는 미치광이의 성질을, 반기훈에게서는 집착스러운 성질을, 부대에서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성질을 배웠다. 하지만 유독 사랑에 관해서는 가르쳐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말문이 막혔던 반태승은 손을 흔들며 반승제를 보냈다. 그가 차에 올라탄 다음 성혜인은 말없이 페달을 밟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약간 기묘했다. 반승제는 평소대로 담배를 꺼냈다가 성혜인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넣었다.“페니야.”마침 신호등
성혜인은 몸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밖으로 나가 다른 잠옷을 꺼냈다. 이번에 반승제는 장난치지 않고 얌전히 잠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그녀를 향해 머리를 까딱하며 말했다.“들어가서 씻어.”에어컨이 켜져 있었기 때문에 성혜인은 춥지 않았다. 그래도 반승제가 건네는 셔츠를 받아서 들며 욕실로 들어갔다.혹시라도 반승제가 갑자기 쳐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던 성혜인은 꼼꼼하게 문까지 잠그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가 자신의 욕실을 남에게 내어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도 모르고 말이다.반승제의 결벽은 병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었던지라 전혀 모르고 있었다.성혜인은 반 시간 정도 지난 후에야 욕실을 나섰다. 거실에서는 반승제가 회의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갈아입을 옷이 없었던 성혜인은 잠깐 고민하다가 반승제의 셔츠를 걸쳤다. 그녀의 옷은 속옷을 포함해 샤워하면서 씻은 탓에 셔츠 안은 텅 비어 있었다.성혜인이 나온 것을 발견한 반승제는 그녀에게 가까이 오라는 눈치를 줬다. 노트북 곁에는 반승제가 직접 정리한 회의 내용이 있었다. 이는 원래 비서의 업무였지만 그녀는 샤워하느라 놓쳐버리고 말았다.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던 성혜인은 빠르게 자리를 잡고 회의 내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시간의 회의가 끝난 다음에는 따로 정리해 심인우에게 메일로 보내주고 나서 반승제에게 말했다.“네이처 빌리지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서요. 저는 내일 오전에 BK사의 대표님과 만나야 해요. 그리고 공사가 끝나는 날짜도 확인해야 해요.”성혜인은 손으로 한쪽 팔을 잡은 채로 말했다. 속옷을 입지 않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이다. 반승제는 물론 그녀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대표님은 같이 가실 필요는 없어요. 공사가 끝나는 날짜는 제가 따로 전달해 드릴게요. 그리고 결과물도 제가 먼저 확인한 다음에 보여드릴게요.”“아니, 나도 같이 갈래.”반승제는 덤덤하게 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