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승제가 성혜인을 단지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성혜인한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성혜원은 윤단미에게 절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프런트직원은 성혜원을 무의식적으로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전에 꼭대기 층 스위트 룸에 온 적이 있는 여자인데 오늘 그녀는 또 왔고 그 룸의 손님 정보를 꼭 알아내려 한다.꼭대기 층은 반 대표의 룸이다. 기나긴 복도에는 두 개의 스위트 룸만 있는데 그중 하나는 새로 인테리어를 한 반 대표가 고정으로 숙박하고 있는 룸이고 다른 하나만 외부 고객의 예약을 받는다.그렇다면 누구든 그 방을 예약할 수 있는데 왜 이 여자는 굳이 예약한 손님의 정보를 묻는 걸까? 반 대표 때문에 온 것이 분명하다.프런트직원은 괜히 번거로운 일과 엮이고 싶지 않아 반사적으로 부정을 하려고 하였는데 방금 그 눈빛은 이미 성혜원을 배신했다.성혜원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이내 몸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나 윤단미는 웃으면서 물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성혜원은 그녀 앞에서 패기가 부족하여 입술만 오므리고 윤단미에게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했다.윤단미는 눈을 가늘게 떴고 포스가 넘쳤다.“이름도 못 알려주면서 감히 내 남자를 노리는 거예요? 누가 이런 배짱을 당신에게 준거죠? 다시 한번 내 눈앞에 띄면...”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성혜원의 귓가에 속삭였다.“당신과 당신 가족 모두 제원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줄게요.”윤 씨 집안에게 그 정도 능력은 없지만 그녀의 배후에는 반승제가 있다.윤단미의 목소리는 그녀와 성혜원만이 들을 수 있다.성혜원의 눈시울은 순간 빨개졌고 강렬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몸 돌려 떠났고 눈에는 원망스러움으로 가득 찼다.‘천한 년! 기다리고 있어, 하루빨리 반승제와 사랑의 결실을 맺을 테니.’윤단미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비웃고 프런트직원을 향해 미소를 짓고서야 반승제가 있는 룸으로 향했다.프런트직원은 두 명은 모두 떠난 후에야 한숨을 돌리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토로했다.“방금 단미 아가
성혜인은 이때 이미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고 중도에 서민규에게 전화를 걸어가지 않겠다고 전했다.서민규는 조금 실망했지만 바로 전에 관계를 가졌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을 가질 수 없다면 전에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와도 상관없다. 어차피 돈은 썼으니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성혜인은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데 여전히 피부에 닿았던 그의 입술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강한 자극은 뼛속 깊이까지 닿았다.그날 밤을 제외하고 그녀는 남자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그녀는 얼른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단추를 풀었다. 붉은 흔적들을 보니 그녀의 얼굴은 순간 달아올랐고 차마 더 이상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얼른 욕조 속으로 숨어들었다.욕조에 한참 몸을 담그니 그제야 뼈 틈새의 간질간질한 느낌이 서서히 사라졌다.성혜인이 잠옷을 입고 일어서던 그때, 유경아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셔서요. 혹시 몸이 편찮으세요?”성혜인은 자신의 목에 난 자국을 보고 당분간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얼른 스카프로 감았다.유경아는 문을 열고 그녀의 온몸을 자세히 훑어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별일 없으면 다행이에요. 방금 급히 올라오셔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리고 마침 오늘 저녁에 전화드리려고 했던 참이었어요. 겨울이가 저녁에 갑자기 구토를 하더라고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서 병원에 데려가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겨울이가 아프다는 얘기에 성혜인은 얼른 뒤쪽 방으로 달려갔다.겨울이는 무기력하게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성혜인은 깜짝 놀라서 바로 겨울이를 품에 안았다.“아주머니, 제가 겨울이 데리고 동물 병원으로 가면 돼요.”아주머니는 나이가 많아 피곤하면 안 되기에 그녀가 직접 가기로 했다.황급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성혜인은 겨울이를 데리고 제원에서 가장 큰 동물병원으로 향했다.제원의 가장 부유한 별장은 거의 모두 포레스트 펜션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있을 정도로 그 위치는 아
