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아내의 친정에 일이 터진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냉정했다.심인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보니 대표인 반승제는 부인을 썩 좋아하지 않는것 같았다. 그는 다시는 승제 앞에서 SY그룹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대표님, 회장님께서도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오셨습니다. 단미 아가씨와 만났냐고 물으셨어요.”반태승은 줄곧 윤단미와의 만남을 극구 반대해왔었다.인우가 건네는 계약서를 받아들며 승제는 할아버지 반태승이 막아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됐다.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승제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승제에게는 매일 참가해야 할 회의 스케줄이 많았는데, 하루 종일 그는 회의를 하고 있지 않으면 회의하러 가는 길에서 시간을 보냈다.회의할 때 승제는 종래로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않았기에 반태승과 윤단미가 걸어온 전화 역시 받지 못했던 것이었다.“단미 아가씨도 대표님께서 보러 오길 원하십니다.”“단미는 많이 회복됐어요?”“부상 정도가 심해서, 아직 한동안은 더 입원해야 할 것 같습니다.”승제는 앞에 놓인 계약서를 그저 뚫어져라 바라보며 한 글자도 적지 않았다.한참 후, 그는 인우에게 물었다.“결혼 후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걸 분명 아는데 왜 여자는 이혼하려 하지 않을까요?”누가 승제에게 데이터를 계산하고 손실을 연구하라 하면 그는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다. 하지만 여자를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승제는 전혀 재주가 없었다.그가 가진 두 번의 경험 역시 모두 혜인이 그에게 준 것이었다.이런 상황에서도 이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남편을 감싸고 도는 혜인을 승제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인우는 대화의 주제가 이렇게 급작스레 바뀔 줄 생각하지 못해 잠깐 당황해했다.몇초가 흐른 후.“대표님, 제 생각에 많은 여자들은 결혼 후에 화를 참고 사는 것 같습니다. 전업주부는 더더욱 그렇고요. 페니 씨는 비록 유능하지만, 결혼에 대한 여자들의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신 것 같아요. 이혼은 결혼의 실패를 의미하는
가까스로 선미의 습격을 피한 혜인은 곧바로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손안에 들려있던 단검을 빼앗았다.병원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두 경비원이 이 험악한 광경을 목격하고 달려와 순식간에 윤선미를 제압했다.선미의 눈동자는 여전히 무섭도록 혜인을 응시하고 있었다.“망할 것, 너 딱 기다려!”혜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단지 해고되었을 뿐인데 왜 이리도 길길이 날뛰는 건지 알 수 없었다.선미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너를 도와주다니, 너를 도와주다니! 너희 둘 사이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니가 꼬리 친 거지? 망할 년! 죽일 거야!”혜인은 우습게 느껴졌다. 그제야 윤선미가 반승제에게 한 통 크게 당했다는 걸 알아챘다. 그녀는 퇴사 통보를 받자마자 반승제를 찾아갔을테고, 거기서 그에게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선미의 막말을 더는 견딜 수 없어 경호원이 그녀를 제압한 사이, 혜인은 곧바로 다가가 뺨을 두번 내려쳤다.뺨을 맞고 당황한 선미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혜인을 바라보았다.“네가 감히 나를 쳐?”혜인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혜인이 오늘 경찰서에 잡혀가 단미에게 도움을 청해 빠져나올 것을 예상했다. 윤씨 집안이 일단 손을 쓰기만 한다면, 윤선미는 쉽게 나올수 있었다.하지만 혜인은 차마 이 말을 참을 수 없었다.“그래, 때렸다, 어쩔래? 승제 씨가 아무리 여자를 만난다고 해도 그 여자가 절대 네가 될 수는 없어. 하물며 그날 승제 씨한테 네 그런 모습을 보여줬는데도, 너는 그 사람 앞에서 어슬렁거리고 싶니? 아마 승제 씨는 네 얼굴을 보자마자 네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통곡하던 장면이 떠올랐을 거야. 굉장히 기분이 더러웠겠지.”혜인의 말에 자극받은 선미의 눈동자가 잔뜩 움츠러들었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였다.그러나 경호원이 그녀를 막아섰다.“망할! 망할! 너 딱 기다려!”혜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장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반 시간 뒤, 윤단미는 윤선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언니, 흑흑... 