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제가 꼴 보기 싫은 듯하시니 저는 이만 가볼게요.”“너... 너...”김경자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성혜인에게 삿대질했다. 하지만 성혜인은 이미 멀어진 후였다. 그 모습에 화병이 제대로 온 그녀는 결국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가고 말았다.반씨 저택을 나선 성혜인은 기분이 아주 좋았다. 따끔거리는 목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말했다.그 길로 중고 시장에 도착한 성혜인은 팔찌를 들고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직원은 팔찌를 이리저리 살펴보면서도 그녀를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물었다.“이걸... 진짜 파신다고요? 중고로?”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직원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말했다.“이건 진짜 귀한 물건이라 제가 결정할 수 없을 것 같네요. 마침 저희 사장님이 사무실에 계시니,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여기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성혜인은 두 명의 직원을 따라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반면 원래의 직원은 조심스럽게 팔찌를 들고 2층의 사장실로 향했다.“사장님, 어떤 여성분이 오셔서 이 팔찌를 중고로 팔겠다고 하시는데 지난번의 보석 박람회의 전시품이 맞는 것 같습니다. 세계적으로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기는 하지만 너무 비싸서 어떻게 해야 할지...”의자에 앉아 있던 사장이라는 남자는 다름 아닌 서주혁이었다. 그는 총기를 만기고 있다가 직원이 들고 있는 물건을 힐끗 봤다.중고 거래 시장은 돈 벌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 이곳에는 사치품부터 시작해서 불법적인 무기까지 없는 물건이 없었다. 물론 법의 변두리에 가까워질수록 아는 사람만 아는 거래가 진행되고는 했다.“진품이 맞기나 해?”“네, 100% 확신합니다.”“가격은 얼마 정도 하지?”“원래 가격은 400억 원쯤 하겠지만 저희는 300억 원까지 가능합니다.”이 팔지는 전 세계에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만약 경매장에 넘어간다면 천문학적인 가격이 매겨질 수도 있었다.“사들여.”직원은 머리를 끄덕이더니 팔찌를 서주혁의 앞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감정을 숨기는데 능한 반승제는 아무런 내색도 없이 차에 올라탔다.차가 백화점을 지나고 있을 때 반승제는 문득 머리를 들며 말했다.“차 세워요.”심인우는 급정거하면서 머리를 돌렸다.“대표님, 무슨 일이세요?”“잠깐 선물을 고르려고요.”성혜인이 팔찌를 받았다면 다른 선물도 좋아할 것이라고 반승제는 생각했다. 역시 온시환의 말대로 선물 공세를 거절할 여자는 없었다.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신이한과 만나봤자 얻을 것 하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사실 반승제도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품게 되었는지 몰랐다. 원래대로라면 성혜인을 더러운 여자라고 내쳐야 정상이기 때문이다. 성혜인은 날마다 남자를 바꾸는 바람기 많은 여자였다. 그런데도 그는 유치하게 재력을 뽐내서라도 성혜인을 신이한에게서 빼앗고 싶었다.반승제는 예쁘게 전시된 목걸이 앞에서 멈춰 섰다. 하지만 지난번의 팔찌처럼 마음에 드는 것은 없었다. 지난번의 팔찌는 전시 중인 작품인 반대로 백화점의 물건은 부자들이 고르고 남은 유행 지난 물건이기 때문이다.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돌아서더니 백화점을 나섰다. 그리고 차에 올라타서 심인우에게 말했다.“보석 전시회 주최 측에 연락해서 선물할 만한 물건을 보내달라고 해요.”심인우는 백미러를 통해 반승제를 힐끗 봤다. 그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반승제와 함께 일한 시간만 해도 몇 년이나 되는 심인우는 그가 얼마나 냉정하고 거리감 있는 사람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이토록 조용해 보이는 그도 화가 나는 순간 완전히 돌변해 버리고는 한다.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안 기를 바랄 뿐이었다.“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반승제는 기분 좋은 듯 곁에 있던 서류를 들어 올렸다. 같은 시각, 성혜인은 두둑한 지갑과 함께 다음 할 일을 계획하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성혜인은 온수빈에게 전화를 걸어 영화와 관련된 일을 물었다. 대본 작가가 온시환이라는 것을 알고
