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반승제와 마주친 강민지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곁에 함께 서 있는 윤단미를 발견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윤단미는 강민지를 한눈에 알아봤다. 보석 사업을 주로 하는 강씨 집안은 진정한 재벌가였기 때문이다.“안녕하세요, 민지 씨.”윤단미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강민지는 듣는 체도 하지 않고 반승제를 바라봤다. 반대로 반승제는 그녀가 안중에도 없는 듯 슥 지나가 버렸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윤단미는 그녀를 향해 짧게 묵례하더니 쪼르르 따라갔다.강민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다. 하지만 플래시를 끄지 않은 관계로 병원 로비 전체가 순간 번쩍였다.반승제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머리를 돌려 강민지를 바라봤다. 눈빛은 만년설이라도 되는 것처럼 차가웠다.“지워요.”당황한 강민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하지만 티를 내지 않고 머리를 쳐들면서 말했다.“싫어요. 당신 와이프한테 보내줘야겠으니까요.”이 말을 들은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강민지를 위아래로 훑어봤다.“성혜인과 아는 사이에요?”“네, 제 친구예요.”반승제는 피식 웃었다.“강 대표님께서 자식 교육에 실패하신 모양이네요.”“뭐라고요?”강민지가 정색하면서 묻자, 곁에 있던 윤단미가 입을 보탰다.“승제 말은 덜떨어진 여자와 친하게 지내지 말라는 뜻이에요.”강민지는 순간 열이 솟구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이 개자식들이...!’반승제는 단호하게 몸을 돌리더니 성큼성큼 멀어져갔다. 윤단미는 일부러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승제는 오늘 저를 위해 병원에 함께 와준 거예요. 하지만 성혜인 씨한테는 말하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저희도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 못 해서요.”윤단미는 말을 애매모호하게 했다. 하지만 배를 만지는 동작과 한저녁에 반승제와 함께 병원에 온 것을 보고 강민지는 바로 미끼를 물어버렸다.‘이 미친년이 임신했다고?’강민지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윤단미의 배를 바라봤다. 그
“안 좋은 상황이라니?”“연예계가 어떤 곳인지는 너도 알지? 온수빈은 요즘 예쁘장한 젊은 남자를 좋아하는 50대 부자 아줌마한테 단단히 걸렸어. 아직은 우리 회사 엠버서더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곧 계약이 끝난 다음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 온수빈이 괜히 너랑 만나달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겠냐? 나라고 해도 50대 아줌마를 버리고 젊고 예쁜 우리 혜인이랑 만나겠어. 그리고 그 변태 아줌마한테 별 이상한 장난감이 다 있는데, 그 아줌마 손에 고자가 된 남자 모델이 한둘이 아니야.”성혜인과 강민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지만 상류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하층민을 상대로 하는 불공평한 일은 어디에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가장 깨끗한 학술계에도 비겁한 짓을 하는 사람이 빠지지 않고 나타났으니 말이다. 상혜인이 자칫 졸업장을 받지 못했을 뻔했던 것만 해도 그랬다.강민지와 잠깐 통화하면서 주의력을 돌린 덕분에 성혜인은 메스꺼움이 훨씬 덜해진 것 같았다.“아무튼 너만 원한다면 내가 바로 예쁘게 포장해서 네 침대 위로 배달해 줄게.”성혜인은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온수빈의 처지가 마음에 걸려 잠깐 멈칫하다가 직접적인 대답을 피했다.“다음에 다시 얘기하자.”성혜인이 반쯤 넘어왔다고 생각한 강민지는 급 기분이 좋아져서는 말했다.“진작 이럴 것이지. 반승제한테 얽매일 필요는 하등 없다니까. 그리고 윤단미가 언제까지 임신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야.”강민지의 말은 마치 비수처럼 성혜인의 가슴에 꽂혔다. 그래서 그녀는 한참 침묵하고 나서야 쉰 목소리로 말했다.“나 이제 자고 싶어.”“아, 미안 미안. 얼른 자. 앞으로 이런 더러운 일은 너한테 말하지 않을게. 우리 혜인이는 좋은 것만 보고 들어요~”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찬물 세수를 했다. 그리고 피부가 저릿저릿할 때가 되어서야 다시 머리를 들어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머릿속에는 임지연이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혜인아, 다른 사람이 이