반승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소매 단추를 천천히 정리했다.실버 블루 컬러의 소매 단추가 유독 눈에 띄는데 그것은 윤단미가 선물해 준 것이다.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리자 윤단미는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승제야, 나랑 같이 위층으로 가자. 나 정말 너무 걱정이 돼.”말을 마친 윤단미는 그제야 성혜인을 봤고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왜 여기에 있는 거죠?”마침 이때 겨울이의 담당 의사가 걸어왔다.“페니 씨, 위층으로 모실게요. 수술은 약 40분 정도 소요돼요.”성혜인은 한숨을 돌렸고 이 좁디좁은 공간이 순간 널찍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반승제와 윤단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반 대표님,윤단미 씨, 저 그러면 먼저 가볼게요.”윤단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호텔 방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을 생각하니 조금 불안하였다. ‘그 머리카락은 도대체 누구 거지?’그리고 방금 호텔에서 반승제의 미팅이 끝난 후,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려고 하는데 반승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단미야, 우리 아직 화해 안 한 걸로 기억하는데."반승제가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윤단미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사실이다.비록 반승제가 두 번이나 붙잡았지만 윤단미가 보기에 그의 태도는 절박하지 않았고 그녀가 억지로 시킨 것처럼 보여 승낙하지 않았다.그 후 3년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승제가 유일하게 정식적으로 인정한 여자친구로 그 누구도 그녀의 위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화해하는 일은 그녀가 말 몇 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반승제가 그런 말을 하니 윤단미는 조금 난처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전화를 걸었으니 자연스럽게 화해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반승제의 생각은 달랐다.기회를 찾아서 얘기를 잘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 고양이한테 문제가 생겨 반승제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한 것이었다.지금 그녀가 성혜인을 바라
이때 세 사람은 2층에 도착했다. 성혜인을 안내해주던 의사가 한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겨울이의 수술은 여기에서 진행할 예정이니 이쪽에서 기다리시면 돼요.”말을 마친 뒤 의사는 윤단미에게 몸 돌렸다.“윤단미 씨, 고양이는 20분 정도 소요 예정인데 이곳에서 여기 이분...”의사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고 윤단미는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는 목을 치켜들었다.“남자친구요.”의사는 미소를 짓으며 안내를 하였다.“두 분은 다른 방에 있는 소파에서 기다리셔도 돼요. 저를 따라오세요. 저희가 최대한 빨리 진행할게요.”윤단미가 남자친구라고 얘기를 할 때 반승제는 성혜인을 곁눈질해 보았다.그러나 성혜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겨울이 수술실만 바라보느라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윤단미의 손에 끌려 다른 방으로 갔다.윤단미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는 걸 보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고 방에 앉아 기다리면서 계속 얘기를 꺼냈다. “방금 페니 씨 목에 있는 흔적 봤어? 전에도 자주 저런 상태로 출근했어?”말인 즉 그녀는 남자와 관계를 자주 가지고 결혼까지 한 사람으로 반승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살짝 뒤로 기댔다.“승제야, 왜 말이 없어.”윤단미는 애교 섞인 말투로 물었다.“전에도 자주 저런 상태로 출근하고 그랬어?”반승제는 첫날밤이 생각났다. 그때의 흔적은 이번보다 더 많았다.“한번 있었던 것 같아.”그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고 이런 화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윤단미는 그가 성혜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윤단미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지만 곧이어 또 약간 불안해졌다. ‘그 머리카락 두 개, 설마 반승제의 아내 것은 아니겠지?’“승제야, 할아버지는 너와 그 아내가 하루빨리 아기를 가지는 걸 바랄 텐데 너와 그 사람은...”만약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낸다면 반승제는 신경을 쓰지 않을 테지만 그 아내 얘기를 언급하자 바로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계속 이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반승제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다시 한번 문질렀고 물로 손에 있는 거품을 깨끗이 헹구고는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천천히 손을 닦았다.