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는 성혜인의 말을 무조건 신뢰했다. 그래서 그녀가 꽤 훌륭한 거래를 제안했다고 생각했다. 만약 손을 쓰지 않는다면 성씨 가문에서 갖은 수를 써가며 질척댈 것이기 때문이다.“너 성씨 집안이랑도 인연이 있었어?”“네.”반승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혜인을 잡고 있는 손에는 힘이 더해졌다.“너...”반승제가 말을 마저 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반태승에게서 온 전화였다. 아무래도 반재인 때문에 전화를 건 듯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풀어주더니 정장 외투를 챙겨 들고 몸을 일으켰다.“네가 원하는 대로 일단 단미한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게.”핸드폰은 반승제가 받을 때까지 걸 기세로 끊임없이 울려댔다. 그가 바빠 보이기에 성혜인은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바쁘신 것 같으니 저도 같이 나가요.”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반승제는 성혜인의 뒤통수를 잡고 집요하게 입을 맞췄다. 마치 그녀의 영혼까지 빨아들일 것처럼 말이다.‘오늘따라 사형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왜 이래?’성혜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반승제에게 기대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하 주차장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지만 반승제는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이 엘리베이터는 반승제의 전용 엘리베이터였기 때문에 따로 사용하는 사람이 없이 계속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반승제의 몸에서 나는 옅은 향수 냄새는 성혜인의 코끝에서 맴돌았다.반승제는 한참 후에야 성혜인을 놓아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심 비서를 따라 집에 돌아가.”“택시가 편해요.”성혜인은 원래 반승제에게 어디에 가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반승제의 핸드폰은 지금도 끈질기게 울려대고 있었다. 전화를 거는 사람이 여간 급한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성혜인은 그를 오래 잡아두고 있을 수가 없었다.“대표님 먼저 일 보러 가세요.”반승제는 차에 올라타다 말고 머리를 돌려 성혜인을 바라봤다. 어쩐지 평소와 달리 깊은 눈빛이었다....반씨 저택에 도착한
반태승은 잠깐 분을 삭이다가 손을 들어 미간을 꾹꾹 눌렀다.“됐다. 그것도 다 제 복이지, 뭐. 언젠가 그놈이 후회한다고 해도 난 도와주지 않을 거야.”“그럼 도련님을 진짜 밤새 무릎 꿇게 하실 겁니까?”“당연하지. 내일 날이 밝은 다음에 쫓아내.”말을 마치자마자 반태승의 핸드폰이 울렸다. 성혜인에게서 온 전화였다.반태승은 순간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전화를 받았다.“혜인아.”“할아버지, 강동의 땅에 관해 묻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내일이면 경매가 열리는데 일 년 동안 방치된 것이 이상해서요. 원래 투자하려고 했던 회사들도 전부 포기했던데, 혹시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마음 같아서 반태승은 성혜인을 저택으로 불러들이고 싶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얘기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문밖에 있는 바보 같은 놈 때문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그 일이라면 이미 네 아버지한테 말했다.”‘네 아버지’라는 사람이 성휘인지 반승제의 아버지인지 헷갈렸던 성혜인은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뒤늦게 반승제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그 땅은 상업을 발전하는데 아주 맞춤한 땅이야. 지하철을 뚫기도 편하고 주택구를 만들어 투자하기도 편하거든. 일 년 전에는 명문 초등학교도 세울 계획이라고 하던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다들 나떨어진 모양이구나. 우리 업계에서는 시간이 금이라 일 년이나 기다릴 사람은 없어. 만약 강동 땅을 살 생각이라면 나는 아파트를 세우는 걸 추천한다. 학교도 백화점도 수도 들어가기 편할 테니 말이다. 별장은 무조건 밑지는 장사일 테니 하지 말거라.”“지하철 개통과 학교 건설 계획은 아직도 유효한가요?”“지금 다시 하려면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하철이면 몰라도 일단 초등학교는 완전히 없던 일이 되어 버려서 주변에 학교가 하나도 없거든. 당분간은 아파트를 세운다고 해도 좋은 값을 받지 못할 거야. 안 그래도 위치가 안 좋은데 지하철은 또 언제 생길지 모르니, 개발도 쉽지는 않을 것 같구나. 이 소식도 다음 달쯤이
