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시환은 사무실에 앉아 있는 반승제를 바라봤다.얼마 전 BH그룹은 온시환의 대본에 투자하는 것을 계기로 엔터 사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오늘 BH그룹에서 찾은 감독과 미팅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반승제의 사무실에 들렀다.“성혜인 씨 말이야, 꽤 대단한 것 같지 않아?”통화를 하고 있던 반승제는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온시환에게 소파에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온시환은 그가 바쁜 것을 보고 말없이 소파로 가서 앉았다.한 번 시작된 통화는 두 시간이나 지속되었다.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골치 아픈 일들을 해결하느라 애썼다. 이때 심인우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대표님, 비행기는 세 시간 뒤 출발합니다.”반승제는 이제야 핸드폰을 내려놓고 미간을 눌렀다.“임원진한테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해줘요.”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한쪽에서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반승제는 온시환을 바라보며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온시환은 성혜인에 대해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반승제가 너무 바빠 보였기 때문이다.“출장 가는 거야?”“응.”반승제는 휴게실로 가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온시환도 그를 방해하지 않고 이만 밖으로 나갔다.반 시간 만에 출국 준비를 끝내고 차에 올라탄 반승제는 핸드폰을 확인했다. 협력사와 회사 임원 외의 연락은 여전히 없었다. 물론 성혜인도 포함해서 말이다.반승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꺼버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그나마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를 돌리며 심인우에게 말했다.“이번 출장은 이틀 정도 걸릴 것 같으니까, 이틀 뒤의 귀국 비행기 티켓을 미리 사줘요.”“네, 대표님.”반승제는 아무에게도 출국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성혜인도 당연히 모르고 있었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로즈가든에서 유경아의 전화를 받았다.“사모님, 어젯밤 경비가 포레스트에서 침입자의 흔적을 발견했어요. 회장님께서 직접 마련하신 별장이라 지금껏 도둑 한 번 든 적 없는데, 혹시 요즘 사모님한테 무슨 일이 있었나요?
성혜인은 임신 테스트기를 한쪽에 놓고 겨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포레스트로 출발했다. 유경아는 마치 그녀가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이 기다리고 있다가 야식이 필요한지 물었다.제원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꼽으라면 성혜인은 단연 포레스트를 선택할 것이다. 포레스트는 돈이 있다고 해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반태승이 그녀에 대한 마음과 정비례하기도 했다.유경아의 질문에 성혜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은 야식을 즐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단 방으로 가서 책상 서랍을 열어봤다. 텅 빈 노트북, 편지, 반지... 다행히 걱정하던 물건들은 전부 다 있었다.사실 성혜인도 자신이 왜 이 물건들부터 확인하는지 몰랐다. 그저 상대가 노리는 것이 이것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것 외에는 사라져서 안 될 물건이 없기도 했다.서랍을 닫은 성혜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한참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서야 화장실에 들어갔다.영원할 것만 같은 기다림이 지속되고 있을 때 유경아가 노크하며 말했다.“사모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길래 따듯한 우유를 준비해 왔어요. 요즘은 별장에서 남아서 편히 쉬세요.”성혜인은 우유를 마시고 나서 다시 화장실로 들어갔다. 임신 테스트기에 뜬 선명한 두 줄을 보고서는 손에 힘이 풀려 테스트기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머릿속은 창백해졌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임신 테스트기를 쓰레기통 속에 버린 성혜인은 터덜터덜 밖으로 나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분명히 번마다 피임을 제대로 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머리카락을 헝클었다.그렇게 뜬 눈으로 보낸 밤이 지나고 해가 떴다. 유경아는 성혜인의 방 앞으로 가서 아침 식사가 준비됐음을 알렸다. 성혜인은 짙은 다크서클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사모님, 요즘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성혜인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머리를 절레