일이 이미 정해진 이상 온수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계속 있어봤자 모욕만 더 당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계약서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대표는 자리에 앉은 채로 도송애에게 전화해 계약을 축하했다. 온수빈이 아직 듣고 있는데도 말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사무실에서 나선 온수빈은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회사에는 신인도 많고 톱스타도 많았다. 그래도 요즘 제일 잘 나가는 것은 온수빈이었기 때문에 다들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사무실에 들어선 순간 그는 인간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도송애의 손에 죽을 목숨이 되고 말았다.도송애의 얼굴을 떠올리자, 온수빈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계약은 이미 체결되었으니 말이다.온수빈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냥 이대로 죽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죽는다고 해도 도송애의 악행은 밝히고 죽을 것이다. 그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 믿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이때 매니저가 곁에서 말했다.“수빈 씨, 바보 같은 생각하지 말아요. 어떻게든 해결 방법이 있을 거예요.”매니저는 온수빈이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도송애는 연예계에서 악명이 자자했다. 얼마 전 잠깐 뜬 적 있는 남자 연예인이 집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가 스트레스 때문이 아닌 도송애 때문에 몸이 망가져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을 업계에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온수빈은 그게 바로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도송애는 그를 노리기 시작한 지 한참 되었기에 얻은 다음 무슨 방법으로 괴롭힐지 몰랐다.“수빈 씨, 그냥 강민지 씨한테 다시 연락하는 건 어때요?”매니저는 도송애에게 갈 바에는 강민지에게 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강민지가 아닌 성혜인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였다.온수빈은 성혜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사실 그는 첫 만남 때부터 성혜인이 좋았다. 하지만 성혜인이 싫다고 하니 그도 별수 없었다.초저녁, 성혜인은
온시환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지만 금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좋아요. 300억 원의 투자금이라면 뭔들 못하겠어요. 근데 페니 씨한테 그 정도의 돈이 있었나요?”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허락만 하시면 내일 바로 입금해 드릴게요.”“온수빈 씨를 좋아해요?”“팬으로서의 좋아함이라면... 네.”온시환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복잡한 남녀 사이만큼 그의 구미를 당기는 것도 없었다.“좋아요. 그러면 내일 오전 9시까지 입금해 줘요. 그러면 바로 온수빈 씨한테 연락할게요.”성혜인은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제가 저녁이라도 살까요?”“아니에요. 다른 일 없으면 이만 가보세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온시환은 소파에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할 일’을 미처 끝내지 못한 그는 아직도 진정되지 못했다.성혜인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룸을 빠져나갔다.같은 시각, 반승제의 연락을 받은 보석 박람회의 주최 측은 벌써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직접 반승제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배달했다.“대표님, 이건 오늘 새로 받은 신상입니다.”상자는 반승제의 손에 놓였다. 상자를 열고 익숙한 팔찌를 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도 모른 채 주최 측 직원은 설명을 계속했다.“이건 해외의 박람회에서 금방 전시를 끝낸 전 세계에 하나 뿐인 팔찌입니다.”팔찌를 본 순간 반승제는 주최 측이 실수로 같은 팔찌를 보낸 줄 알았다. 하지만 전 세계에 하나 뿐이라는 말을 듣고는 표정이 빠르게 식어갔다.“이 팔찌는 어디에서 구한 거죠?”반승제의 기세에 겁먹은 직원은 뒤로 한 발짝 물러나면서 말했다.“실은 중고 거래 시장에서 받은 지 얼마 안 된 제품입니다. 많은 손님이 원하지만 일단 반 대표님에게 가장 먼저 가져왔습니다.”반승제는 크게 심호흡했다. 아직도 화를 내지 않고 덤덤한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그는 심인우에게 카드를 넘겨주고 결제를 부탁하더니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주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반승제의 문자를 확인하고 난 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본능이 반승제를 만나러 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10번의 약속을 빨리 끝내고 관계를 깔끔하게 끊어내고 싶기도 했다.앞으로 성혜인은 SY그룹을 운영하는 데 집중하며 지금까지 모은 돈으로 투자할 생각이다. 그래야만 이혼한 후에도 잘 살 수가 있었다.정작 호텔로 가자니 반승제가 오늘 밤은 또 얼마나 사람을 힘들게 굴지 걱정이 앞섰다. 지난 여섯 번 중 그 어느 한 번도 쉽게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큰마음 먹고 호텔에 도착한 성혜인은 1층 로비에 있던 심인우와 마주쳤다. 