꼭 와서 나 풀어줘야 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혜인은 신문을 한 편에 내려놓았다. 승제를 기다리는 동안 화가 많이 누그러들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당장 해야 할 일을 잊은 건 아니었다.“반 대표님.”혜인이 정중하게 불렀다.반승제는 검은색 대리석 테이블 뒤로 가 가죽 의자에 앉았다.“일이 있는 거면 두 시간 뒤에 다시 얘기해, 지금은 회의가 있어.”어차피 오늘 밤 안에 해결하면 되는 일이였기에 혜인은 두 시간 더 기다려도 상관없었다.“알겠습니다. 볼일 먼저 보세요.”고개를 든 승제의 시선이 그녀의 몸으로 향했다.그때, 승제에게 줄 커피를 들고 인우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커피를 건네고 문을 나서려던 인우의 귀에 승제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저녁은 먹었어?”선미의 일로 내내 화가 나 있던 혜인은 저녁을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아뇨.”“심 비서, 페니가 먹을 저녁 식사 준비 부탁해요.”인우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승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볼 때 그는 무척 세심하게 혜인을 챙기는 것 같았다.“저 안 배고파요, 대표님.”혜인은 승제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승제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옆에 놓인 컴퓨터를 천천히 열었다.“언제 회의가 끝날지 몰라. 적어도 두 시간은 걸릴 거야. 그러니 뭐 좀 먹어둬.”혜인은 더 거절하지 않았다.인우는 직원들이 이용하는 구내식당의 음식을 대접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고 하는 수 없이 급히 특급 호텔에 연락해 식사 준비를 부탁했다. 반 시간도 채 안돼 서 작은 배식카가 꼭대기 사무실 층에 있는 혜인의 앞에 도착했다.혜인이 다소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문득 윤단미의 병실 입구에 있었던 배식카가 생각났다.작은 테이블이 그녀의 앞에 놓였고, 그 위에는 애피타이저부터 식후 디저트까지 없는게 거의 없었다.본래 혜인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이 광경을 보니 자기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참지 못한 혜인은 포크를 들어 천천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승제는 가죽의자에 앉아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곁눈질로 계속
승제의 발걸음이 갑자기 멈췄고, 왠지 모르게 화가 난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자신이 디자인을 맡고 싶어 온갖 수단을 쓰며 노력할 땐 언제고, 이젠 하기 싫으니 바로 기회를 차버리네...’승제가 제자리에 선 것을 눈치채지 못한 혜인이 미처 멈추지 못하고 승제의 등에 코를 박았다. 코가 시큰시큰 하며 아파 났다.“원인은?”그의 말투에는 이렇다 할만한 기복은 없었지만 어쩐지 평소보다도 차가워 보였다.혜인은 사실대로 말했다.매번 선미가 와서 자신을 위협하는데도 불구하고 쉽게 풀려나면, 자신은 도대체 목숨이 몇 개나 있어야 선미를 상대할 수 있냐고 말이다.승제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혜인도 뒤따라 같이 탔다.“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데?”“대표님이 직접 풀어주시고는 저랑 일이 생겨서 잡혀갔다는 것도 모르셨어요? 며칠전에 산장에서 저를 공격하려 했을 때, 성공하지 못했으니 더는 말 하지 그냥 참았어요. 그리고 나서는 윤단미 씨가 남자 둘을 시켜서 저를 위협했고요, 다행히 제 친구 덕분에 살았어요, 저. 목에 난 상처도 그때 생긴거고 오늘에야 붕대를 풀었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마주쳤을때 참지 못하고 손을 댄 거예요. 오늘 오후에는 어땠는지 아세요? 윤선미가 와서 단검으로 저를 찌르려 했다고요! 제가 피했으니 망정이니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어요. 그런 윤선미를 대표님이 반 시간 만에 풀어주신 겁니다. 저희 집안이 윤씨 집안, 또 대표님네 집안하고도 비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그러니 제가 눈치 있게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야겠죠.”혜인이 말하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지하 주차장에 도달했다.반승제는 혜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들려고 하지 않았다.그는 혜인의 턱을 탁 잡고는 강제로 고개를 들게 했다.좁은 엘리베이터 안은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찼다.“울어?”혜인은 울지 않았다. 다만 말하다 보니 억울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게다가 아빠도 여전히 깨어나시지 못했고 SY그룹이 곧 파산당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요 며칠