이튿날.성혜인이 마침 SY그룹의 일을 끝냈을 때 온수빈의 전화를 받았다. 온수빈은 카페, 그것도 고급 카페에서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그녀는 약속장소로 가서 온수빈과 만나기 전 일단 법원 측에 연락해서 재촉했다. 그림 사건으로 김경자가 법정 싸움에 임하든 합의금을 내든, 둘 중 하나는 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아무튼 순순히 김경자를 내버려 둘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카페에 도착하자 한눈에 봐도 열심히 꾸민 티가 나는 온수빈이 보였다. 그는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벌떡 일어나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페니 씨.”성혜인은 말없이 온수빈을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또다시 말했다.“저는 좋아요. 페니 씨만 원한다면요.”온수빈은 강한 인상의 다른 남자들과 달리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성혜인은 갑자기 기억의 사막 속에 묻힌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온수빈이 그와 같은 말을 했는지라 감정의 파동이 더욱 심했다.“저는 처음부터 페니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성혜인은 머리를 푹 숙인 채로 커피잔만 바라봤다. 그러다가 드디어 머리를 들고 말하려고 했을 때 커피가 온수빈의 얼굴에 쏟아졌다.이 카페는 예약이 필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반인과 파파라치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사업하는 사람이나 톱스타들이 애용하고는 한다.온수빈도 이곳에 와서는 모자와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얼음이 섞여 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그의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성혜인은 커피를 뿌린 사람을 바라봤다. 상대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였는데, 곁에는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가 함께 서 있었다너무나도 인상적인 모습에 성혜인은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가 바로 강민지가 언급했었던 TJ 엔터의 대표 도송애라는 것을 말이다. TJ 엔터는 연예계에 발을 들인 지 10여 년이 된 유명한 회사였다. 그리고 수많은 톱스타를 배출하기도 했다.도송애는 온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무리 관리를 잘했다고 해도 50대는 50대였다
도송애는 황급히 성혜인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아이고, 죄송해요. 제가 귀하신 분도 못 알아봤네요. 오늘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니 계산이라도 제가 할게요.”도송애는 또 활짝 웃으며 반승제를 바라보더니 이어서 말했다.“대표님, 저희는 저쪽에서 얘기를 나눌까요?”반승제는 오늘 협력을 목적으로 도송애와 약속을 잡았다. BH그룹이 영화계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대본 하나에 투자하는 것으로는 모자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심드렁한 태도로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만 바라봤다.‘어제는 신이한이고 오늘은 온수빈이야? 도대체 이 여자는 얼마나 많은 남자를 만나야 만족하는 거지?’속으로 묵묵히 생각하고 있던 반승제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서 기다려. 같이 나가자.”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저 할 일이 있어요.”반승제의 분위기는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도송애가 보고 있기 때문에 화를 내지는 않고 그냥 성혜인의 옷깃을 정리해 줬다. 그렇다고 한들 그녀가 느낀 것은 배려가 아닌 위협일 뿐이었다.“말 들어.”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승제가 도송애를 따라 룸으로 들어간 후에는 차갑게 식은 표정으로 휴지를 뽑아 온수빈에게 건네줬다.“괜찮아요?”온수빈은 인간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도 된 것처럼 커피 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었다. 성혜인의 질문을 들은 다음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죄송해요...”부자들 앞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톱스타라고 해도 일개 노리개일 뿐이라는 것을 성혜인은 처음으로 뼈저리게 느꼈다.이때 온수빈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남자주인공이 바뀌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온시환의 전화였다. 이번 기회를 도송애에게서 벗어나는 중요한 기회로 여겼던 그는 다급한 말투로 물었다.“작가님, 배우를 왜 갑자기 바꾸게 되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사실은 투자자의 의견이었어요. 영화의 투자자인 반승제 대표님이 남자주인공을 바꾸라고 해서 저도 어쩔 수 없네요.”온시환은 솔직하게 대답
“아무래도 제가 꼴 보기 싫은 듯하시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너... 너...”김경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성혜인에게 삿대질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그 모습에 화병이 제대로 온 그녀는 결국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가고 말았다.반씨 저택을 나선 성혜인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따끔거리는 목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말했다.그 길로 중고 시장에 도착한 성혜인은 팔찌를 들고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직원은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도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물었다.