심인우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가까이 다가가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해줬다.“페니 씨, 대표님께서 오늘 기분이 안 좋으셔서 조심해야 할 겁니다.”반승제가 기분이 안 좋다는 말에 성혜인은 약간 올라가기 싫어졌다. 빡친 반승제라면 분명 평소의 냉철함을 잃고 눈이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성혜인이 무서운 듯 뒷걸음질 치는 것을 보고 심인우가 작은 목소리로 일깨웠다.“지금 안 올라가시면 대표님께서 직접 댁으로 찾아가실 겁니다.”반승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든지 얻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혜인은 결국 묵묵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반승제의 호텔 방 앞으로 간 후에도 성혜인은 쉽사리 들어가지 못했다. 두꺼운 문을 사이 두고도 그의 위압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성혜인은 손을 올려 조심스레 노크했다. 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서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칠게 벗어 던진 정장 외투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 헤친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 감정 없는 눈빛으로 머리를 살짝 들었다.성혜인은 호텔 측에서 준비한 하얀 슬리퍼를 갈아 신으며 가방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반승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다 말고 테이블 위에 놓인 팔찌를 발견했다.반승제는 몸을 일으키더니 팔찌를 한
반승제는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성혜인의 턱을 확 들어 올리며 억지로 머리를 들게 했다.“뭘 잘했다고 울어?”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듯이 눈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전보다 훨씬 야윈 그녀는 얼굴 살이 쏙 빠져서 조금만 힘을 줘도 턱이 부스러질 것만 같았다.반승제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서 손을 놓았다. 감정에 예민한 편이 아니었던 그는 복잡한 감이 들기만 했다. 비록 윤단미와 연애를 해본 적 있기는 하지만 자꾸만 그때와 달리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들었다.‘역시 분노겠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가?’적어도 성혜인 외의 다른 사람에게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라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어쩐지 지는 느낌이 들었던 반승제는 허리의 동작에 힘을 더했다.성혜인은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이다. 그래서 반승제가 어떻게 하든 이를 꽉 악물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자가 이러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노리고 버틴 것이었다.죽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는 성혜인을 보고 한번 끝낸 반승제는 급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짜증 섞인 손길로 그녀를 침대 위로 내던졌다.“됐어, 나가.”침대 위에 엎어진 성혜인은 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벌떡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눈길은 단 한 번도 반승제에게 향하지 않았다.그 모습에 반승제는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와중에 팔찌가 다시 떠오르자, 그녀가 뻔뻔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승제는 심호흡하고 나서 욕실로 향했다. 성혜인이 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말이다.옷을 입고 난 성혜인은 바로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에는 늘 그랬듯이 초췌한 그녀의 얼굴이 비쳤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는지 회의감이 드는 순간이었다.샤워를 하고 나온 반승제는 성혜인이 사라진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윽고 침대에 묻은 빨간 핏자국을 보고는 액정 깨진 핸드폰으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몸은 괜찮아?”성혜인은 몸이 괜찮지 못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그녀는 배가 너무 아파서 곧 정신을 잃을