백연서는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곧바로 핸드폰을 쳐들고 사진 증거를 남겼다.‘내가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라고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감히 사고를 쳐? 역시 재수 없는 년이야!’백연서는 심호흡하고 나서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사람은 반승제가 아닌 심인우였다. 반승제는 오늘 하루 종일 회의할 예정이라 아예 핸드폰을 그에게 맡겨버렸다.“안녕하세요, 사모님. 저 심 비서입니다.”“내가 긴히 할 말이 있으니까, 승제한테 전화 좀 바꿔줘.”심인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침착하게 말했다.“대표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이시라 대략 네 시간 후에 통화할 수 있습니다.”백연서는 단 일 초도 기다릴 수 없어서 일단 윤단미에게 전화를 걸었다.“단미야, 너 혹시 승제랑 혜인이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니?”안 그래도 기분이 언짢았던 윤단미는 성혜인의 이름을 듣자마자 흥분하며 대답했다.“두 사람 이혼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승제가 그 여자를 싫어한다고 했잖아요!”윤단미의 대답을 듣고 난 백연서는 약간 시름이 놓였다. 하지만 아무리 반승제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해도 이 소식이 퍼져나가면 반씨 집안이 창피를 당할 것이기 때문에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이젠 하다 하다 바람까지 피워? 그래도 덕분에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네.’안 그래도 성혜인을 집안에서 쫓아낼 구실을 찾고 있던 백연서는 이번이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기분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포레스트를 떠나 김경자에게 전화를 걸었다.보수적인 김경자는 이런 문제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경자는 집안 어르신이 첩을 들이는 모습을 본 적 있는 건 물론이고 남존여비의 사상이 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원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손주며느리가 다른 남자와 바람나서 애까지 배었다니, 김경자는 당연히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백연서의 말을 듣자마자 테이블을 쾅 소리 나게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승제가 관심
머리가 어질어질 했던 성혜인은 뒷좌석에 가만히 누워있었다. 다행히 몸에 힘만 풀렸을 뿐 정신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차가 병원 앞에 멈춰 서는 것을 보고 성혜인은 백연서가 낙태를 원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손잡이를 꽉 잡으며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다. 하지만 두 명의 경호원은 사정없이 그녀를 차 밖으로 끌어냈다.성혜인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힘으로 경호원의 손을 깨물더니 휘청휘청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 전 금방 약을 들이마신 관계로 100m도 달리지 못하고 땀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몸이 힘든 것보다는 심적으로 두려운 게 더 컸다.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아무리 계획에 없던 아이라고 해도 그라면 이토록 냉정하게 병원으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짐승만도 못한 대우도 하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최선을 다해 달리면서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으로서는 정체를 들킨다고 해도 아이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그녀가 스스로 결정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아이를 건드려서는 안 된다.백연서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반승제밖에 없는 상황에 그의 핸드폰은 애석하게도 꺼져 있었다. 마지막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들고 경호원들이 발걸음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성혜인은 급한 대로 반태승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하지만 전화를 걸기도 전에 경호원이 핸드폰을 차 냈고 그녀도 덩달아 바닥으로 쓰러졌다. 경호원들이 서서히 그녀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젖 먹던 힘까지 짜냈는데도 도망간 거리는 500m밖에 안 됐다. 