성혜인이 이혼 얘기를 꺼내지 못했던 건 반태승 때문이었다. 반태승은 이 세상에 얼마 없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잘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반태승은 언제나 그녀를 믿어줬고 SY그룹의 1차 융자도 많이 도와줬다.1차 융자 다음에는 2차 융자가 있었다. 솔직히 만약 성혜인이 이때 이혼을 했다면 너무 목적 있는 여자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3개월이라는 시간을 둔 것은 모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성휘도 지금 같아서는 3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성혜인은 보여주기식의 결혼과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 SY그룹으로 그에게 보답을 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제 떠날 때 속이 편할 것이다.성혜인은 손을 들어 미간을 눌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성휘의 친딸을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기 때문이다. 성휘는 죽기 전에 친딸과 만나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난번 서천에 갔을 때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성혜인의 능력으로 3개월 안에 24년 전의 일을 조사해 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으로서는 그저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성혜인은 장하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일 직접 입찰에 참가하겠다고 말하기 위한 전화였다....이튿날 아침.오늘 무조건 윤단미와 마주치게 될 것이기에 성혜인은 모자, 마스크, 선글라스는 물론이고 옷까지 잔뜩 껴입었다. 원래의 몸매를 가리기 위해서 말이다. 널찍한 외투는 아무도 그녀가 손을 다쳤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전부 가려버렸다.경매장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보였다. 이번 입찰 건은 기껏해야 몇천억 원짜리였기 때문에 원래 같으면 기자들의 시선을 끌 수 없었다. 오직 대기업이 참가해야만 기사로 쓸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성혜인은 장하리와 함께 입장했다. 그리고 곧바로 장내에 앉아 있는 윤단미를 발견했다. 윤단미의 주변에는 세한그룹의 임원들이 잔뜩 몰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번 입찰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반대로 SY그룹을 대표하는 성혜인은 장하리만 데리고 왔다. 임원진이 아직 완전히 결
반승제의 기운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눈빛 또한 칼날같이 예리해졌다.윤단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그리고 반승제가 멀어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는 “쯧쯧”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두 사람 부부 아니에요? 설마 지금껏 여보 소리 하나 못 들어본 건 아니죠?”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자를 더욱 아래로 누를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던 윤단미는 당연히 슬픈 표정일 것으로 여기고 말했다.“참, 그거 알아요? 저 임신했어요.”성혜인의 눈초리는 파르르 떨렸다. 곁에 있던 장하리는 놀란 듯 머리를 들어 윤단미의 배를 바라봤다. 그러자 윤단미는 자신만만하게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두 사람은 결혼하고 나서도 데이트 한번 한 적 없죠? 임신은 뭐 꿈도 못 꾸겠네요. 승제가 저한테 그러던데 당신만 보면 구역질이 난대요. 하루하루 이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다니까요?”윤단미의 말을 들은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윤단미는 곧바로 정색하면서 물었다.“왜 웃어요?”‘설마 내 말을 안 믿는 거야?’윤단미는 어쩐지 비웃음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마침 폭언을 퍼부으려고 할 때 경매가 시작해서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렸다. 이때 성혜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한테서 들었어요. 지금껏 단 한 명의 여자만 만난 적 있다고 하셨는데, 그게 윤단미 씨였던가요? 만약 아니라면 배 속의 아이는 누구의 것일까요?”“이 미친...”윤단미는 욕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있었기에 여기서 흥분하는 건 그녀의 명성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녀는 심호흡하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당신 남편이 어떻게 저를 돕는지나 보고 있어요.”윤단미가 멀어진 다음 성혜인은 곁에 있던 장하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개자식...”언젠가 자신도 한 적 있는 말인 것 같았기 때문에 성혜인은 피식 웃으면서 물었다.“장 비서는 남자친구 있어요?”“네, 7년째 만나고 있어