조금 전 단단히 겁먹었던 성혜인은 이제야 약간 진정되었다. 그래서 잔뜩 쉰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만족해요?”성혜인의 말 한 마디는 반승제가 품고 있던 폭탄을 완전히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연고를 들고 있는 채로 머리를 들며 물었다.“그게 무슨 뜻이지?”“대표님은 제가 비참해진 꼴을 보는 걸 제일 좋아하잖아요.”말투가 평소대로 돌아온 성혜인은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소원 이루셔서 참 좋겠네요.”성혜인은 아직도 침대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반승제를 경계하는 듯 발에 힘을 꽉 주고 있었다.반승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거만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새로 생긴 뜨거운 것에 덴 듯한 흔적을 이제야 발견하고는 내려고 했던 화가 가슴팍에 걸려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연고를 휙 던지면서 차갑게 말했다.“약 가지고 꺼져.”성혜인은 묵묵히 침대에서 일어나 연고를 주어들었다. 그리고 옷매무시를 정리하며 떠날 준비를 했다.성혜인이 진짜 떠나려는 것을 보고 반승제는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의 모든 움직임이 다 반승제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몸 안의 수분은 분노에 들끓다 못해 한 방울도 남김없이 증발될 것만 같았다.반승제는 성혜인을 확 끌어당기더니 대신 연고를 발라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반승제가 상처도 무시한 채 계속하려는 줄 알고 결국 참다못해 뺨을 때렸다.모든 힘을 다해 때린 성혜인에 의해 반승제는 고개가 홱 돌아갔다. 짝 소리와 함께 입술에는 피가 터지고 말았다. 머릿속은 ‘윙’하고 울려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난생처음 뺨을, 그것도 여자한테 뺨을 맞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반승제는 잠깐 조용히 있다가 간질간질한 입가를 닦았다. 그러자 손가락에는 붉은색 피가 묻어났다. 그의 눈빛은 금방으로 철창을 벗어날 야수만큼 위험했다. 그리고 홧김에 성혜인을 확 끌어당겼다.성혜인은 몸을 흠칫 떨더니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라는 해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눈빛에는 본능적인 두려움
“그래요?”반승제는 덤덤하게 손을 빼내면서 말했다.“이만 돌아가 보세요.”의사는 약간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BH그룹의 대표씩이나 되는 반승제가 자신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도 모를 리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다른 말 없이 부랴부랴 호텔을 나섰다.반승제는 1층 로비에 계속해서 앉아 있었다. 지금의 얼굴로 온시환이나 서주혁을 만나러 간다면 평생 놀림감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새벽 다섯 시까지 1층에서 화를 삭이고 나서야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으로 들어가자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그래서 반승제는 성혜인이 당연히 지하 주차장을 통해 떠났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으러 침실에 들어가자,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작은 몸짓이 보여 우뚝 멈춰 섰다.누구는 화가 나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데, 누구는 방안에서 속 편하게 쿨쿨 자는 것을 보니 겨우 진정됐던 화가 또다시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반승제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이불을 거뒀다. 성혜인을 당장 쫓아낼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손바닥만 한 얼굴이 살이 빠지면서 더욱 작아진 것이 안타까웠다.결국 반승제는 성혜인에게 이불을 다시 덮어줬다. 그리고 옷장 앞으로 가서 오늘 입을 정장을 고르기 시작했다.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실 테이블 위의 서류만 챙겨 든 채 밖으로 나갔다.밖에서 반승제를 기다리고 있던 심인우는 그의 얼굴에 난 선명한 손자국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동시에 성혜인이 아직 살아있기는 한지 걱정되기도 했다. 태생이 오만한 그는 한 번도 홀대받은 적 없었다. 여자에게 뺨을 맞는 일은 더욱 없었다.심인우는 운전대를 꽉 잡은 채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페니 씨는 괜찮아요?”페니의 얘기가 나오자, 반승제의 표정은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가슴 속의 폭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시끄럽게 울려대는 것 같았다.“안 괜찮아요. 장례 치르게 관이라도 준비하던가요.”심인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역