“이걸... 진짜 파신다고요? 중고로?”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이건 진짜 귀한 물건이라 제가 결정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마침 저희 사장님이 사무실에 계시니,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여기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성혜인은 두 명의 직원을 따라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원래의 직원은 조심스럽게 팔찌를 들고 2층의 사장실로 향했다.“사장님, 어떤 여성분이 오셔서 이 팔찌를 중고로 팔겠다고 하시는데 지난번의 보석 박람회의 전시품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너무 비싸서 어떻게 해야 할지...”의자에 앉아 있던 사장이라는 남자는 다름 아닌 서주혁이었다. 그는 총기를 만기고 있다가 직원이 들고 있는 물건을 힐끗 봤다.중고 거래 시장은 돈 벌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사치품부터 시작해서 불법적인 무기까지 없는 물건이 없었다. 물론 법의 변두리에 가까워질수록 아는 사람만 아는 거래가 진행되고는 했다.“진품이 맞기나 해?”“네, 100% 확신합니다.”“가격은 얼마 정도 하지?”“원래 가격은 400억 원쯤 하겠지만 저희는 300억 원까지 가능합니다.”이 팔지는 전 세계에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만약 경매장에 넘어간다면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질 수도 있었다.“사들여.”직원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팔찌를 서주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는데 능한 반승제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차에 올라탔다.차가 백화점을 지나고 있을 때 반승제는 문득 머리를 들며 말했다.“차 세워요.”심인우는 급정거하면서 머리를 돌렸다.“대표님, 무슨 일이세요?”“잠깐 선물을 고르려고요.”성혜인이 팔찌를 받았다면 다른 선물도 좋아할 것이라고 반승제는 생각했다. 역시 온시환의 말대로 선물 공세를 거절할 여자는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신이한과 만나봤자 얻을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사실 반승제도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성혜인을 더러운 여자라고 내쳐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성혜인은 날마다 남자를 바꾸는 바람기 많은 여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유치하게 재력을 뽐내서라도 성혜인을 신이한에게서 빼앗고 싶었다.반승제는 예쁘게 전시된 목걸이 앞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지난번의 팔찌처럼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지난번의 팔찌는 전시 중인 작품인 반대로 백화점의 물건은 부자들이 고르고 남은 유행 지난 물건이기 때문이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서더니 백화점을 나섰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서 심인우에게 말했다.“보석 전시회 주최 측에 연락해서 선물할 만한 물건을 보내달라고 해요.”심인우는 백미러를 통해 반승제를 힐끗 봤다. 그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반승제와 함께 일한 시간만 해도 몇 년이나 되는 심인우는 그가 얼마나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토록 조용해 보이는 그도 화가 나는 순간 완전히 돌변해 버리고는 한다.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안 기를 바랄 뿐이었다.“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반승제는 기분 좋은 듯 곁에 있던 서류를 들어 올렸다. 같은 시각, 성혜인은 두둑한 지갑과 함께 다음 할 일을 계획하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성혜인은 온수빈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와 관련된 일을 물었다. 대본 작가가 온시환이라는 것을 알고
일이 이미 정해진 이상 온수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계속 있어봤자 모욕만 더 당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약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대표는 자리에 앉은 채로 도송애에게 전화해 계약을 축하했다. 온수빈이 아직 듣고 있는데도 말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사무실에서 나선 온수빈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회사에는 신인도 많고 톱스타도 많았다. 그래도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것은 온수빈이었기 때문에 다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그는 인간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도송애의 손에 죽을 목숨이 되고 말았다.도송애의 얼굴을 떠올리자, 온수빈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약은 이미 체결되었으니 말이다.온수빈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냥 이대로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는다고 해도 도송애의 악행은 밝히고 죽을 것이다. 