가는 길 내내 그들 사이에는 말없이 정적만이 흘렀다. 이윽고 차가 로즈가든에 도착했다.혜인은 차문을 열고 내리려다 말고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돌아와 앉았다.“후에 윤단미 씨가 또 저를 찾아온다면, 제가 대표님께 일러바쳐도 되나요?”일러바친다는 단어를 그녀는 더욱 힘주어 당당하게 얘기했다.모두가 알다시피 혜인이네 집안은 윤씨네보다, 반씨네 집안보다 힘이 없었다.윤단미는 승제의 여자친구라는 이유로 그를 등에 엎고 무슨 짓이든 할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윤단미를 혜인은 결코 당해낼 수 없다.반승제는 혜인을 바라보며 몇 초간 침묵하더니 물었다.“왜 내가 네 편에 설거라 생각하지?”“제 편에 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의가 있는 쪽에 설거라 생각하는거죠. 앞으로 적어도 제가 먼저 나서서 단미 씨를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쪽에서 늘 저를 가상의 적으로 두는거죠. 하지만 대표님과 제 사이는 정말 결백하잖아요.”결백이라는 단어를 들은 남자의 시선이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혜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는 몸을 살짝 기울고 그녀의 두 다리를 바라보며 비웃는듯한 말투로 말했다.“어떻게 네 입에서 결백이라는 소리가 나와?”혜인의 볼이 빨개지며 그 기세가 한 풀 꺾였다.승제는 운전대를 잡은채 묵묵히 앞을 바라보았다.“내가 너를 도운건, 우리 사이가 더는 결백하지 않아서야.”혜인의 심장이 밖으로 튀어 나올것 같았다. 그녀는 이것이 승제가 한 말이라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밤이 너무 깜깜했던 탓인지 그녀는 왠지 숨이 막히는것 같았다.“페니야, 우리 둘 사이가 여전히 그렇게 결백했다면, 아마 너는 내 얼굴도 보지 못했을거야.”사실이었다.그게 아니면 그는 절대 이 늦은 시간에 여자를 직접 바래다주지 않았을거고 이렇게 많은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다.모든것은, 더이상 결백한 사이가 아니였기 때문이었다.“가봐.”혜인의 머릿속은 마치 폭죽이 터진듯이 복잡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얼떨떨해 차에서 내린 혜인이 뒤돌아보기도 전
혜원은 숨을 크게 들이 쉬었다. 그때, 밖에서 성한이 물건을 깨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요 며칠 성한은 쭉 이래왔다. 아주 작은 사소한 일에도 성한은 불같이 화를 냈다.게다가 성혜인과 윤단미가 완전히 싸운것도 아니고 윤선미까지 외국으로 보내졌으니 그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다.성혜원은 자신의 집안이 어떻게 되든, 자신이 얼마만한 재산을 분할받게 되든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반승제를 원했다.오직 반승제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비로소 원만한 인생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혜원은 문을 열고 나갔다.“오빠, 화 내지마 먼저. 윤선미가 외국으로 보내진걸 보면 반승제가 성혜인 편에 선게 분명해.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 기회가 있어.”“무슨 기회가 더 있긴 있어! 혜원아, 넌 아마 모를거야,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허 비서님과 바람을 피우는 걸 보신 모양이다. 그래서 충격받고 입원하신거야. 아버지가 깨어나시면 우리 셋은 끝났어. 어머니한테 있던 주식 지분도 모두 도로 뺏길거고, 그러면 SY그룹은 성혜인 혼자의 몫이 되는거지!”성혜원은 놀라 움츠러 들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그런 이유로 쓰러지신 건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혜원의 낯빛이 순식간에 안 좋아졌다.성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어. 윤단미를 보호하기 위해 반승제가 성혜인과 이혼하게 되면 내가 성혜인을 죽이 되도록 만들어도 반씨 집안에서 뭐라 할 수 없을거야. 또 어머니는 갖은 수단으로 아버지가 못 깨어나시게 하면 되고... 결국 SY그룹은 우리께 되는거지!”“하지만 오빠도 봤잖아. 성혜인이 데려온 보디가드 두명이 아버지 병실을 지키고 있서서 엄마도 손을 쓸 수 없다는걸. 게다가 허 비서님도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지... 엄마랑 허 비서님 일을 다른 사람들이 알았을가봐 무서워 죽겠어!”성혜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그녀는 다시 예전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다시 숨을 들이마시더니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피식 웃었다.“할아버지 할머니
