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는 바람에 온시환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내가 너무 많이 생각한 건가? 승제는 진짜 그 여자를 아예 상관도 안 하는 건데.’“좋아, 그냥 노는 거라고 하니 됐어. 그럼 술 좀 답답하게 마시지 말지 그래?”“안 그랬어.”반승제는 온시환에게 반박하며 또 성혜인을 힐끗 쳐다보았다.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탓에 마치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자신과 상관이 없다는 듯이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마음은 또다시 꽉 막힌 듯 답답해 났다.“사실 페니도 그저 그래.”온시환은 그의 말이 웃겨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감정을 잘 정리한 다음에야 그는 다시 원래대로 머리를 돌려 대답했다.“맞아, 제원에 페니 씨보다 예쁘고 재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응.”반승제는 속이 더욱 답답해졌다.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등을 뒤로 기대 더는 성혜인을 바라보지 않았다.그렇게 성혜인은 그림을 완성할 때까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았고 완성한 뒤에 그림판을 거뒀다.신이한은 머리를 휙 들이밀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 머리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게 됐다.“다 그렸어요?”“네.”신이한은 그림을 한번 보더니 조금 놀랐다는 듯이 눈썹을 추켜올렸다.비록 그녀의 그림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잘 그릴 줄은 그도 예상치 못했다.생동감 넘치는 그림에는 신이한만의 특유의 분위기마저 가미되어있었다.“정말 잘 그리셨네요.”“신 대표님께서 만족스러워하시면 됐어요.”“페니 씨, 제가 그렇게 큰일을 도와드렸는데, 고작 그림 두 점이 다라면 제가 손해 보는 게 아닐까요?”사실 성혜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에서 그에게 약속했다.“신 대표님께서 제 그림을 원하기만 하시면 저는 절대 미루지 않겠습니다.”신이한은 억지를 부리지 않는 성혜인의 모습이 좋았고 이내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왔다.“그럼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데려다줄게요.”“괜찮아요, 대표
하지만 반승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심지어 입을 크게 벌려 그녀의 목을 물기도 했는데 그건 암컷을 완전히 정복하려는 수단이었다.이 순간 폭발한 호르몬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성혜인의 눈에서는 순간 눈물이 흘러내렸고 온몸은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반승제는 그녀를 받들고 무아지경으로 했다.그때, 밖에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나가던 직원인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룸 문이 갑자기 그들에 의해 열려 조그마한 틈새가 생겼다.성혜인은 놀라 순간적으로 머리를 그의 목에 파묻었고 반승제는 기분이 짜릿해 머리가 저릿저릿해 났다.“꺼져.”그가 들어오려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본래 조금 이따 사용할 이 룸에 점검차 들어오려 했던 직원들은 그의 강한 목소리를 듣고는 놀라 서둘러 뒤로 물러갔다.“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직원이 떠나고, 룸 안에는 울음을 훌쩍이는 성혜인의 작은 목소리만 있었다.반승제는 그녀의 등을 작게 토닥여주고는 더 높이 받들어 올렸다.그는 이 자세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이래야만 그녀가 힘을 못 쓰고 전적으로 그에게 의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반승제는 그녀가 살이 빠졌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조금 전 룸에 있을 때는 불빛이 너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 그녀를 품에 안고 나니 예전보다 아주 가벼워진 걸 느낄 수 있었다.특히 허리는 한번 꼬집으면 부러질 것 같았다.“일주일 동안 밥 안 먹었어?”손으로 가늠해보며 그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성혜인은 여전히 그의 목에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코끝에 반승제의 차가운 분위기가 맴돌았는데 그 기운이 너무나 강렬해 마치 모공에 타고 온몸에 퍼질 것 같았다.그녀는 반승제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미세하게 몸을 떨 뿐이었다.