한편, 안에서는 윤단미의 보디가드가 그녀에게 귓속말을 전했다.“어제 부탁하신 페니 씨에 관한 자료, 사실 어젯밤 이미 다 알아봤습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사실이라 저희 쪽 사람들에게 다시 조사해달라 했는데 여전히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윤단미는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결과요?”보디가드는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페니 씨 진짜 이름이 성혜인입니다. 반 대표님 서류상의 그 아내 말입니다.”윤단미는 마치 벼락에 맞은 듯 제대로 서 있지조차 못했다.“그럴 리가요!”그녀의 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순간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그러자 윤단미는 서둘러 목소리를 낮췄다. 얼굴을 창백해진 채로 말이다.“그럴 리가요, 같은 사람일 리 없어요. 다시 한번 조사해와요!”‘성혜인 그 여자는 뚱뚱하고 못생겼는데, 심지어 승제 본인조차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인데... 승제가 지금 페니한테 흔들리고 있고, 만약 성혜인이 진짜 페니라면, 승제가 지금 자기 아내를 좋아하는 거잖아?!’온몸은 순식간에 차가워졌고 마음도 시리기 그지없었다.“이미 저희 쪽 사람이 두 번이나 조사해봤습니다. 정말 아주 자세하게 모두 조사했는데 확실하다고 나왔어요. 저도 정말 믿기지 않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보디가드는 곧바로 윤단미에게 자료를 건네 보였다.윤단미는 손가락마저 떨려 심지어 구토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성혜인의 자료에는 영어 이름 페니, 제원대학교의 학생, 주영훈의 제자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눈앞이 새까매진 윤단미는 하염없이 입으로 중얼거렸다.“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그녀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리고 손에 있던 자료들을 전부 찢어버렸다.“아아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어떻게!”윤단미는 미친 듯이 앞에 있는 의자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자 RI그룹의 임원이 와 서둘러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말렸다.“윤단미 씨, 주변에 아직 기자들도 있습니다.”안색이 곧 어두워지더니, 윤단미는 보디가드의 보호 아래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로즈가든에서 반승제를 기다릴 때, 성혜인은 바깥의 풍경을 보며 멍을 때렸다.초인종이 울리자 그녀는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이미 샤워를 마친 그녀는 반승제의 머리카락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걸 발견했다. 그도 금방 샤워를 마치고 온 모양이었다.지난번 곧 떠난다는 서민규의 말을 반승제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장소를 로즈가든으로 정했다.다른 뜻은 없었고, 반승제는 그저 이 공간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시트는 바꿨어?”그는 성혜인의 허리를 감싸며 물었다.“나는 다른 사람이 잔 데서는 안 자.”“바꿨어요.”“소독은 했어?”성혜인은 그가 참 까탈스럽다고 생각했다.“네.”반승제는 그제야 만족했다는 듯 그녀를 안았다.공주님 안기가 아니라 그녀의 엉덩이를 잡고 두 다리로 자신의 허리를 감싸게 하는 자세로 말이다.조금 전의 수많은 질문 때문에 성혜인은 그가 당연히 침실로 향하는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반승제는 그녀를 안고 부엌으로 향했다.부엌에는 네모반듯한 식탁이 있었는데 평소 그 위는 주로 반찬들을 놓은 곳이었다.그곳에 누운 성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불 꺼요.”다른 곳이면 몰라도 성혜인에게 부엌은 매우 부끄러운 곳이었다. 비록 그녀는 이곳에서 전등을 사용한 적이 몇 번밖에 없긴 했지만, 부엌의 전등 빛은 매우 밝았다.저녁이라 바깥이 어둑어둑해지는 반면 부엌이 너무 환하면, 밖에서도 다 비치지 않을까 싶어 두려웠다.반승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귀를 깨물며 물었다.“스위치는 어디 있어?”성혜인은 숨을 한번 몰아쉬며 대답했다.“문 앞에요.”그러자 그는 몸을 돌려 곧장 문 앞으로 걸어가 불을 껐다.그때, 성혜인이 또 한마디 덧붙였다.“거실 불도 꺼요.”어차피 바깥이 완전히 어두워진 게 아니라, 불을 꺼도 볼 수는 있었다.그래서 반승제는 그녀의 말에 따라 거실의 불도 껐다.불이 꺼지는 순간, 성혜인은 부끄러운 감정이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그제야 그녀는 한숨을 돌렸다. 반승제는 그녀에게 다가가며 값