그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이때 매니저가 곁에서 말했다.“수빈 씨,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아요.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을 거예요.”매니저는 온수빈이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송애는 연예계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얼마 전 잠깐 뜬 적 있는 남자 연예인이 집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닌 도송애 때문에 몸이 망가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업계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온수빈은 그게 바로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도송애는 그를 노리기 시작한 지 한참 되었기에 얻은 다음 무슨 방법으로 괴롭힐지 몰랐다.“수빈 씨, 그냥 강민지 씨한테 다시 연락하는 건 어때요?”매니저는 도송애에게 갈 바에는 강민지에게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강민지가 아닌 성혜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온수빈은 성혜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그는 첫 만남 때부터 성혜인이 좋았다. 하지만 성혜인이 싫다고 하니 그도 별수 없었다.초저녁, 성혜인은
온시환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금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요. 300억 원의 투자금이라면 뭔들 못하겠어요. 근데 페니 씨한테 그 정도의 돈이 있었나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허락만 하시면 내일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온수빈 씨를 좋아해요?”“팬으로서의 좋아함이라면... 네.”온시환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복잡한 남녀 사이만큼 그의 구미를 당기는 것도 없었다.“좋아요. 그러면 내일 오전 9시까지 입금해 줘요. 그러면 바로 온수빈 씨한테 연락할게요.”성혜인은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제가 저녁이라도 살까요?”“아니에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온시환은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할 일’을 미처 끝내지 못한 그는 아직도 진정되지 못했다.성혜인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룸을 빠져나갔다.같은 시각, 반승제의 연락을 받은 보석 박람회의 주최 측은 벌써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직접 반승제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배달했다.“대표님, 이건 오늘 새로 받은 신상입니다.”상자는 반승제의 손에 놓였다. 상자를 열고 익숙한 팔찌를 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모른 채 주최 측 직원은 설명을 계속했다.“이건 해외의 박람회에서 금방 전시를 끝낸 전 세계에 하나 뿐인 팔찌입니다.”팔찌를 본 순간 반승제는 주최 측이 실수로 같은 팔찌를 보낸 줄 알았다. 하지만 전 세계에 하나 뿐이라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이 팔찌는 어디에서 구한 거죠?”반승제의 기세에 겁먹은 직원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말했다.“실은 중고 거래 시장에서 받은 지 얼마 안 된 제품입니다. 많은 손님이 원하지만 일단 반 대표님에게 가장 먼저 가져왔습니다.”반승제는 크게 심호흡했다. 아직도 화를 내지 않고 덤덤한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그는 심인우에게 카드를 넘겨주고 결제를 부탁하더니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온시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공지민은 갑자기 연승혁의 총을 움켜쥐었고 경찰에게는 지금이 좋은 기회였다.저격수의 총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고 공지민은 어깨에 총알이 박힌 것을 느꼈지만 연승혁의 총을 꼭 붙잡고 놓지 않았다.총성이 다시 울리자 연승혁은 그녀를 안은 채 몇 바퀴를 굴렀다.온시환은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을 붙잡으며 미친 듯이 소리쳤다.“인질이 아직 잡혀 있는데 총을 쏘면 어떡해요? 당장 멈춰요!”현장은 매우 혼란스러웠고 이때 그들이 공격을 멈춘다면 연승혁이 어떻게 반격할지 예측이 안 갔다. 방금 그가 살짝 손을 움직였을 뿐인데 한 사람을 죽였다.총성은 잠시 멈췄고 공지민의 어깨에서 피가 흘렀으며 연승혁은 방금 그녀를 보호하다가 다리와 허리에 총을 맞았다.두 사람 모두 온전한 데 없었지만 공지민은 그가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농담할 기분이 있어 보였다.“지민아, 우리가 어쩌다 이런 거지꼴이 됐냐?”공지민은 그가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녀가 방금 미친 듯이 그의 손에 들린 총을 붙잡지 않았다면 경찰도 총을 쏘지 않았고 그도 두 번이나 총에 맞지 않았다.게다가 총알이 날아왔을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보호했는데 그가 왜 그랬는지 그녀는 이해가 안 갔다.