반승제는 그녀가 아파하는 것인지 아니면 짜릿해서 그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그는 고개를 살짝 꺾어 살며시 그녀의 귀를 깨물었다.그러자 성혜인은 또 한 번 몸을 흠칫 떨었다.반승제는 참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그는 옆에 있는 샤워기를 가져와 그녀의 머리를 적신 다음 자신의 가슴에 기대게 하고 머리를 감겨주었다.성혜인은 피곤해 눈꺼풀조차 뜰 수 없었다. 정신을 잃을 때 그녀는 반승제를 토막 내 죽이고 싶었지만, 지금 깊은 잠이 드는 바람에 그의 이런 부드러운 모습을 보지 못했다.반승제는 누군가의 시중을 든 적이 없어서 매우 서툴렀다. 그는 샴푸를 여러 번 짜고 천천히 그녀의 머리카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그러자 바로 거품이 일기 시작했고 그는 혹여라도 그녀를 아프게 할까 봐 자신의 힘을 컨트롤 하며 계속 이어갔다.그렇게 마사지를 한 지 반 시간쯤 지났을까, 그제야 깨끗이 씻었다고 확신하고 샤워기를 갖고 와 거품을 씻어냈다.성혜인은 계속 그의 가슴에 기댄 자세를 한 채 깊은 잠을 잤다.다 씻기고 나서 반승제는 그녀를 안아 들어 곁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너무 깊게 잠든 탓에 의자에 앉히자 그녀는 스르륵 아래로 미끄러지고 말았다.하는 수 없이 반승제는 직접 의자에 앉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자게 한 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려주었다.아무리 좋은 드라이기라도 작지 않은 소리가 났다.한참 단잠에 빠져있던 성혜인은 자꾸 귓가에서 “웡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시끄러워.”그녀는 목이 다 쉬어버렸음에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한마디 쥐어짰다.해외에 있을 때, 머리를 감지 않고 자서 이틀 동안 머리가 아픈 적이 있었던 반승제는 성혜인이 머리를 말리기 싫어하는 것을 보자 미간을 구기며 말했다.“움직이지 마.”그러자 성혜인은 움직이지 않았고 다시 그의 품에서 고이 잠들었다.그녀는 단발로 머리를 잘랐지만, 여전히 숱이 많았고 머릿결이 부드러웠다. 반승제는 2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겨우 다 말릴 수 있었다.그는 성혜인을 안고 침실로 들어갔고 그녀의 아래를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상처가 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불을 끌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모든 것을 끝내자 시간은 어느새 아침 8시가 다 되어갔다. 출근할 시간은 이미 지난 지 오랐다.그때, 때마침
반승제는 그녀를 끌어 당겨와 자신의 품에 꽉 묶어두었다.“신이한이 뭐가 그렇게 좋은데? 그 자식 원래 여자들한테 헤프지 않나? 별장 한 채라도 달라고 하지, 왜 안 그랬어? 오히려 살이 더 빠져서 오고 말이야.”그의 손은 제멋대로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성혜인은 화가 난 나머지 손가락 끝을 가볍게 떨었다. 그녀는 반승제를 무시한 채 숨을 고르고 곁에 있는 외투를 들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반승제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등 뒤에서 그녀를 꼭 안았다.“돈이 좋은 거면 나도 얼마든지 줄 수 있어.”그 말은 마치 화약창고에 불이 달린 성냥개비를 던진 것과 같았다.표정이 순식간이 어두워진 성혜인은 그를 힘껏 밀어냈다.반승제도 뒤로 한 발짝 물러나게 되자 기분이 좋지 않았다.‘어젯밤 그렇게 좋았고, 아침에는 특별히 달래주기까지 했는데, 정말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그의 표정도 덩달아 차가워졌다.“좋고 나쁜 것도 구분하지 못하는 거야?”성혜인은 분노가 치밀어올라 당장 한 마디도 뱉을 수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식하고 웃었다.“네, 좋은 거 나쁜 거 구분하지 못해요. 대표님, 저 많이 힘들거든요? 지금 먼저 가봐도 될까요?”그건 분노가 섞인 웃음이었다.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다. 이 기분은 마치 뼛속 틈으로부터 번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반승제의 얼굴을 보는 것도 몸서리쳐질 정도로 짜증이 났다.반승제는 윤단미와 연애할 때 줄곧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왔었다. 그에게 있어 상대방을 좋게 대해주는 수단은 단지 사람을 시켜 그녀에게 선물을 사주게 하는 것이었다.그의 눈에 돈은 그저 가벼운 종이 쪼가리에 불과했다.‘해외에서 어쩌다 마음에 든 거였는데, 페니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런 태도라고?’반승제의 마음 한쪽에서 좌절감이 솟구쳐올랐다.그는 성혜인을 지나 먼저 침실에서 걸어나왔다.심지어 반승제는 그녀와 어깨를 스쳐 지나갈 때 한마디 덧붙이기도 했다.“이건 원래 단미한테 주려던 거였어