그 과정은 일분도 되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한 세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반승제는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착한 척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평소에 언변이 그토록 뛰어나더니 지금은 놀라서 몸서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 반승제는 입을 열었다. 이런 대화를 시작했으니 성혜인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반 대표님은 저의 상사이고 고용주이니 당연히 무서운 존재죠.”반승제는 그녀의 귀 뒤에 가려지지 않은 흔적을 보았다. 아마 서둘러 오다 보니 아무도 그녀에게 귀띔을 주지 않은 모양이다.“남편과의 식사자리는 즐거웠어?”‘이런 모습을 남편이 목격했는데 이혼을 당하지 않았다고?’성혜인은 바로 머리를 굴렸다.“저녁에 겨울이한테 문제가 생겼고 마침 민규 씨도 바쁜 터라 약속을 취소했어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윤단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떴다.성혜인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휴지를 뽑아 손을 닦으려고 하는데 반승제는 다시 돌아와 몸을 약간 기운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은 우리 모두 잊었으면 좋겠어.”성혜인은 온몸이 굳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서로에서 좋은 것이라고 눈빛에 쓰여있었다.그녀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고 그와 함께 지내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알고 있어요. 반 대표님은 윤단미 씨가 질투할까 봐 그러시는 거잖아요. 안심하세요, 저 입이 무거워요.”반승제는 바로 그녀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홀가분해하며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시선이 조금씩 그녀를 스쳐 지나갔고 말투도 조금 쌀쌀해졌다.“눈치는 있네.”
계약을 맺었다고? 이혼할 거라고?!그녀가 이 조건을 얘기하기도 전에 반승제가 먼저 이 얘기를 언급했다.윤단미는 순간 달콤함으로 가득 차오르면서 마음이 들떴다.그녀의 손끝마저 떨려왔다. 만약 반승제가 이혼을 한다면 반 씨 집안의 며느리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 아닌가?“이혼... 하려면 얼마나 걸려?”반승제는 앞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얘기했다.“늦어도 반년. 할아버지가 요즘 많이 안 좋으셔.”윤단미의 볼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고양이를 만지며 애써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켰다.그러나 차가 윤단미 집 앞에 세워졌을 때, 그녀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그래, 그럼 반년. 승제야, 네 말이 맞아. 우리는 아직 재결합하지 않았어. 그러나 나는 내가 아내로서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것을 너에게 알려줄 거야. 나는 너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고 그 여자를 만나려고 하지도 않을 거야. 그때 우리가 헤어졌던 이유는 단순히 네가 결혼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 우리 사이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아. 그 문제를 내가 천천히 찾아내고 차차 해결할 거야. 만약 네가 어느 날 재결합에 동의한다면, 우리 그때 결혼하자.”마지막 그 한마디를 뱉어낼 때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였고 득의양양했다.그러나 반승제는 그냥 담담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재결합하면 그때 다시 얘기해.” “승제야, 미안해. 그때 내가 너무 제멋대로였어. 외국에 남아서 무슨 그림을 배운다고 고집부리고 너의 재결합도 거절했어. 앞으로 내가 먼저 너에게 애정표시도 할 거야.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어.”말을 마치고 그녀는 차에서 내려 차창 밖에 서서 그를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반승제는 그녀를 힐끗 보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들어가. 밖은 추워.”윤단미의 마음은 더욱 달콤함으로 차올랐고 한 걸음 걷고 세 걸음 돌아보며 집으로 들어갔다.반승제는 자동차에 앉아 있는데 온몸이 좀 불편했다.그는 여기에 머무르
“성혜인이 어디 갔어? 당장 내 앞에 나타나라고 해!”오늘 백연서는 정말 너무나 화가 났고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만약 반승제한테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성혜인이 어떤 대가를 치러도 변상해 낼 수 없다.유경아도 백연서가 조금 무서웠다. 때론 백연서는 억지를 부리며 성혜인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사모님 아직 밖에 계세요.” 백연서는 이 말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결혼한 여자가 아직도 밖에 있다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뭘 하고 있는지 누가 알겠어. 지금 몇 시야?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는데! 하루 종일 뭐 하나 몰라. 승제가 집에 없는 3년 동안 그 사이 우리 반 씨 집안에 떳떳하지 못한 일을 했을지 누가 알아. 