그래서 그는 어디서 들은지 모를 그 말을 믿지 않았고 늙은 부모님이 혹여나 사기를 당할까봐 가지 마시라고 충고했다.하지만 충고를 무시하고 무작정 성휘를 찾아갔던 부모님은 뜻밖에도 6억이나 되는 돈을 갖고 돌아왔다.그 돈으로 은행에 가 대출금을 물기 전까지만 하여도 성훈은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싶었다.30년의 집대출을 이렇게 한꺼번에 물었는데도 몇천만원이 남았으니까.“어머니, 대출 조기상환신청은 통과했습니다. 은행에서 돈을 뗐어요. 이제 매달마다 대출을 갚지 않아도 됩니다.”라정옥의 눈빛이 흥분으로 가득차더니, 곧이어 탐욕으로 변했다.“성휘네가 아주 돈을 잘 버는것 같더라. 6억을 눈 깜빡하지 않고 내놓는걸 보면 말이야. 별장도 어찌나 아름답고 으리으리한지, 몇백평은 족히 되어보이는것 같더라. 우리가 들어가서 살아도 문제 없을만큼 말이야! 이사가서 살게 되면 이 집은 임대로 내놓자꾸나.”성훈 역시 그 말에 눈이 반짝거렸다. 하지만 몇년동안 큰형의 안부는 물론이고 생활비 한번 보태주지 않았던 부모님이 갑자기 들어가 같이 살겠다고 하면 과연 성휘가 동의할지 성훈은 의문이였다.“어머니, 근데 형님이 아직 병원에서 깨지 못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그래, 네 형 아직 의식불명 상태다. 재혼한 여자가 아들을 데려왔던데 혹시나 네 형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회사며 재산이며 모든건 그 친자식도 아닌 놈한테 떨어지는것 같더라. 친딸이 두명 있는데, 하나는 성혜인이라고 하고 하나는 성혜원. 성혜인이라는 애는 네가 본적이 있어. 성혜원이라는 애는... 많이 비실거리더라. 힘 없는 딸 둘이서 뭘 할수 있겠니. 그러니 만약 일이 생기면 그 아들놈을 네 호적에 올리게 해야지, 그럼 네 형도 분명 엄청 고마워할거다.”성무일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네 어미 말이 맞다. 딸들은 아무 소용 없어. 아들, 얼른 SY그룹에 가보도록 해라. 네 형이 제원에서 회사를 세웠는데 그깟 회사에서 잘리는게 뭐가 무서워! 우리 모두 SY그룹에 가서 일할수 있다고!”성훈 역시 가만히 앉
혜인은 모처럼 어젯밤 푹 잘 잤는데, 결국 아침에 또 일이 터지고 말았다.그는 미간을 푹 찌푸린 채 차를 몰아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리정옥과 성무일 이 땅에 누워 소란을 피우고 있었다. “사람 죽이네, 사람 죽여.”라고 연신 말을 뱉으면서 말이다.눈앞이 캄캄해진 혜인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소란 그만 피우시죠?”혜인이 온 것을 발견한 라정옥이 순간 소리를 멈추더니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너 할머니한테 말하는 꼬라지가 뭐냐? 나는 네 할미야. 어째, 윗어른을 공경하는 표현이 하나도 없는것 같구나. 양심은 개나 줘 버렸니?”숨을 한번 크게 들이쉰 혜인의 눈에 보디가드 얼굴에 나있는 손바닥 자국이 들어왔다. 이 노부부가 손을 댄 것임을 단번에 알아챘다.“아가씨.”두 보디가드는 민지가 데려온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그들 역시 혜인을 알고 있었고 그녀에게 무척 예의가 발랐다.혜인은 골치가 아파났다.“계속 이렇게 소란 피우시면 그냥 여기서 던져버리세요. 배상금은 제가 나중에 다 댈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혜인의 말을 들은 라정옥이 황급히 땅을 짚고 일어섰다.“뭐라고?! 사람 죽이려고 그래? 여러분 다들 와서 한번 봐보세요, 이게 제 친소녀입니다, 글쎄. 저랑 자기 할아버지를 여기서 던져버리라네요. 어떻게 이런 못된 계집애가 다 있습니까! 제 어미를 똑닮았네요!”혜인은 그들이 억지 부리는 것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염치도 없이 자신의 엄마를 언급하는 소리에 순식간이 안색이 어두워졌다.“지금 당장 저 사람들 던져버리세요. 한번에 죽이지 못하면, 두번이라도 더 던지세요. 이 정도의 배상금은 저희 집에 차고 넘쳐요.”두 보디가드는 서로 마주보더니 바로 라정옥을 들어올려 창문으로 향했다.혜인이 그저 큰소리를 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라정옥은 진짜로 이렇게 손을 쓸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창문곁이 들려있던 라정옥의 눈에는 건물 아래 풍경이 힐끗힐끗 들어왔다.땅에 누워 여전히 행패를 부리던 성무일이 그 장면을 목격하자 놀라 창백해졌다
설우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설연주는 나한테 없어. 원래 사람을 시켜서 멀리 보내려고 했는데 중간에 스스로 사라졌어.”이상하게도 설연주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마음이 불편하고 짜증이 밀려왔다. 그는 설연주와 얽힌 일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설우현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허튼수작을 부리는 여자일 뿐이었다.두팔은 격하게 기침하더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설연주를 찾아, 이 땅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내!”