그녀는 바닥에 숨었고 연승혁은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경찰 측은 반승제와 온시환, 그리고 서주혁이 막고 있어서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했다.연승혁이 맞은 두 발의 총알로 그를 죽이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는 손을 들어 공지민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공지민의 속눈썹이 떨렸지만 여전히 입을 꾹 다물었다.그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방금 네가 한 짓은 내가 널 백번 죽여도 모자라.”모든 사람이 연승혁이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것을 보았고 그가 총을 쏠 거라고 생각했다.온시환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누군가에 의해 끌려갔고 연승혁은 다른 곳에 신경 쓰지 않은 채 공지민의 눈만 바라보았다.그녀는 두려워하지 않았다.연승혁은 갑자기 그녀의 얼
연승혁은 절벽 끝까지 밀려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주변에는 저격수들이 잠복했고 그는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을 붙잡아 자신의 앞을 막았다.“나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행복하지?”공지민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한테 붙잡힌 채 서 있었다. 절벽은 매우 높았고 아래는 안개가 자욱했다.주위에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이 너무 교활해서 공지민을 인질로 삼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저격수는 지금까지 총을 쏘지 못했다. 절벽 끝에는 연승혁과 공지민이 서 있었고 반대편에는 수십 명의 경찰들이 있었다.숲의 다른 곳도 수많은 경찰들이 지켰고 연승혁은 오늘 절대 빠져나가지 못했다.누군가가 연승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연승혁, 지금 당장 자수하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연승혁은 미소를 지으며 공지민의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었다.“무고한 사람? 이 사람은 무고하지 않아.”공지민은 전혀 두렵지 않았고 그녀의 시선이 앞을 향하자 급히 나타난 온시환을 보았다.온시환의 다리는 부상을 입은 듯 절뚝거리고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그가 매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연승혁은 온시환을 보자 눈썹을 치켜올렸다.“다 왔네. 지민아, 남편한테 인사 안 해?”공지민은 그가 무슨 의도인지 몰라 눈살을 찌푸렸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의 뺨에 키스하고 온시환 쪽을 바라보았다.“네 아내 덕분에 도망치는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온시환은 순간 안색이 변했지만 다시 평온해졌다.연승혁은 마치 미친개처럼 아무나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가 온시환한테 적대감을 품은 건 온시환과 공지민의 부부 관계를 질투하기 때문이었다.온시환은 기침하며 공지민에게 물었다.“괜찮아?”공지민은 고개를 저으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계속해서 안 좋은 소리를 할까봐 그저 못 들은 척했다.하지만 연승혁은 그녀를 가만히 놔줄 생각이 없었다.“네 남편이 묻잖아. 나랑 같이 있는 동안 얼마나 즐거웠는지 말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이마는 고통으로 인해 땀으로 뒤덮여 있었다.연승혁은 막대기를 던지고 담담하게 말했다.“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 내가 널 죽일거라고 생각했지?”“그러려고 한 게 아니야?”지금 그녀를 죽이는 건 그가 그동안 쌓여왔던 원한을 풀고 해외로 도망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연승혁은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난 말이야. 경찰들이 정의로운 척 가식 떠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어.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를 인질로 잡는 게 더 안전하지 않겠어?”그제야 공지민은 그가 자신을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녀를 인질로 삼기 위해서란 걸 알았다.하지만 그는 1급 수배범이고 심지어 건드려서는 안 되는 조직까지 건드려서 인질을 잡고 있다고 해도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공지민은 그의 손에 이끌려 일어난 후 길을 계속 가는 수밖에 없었다.“꼼수 부리지 마.”그녀의 머릿속에는 그가 자신을 전에 본 적이 있냐고 물어본 질문이 떠올랐다.사실 방금 연승혁이 그녀를 찔렀던 사악한 행동이 그녀가 꿈에서 본 어린 소년의 행동과 똑같았다는 것 외에는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사방에서 연승혁한테 자수하라는 경찰 측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연승혁은 하늘로 중지를 치켜들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를 더욱 꼭 껴안았다.주위의 총소리가 다시 울렸지만 그는 운이 좋게도 매번 피했다.아마도 경찰 측에서는 공지민을 염려하여 함부로 총을 쏘지 못했고 연승혁이 스스로 멈추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온시환은 경찰의 뒤를 따르면서 공지민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다리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더 빨리 걸어가려고 했다.반승제는 그가 심하게 다친 것을 보고 화가 났다.“미친 거야? 다리에 통증도 안 느껴져? 여기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연승혁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공지민이 살아있는 것도 직접 확인했잖아.”온시환의 눈앞이 캄캄해지기 시작했고 반승제를 밀치며 그가 말했다.“빨리 가야 해.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안전한
