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인은 오늘 포레스트로 돌아갔다. 겨울이를 못 본 지도 한참 되었고 그의 상처가 잘 아물었는지도 걱정되었다.성혜인이 돌아온 것을 본 유경아는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사모님, 오셨어요? 겨울이는 금방 산책하고 돌아왔어요.”반승제가 언제 포레스트로 돌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유경아는 겨울이를 밖에 풀어둘 수 없었다. 그래서 겨울이는 계속 끝방에 가둬진 채 지내고 있다.성혜인이 가까이 다가가자, 겨울이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를 알아듣고 흥분하며 하울링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성혜인은 얼마나 가슴이 미어졌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로 자세를 낮춰 겨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성혜인은 원래 겨울이를 로즈가든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웃 사이의 모순을 해결했다고 해도 최효원이 앞집에 살고 있는 이상 겨울이가 무슨 일을 하든 트집 잡고 신고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도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만약 성혜인의 예상대로 된다면 로즈가든에는 또 바람 잘 날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성혜인은 결국 겨울이를 포레스트에 남겨두기로 했다.성혜인은 겨울이를 거의 반 시간 가까이 쓰다듬다가 마당으로 나가서 놀아주기 시작했다....병원.소윤과 성혜원은 함께 병원으로 갔다. 성훈과 라정옥이 한바탕 난동을 부리고 떠났으니, 보디가드들도 자리를 비웠을 것으로 여기고 말이다. 하지만 입원 병동으로 가보니 보디가드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소윤은 화가 치밀어 올라 목덜미를 잡았다. 성혜원도 표독한 눈빛으로 보디가드들을 노려봤다. 두 사람 다 차분하게 기다릴 인내심을 잃은 지 오래였다.“혜원아, 나는 일단 허진 아저씨를 만나러 갈게. 아무래도 많이 다친 모양이더구나.”성혜원은 미간을 구겼다. 이런 상황에서도 내연남 걱정을 하는 소윤이 아니꼽기도 했다. 그래서 그녀는 콧방귀만 뀔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소윤은 머쓱한 듯 성혜원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결국 자신과 몇 년 동안이나 함께 보낸 허진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의 병실로 향했다.이때 허진의 병
간호사는 성혜원의 행동이 이해가 안 가는 듯 머리를 갸웃하고는 약을 들고 성휘의 병실로 갔다. 병실 앞을 지키는 두 명의 보디가드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막아서지 않았다.간호사가 주사기 안에 든 약을 성휘에게 놓으려고 한 순간 그는 눈을 번쩍 뜨고 과호흡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만 주사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황급히 밖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교수님! 교수님!”한 무리의 의사들이 병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성휘를 응급실로 데려갔다. 간호사는 텅 빈 병실 안에서 바닥에 떨어진 주사기를 집어 쓰레기통에 던졌다. 그리고 이참에 쓰레기통까지 비웠다.복도 끝에 서 있던 성혜원은 의사들이 부랴부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자신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체내에 들어간 순간 죽을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독약이었으니 말이다.이때 성혜원의 시선에 쓰레기를 들고나오는 간호사가 보였다. 쓰레기의 가장 위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가 준비한 약이었다.“약은 그냥 버리는 거예요?”“네, 환자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져서요. 좋아진 건지 나빠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응급실로 갔어요.”성혜원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만약 성휘가 정신을 차린다면 집에서 쫓겨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어떡해... 어떡하지...’성혜원은 성한에게 전화를 걸어 병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얘기해줬다. 그러자 성한은 곧바로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출발한다고 했다. 성혜원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성한은 무조건 성혜인을 상대하러 갈 것이기 때문이다.성혜원의 생각이 맞았다. 성한은 로즈가든 근처에 매복해서 성혜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혜인이 눈에 띄는 순간 처리해 버릴 작정으로 말이다.성한을 부추기고 난 성혜원은 앞으로 성휘가 깨어나는 것을 막던지, 반승제와 결혼하던지 둘 중 하나는 꼭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번 일부러 가장 섹시한 옷을 입고 반승제를 찾아갔지만 쓰레기 취급을 당한 일이 생각나며 그녀는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온시환은 반승제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그 여자?”“페니 말이야.”“미친, 나 지금 윤단미 얘기하고 있거든?”“그래?”반승제는 약간 멈칫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 모습이 웃겼던 온시환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러니까 네 말은 너랑 페니 씨가 어떻게 될지는 페니 씨의 생각에 달렸다는 거지?”‘설마 이러다 페니가 결혼하겠다고 억지를 부려도 동의하는 거 아니야?’온시환의 질문에 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온시환은 당황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너 설마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윤단미 얘기를 하는 동안 한마디도 듣지 않고 유부녀 생각만 하고?”“아니거든.”온시환은 반승제를 힐끗 노려봤다. 그러고는 반승제의 취중 진담을 듣기 위해 일부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저 여자 어때? 페니 씨랑 비교해 봤을 때.”반승제는 머리를 들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여자를 힐끗 보고는 금세 시선을 거뒀다.“별로야.”온시환은 감탄하는 표정으로 반승제의 앞에 놓인 빈 술병을 봤다. 반승제가 오늘처럼 경계를 풀고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아주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고 녹음하기 시작했다.“승제야, 왼쪽에 있는 여자는? 몸매가 죽여주는데, 페니 씨보다 낫지?”온시환은 내일 반승제에게 녹음을 들려주며 아주 재미나는 반응을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승제는 차가운 눈빛으로 가만히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취하고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반승제의 경계심에 온시환은 제 풀에 꺾여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덕분에 반승제가 성혜인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진지한지는 알게 되었다. 별다른 취미가 없는 온시환에게 이는 최근 가장 큰 재밋거리였다.두 사람은 프라이빗 룸이 아닌 로비에 앉아 있었다. 온시환의 말로는 ‘가면을 벗어던진 채 욕망에 찌든 반인반수’들을 구경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아주 훌륭한 영감이 되어주고는 했다.온시환은 반승제를 부축