성혜인은 힘이 빠진 나머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그녀는 그가 정장 바지만 입은 채 손에 셔츠를 들고 있는 걸 발견했다.셔츠에는 주름이 잡혀 있었고, 그의 등에는 온통 그녀의 손자국들로 가득했다.바깥은 어느새 날이 밝아지는 중이었다. 반승제는 뒤돌아 그녀를 바라보더니 뭐라 한마디 건넸다.회의하러 간다는 것인지 무엇인지 사실 그녀는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다.성혜인은 그가 셔츠를 벗어 던지고 다시 들어올 때 말끔한 차림을 하고 온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심인우가 그에게 보내준 모양이었다.반승제가 집 아래에 차를 타러 갔을 때 심인우는 이미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그는 만족스러운 듯 미간을 꿈틀거리며 심인우에게 지시를 내렸다.“여성용 하이힐 몇 켤레 골라줘요. 230mm 사이즈 정도로요.”심인우는 한 번도 이런 물건을 골라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자친구도 없었으니 말이다.또 하이힐은 커튼 힐, 콘 힐, 스트랩 힐 등등 종류도 아주 다양했다.차를 몰아 BH그룹으로 향하고,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그는 사진 몇 장을 골라 반승제에게 물었다.“대표님, 대충 어떤 스타일을 원하십니까?”그제야 반승제는 하이힐에 여러 가지 디자인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냐하면 그도 여태껏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어젯밤 그녀가 신은 하이힐이 자신에게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준 일이 생각나자, 반승제는 망설임 없이 앞이 뾰족한 스트랩 힐을 골랐다.“이런 거로 해요.”심인우는 그를 묵묵히 쳐다보며 대표님이 어딘가 답답한 면이 있다고 느꼈다.그러다 가볍게 기침을 하며 물었다.“몇 켤레 준비할까요?”“일단 두 켤레요. 이런 은색 힐로 준비해줘요. 끈은 되도록 부드러운 게 좋아요. 힐 바닥도 단단해야 하고 색은 꼭 밝아야 해요. 블랙은 이런 거로 부탁해요, 깔끔하고 정교한 게 피부가 더 하얗게 돋보일 수 있겠어요.”듣고 있던 심인우는 얼굴이 다 빨개졌다.‘참 많이도 알고 계시네.’심인우는 물론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애써 감추려는
현재 반태승도 그가 또 한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하룻밤 동안 무릎을 꿇려 벌하는 거로 마무리했다.처음 반승제가 바람피운 걸 알았을 때는 집안의 법대로 엄중히 벌했기에, 무릎을 꿇리는 건 그와 비길 바 없이 가벼운 벌이었다.그 말인 반태승의 경계가 아주 느슨해졌다는 것을 설명한다. 단지 결정적 계기 하나가 부족할 뿐. 반승제는 그 계기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윤씨 집안.윤단미는 밤새도록 미친 듯이 굴었다.사람은 극한으로 분노했을 때 거의 한마디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의 목이 쉬어버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엄서향은 그녀를 달래기 위해 줄곧 초조하게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서 있었다.“단미야, 무슨 일 있는 거면 다 같이 상의하면 돼.”윤단미의 입술은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너무나도 굴욕적이었다. 이전에 당한 굴욕들을 모두 더해봐도, 성혜인이 페니라는걸 알았을 때 느낀 굴욕보다는 덜했다.자신이 늘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녀는 내내 성혜인의 손바닥 안에서 놀고 있던 것이었다.밤새운 탓에 윤단미의 눈은 퉁퉁 부었다. 그녀는 그 진실만 떠오르면 몸이 부르르 떨려 참을 수가 없었다.엄서향은 집사에서 예비 열쇠를 갖고 오게 해 문을 열었다.“너 요 며칠 한 번도 할머님 찾아뵈러 가서 얘기 안 나눴어. 할머님은 너를 가장 지지하는 분이야.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돼.”윤씨 집안 모든 사람은 그녀가 반씨 집안에 시집가기를 바라고 있다.윤단미는 눈이 시뻘게져서는 쉰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더는 기회가 없어요.”‘영원히 기회는 없을 거야. 승제도 곧 알게 될 테니까.’엄서향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단미야, 침착해. 승제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든 너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어. 무슨 수를 써서든지 목표를 이뤄내고 말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말이야. 그 반재인도 너를 계속 쫓아다닌다고 하지 않았니?”‘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