공지민은 며칠 동안 별장에서 먹는 것 빼고는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별장 주변 화원을 구경하며 조용하게 있었다.고용인 아줌마는 거의 그림자처럼 공지민을 따라다녔고 매일 있었던 일들을 연승혁에게 보고했다.연승혁은 이틀이면 돌아갈 수 있을거로 생각했었는데 이번 일은 좀 까다로워 시간이 길어지게 되었다.연승혁은 운 좋게 살아남았던 시한폭탄 같은 그 사람을 빨리 찾아 죽여야만 했지만, 부하들의 추적에 의하면 이 사람은 동쪽에서 신호가 잡혔다가 얼마 안돼서 다시 서쪽에서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부하들이 전문적인 기술자가 아니었더라면 연승혁은 자신이 지금 그 사람에게 농락당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한 사람이 그토록 짧은 시간에 동쪽에서 서쪽까지 그 먼거 리를 움직일 수 있었을가.이것은 분명 그를 제원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 끌려는 작전인 듯했다.연승혁은 원수가 너무 많아 누가 저지른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 초조해 지기 시작했지만, 공지민의 일거일동을 보고 받을 때마다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저녁 무렵, 공지민은 직접 연승혁에게 전화를 걸어 원망의 말투로 말했다.“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정말 심심해 미칠 것 같은데 사람 시켜 나 좀 데리고 놀라고 하면 안 돼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줄곧 별장에서 연승혁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연승혁은 하루면 일이 해결될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며칠을 지체하게 되어 공지민 홀로 집에서 기다리게 되었다.공지민은 이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혹시 예전에 난 직업도 없이 오빠가 날 먹여 살린 거예요?공지민은 며칠 동안 아무런 의욕이 없이 먹기만 했었고 누구도 먼저 연락해 찾은 일도 없어서 자신이 직업도 없었을 거로 생각했다.만약 출근하던 사람이 었으면 며칠 동안이나 사라졌는데 사장님이 직원들더러 연락해보라고 하지 않았을까.연승혁은 사람을 시켜 공지민을 데리고 밖에 나가 바람도 씌우게 하고 싶었지만 온시환이랑 부딪치는 일이 생길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온시환은 거의 매일 열 몇
“맛있어, 먹고 싶으면 이따 저녁에 나가서 먹자.”동생은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그런 염정아가 걱정되어 소매를 잡으며 위로하려 했지만, 옷을 더럽힐까 봐 그러지도 못하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누나, 일하는 거 힘들지? 아니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돈을 벌어 우리한테 햄버거도 사주고 저녁에도 좋은 거 먹으러 가자고 하겠어.”염정아는 손을 들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이번에 좋은 회사에 취직해서 사장도 엄청 좋은 사람이고 월급도 많이 줘.”동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들고 있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허겁지겁 먹어댔다.염정아는 공지민의 계획에 피해라도 줄까 봐 내일 돌아가야 해서 오늘 저녁밖에 시간이 없었다.아이들은 모두 배가 불룩하게 나와서야 밥상에서 일어섰고 동생은 배가 부름에도 토할 정도로 그냥 먹고 있었다.염정아는 동생의 손에 남은 햄버거를 뺏으며 말했다.“내가 말했잖아.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왜 아직도 그 습관 못 버려?”“오늘 안 먹으면 다음엔 없을가봐...”“이젠 그런 걱정 하지 마. 내 말만 잘 들으면 앞으로 쭉 있을 거야.”“그래, 누나 말 잘 들을게.”염정아는 웃으면서 남은 햄버거를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집에 있던 냉장고는 전에 중고로 샀던 거라 너무 작았고 티비도 화면이 매우 작아 아이들이 한데 모여야만 볼 수 있어서 염정아는 집에 온 틈을 타 냉장고랑 티비를 모두 새것으로 바꾸었다.새 티비는 백 인치라서 화면이 큰 소파에 앉아서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아이들은 너무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췄고 젤 작은 막내 둘까지 신이 나서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염정아는 집 안에 있는 모든것 들을 교환하고 정리 한 다음 몇 시간이 지나 아이들을 데리고 랍스타 먹으러 나섰다.식당에 도착하자 동생은 낯선 환경이라 염정아 곁에 꼭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아이들도 처음 보는 주변의 분위기에 큰 소리로 말도 못 하고 있자 염정아는 바로 조용한 방으로 예약해 메뉴판에 있는 음식을 하나씩 전부 주문했
동생의 연락을 받은 염정아는 아이들 생각에 먼저 공지민한테 연락하고 싶었지만, 둘 사이의 약속 때문에 연락도 못하고 결국 온시환에게 연락하게 된 것이였다.염정아가 할 말이 있는 듯한데 뜸들이며 못하고 있자 온시환은 그녀가 집을 그리워하는 눈치를 채고 말했다.“이틀 정도 지연되여도 괜찮을 거예요. 제가 사람 시켜 집에 데려다줄게요.”염정아는 그 순간 얼굴색이 밝아지며 눈시울을 붉혔다.“네, 고마워요 시환씨.”온시환은 말한 대로 그날 바로 사람 시켜 헬기로 염정아를 집에 데려다주었다.집에 도착한 염정아는 방문을 열고 동생이 아이들을 달래고 있는 것을 보았다.동생의 행동은 아주 서툴렀고 정상적인 사람들하고는 비교가 되지만 아이들이 그의 보살핌에 잘 커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염정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문 여는 소리를 듣고 동생은 바로 뒤돌아보더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누나!”