만약 정말 그랬으면 반드시 성 씨 집안 모든 사람들이 그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유경아는 침을 삼켰고 정말 반 대표님이 알레르기가 돋은 걸 성혜인의 문제로 돌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반 대표님은 알레르기가 돋은 상태에서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기에 이건 포레스트 펜션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게 분명하다. “최근 사모님의 강아지는 이곳에 있지 않았어요.” 유경아는 성혜인을 지켜주기 위하여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 백연서는 차갑게 웃었다.“네가 지금 누구 편을 들려고 하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성혜인에게 잘 보여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어차피 걔는 승제와 이혼할 거야. 지금 회장님의 몸이 좋지 않아서 우리가 걔를 불쌍히 여기고 이 집에서 좀 더 머물게끔 허락해 준 거야. 도우미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해. 수작 부리지 말고.” 백연서는 옆에 앉으며 얘기를 이어갔다.“성혜인한테 오라고 해. 오늘 저녁 반드시 걔를 만나야겠어. 승제는 그 강아지 때문에 알레르기가 돋은 게 확실하니 그 강아지는 버려야 돼.”유경아는 성혜인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겨울이도 좋아한다. 지금 백연서의 이런 말을 들으니 그녀도 조금 화가 났지만 백연서의 말이 맞다. 그녀는 도우미일 뿐 반 씨 집안일에 간섭할 권한이
반승제에게 제원의 다른 명문가 아가씨를 소개해 주려 하였는데 자신에게 분명히 강아지 털 알레르기가 있는 걸 알면서 윤단미와 함께 동물 병원에 갔다는 걸 보아하니 두 사람이 옛정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그런데 성혜인이 어떻게 승제가 윤단미와 함께 동물 병원에 간 사실을 알았지? 그 년 설마 승제를 스토킹 하는 거 아니겠지?’백연서는 미간을 찌푸렸고 바로 성혜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착각하지 마. 승제에게서 떨어져. 어차피 너희들은 이혼하게 되어 있어. 네가 어떤 수를 써도 승제는 너를 원하지 않을 것이니.」참으로 보기 거북한 문자이다. 성혜인은 이 문자를 보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반드시 대표님에게서 멀리 떨어질 테니.」 백연서는 차갑게 웃었다. ‘꼭 그렇게 해. 그렇지 않으면 성 씨 집안, 가만히 두지 않을 테야.’ 또 한 시간이 흘렀고 겨울이가 드디어 마취에서 깼다. 의사는 성혜인에게 당부를 하였다.“이것은 상처에 바르는 약이에요. 하루에 꼭 세 번씩 발라야 돼요. 이제 날씨가 더워져서 감염 위험성이 있어요.”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요즘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네이처 빌리지 일도 처리하고 있고 김양훈의 조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 겨울이를 돌 볼 정력이 없다. 그리고 지금 반승제가 포레스트 펜션에 있으니 겨울이를 데리고 갈 수도 없다. “페니 씨, 혹시 겨울이를 돌볼 시간이 없으시면 병원에 입원을 시켜도 돼요. 매일 돌봐주는 전담의사가 있어요. 다만 입원비가 좀 비싸요.” 성혜인은 한숨을 돌리고 바로 돈을 냈다. 떠나기 전 그녀는 겨울이를 보고 가려 하였고 겨울이도 주인이 온 걸 알고 일어나려 애썼다.성혜인은 그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겨울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그녀를 너무 오래 보지 못해 심심한 나머지 자갈을 삼킨 것 같다. 아주머니한테 얘기해서 정원의 자갈들을 버려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또 같은 문제가 생기면
설우현이 전화를 끊었을 때 설연주는 이미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그는 한 치의 연민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 같은 여자에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하지만 입가에 남은 상처는 여전히 아팠다. 말만 해도 상처가 당겨져 입술이 따끔거렸다.그는 휴대폰을 넣고 차에 오르려는데 그때 설기웅에게서 전화가 왔다.“오늘 밤엔 집에 와서 저녁 먹자.”“네, 형.”설우현은 손으로 이마를 누르며 짜증이 피어올랐다.마침 설연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설기웅과 설의종은 아직 설연주가 설씨 가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였다.설씨 가문 저택에 도착하자 그는 우연히 설다연이 담벼락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설다연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옆에 있던 꽃을 하나씩 따서 바닥에 던지고 있었다.이전에는 계절의 변화도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몰랐던 그녀는 설씨 가문에 들어온 후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처음 몇 달 동안 설우현이 집에 들를 때마다 그녀가 설기웅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오빠, 이거 뭐야?”“이건?”“그럼 이건 뭐지?”솔직히 설우현이라면 그런 질문에 답할 인내심이 없었을 것이다.설다연은 사람을 죽이는 법 외엔 세상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왜 꽃이 다양한 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가을이 되면 나뭇잎이 붉게 물드는지, 심지어 물속에 왜 물고기가 있는지조차도 몰랐다.