성혜인은 바닥에 쓰러진 다음에도 핸드폰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경호원이 더욱 먼 곳으로 차버리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성혜인은 땀인지 식은땀인지 모를 것으로 흠뻑 젖은 채 창백한 안색으로 쓰러져 있었다. 백연서는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네가 원하지 않는대도 어쩔 수 없어. 명색이 반씨 집안 며느리인데, 혼외자식이 웬 말이니?”성혜인은 손톱이 살결을 파고들 정도로 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반태승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백연서에게 빌어봤자 절대 동의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그러나 만약 반승제에게 전화를 걸어 연유를 잘 설명한다면 그가 아이를 지키기를 희망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아무리 희박하다 해도 가능성이 있긴 있었다.백연서가 미간을 찌푸리며 턱을 들어 올렸다.“사람 들고 들어가요, 수술은 이미 예약해놨으니.”“어머님...”백연서의 말투가 매우 담담했다.“성혜인, 승제에게 전화를 걸면 걔가 아이를 지키라고 할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걔가 널 좋아한다고 얘기한 적 있니?”성혜인은 갑자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그녀는 현재 반박할 기력조차 없었다. 온몸이 나른해져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백연서는 반씨 가문의 힘을 빌려 곧바로 비밀통로를 통해 성혜인을 수술실로 옮겼다.그녀는 성혜인이 난리를 칠 게 두려워 의사에게 전신마취를 해줄 것을 부탁했다.의사도 몇 년 동안 반씨 가문과 합작한 적이 있는지라 순순히 백연서의 말을 들었다.“여사님, 제가 검사를 좀 해보려고 하는데, 정말 아이를 원하지 않으십니까?”“당연하죠.”백연서는 성혜인을 극히 싫어하고 있었다.게다가 반승제가 제 아들이었기 때문에, 어찌 됐든 간에 그의 체면을 잃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의사는 백연서의 뜻을 확인하고는 곧장 수술실의 문을 닫았다.하지만 반 시간이 지나자 수술실 문은 다시 열렸다. 그러고는 의사가 나오며 백연서에게 말했다.“여사님, 검사를 해봤는데 정말 임신을 한 게 맞습니다. 하지만 자궁외임신이라 반드시 유산을 시켜야 합니다.”백연서는 어리둥절해 하더니 이내 코웃음을 쳤다.‘성혜인, 이게 네 업보인가?’아이는 본래 태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그럼 수술 해주세요.”의사는 고개를 끄덕였다.“임신 기간이 짧으니 무통 유산을 추천해 드립니다. 전혀 아프지가 않아요. 이미 정맥에 마취를 주사했으니 그럼 수술을 진행하겠습니다.”백연서에게 그런 건 전혀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어차피 자궁외임신이라
포레스트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이곳으로 왔는지도 몰랐다. 침대에 엎드리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 베개가 전부 젖어버렸고 그녀의 몸은 미세하게 떨렸다.그녀는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안간힘을 썼다.그때, 유경아가 문을 두드렸다.“사모님, 국을 끓여왔는데 이거라도 좀 드세요.”유경아는 그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마치 수면 부족인 마냥 요 며칠 성혜인의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그녀의 말소리를 들은 성혜인은 침대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 감정을 추슬렀다.“저 안 먹어요, 아주머니.”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은 거라고 여긴 유경아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국을 보온시켜둘 테니 혹시라도 밤에 드시고 싶으면 주방으로 가세요.”“네.”성혜인은 그저 목이 아플 뿐이었다. 잠시 엎드려 있던 그녀는 문득 또 그 편지와 반지가 떠올랐다.그녀는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와 편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편지는 어느새 손에서 젖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눈물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이다.그렇게 성혜인은 울며 잠이 들었다.새벽 두 시쯤, 그녀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일어나 구토를 했다.위가 너무 아파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겨우 위약을 찾아냈고, 성혜인은 즉시 입안에 넣어 씹어먹었다. 그러고는 수면을 돕는 약까지 한 알 먹고 나서야 다시 침대로 돌아가 엎드려 누웠다.그녀가 몽롱해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강민지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그 시각, 강민지는 병원에 있었다. 신예준의 사촌 여동생 상태가 갑자기 악화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가 수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모든 수술에는 리스크가 존재한다. 특히 머리를 여는 수술은 그중에서도 가장 리스크가 크다.신예준의 사촌 여동생은 수술이 실패할까 봐 걱정했다.다행히 오늘 밤 응급처치를 받아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꽃을 한 아름 안고 병원에 온 강민지는 비로소 그