“왈왈!”이때 겨울이의 소리가 끝방 쪽에서 들려왔다.성혜인은 유경아가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했겠거니 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겨울이는 한달음에 거실로 달려가 그녀의 앞에서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마치 방 안에 들어가기 싫다고 애원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겨울이의 소리에 유경아가 깰까 봐 걱정되었던 성혜인은 부랴부랴 그를 데리고 끝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흥분한 겨울이는 죽어도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다.성혜인은 겨울이가 너무 오래간만에 자신과 만나서 흥분했을 것으로 여기고 억지로라도 방 안으로 밀어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때 그녀는 예고 없이 들려온 출입문 여는 소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버리고 말았다.이 시간에 도우미가 왔을 리는 난무했다. 입주 도우미인 유경아일 리도 절대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진작에 잠들었기 때문이다.‘도둑인가? 아니야, 포레스트의 경비를 뚫을 수 있는 도둑은 없어.’겨울이는 성혜인이 생각에 잠긴 틈을 타서 미친 듯이 거실로 달려가기 시작했다.“왈왈!”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을 반기는 듯 신이 나게 짖으면서 말이다.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겨울이를 따라 내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반승제는 겨울이의 이마에 남은 선명한 흉터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성혜인은 몰래 뒷문으로 나가서 포레스트를 떠났다. 하지만 겨울이는 어쩔 수 없이 남겨지게 되었다.로즈가든에 도착하고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된 후에야 성혜인은 유경아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하지만 오늘따라 깊게 잠든 유경아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포레스트에서 개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절대 인정하면 안 된다는 문자만 보내뒀다.반승제는 느긋하게 셔츠 단추를 풀었다. 겨울이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주변을 뱅뱅 맴돌았다.“겨울이?”혹시나 하는 마음에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이름을 불러보니 겨울이는 훌쩍 뛰어오르며 꼬리를 흔들었다.“역시 너 맞
성혜인은 반승제가 무조건 취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안 그러면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걱정한다기보다는... 이 시간에 대표님이 찾아오시면 남편이 오해할까 봐서요.”이 말을 들은 반승제는 순간 침묵에 잠겼다. 핸드폰을 사이 두고도 그 위압감이 전해질 정도로 말이다.성혜인이 말을 계속하려던 찰나 반승제가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성혜인은 실수로 끊어진 줄 알고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통화 연결음만 들려오고 나서야 성혜인은 그가 자신을 일부러 무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갑자기 왜 이러지?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근데 나는 유부녀라는 컨셉을 유지하고 싶었을 뿐인데...’반승제는 잠잠해진 핸드폰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소파로 올라가려는 겨울이를 향해 머리를 돌렸다.“너도 그놈의 남편에 비해서는 뒷전인가 보군.”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한 겨울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반승제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척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반승제가 귀국하기 전에 겨울이는 줄곧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잤다. 그래서 오늘도 늘 그랬듯이 소파에 엎드린 채 편안하게 잠들었다.기분이 언짢았던 반승제는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컴퓨터와 문서를 발견하지도 못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욕실로 가서 차가운 물을 틀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진정되지 않았다. 알코올의 작용으로 인해 겨울이를 팔아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들었다. 성혜인이 괴로워하는 표정을 볼 수 있도록 말이다.‘남편... 남편... 바람이나 피우는 남자를 왜 자꾸 입에 달고 사는 거야. 진짜 정신과라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반승제가 전화를 받지 않자, 성혜인도 더 이상 걸지 않았다. 끈질기게 전화를 걸다가는 오히려 반작용만 일으킬까 봐서 말이다.통화하는 내내 정체에 관해 묻지 않는 걸 봐서는 다행히 테이블 위의