두팔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고 설우현은 이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자리를 떠났다.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설기웅은 이미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다고 말했다.설우현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누구예요?”“최용호의 사촌 여동생이야. 한동안 널 좋아하며 따라다녔잖아. 넌 항상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는지 약까지 구해왔더군.”설우현의 가슴에는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 여자는 얼굴이 낯익었다. 오랜 시간 자신에게 집착했던 사람이었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너무 집착하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형, 그 여자 지금 어디 있어요?”“아버지를 찾아갔어. 아버지는 너와 그 여자의 결혼을 고려하고 계셔.”설우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하, 나더러 그런 여자와 결혼하라고?’하지만 이내 설기웅의 무거운 목소리가 이어졌다.“너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 없다면 누구와 결혼하든 상관없잖아.”설우현이 가문을 위해 혼인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가 특별히 마음에 둔 여자가 없다면 최용호의 사촌 동생과 결혼해도 문제가 없었다.최용호는 설기웅의 친구였고 최씨 가문도 플로리아에서 손꼽히는 재벌가였다. 이 결혼은 양 가문에도 손색없는 혼사였다.설우현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손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형, 이 일은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그는 특정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다.자신이 여자의 계략
설우현은 잠시 발걸음을 주춤했다.‘이 여자는 어쩜 이렇게 뻔뻔해? 그래, 무릎 꿇고 싶으면 꿇으라지.’설연주는 두팔에게서 이미 잔혹한 고통을 겪은 뒤라 간신히 버티고 있는 상태였다. 설우현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설우현의 부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어떻게 할까요?”그는 부하에게 설연주를 병원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설연주는 이번에도 심하게 앓기 시작했고 지난번처럼 고열이 계속되었다. 의사는 여러 방법을 동원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설우현은 그녀를 보내는 일을 미루고 오늘 밤 예정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다. 그도 병원에 머물며 그녀를 돌볼 여유가 없었다.설연주는 그가 떠나자마자 오번에게 전화를 걸었다.“두팔한테서 나왔어요?”오번은 원래 두팔을 따라다니며 설연주의 상황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녀가 떠난 뒤로 자신도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약 좀 구해줄 수 있어요? 당장 필요해요.”오번은 무슨 약인지 듣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연주 씨, 설마...”설연주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통화 중임을 깨닫고 바로 대답했다.“네, 바로 그걸 원해요. 곧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잡으려고 할 거예요. 설우현이 나를 보기 싫어하니까 그 전에 딱 한 번이라도 그 남자와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요?”오번은 잠시 침묵하더니 한참 후에야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미쳤어요? 이 일이 들키면 우리 둘 다 끝장이야.”“그러니까 들키지 않게 도와줘요. 당신이라면 이런 약 구할 수 있잖아요?”오번은 망설이다가 결국 결단을 내리고 자신의 비밀 약을 그녀에게 가져다주었다.밤이 되어 설우현은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흰색 정장을 입고 설기웅의 뒤를 따라 몇몇 협력업체 관계자들을 만난 뒤 한적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연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그는 중간에 2층에 올라가 친구들을 찾으려 했지만 그들은 찾지 못하고 대신 술 한 잔을 마신 뒤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방의 분위기는 아늑하고 고급스러웠다