예전에 그녀의 세상은 실험복을 입은 연구원들과 시험관들뿐이었고 그 안엔 약품 냄새 말고는 다른 냄새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더군다나 그녀는 살인 병기로 길러졌고 잔인한 본능을 깨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고기를 먹도록 훈련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음식을 익혀 먹어야 한다는 것조차도 몰랐다.결국 설기웅이 하나하나 가르치며 그녀의 세계를 재구성해주었다. 설우현 역시 처음으로 형이 그토록 인내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는 벽 아래 서서 설다연이 여전히 꽃을 따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꽃들은 왜 따는 거야?”설다연은 담벼락에서 뛰어내려 설우
한편, 설연주는 눈이 가려진 채로 설우현 앞에 끌려왔다.오늘 단지 슈퍼에 가서 음식이나 좀 사려고 했을 뿐인데 갑작스럽게 납치를 당했다. 도대체 누가 잡아 온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녀는 바닥에 강제로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 귀 옆에서 라이터 소리가 들려왔다.설우현은 의자에 앉아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설연주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우현 오빠’라고 부르려다 멈칫했다.하지만 설우현이 입을 떼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네가 사는 그 집 사실 해커가 소유한 거더군. 그런데 그 해커가 혜인이 납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어. 내가 그놈을 잡았을 때 끝까지 배후를 자백하지 않더니. 알고 보니 네가 바로 그 배후였구나, 설연주.”설연주의 눈에 담긴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설우현이 명확한 증거를 찾았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이제 자신이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설연주는 고개를 푹 떨구고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그러자 설우현은 그녀의 머리채를 단단히 움켜잡고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머리카락이 잡힌 설연주는 두피에 전해지는 고통에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이내 그를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오빠, 이제 다 알아낸 거예요?”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우현은 그녀를 내동댕이쳤다. 설연주는 바닥에 나뒹굴며 등에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설연주, 가족을 건드리는 건 선을 넘었어. 내가 널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설연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우현은 짜증이 치밀어 담배를 꺼냈다. 그는 평소 여자는 절대 때리지 않았지만 설연주가 저지른 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듣자 하니 너 두팔과 어울려 다녔다더라. 마침 그놈도 지금 널 찾고 있더군.”설연주는 몸이 떨리며 순간 얼어붙었다. 혹시 설우현이 그녀를 두팔에게 보내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살아서 나오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널 두팔에게 넘길 거야.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두팔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설강민을 내려놓으라 지시하고 홀로 걸어갔다.설우현은 이미 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설강민이 들어오자 설우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두팔은 설우현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설우현이 혼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그는 설강민 같은 쓰레기 때문에 설우현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두팔의 부하가 설강민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이미 탈진 상태가 된 설강민은 그대로 바닥에 개처럼 엎드렸고 얼굴은 온통 피로 얼룩져 있었다.“형, 형... 나 구해줘요...”미약한 그의 목소리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설우현은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돈 박스들을 세어보라고 지시했다.두팔은 홀 한가운데 앉아 자신의 공간에 가득 쌓인 박스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박스 앞에서 돈을 세며 확인하고 있었다.“설우현, 듣자 하니 설씨 가문에 새로 들어온 여자가 있더군. 설연주라고 했던가?”설우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자와는 깊게 얽히고 싶지 않았다. 두팔은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그 여자의 원래 이름은 진연주였어. 내 밑에 있을 때 아주 말 잘 듣던 아이였지.