공지민은 자신이 왜 이런 꿈을 꾸는지 몰랐고 이 꿈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도 몰랐지만 꿈속의 나쁜 소년은 연승혁과 매우 흡사했다.그녀가 깨어났을 때 주변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고 모두가 지쳐서 한적한 곳에서 쉬고 있었다.연승혁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비꼬기 시작했다.“돼지야? 이런 상황에서도 잠이 와?”공지민은 두 손으로 팔을 감싸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도망쳐야 할 사람들은 당신들이잖아.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어.”연승혁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헛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지금은 상황이 긴박해서 더 이상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공지민이 눈을 감고 잠시 쉬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총소리가 들렸다.연승혁의 부하들은 신속하게 총을 꺼내 경계하기 시작했고 연승혁은 그녀를 끌고 계속 길을 떠났다.“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서둘러 길을 떠나야 해. 국경을 넘으면 우리 쪽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연승혁의 부하들은 이미 지쳐서 녹초가 되었음에도 자리에서 일어섰다.공지민은 지금 이 구역이 이미 포위된 상태이고 이들 중에 배신자가 존재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그녀의 시선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에게로 향했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뒤따라오고 있었다.몇 분을 걷다가 연승혁은 갑자기 단검을 집어 들고 그 남자를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미리 대비하고 있어서 가슴의 상처는 깊지 않았고 그는 수 미터 높이의 제방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연승혁은 그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오므렸다.부하들이 서둘러 물었다.“형님, 무슨 일이에요?”“저 남자 몸에 추적기가 달려 있어.”그 남자가 처음부터 배신을 작심하고 접근한 게 아니라 중간에 배신하기로 한 후임시로 설치한 추적기로 보였다. 그래서 경찰이 그렇게 빨리 찾아 올 수 있었던 거고 또한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리는 거 봐서 아마 주변은 이미 빈틈없이 포위된 듯했다.부하들은 초조해하기 시작했다.“그럼 이제 어떡해요? 아니면 저희가 여기서 막고 있을 테니까
공지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욕설하면서 그녀를 정말 죽이려고 했지만 연승혁이 막아섰다.연승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호루라기를 흘깃 쳐다본 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계속 걸음을 재촉했다.공지민은 눈을 감았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사람들이 잡혔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바랐다.그녀는 자신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매우 걱정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잠시 기대어 있다가 잠결에 살해당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 공지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그녀는 어렸을 때 외딴 산골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장작을 모으러 산에 올라갔을 때 멀지 않은 곳에 한 소년이 나타났고 그 소년의 옆에는 키 큰 남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등에 돼지풀이 가득한 바구니를 짊어지고 손에는 자신이 주운 막대기를 쥔 채 언덕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마침 그 소년 앞에 절하는 자세로 엎드려 넘어졌다.그녀보다 몇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흥미로운 듯 고개를 숙였다.옆에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도련님, 간첩일지도 모르니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공지민은 그 당시에 그런 말을 처음 들어봤고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불리는 소년이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막대기를 가져가서 그녀의 얼굴과 어깨를 번갈아 찌르기 시작했다.공지민은 너무 아파서 바로 울음을 터뜨렸다.