평소 설연주는 다른 남자들에게 무척 차갑고 계산적인 태도를 보였다.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유독 설우현에게만큼은 어딘가 진심이 담긴 듯한 모습이었다.그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은 그녀와 가까이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었다.그러나 문제는 설우현이 그녀의 그런 마음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설연주가 더욱 처량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설연주는 두팔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 조용히 침대에 앉아 있었다.반면 두팔은 그녀의 이런 상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래전부터 설연주를 탐하고 싶었고 지난번 사람을 시켜 길들였지만 그녀는 끝내 도망쳤다.이번에는 누구도 그녀를 구해줄 수 없을 것이다.두팔은 설연주를 침대에 내리눌렀다.설연주의 얼굴에 잠시 공포가 스쳤지만 이내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게 변했다.두팔은 그녀의 겉옷을 벗겨내고 더 안쪽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설연주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넘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설연주는 반항할 마음조차 사라진 것 같았다.심지어 마음속 깊이 설우현이 이 일을 알게 된다면 조금이라도 후회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후회하거나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았다.이런 상황에서도 설연주의 머릿속엔 온통 설우현 생각뿐이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고개를 돌려 두팔의 표정을 보지 않으려 했다.두팔도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침대에서 무너지는 모습이 보고 싶을 뿐이었다.마침내 그가 그녀의 마지막 옷을 벗기려던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두팔의 부하가 문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형님, 저희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깜짝 놀란 설연주는 일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설우현이 서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이 상황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두팔은 그를 알아보고 즉시 옷을 바로잡았다.“우현 씨가 여긴 또 무슨 일로 찾아
오번은 설우현의 선택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설연주를 정말로 혐오하는 듯했다. 결국 오번은 자기 힘으로 계속 설연주를 찾아야 했다.그러던 이틀 후 그에게 또 다른 의뢰가 들어왔다. 마침 그 의뢰는 두팔과 관련된 것이었다. 두팔이 그를 영입하려 하고 있었다.오번은 원래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대화 속에서 설연주의 이름이 언급되자 마음이 흔들렸다.“형님, 설연주를 계속 무릎 꿇리고 있을까요?”두팔은 손에 든 휴대폰을 보며 설우현의 사람들이 직접 설연주를 넘겼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전에 설연주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무척 당당하더니 이제는 그 기세가 완전히 꺾여버린 모습이었다.“사흘 동안 계속 무릎 꿇리고 있어. 음식은 주지 말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내버려둬.”오번은 통화 속 두팔의 말을 듣고 경악했다. 설연주가 두팔에게 넘어갔다니 믿기지 않았다. 두팔은 다시 한번 조건을 제시하며 웃음을 띠고 물었다.“듣자 하니 해킹 실력이 대단하다던데, 우리 쪽으로 와볼 생각 없나? 충분한 보상은 보장하지.”오번은 고민 끝에 결국 두팔에게 가기로 결심했다.그날 밤, 그는 설연주를 만났다.설연주는 이미 이틀 밤낮을 무릎 꿇은 채로 있었다. 그녀의 등은 채찍 자국으로 가득했고 목에는 쇠사슬이 걸려 있었으며 그 끝은 두팔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설연주는 고개를 떨군 채 누구의 시선도 마주하지 않았다.두팔은 갑자기 사슬을 세게 잡아당겼고 그녀는 바닥에 엎어졌다.이윽고 두팔은 사슬을 조금씩 당기며 설연주의 온몸이 떨리는 것을 보고 비웃음을 터뜨렸다.“연주야, 성씨를 바꿔가며 꼼수를 부렸지만 결국 설우현이 직접 널 내게 넘겨줬잖아. 기분이 좀 상했겠다?”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두팔의 구두가 그녀의 손등을 짓밟았다.설연주는 손가락을 오그리며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꾹 참았다.두팔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을 내려다보았다.“저번에 겨우 길들였더니 네가 도망갔잖아. 이번에는 도망갈 기회를 줄 생각 없으니까 각오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