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습도 제법이었는데, 내가 맛보기도 전에 설연주가 되어 설씨 가문으로 가버렸지. 너희 설씨 가문에서 그런 여자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만.”두팔은 조롱 섞인 미소를 띠며 다리를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연주는 한때 내 충실한 개였어. 그래서 연주를 위해 특별히 여러 개의 목줄을 맞춰놨지.”두팔이 손뼉을 치자 부하들이 맞춤 제작된 목줄을 가져왔다. 목줄은 검은색, 은색, 금색으로 각각 다른 디자인이었으며,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설우현은 이를 보며 곧장 주변 몇몇 사람들의 취향이 생각났다. 그들은 이런 조련에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묘한 쾌감을 얻는 사람들이었다. 설연주가 이런 취향을 가지고 있다니 의외였다.이윽고 설우현의 미간이 잔뜩
설우현은 살면서 이토록 파렴치한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설연주를 상대하기 싫었던 설우현은 그대로 문을 쾅 닫아버렸다.다음 날, 설연주는 그대로 별장에서 쫓겨났고 도우미가 다가와 정중하게 설우현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앞으로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라는 명령이었다.그렇게 일주일 동안 설연주는 설우현을 보지 못했다.오히려 설강민의 소식은 계속하여 들려왔는데 현재 돈을 다 써버려 또 두팔의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겁도 없이 독촉하러 온 사람들까지 때렸다는 것이다.두팔 쪽에서는 당연히 설강민의 행패를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현재 설강민은 이미 두팔에게 잡혀 끌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가 어떤 일을 겪을지는 아무도 모른다.설연주는 설준석의 별장에서 지내며 계속하여 그쪽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저녁이 되고 설준석이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별장으로 돌아왔다.음식이 나오자마자 설준석은 두팔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아들이 100억이나 달하는 빚을 졌으니 당장 돈을 들고 오라는 협박 전화였다.물론 설준석도 두팔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지만 꽤 많은 사업을 하고 있다는 정도로 알고 있다.플로리아 상층부의 목적지는 주로 지하 도박장으로 하룻밤에 벼락부자가 될 수도 있고 즉석에서 돈을 전부 잃어 취직하게 될 수도 있다.물론 지하 도박장에서도 돈을 빌릴 수 있지만 그곳에는 정해진 조건이 있었다.하지만 두팔이 운영하는 고리대금에는 조건이 없었고 대신 갚지 않으면 손과 발을 모두 잃고 모든 가족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어쨌든 두팔이 운영하는 무리는 전부 극악무도한 양아치들이었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천 만 정도로 만약 일가를 독촉하는 데 성공한다면 단번에 몇십억은 벌 수 있다.전화를 받고 화가 치밀어 오른 설준석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며 물었다.“설강민은?”그러자 휴대폰 건너편에서 설강민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요. 저 사람들이 내 팔과 다리를 부러뜨릴 거란 말이에요. 빨
“네가 왜 울어?”“오빠, 제가 앞으로 어떻게든 보답할게요.”설우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앞으로?지금 당장 사과를 받아내도 모자랄 판에 또 아무것도 모르는 척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둘 사이에 과연 앞으로가 있을까?설연주의 침묵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던 설우현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꽉 주먹을 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설연주, 너 내일 나랑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 좀 받자.”순간, 설연주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설우현이 무언가를 알아챘다고 생각한 그녀는 즉시 설우현의 품속에서 벗어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안 가요.”“너 지금 살이 너무 많이 빠졌어. 모르겠어?”이제 만난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불쌍할 지경으로 살이 많이 빠져있었다.분명 처음에 만났던 설연주는 화려한 여우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정말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오빠, 저 정말 괜찮아요. 난 그냥... 사랑에 사로잡혀서 그래.”그 말을 들은 설우현은 하마터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그렇게 많은 세컨드를 이용하고 어떻게 사랑에 사로잡혔다는 말을 이리도 뻔뻔하게 할 수가 있지? 이건 사랑을 더럽히는 행동 아닌가?“뭐? 요즘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무심코 물으며 설우현은 심지어 담배 한 대를 꺼내 천천히 불을 붙였다. 게다가 얼굴 전체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어디 한번 지어내 봐.’그리고 설연주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설우현은 그녀에게 한 치의 감정도 없다.하긴 바람기가 많아 보여도 설씨 가문에서 가장 규칙에 예민한 사람이고 단순한 사람이니 그에게 있어 설연주는 그저 여동생일 뿐이었다. 엄연히 설씨 가문과 혈연관계가 있는 여자를 잠자리 상대로 생각할 리가 없었다.정말 도끼로 제 발등을 찍은 셈이었다.순간, 엄청난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특히 조롱하는 듯한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니 마음은 더욱 괴로웠다.설우현의 마음속에서 설연주 같은 여자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혀 알 수