반희월은 성혜인은 힐끗 한번 보고는 다시 시선을 거뒀다.어차피 성혜인 본인이 직접 선택한 인생이니 자신과 무관했기 때문이다.반희월은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중을 나온 몇몇 임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그때, 한 직원이 성혜인의 앞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성혜인은 고개를 저었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몸이든 무릎이든 어느 한 곳 안 아픈데 없이 모두 아팠다.차를 잡아 포레스트로 돌아간 그녀는 그대로 엎드려 잠이 들었다.유경아는 그녀가 어젯밤 돌아오지 않은 일에 대해 감히 더 물어보지 못했다.전에도 성혜인은 포레스트에 오길 싫어했으니까 말이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가서 국을 끓였고 성혜인에게 몸보신을 해줄 수 있길 바랐다.한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반희월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그 여자가 나온 이곳 호텔에 반승제가 묵고 있다는 것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흔적들이 반승제가 남긴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반승제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말이다.하지만 반씨 집안에서 정말 반승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그래서 그녀는 참지 못하고 직접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시각 반승제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는 성혜인이 떠난 뒤로 줄곧 테이블 위에 놓은 서류들을 보고 있었다.그러나 이루 말할 수 없는 짜증들이 몰려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승제야, 너 어디 있어?”“호텔이에요.”그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순간 예감이 좋지 않았던 반희월은 곧바로 그의 방에 도착했다.말끔한 차림의 반승제는 차가운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서류들이 앞에 놓인 걸 보니 여자를 그렇게 만들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성혜인의 목에 난 흔적들은 매우 선명했다. 밖에 그냥 보이는 것도 그렇게 많으니 아마 안 보이는 데는 더욱 많을 것 같았다.반희월은 반승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집사람들과 있을 때에도 말이 별로 없고 카리스마가 강했다.반승제는 눈가에 옅은 붉은 빛을 감추고 있
성혜인은 포레스트에서 밤 8시까지 잤다. 깨어날 때 그녀는 삭신이 쑤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잠에서 깬 그녀는 유경아가 끓여준 국을 조금 마셨다.“사모님, 요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제가 회장님께 한번 들르시라고 말씀드려 볼까요?”성혜인은 숟가락을 꽉 움켜잡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괜찮아요.”유경아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그럼 편히 쉬세요, 살 많이 빠지셨어요.”성혜인은 자신의 볼을 만져보았다. 그러고는 뭐라 말을 하려는데 때마침 로즈가든 경비실에서 메시지가 날아왔다.「안녕하세요. 어젯밤 야간 순찰을 돌 때 집에 누군가 침입한 것 같아서요. CCTV도 때마침 고장이 났습니다. 방금 옆집 사는 분들께서 부정당한 거래가 이뤄지는 것 같다고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와서 조사에 협조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또 최효원이네.’성혜인은 짜증이 났다. 차를 몰고 로즈가든에 도착한 그녀는 1층에서 최효원과 경찰을 발견했다.최근 임경헌과의 관계가 괜찮은 모양인지 최효원의 안색은 매우 좋아 보였다.그녀는 성혜인을 보자마자 바로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저 사람이에요. 그 두 사람 저 사람 집에서 나와서 갔어요. 그리고 저 사람 사생활이 원래 깨끗하지 않거든요.”성혜인은 그녀를 무시한 채 경찰에게 말했다.“최근에 제가 집에 있지를 않아서요. 집에 아무래도 도둑이 든 모양입니다. 아무쪼록 잘 조사해주셨으면 좋겠네요.”그러자 최효원이 곁에서 몇 마디 덧붙였다.“웃기지 말아요. 무슨 더러운 짓을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남한테 알려질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잖아요.”성혜인은 그녀에게 웃으며 말했다.“효원 씨, 마침 효원 씨한테 뭐 좀 말할 게 있었는데, 얘기 좀 나눌까요?”그녀는 먼 곳에 있는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는데 그쪽에는 모퉁이가 있었다.최효원은 성혜인이 겁을 먹은 줄 알고 피식 코웃음을 쳤다.“저한테 사과하고 싶으시면 여기서, 사람들 다 있는 앞에서 해요.”“사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더 중요한 일이에요. 임경헌 씨에 관한.