한편, 전화를 끊은 강민지는 신예준이 의사의 진료실에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이 의사는 강민지가 강씨 집안의 인맥을 통해 초청해온 국제적으로 이름난 전문가였다.오늘 밤 의사를 비롯한 모두는 조희서와 실랑이를 벌이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강민지는 이미 의사로부터 가능한 한 빨리 조희서의 수술을 진행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다행인 것은 만약 수술할 시 그가 집도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집도하면 성공률이 30%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가 집도를 하면 70%는 보장한다고 했다.그러나 조희서는 일단 수술 성공 가능성이 100%가 되지 않는다고 하자 두려워했다.“예준 씨.”강민지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하지만 신예준은 되려 옆으로 한 발짝 비키며 손을 들어 눈썹을 어루만졌다.“미안해, 민지야. 내가 지금 기분이 좋지 않아서. 밖에서 좀 기다리고 있을래? 들어가서 희서 좀 설득하려고. 희서가 지금 다른 사람은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아.”강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얗게 씻겨진 그의 청바지를 보자 마음이 약해지는 것 같았다.“알겠어, 그러면 여기 앉아있을게.”그녀는 복도의 의자에 앉아 신예준이 멀지 않은 병실로 들어가는 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병실 침대에 앉아있던 조희서는 신예준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순식간에 눈시울을 붉혔다.“오빠.”소리 내 그를 한번 불렀을 뿐인데 조희서는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신예준은 얼른 다가가 따뜻한 물을 건네주었다.“이 의사 선생님은 해외에서 청해온 전문가야. 수술 성공률이 굉장히 높대. 그러니까 그만 떼쓰면 안 될까, 희서야?”조희서는 무서워 그의 옷 소매를 꼭 쥐었다.“난 그냥 죽을까 봐 무서운 거야. 나는 오빠 곁에 계속 같이 있어 주고 싶다고.”신예준은 컵을 앞에 놓고 조희서의 한쪽 손을 꼭 잡았다.“의사 선생님께서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나한테 말씀하셨어. 만약 계속 수술을 미룬다면 의사 선생님도 더는 방법이 없으시대. 희서야, 나도 네가 계속 내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해외의 회의실.몇 시간만 하기로 예정되어있던 회의는 또 세 시간이나 연장되었다.자리에 함께 있던 임원들은 반승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회의 내내 그가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어 모두들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반승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한 감정이 순간 솟구쳐 올라와 전의 냉정함을 잃어버렸다.그러나 그는 계속 의연하게 앉아 PPT를 바라보았고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꺼냈다.“회의는 이만 끝내죠. 두 사람을 파견해 그쪽 회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하시고요.”현장에 있던 임원들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고 전부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밖을 향해 걸어 나갔다.심인우도 그의 뒤를 바짝 따라나섰다.해외에 도착하자마자 반승제는 시차 적응을 할 새도 없이 곧장 회의실로 향해 여태까지 회의를 진행했다.그런데도 아직 해외의 일이 끝나지 않아 그의 눈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심인우가 건네준 핸드폰을 받아들고는 전원을 켰다.“대표님, 뭐라도 드시겠습니까?”반승제는 머리를 저으며 손을 들어 눈썹을 어루만졌다.“심 비서도 돌아가서 쉬어요. 깨어나면 내일 필요한 자료들 정리해주시고요. 귀국 날짜는 일주일 미루는 게 좋겠어요.”“알겠습니다.”심인우가 돌아가자 반승제는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친 그는 한 손으로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하며 나왔다.하지만 또다시 왠지 모를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아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던져버리고는 드라이기를 들어 머리를 말렸다.그리고 드라이기를 보자 갑자기 성혜인이 자신의 머리를 말려주던 장면과 더불어 끈을 묶던 장면까지 떠올랐다.그는 손을 멈추고 드라이기마저 던져버리고는 침대에 누웠다.그렇게 반승제는 젖은 머리를 한 채 잠이 들어버렸다. 수면이 부족한 탓이었는지 깨어났을 때 그는 머리가 몹시 무거운 느낌이 들었다.오늘 회의에 필요한 자료들을 들고 온 심인우는 그의 안색을 보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대표님, 어디 불편하십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