그러나 성혜인은 말을 마치고 옆에 있던 도우미에게 꽃병을 건네주고는 다시 설연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난 저녁 비행기를 타고 곧 남편과 함께 제원으로 돌아갈 거야. 다음에 널 만나게 될 땐 친구로 만났으면 좋겠네.”설연주는 당당하게 작별인사 한마디도 못 하고 여전히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당당한 성혜인에 비하면 그녀는 마치 평생 빛을 보지 못하는 도랑 속 쥐와 같았다.설연주는 심지어 성혜인의 말을 통해 자신의 비열함을 느꼈고 그 비열함은 차마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설연주는 성혜인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못했다.혹여나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을 향한 원망과 역겨움을 눈치챌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솔직히 설연주는 성혜인을 진심으로 숭배하고 있었고 진심으로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미 진실을 알게 된 마당에 이제 와서 친구를 사귄다는 건 사치인 셈이다.그렇게 설연주는 설우현이 두 사람을 찾아올 때까지 한참 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윽고 그들에게 다가온 설우현은 설연주의 작품을 보며 입술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못생겼어.”그제야 다시 정신을 차린 설연주가 설우현의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고 뺨을 맞기라도 한 듯 통증이 밀려왔다.이렇게 비열하고 음침하기 그지없는 인간일 뿐인데 감히 설우현에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어쩐지 오래 못 살 것 같더라니... 그녀 같은 사람은 지옥에 가야만 한다.하느님은 그녀에게 복수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내 설연주는 기침을 몇 번 하고 나서 다시 설우현을 바라보았고 설우현은 그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마디 툭 내던졌다.“이따 밥 먹고 가.”그러자 설연주는 몰래 손바닥에 묻은 핏자국을 휴지로 슬쩍 닦아내며 탐욕스럽게 설우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왜 이 타이밍에 설우현 같은 도련님을 만난 거지?’운명은 정말 그녀를 농락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그렇게 성혜인의 말대로 그녀는 저녁 비행기를 타고 제원으로 떠났고 설우현은 특별히 그들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설연주는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녀는 오번과 통화를 하며 문을 열어주기 위해 현관으로 향했다.그 결과 밖에 서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설우현이었고 그는 담배 한 개비를 손에 끼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뿌연 연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설연주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설연주는 순간 마법이라도 걸린 듯 무어라 말해야 할지, 설우현이 갑자기 이곳에는 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우현 오빠...”이어 설연주는 다급히 전화를 끊었다.한편, 설우현은 담뱃불을 끄고 시선을 돌려 설연주의 몸을 쓱 바라보았다.긴장한 나머지 설연주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버렸고 설우현이 과연 조금 전의 통화 내용을 들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그렇게 한참 후에야 설우현은 비로소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버렸다.“혜인이가 너 보고 싶다네. 오후 비행기야.”설연주도 잇따라 입술을 달싹였지만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묵묵히 그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차가 설우현의 별장에 도착하고 설연주는 그제야 오늘 오기로 한 손님이 설우현의 여자친구가 아닌 성혜인이라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거실에 도착해 보니 성혜은이 거실에서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고 그 옆에는 빈 스위치 하나가 놓여있었다. 설우현 본인이 사용하던 스위치로 보였다.한편, 성혜인은 설연주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먼저 말을 건넸다.“연주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설연주는 무의식적으로 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이미 스위치 앞으로 다가가 스스로 게임을 시작했다.결국,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성혜인을 따라 화원으로 들어섰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을 위해 간식거리를 가져다주었다.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처럼 분위기가 매우 화목해 보였지만 사실 설연주는 이 자리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계속하여 안절부절못했다. 성혜인이 대체 무슨 말을 하려 하는 것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애초에 두