소년은 옆에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이게 간첩이라고? 갓 태어난 새끼 돼지처럼 뽀얗네.”“도련님, 혹시 모르니 매사에 조심하셔야 합니다.”소년은 웃으며 손에 든 막대기로 공지민을 계속 찔렀다.공지민은 감히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울기만 했다.“이 아이의 눈이 너무 예뻐서 파내서 소장하고 싶어.”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울려 퍼졌다.공지민은 우는 것도 잊은 채 TV에서도 본 적이 없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분석을 마친 후 그녀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비밀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먼 곳의 헬리콥터 소리가 들렸지만 연승혁 쪽인지 H국 정부 쪽인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연승혁의 부하들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고 안색이 변한 걸 보니 H국 정부 쪽인 것 같았다.공지민은 빠르게 깊은 숲으로 끌려들어 갔는데 이곳의 숲은 비교적 원시적이었고 H국 국경에 자리 잡고 있어서 앞으로 1km 더 나아가 국경에서 벗어나게 되면 H국 정부도 그들을 어찌할 수 없었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한국어로 욕하는 소리가 공지민의 귀에 또렷하게 들렸다.“제기랄! 젠장!”그 남자는 몇 마디 욕설을 퍼부은 뒤 키 큰 나무가 우거진 울창한 숲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여기서는 헬리콥터가 그들이 보이지 않지만 방금 전에 그들이 터널에서 빠져나왔을때 이미 발견됐을 것이고 헬리콥터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기만 하면 추적자들이 곧 올 거였다.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가끔 멈춰 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생각했다.공지민은 연승혁에 이끌려 모두와 함께 빠르게 이동하다가 중간에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알 수 없는 말을 한 뒤 자리에 멈춰 섰다.그는 몸을 돌려 연승혁에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연승혁의 표정은 처음에는 괜찮다가 갑자기 싹 바뀌면서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 공지민을 바라보았다.공지민은 버마어를 하는 남자가 또다시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연승혁은 당분간 그의 도움을 받아 길을 나서야 했기에 이때 저 여자를 달라고 하면 연승혁은 분명히 동의할 거였다.하지만 연승혁은 단검을 꺼내 들어 빠른 속도로 남자의 팔을 향해 찔렀다.그 남자는 고통으로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의 쓰러질 뻔했다.연승혁은 그에게 버마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상대방은 즉시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공지민을 더 이상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전전긍긍하며 계속해서 길을 안내하기 시작했다.공지민은 연승혁이 정말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그한테 제일 필요한 사람을저렇게
공지민은 연승혁이 역겨움을 느끼고 멈출 줄 알았는데 갑자기 그가 힘을 더 세게 주기 시작했다.“계속해 봐. 네가 그 남자랑 있었던 일을 말할수록 난 더 흥분될 거야.”“이거 놔!”‘미친놈!'연승혁은 그냥 이대로 그녀를 죽이고 싶었다.공지민은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연승혁의 눈에 비친 상처를 보지 못한 채 그를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설사 그녀가 그의 눈을 봤다고 해도 그저 비웃기만 할지도 모른다.그렇게 밤이 지나가고 이튿날 공지민은 누군가 부은 찬물에 의해 잠이 깼다.그녀는 눈을 뜨고 연승혁이 담배를 손에 쥔 채 얼굴에 반쯤 미소를 띠고 있는 것을 보았다.“깼어?”공지민은 갑자기 어젯밤에 그가 미친 듯이 그녀를 탐해서 온몸이 떨릴 정도의 고통스러움에 자신이 기절해 버렸던 게 떠올랐으며 지금도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그는 호루라기를 손에 쥐고 놀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깼으면 얼른 일어나. 서둘러 떠나야 해.”공지민은 심리적 혐오감뿐만 아니라 육체적 피로와 고통으로 인해 온몸이 떨렸다.“나 지금 걸을 수가 없어.”한 발짝만 내딛어도 그녀는 무릎을 꿇을 것 같았고 더군다나 며칠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연승혁이 다가와서 공지민의 턱을 잡고 호루라기로 그녀의 얼굴을 두드리며 말했다.“지금 나한테 애교 부리는 거야? 안타깝지만 난 구은우가 아니라서 안 넘어가.”공지민은 지금 이 상황에 왜 구은우를 언급하는지 이해가 안 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유독 구은우를 언급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그녀는 여전히 침대에 앉아 일어날 생각이 없었고 심지어 이대로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가 아무리 괴롭히고 재촉해도 다시 걸음을 떼지 않기로 했다.하지만 다음 순간 그가 갑자기 그녀의 목에 호루라기를 걸어주었다.그녀가 의혹스러워하던 찰나 그가 입을 열었다.“이거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만들어 준 거잖아. 이제 걸을 힘이 생겼지?”