염정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능숙하게 아이들한테 분유를 타 주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동생은 염정아의 주변만 맴돌면서 금방 통화한 지 얼아도 되지 않은 사람이 이렇게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며 꿈만 같게 생각했다.주방을 보던 염정아는 초라하게 놓인 반찬 몇 가지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너희 요즘 이렇게만 먹은 거야?”동생은 눈빛이 조금 흔들리더니 1분 만에 잘못을 인정하고 아이들에게 햄버거를 시켜줬다고 자백했다.“미안해 누나,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시켰어.”두 남매는 부모님들이 살아 계실 때만 햄버거를 먹어봤었고 지금의 그들에겐 이런 음식들은 사치품이였다.그때 염정아는 집을 나서면서 아래층 마트 아줌마한테 돈을 맡겨뒀는데 동생의 요구에 아줌마가 배달을 시켜준 듯 하였다.염정아는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였다.“먹고 싶으면 우리 오늘도 시켜 먹자.”4억, 그들은 지금 돈이 전혀 부족하지 않았고 공지민이 후에 또 몇천만을 주었다.동생은 또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닥까지 밀고 닦기 시작했다.염정아는 빨
연승혁은 의자를 찾아 앉아 묵묵히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았고 그의 부하들은 그들을 공격해 온 해커의 추적에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시간이 오래 걸리자 연승혁은 귀찮은 어조로 물었다.“얼마나 더 걸려야 되는 거니?”“형님, 이틀은 걸려야 될 듯 해요. 그쪽에서 언제 다시 움직일지 몰라 아직은 추적하기 어려워요. 일단 움직임이 있을 때 추적해 봐야 할것 같네요. 현재 상황에서 보아 신호는 10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에서 잡히고 있으니 아마 해역 부근에 있는 것 같아요.”연승혁은 귀찮다는 듯 눈을 감으며 짧게 대답했다.“그래.”연승혁은 제원의 별장에서 나오면서 고용인 아줌마한테 공지민을 잘 돌보라고 지시했다.공지민은 휴대전화를 연승혁에게 빼앗겨 당분간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고 별장에 있는 아줌마는 매일 그녀의 건강 상태를 관찰하며 잘 돌봐주었다.이것 또한 연승혁이 지시한 일이었고 그는 이렇게 감시하며 공지민의 기억이 언제 돌아올지 지켜보고 있었다.별장에서 하루 종일 자고 일어난 공지민은 아줌마가 연승혁에게 회보하며 온시환이 정문 밖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회장님, 저 사람 들여보낼까요?”연승혁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모르지만 아줌마는 알았다는 대답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간은 벌써 저녁 무렵이 되었고 공지민은 온 하루 별장 안에만 있었다.온시환은 며칠 동안 공지민의 소식이 끊기자 걱정되어 그녀의 집에 찾아갔지만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공지민은 요 며칠 사람도 보이지 않고 통 연락이 없었다는 것이다.많이 불안해진 온시환은 공지민에게 전화를 몇 번이나 걸었지만 역시 받는 사람이 없었다.당연히 온시환은 공지민의 휴대전화가 연승혁의 손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연승혁은 공지민의 휴대전화에 뜬 온시환의 부재중 전화를 보고 왠지 모를 불편한 마음이 또다시 생기게 되었다.그러고는 휴대전화를 옆에 두고 더 이상 상대하지 않았다.연씨 가문은 외래인 출입 금지라서 들어가지도 못한 온시환은 차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그 시각 염정
날은 이미 저물었고 조용한 공간엔 선남선녀 둘뿐이라 음침한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승혁은 이건 자신이 시작한 게임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공지민이 단순하게 행동 할수록 그녀를 덮치고 싶은 사악한 마음은 점점 더 강해졌고 누나라 해도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있는 한 아무나 그의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연승혁의 시선은 공지민으로 향했고 쇄골로 부터 아래로 내리 훑어보며 얇은 슬리퍼 한 켤레만 신어 은은한 분홍빛을 드러낸 발등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듯 시선을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겼다.“일이 생긴 거 맞아. 나가서 해결해 봐야 할것 같아.”연승혁은 마음속으로 며칠 후에 돌아와서도 공지민이 이대로 사람을 유혹하면 아무 생각 없이 일단 그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나중에 할머니께 천천히 설명하기로 생각했다.“오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연승혁은 공지민이 이렇게 자신에게 달라붙을 줄은 몰라 입꼬리를 실룩거리면서 말했다.“어딜 따라오겠다는 거야?”“오빠랑 떨어져서 있고 싶지 않아요. 잊고 지낸 것이 너무 많다 보니 오빠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좀 놓일 것 같아요. 오빠한테 혹시 다른 여자라도 있나요?”“아니, 같이 가도 돼. 근데 내가 어떤 일을 하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줘.”필경 해결해야 할 일은 피를 보는 일이라서 걱정되는 듯하였다.“괜찮아요. 저 안 무서워요.”연승혁은 밑도 끝도 없는 사람이라 공지민이 이 정도로 말하니 바로 데리고 집에서 나섰다.헬기에 탑승한 후 공지민은 눈을 감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연승혁은 계속 통화만 하고 있었고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무슨 일이야?”회답이 없자 연승혁은 바로 헬기를 먼저 착륙하게 하고 단번에 공지민을 안아 헬기에서 내렸다.“어떤 상황인지 내가 먼저 가서 상황을 좀 볼 테니 일단 집에 가만히 있어.”“오빠, 저도 같이 가고 싶어요.”공지민의 말에 연승혁은 심장이 무언가에 꽉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제야 자신이