성혜인은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만약 유경아와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반승제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겨울이를 왜 안 돌려주려고 하는 거지?’뒤늦게 정신 차린 성혜인은 반승제가 멀어진 것을 보고 후다닥 쫓아가며 말했다.“대표님, 저 진짜 겨울이를 잃어버렸어요. 대표님이 헛것을 본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어디에서 봤는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반승제는 우뚝 멈춰 섰다. 깔끔한 정장, 날카로운 인상, 차가운 목소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는 모습이었다.“남편이랑 같이 찾으러 다니지 그래?”성혜인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점점 멀어지는 반승제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다시 엘리베이터 앞까지 쫓아가며 말했다.“제 남편은 일 때문에 시간이 없어요...”반승제는 감정 하나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불안에 떠는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금방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그러면 시간이 있을 때 다시 찾던가. 난 5분 후에 회의 들어가야 해. 인테리어 일 때문이 아니라면 여기서 귀찮게 굴지 마.”이때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반승제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이기 때문에 주변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성혜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문이 서서히 닫히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반승제가 왜 겨울이를 돌려주지 않으려고 않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핸드폰을 꺼내 유경아에게 문자를 보냈다.「겨울이는 당분간 대표님의 뜻에 따라 포레스트에서 지내게 해요. 대신 절대 원래도 포레스트에서 지냈다는 걸 들키면 안 돼요.」성혜인의 사정을 잘 아는 유경아는 곧바로 답장했다.「물론이죠, 시름 놓고 저한테 맡기세요.」유경아라면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한 성혜인은 자신이나 겨울이를 찾는 척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핸드폰을 만지작댔다. 반승제에게 의심받지 않으려면 열심히 찾는 척 행동을 보여줘야 했다.성혜인은 자신의 SNS에 겨울이의 사진과
성혜인은 보여 주기 식의 글을 올리고 나서 병원으로 가려고 했다. 이때 반승혜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페니 씨, 겨울이를 언제 잃어버렸어요? 저도 같이 찾아줄게요.”반승혜가 이토록 열정적으로 나올 줄 몰랐던 성혜인은 약간 머뭇거리며 답했다.“어... 하루 전이요.”“페니 씨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제가 갈게요. 저랑 같이 CCTV를 보면서 겨울이를 찾아요.”반승혜는 개 주인인 성혜인보다도 더 급한 말투로 말했다.“아니에요, SNS에 올렸으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더구나 겨울이는 똑똑하잖아요.”“아무리 똑똑해도 개는 개예요. 그리고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요? 나쁜 사람한테 팔려 가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요. 저 승제 오빠한테 연락했어요. 근데 답장은 없더라고요.”‘그 승제 오빠라는 사람이 승혜 씨 연락을 무시하고 겨울이도 데리고 있어요...’성혜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생각했다. 그녀는 아직도 반승제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윤단미의 고양이를 위해 복수하려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금세 자신의 추측을 사실이라 단정 짓고 미간을 찌푸렸다.이것도 성혜인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내일이 지구 종말이라는 말을 믿을지언정 반승제가 자신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윤단미를 떠올리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남자한테 첫사랑은 진짜 엄청난 존재구나. 지나간 일로 아직도 이렇게 신경 써줄 정도라니...’“페니 씨, 저한테 문자로 위치를 보내줘요. 저 지금 차 탔어요.”반승혜의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던 성혜인은 로즈가든의 주소를 보내줬다. 그리고 그녀도 운전해서 로즈가든으로 돌아갔다.주차장에 차를 세운 성혜인은 차에서 내리려고 하다가 언뜻 백미러를 바라봤다. 그리고 주변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의 차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낯선 이를 발견했다. 얼마 전 금방 정신을 잃고 술집에 끌려간 적 있기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경각심을 일깨우고 차 문부터 잠갔다.낯선 이는 성혜인
성한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창문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운전하고 있던 소윤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닥쳐요!”눈에 빨갛게 충혈된 성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돈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건 성혜인뿐이라고요!”소윤은 몸을 흠칫 떨더니 핸들을 꼭 잡았다. 성한의 집착에 그녀마저도 겁이 나기 시작했다.‘이게 다 성혜인 그년 때문이야!’“한아...”소윤은 조심스럽게 성한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표정으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성휘가 언제 깨어날지 모를 상황이니 단두대에 올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같은 시각, 성혜인은 포레스트로 돌아간 후에도 한참 진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성한을 처리해야 하는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것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거니와 지금 이대로라면 마음 놓고 외출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성혜인은 심호흡하며 진정하더니 평소 자주 입지 않는 옷으로 갈아입고 모자와 마스크도 썼다. 그러고는 강민지도 절대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간 다음에야 밖으로 나갔다.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성혜인은 포레스트의 두 운전기사와 함께 외출했다. 그들은 반태승이 직접 고용한 사람이기 때문에 믿을만했다. 유경아의 말로 그들 중 한 명은 운전 기술이 뛰어나 수십 대의 차가 쫓아온다고 해도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성혜인은 운전 기술이 좋은 기사를 자신의 차에 태우고, 자신은 포레스트에 항상 세워져 있는 다른 차에 올라탔다. 그녀는 이렇게 성한을 유인해 내서 처리해 버리기로 했다.사전 준비를 마친 성혜인은 성한에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어디예요? 할 말 있으니까 지금 좀 만나요.」성한은 금방 답장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인적이 드문 곳에 있는 술집에 있으니 할 말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 보나 마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CCTV가 없는 술집일 것이다.눈에 뻔히 보이는 수단이기는 하지만 성혜인은 일부러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