경찰은 최효원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 그러자 진작 눈물범벅이 된 그녀는 벌벌 떨면서 대답했다.“마, 맞아요...”식은땀으로 등이 흠뻑 젖은 최효원은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힘들게 임경헌을 꼬셔서 얻은 지금의 생활을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여자 때문에 망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그다지 중요한 것을 알아내지 못한 경찰은 두 사람에게 가 봐도 좋다고 했다. 최효원은 로즈가든에 있을 용기가 없었고 성혜인은 포레스트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함께 나가게 되었다.최효원은 진작 다리에 힘이 풀렸다. 성혜인이 바로 곁에 있는 것을 보고는 몸까지 주체가 되지 않고 벌벌 떨렸다.성혜인은 길가에 나온 다음에야 최효원에게 말했다.“효원 씨, 이번이 마지막이길 바라요.”성혜인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예리하기만 했다.최효원은 몸을 흠칫 떨면서 대답했다.“네... 알겠어요...”성혜인은 차에 올라타서 유유히 멀어져갔다.제자리에 혼자 남은 최효원은 자칫 힘이 풀려 무릎을 꿇을 뻔했다. 등은 겉으로도 보아낼 수 있을 만큼 흠뻑 젖어 있었다. 눈물은 여전히 줄줄 흘렀고 뺨도 지끈지끈 아팠다.최효원은 성혜인에게 단단히 겁먹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임경헌에게 알릴 용기는 없었다.성혜인은 직접 운전해서 포레스트로 향했다. 얼마 전부터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는 차 안에서 누군가가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저 여자가 확실해?”한 남자가 먼저 묻자,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네, 보스. 저희가 오랫동안 조사하고 확인했습니다. 비록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반승우 씨가 서천군에 있을 때 성혜인 씨와 잠깐의 교류가 있었던 건 확실합니다.”보스라고 불린 남자는 한참 침묵하고 나서야 다시 물었다.“윤단미는?”“윤단미 씨도 조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진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고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확신이 설 때까지 계속 알아봐.”사실상 그들은
윤단미는 반승제가 반승우의 사인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반승우에게서 받은 물건은 없는지 물었던 것도 기억하고 있었다.사실 윤단미는 반승우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반승우는 다정한 가면을 쓰고 있었을 뿐, 그녀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그녀가 쫓아다니지 않았다면 진작 어색한 사이로 끝났을 관계였다.오래전 우연한 기회로 김경자와 인연을 맺은 후로부터 윤씨 집안에서는 꼭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경자에게는 천재 손자가 두 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윤단미의 미래 남편이 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반승우가 김경자의 최애 손자라는 이유 하나로 윤단미는 그를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묻고는 했다. 반승우는 반승제와 달랐다. 그녀를 보고도 말 한마디 없이 무시하는 반승제와 달리, 반승우는 대답도 해주고 태도도 좋았다.하지만 둘 중에서 더 잘생긴 쪽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반승제였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눈으로 빚은 인형처럼 차갑고도 아름다웠다.10대 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훔친 반승제에게 윤단미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반승우와 만남을 이어가는 와중에도 그를 관찰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가 반승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를 알게 되었다.반승우는 줄곧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반승제도 똑같이 훌륭하기는 했지만 반승우의 그림자에 가려져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후에는 반태승을 따라 일찍 군 입대를 하기도 했다.제원의 대부분 사람이 반씨 집안의 두 형제가 원수지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윤단미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둘도 없는 친한 형제 사이라는 것을 말이다.반승제는 반승우의 죽음을 모르는 척 지나갈 사람이 아니었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대로 반승제는 잠깐 침묵하다가 곧바로 긍정적인 대답을 줬다.“나 지금 호텔에 있어.”그 말인즉슨 윤단미에게 찾아오라는 뜻이었다.윤단미는 감정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성혜인을 상대할 때처럼 성급하게 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급한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