연승혁은 왜 일이 이렇게 된 건지 머릿속으로 수없이 생각했지만, 공지민이 소파로 이끌어 앉고 나서야 그나마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공지민의 휴대전화는 이미 연승혁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는 전부 온시환에게서 걸려 온 것이였다.연승혁은 휴대전화를 다시 공지민 앞에 놓으면서 말했다.“이 번호에 전화 걸어 최근 한 달 동안은 연씨 가문에서 할머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해.”공지민은 부재중으로 적힌 온시환이라는 이름을 보고 물었다.“이건 누구예요?”“네 친구야. 네가 어떻게 된 건지 걱정되어 연락이 온 같으니 내 말대로 문자 한 통 보내줘.”“알겠어요.”공지민은 머리를 끄덕이며 연승혁이 말한 대로 메세지를 작성하여 발송했다.하지만 회답은 바로 오지 않았고 몇분이 지나서야 문자 알림음이 울렸다.“걱정되니까 전화 좀 받아.”연승혁은 바로 휴대전화를 뺏어가 대충 한 줄로 답장을 보냈다.“걱정하지 말아요.”답장을 받은 온시환은 미간을 찌푸리며 공지민이 자신을 배신하고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온시환이 바다에 보낸 사람은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고 오늘 밤 연승혁은 그쪽에서 명령을 받을 것이다.연승혁의 꼬리는 이미 잡혔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도 증인을 찾지 못한 것이다. 증인은 연승혁에 의해 불 속에 버려진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지만, 지금은 행방불명이고 이 사람만 찾으면 연승혁을 감옥에 보낼 수 있었다.지금 공지민은 혼자 움직이고 있는 듯 하였으나 그녀의 계획을 들은 적 없는 온시환은 매우 불안했다.온시환은 자신이 막지 않으면 공지민은 죽을 길밖에 없고 그녀 역시 살아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그럼 난? 단 일 분이라도 날 생각한 적 있었나?’온시환은 공지민의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 항상 잘해주고 있는 자신을 거절할 방법이 없어서 함께 지내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소파에 드러누운 온시환은 문자로 공지민이 어떤 계획을 하고 있는지 다시 묻고 싶었지만, 연승혁한테 들킬까 봐 섣
연승혁은 온시환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결혼도 했으니 이제 좀 안심하지 그래? 누나는 연씨 가문의 사람이기도 하고, 요즘 들어 태도도 한결 누그러졌잖아. 할머니를 돌보러 간다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 설마 누가 누나를 괴롭히기라도 할까 봐?”온시환은 술잔을 비우고 몸을 뒤로 기대며 한껏 여유로운 모습으로 물었다.“그래서 원아정은 어떻게 처리할 거야?”“원래 해외로 보낼 계획이었는데, 공항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쳤어. 지금까지도 행방을 못 찾고 있어.”온시환은 이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네 사람들 진짜 무능하네?”이 일은 연승혁 자신도 잘못 처리한 게 분명했기에 그는 드물게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온시환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이곳에 공지민이 없으니 흥미를 잃은 듯 지루해졌다.연승혁 역시 마음이 이곳을 떠나 있었다. 그는 이상우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집에 공지민이 있는데...’그 생각이 들자마자 그는 어딘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술자리에 나와 있는 것도 단지 그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또다시 선을 넘는 행동을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이 게임은 분명 자신이 시작한 것이었지만 그는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 기분은 묘하게 불편하면서도 생소했다.그는 다시 한 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옆에 앉은 온시환을 흘깃 바라보았다.솔직히 말해, 온시환의 외모는 인정할 만했다. 여자 친구도 여럿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공지민도 그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던 적이 있지 않을까?그녀가 두 다리로 이 남자의 허리를 감싸안은 적은 없었을까?그런 생각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고 묘한 불쾌감이 밀려왔다.연승혁은 술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투를 집으며 말없이 나갈 준비를 했다.이상우도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연승혁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이상우는 담배를 피우지 않기에 조금 떨어져서 걸어가며 말했다.“나