심리적 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 몰래 그런 짓까지 한 거야?’“온시환도 이 사실을 알아?”“알 필요 없어.”공지민의 단호한 대답에 연승혁은 낮게 비웃음을 터뜨렸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위에 몸을 얹고 있었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를 물며 속삭이듯 말했다.“좋아. 나도 애를 좋아하진 않아. 이제 걱정 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널 가지고 놀 수 있겠군.”하지만 그가 내뱉은 그 말에는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그 떨림이 불안처럼 스며들었다.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밀어내며 허리띠를 채웠다. 그리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공지민은 온몸이 풀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자기 몸을 닦았다. 배 안은 긴장감으로 가득했다.누구도 이 상황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연승혁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3시간 뒤, 배는 강을 빠져나와 육지에 도착했다.그들은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리고 H국 국경은 삼엄한 방어로 악명이 높았기에 탈출이 쉽지 않았다.그날 밤, 그들은 산 아래에 있는 한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공지민은 나무로 된 욕조 안에 거칠게 던져졌다. 연승혁은 그녀를 대충 씻긴 뒤 욕조 가장자리로 그녀를 끌어올렸다. 그러고 나서는 힘으로 그녀를 억누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했다.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지만, 연승혁은 그런 그녀의 상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손길과 이빨 자국은 그녀의 피부 곳곳에 깊은 흔적을 남겼고, 멍과 상처로 얼룩지게 했다.그러나 공지민의 눈빛은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냉정하고 무감한 눈빛은 그를 자극했고 더 불편하게 만들었다.그의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에는 두려움이나 고통 대신 오직 차가운 거부감만이 가득했다.모든 것이 끝난 뒤, 연승혁은 그녀를 바닥으로 밀쳐냈다.강한 충격에 그녀는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연승혁은 욕조 옆에 앉아 무언가를 손에 들고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공지민의 시선이 그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도 잘 아는 물건이었다. 바로 구은우가 어린 시절 그
그 뜨거운 온기가 다가오자, 공지민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꼈다. 속이 뒤틀리듯 메스꺼워졌고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그 순간 연승혁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빛은 깊은 어둠 그 자체였다. 그를 둘러싼 기운이 아까와는 전혀 달라져 있었다.공지민의 가슴을 더듬고 있던 외국인 남자는 여전히 손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는 연승혁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구해달라고 애원하기를...연승혁은 무릎 위에서 손가락으로 천천히 박자를 맞추며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게임을 즐기는 사냥꾼처럼 여유로웠다.처음 그가 공지민을 TV에서 봤을 때부터 그는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그 맑고 깨끗한 눈동자가 너무나 순수했기에,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덧칠하고 싶다는 충동이 있었다.연승혁은 눈을 내리깔더니 갑자기 공지민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그의 손끝에 느껴졌다.외국인 남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훔치며 사과하는 듯 외국어로 중얼거렸다.하지만 공지민은 여전히 혐오감에 휩싸여 있었다. 심지어 연승혁의 품에서조차 조금 전 외국인 남자에게 느꼈던 것과 똑같은 불쾌감이 가시지 않았다.그녀의 눈빛이 이를 드러내자, 연승혁은 비웃으며 갑자기 허리띠를 풀며 그녀의 바지를 거칠게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왜? 나랑 잤던 것도 그렇게 더럽게 느껴졌었어? 그땐 그렇게 좋아하더니 지금은 왜 이러는 건데?”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낮아졌고 분노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연승혁은 그녀를 거칠게 다루며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공지민은 저항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였다.배 안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시선을 돌리거나, 차라리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었다. 연승혁의 분노와 집착 앞에서 누구도 감히 나설 수 없었다.통증이 그녀의 몸을 가르고 지나갔다.고통과 모멸감이 그녀의 온몸을 뒤덮었고, 그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가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