공지민의 눈빛은 너무 맑았다. 연승혁은 이런 순수함이 싫었다. 그는 예전부터 너무 깨끗한 것을 보면 망가뜨리고 싶어졌다.마치 과거 드라마 속 공지민을 처음 봤을 때의 기분과도 같았다.지금은 상황이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녀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공지민은 그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그 모습은 그날 폐공장에서 보여주었던 농염한 태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마음을 녹아내리게 했다.“오빠, 저녁은 뭐 먹어요?”“네가 먹고 싶은 걸로. 내가 요리사에게 시킬게.”연승혁은 시선을 피하며 어둑한 눈빛을 감추고 소파로 가 앉았다. 공지민은 그의 꽁무니를 따라가 곁에 앉았다.“아무거나요.”그녀는 어느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그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나 예전에 오빠를 좋아했던 건 오빠 얼굴 때문이 아니었을까요?”공지민은 장난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턱선을 따라 손끝으로 훑더니, 손가락 끝이 그의 목젖을 스치듯 지나갔다.그 순간, 연승혁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무엇인가 가볍고도 날카로운 것이 그의 마음 한구석을 간지럽혔다.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손끝 온기가 은근히 탐이 났다.요리사가 저녁을 가져올 때까지도 두 사람은 여전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공지민은 연승혁에게 같이 앉아 식사를 하자고 했지만 연승혁은 갑자기 나갈 일이 있다며 혼자서 먹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차에 앉은 연승혁은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상황이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그때 친구로부터 술자리에 오라는 연락이 와서 그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마침 그 자리에는 이상우도 나와 있었다.이상우는 여전히 금테 안경을 쓴 채 그를 보자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연승혁은 평온한 얼굴로 그의 옆 자리에 앉았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다.“원아정이 사라졌다는데, 그거 진짜야?”연승혁은 잔을 들어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응, 진짜야
공지민은 멍한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진심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런 거였군요.”그녀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얼굴에는 어딘가 알 수 없는 혼란과 미묘한 행복감이 섞여 있었다.연승혁은 일부러 그녀를 골려주려던 참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바지를 벗긴 걸 생각하면 그대로 넘어갈 수 없었다.그날 폐공장에서 그녀가 ‘오빠’라고 불렀던 그 농염한 목소리는 마치 주문처럼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두 다리를 꼬아 올리며 보였던 그 요염한 눈빛은 숲속의 교활한 여우처럼 그를 현혹시켰다. 하지만 지금의 공지민은 순수하고 멍한 토끼처럼 덫에 걸린 듯한 모습이었다.처음에는 그저 장난일 뿐이었는데 어느새 심장이 조금씩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이상우는 커튼을 닫고 손목시계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난 이만 가볼게. 다음에 같이 밥이나 한번 먹자. 연락해.”이상우와는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친구였기에 그 정도의 약속은 자연스러웠다.연승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지민의 볼을 꼬집었다.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며 도톰한 볼은 꼬집을 때마다 화난 햄스터를 연상케 했다.방 안에 둘만 남았을 때 공지민은 커다란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뭐 하는 거예요?”연승혁은 살짝 힘을 주며 부드럽게 달래듯 말했다.“귀여워서. 다시 한번 오빠라고 불러볼래?”그날 폐공장에서 불렀던 것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인 목소리로 말이다.공지민은 미간을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평소에 제가 그렇게 불렀어요?”연승혁은 그녀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웃었다.“그래.”“정말 오글거리네요.”그러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오빠.”공지민의 목소리는 지난번처럼 농염하고 유혹적이지 않았지만 왠지 이번에는 지켜주고 싶어지는 느낌이 들었다.연승혁은 그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에서 움트는 걸 느꼈다. 손을 내리고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가슴이 이상하게 뛰었다.하지만 그는 이 상황이 꽤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