설연주는 속눈썹을 늘어뜨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음식을 천천히 먹고 나니 운전기사가 그녀 옆에 다가와 서 있었다. 이는 분명 그녀를 재촉하고 있는 신호였다.설우현을 바라보았지만 설우현은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그의 컴퓨터만 바라보고 있었다.설연주가 마음속으로 몰래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한번 설우현을 깊게 쳐다보고 나서야 설연주는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기사의 뒤를 따랐다.그녀를 태운 차가 막 별장을 떠나려 할 때, 다른 차가 천천히 별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그 순간, 설연주는 원인 모를 충동이 느껴졌다. 그녀는 설우현의 여자친구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섹시한 연상 스타일일까? 설우현은 그런 여자를 더욱 선호하니까.’설연주는 속눈썹을 드리운 채 창문을 열어보았다.하지만 그녀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다른 차는 누가 타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었다.그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기사가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괜히 실마리가 드러날까 걱정되었던 설연주는 어쩔 수 없이 차창을 다시 닫아버렸다.“가시죠.”운전기사도 다시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렇게 설연주는 천천히 별장을 떠났다.오랜만에 다시 설준석의 별장에 돌아와 보니 이상하게 분위기가 어수선하게 느껴지고 무엇을 해도 흥미가 돋지 않았으며 설우현의 얼굴이 계속하여 눈앞에서 아른거렸다.수없이 많은 남자를 꼬시며 이용해 먹었지만 설연주는 단 한 번도 연애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는 줄곧 설연주의 이용수단일 뿐이었다. 처음부터 불쌍할 지경으로 적은 감정을 남자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하물며 그 상대는 설우현이다. 그녀와 같은 여자가 설우현에게 어울릴 수가 없는 법이다.설씨 가문의 도련님으로 금수저를 달고 태어나 평생 고생 한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연주는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우스우면서도 씁쓸해졌다.저녁이 되자 오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설연주 씨, 설강민이 두팔에게 끌려갔다고 합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보니 온몸이 오싹해졌다. 설강민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낭패한 모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평소 물 쓰듯 돈을 쓰던 술집에서 쫓겨나는 날이 있다니.그 순간, 설강민은 문득 설준석이 이 술집의 지분을 일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설강민은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건 분명 그의 체면을 짓밟기 위해 아버지가 지시한 것이 틀림없었다. 원래 설준석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 넣고 돈을 갚아달라며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막상 이 지경이 되니 왠지 모를 오기가 생기며 더더욱 설준석과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설강민은 갑자기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조금 전 또 20억 원을 빌렸으니 차라리 이 20억 원으로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게 나았다.다시 마음을 먹고 설강민은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한 채 현금 뭉치를 매니저에게 던져주었다.“지금 당장 가장 좋은 술을 가져오고 5명의 계집애를 데려와.”한 푼도 없을 줄 알았던 설강민이 뜻밖에도 600만을 들고 들어오니 조금 당황한 모양이다.그러자 설강민은 오히려 더욱 으스대며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었다.“아무리 초라해도 난 설씨 가문 일원인데 그깟 돈 하나 못 꺼내겠어?”돈을 받은 매니저는 바로 계집 몇 명을 설강민에게 보내주었다.아무리 돌이켜봐도 오늘 밤의 일은 생각할수록 더욱 화가 났다. 하여 설강민은 매니저가 보낸 여자들이 도착하자마자 양옆에 여자들을 껴안으며 오늘 밤 겪었던 울분을 풀어냈다.한편, 설연주는 구석에 서서 설강민의 모든 행동을 눈여겨 바라보고 있었다.룸을 떠나고 화장실에 간 설연주는 그제야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최근에 열이 나며 심각하게 살이 많이 빠진 모양이다.그리고 오늘 밤 설강민이 겪은 일을 생각하면 웃기면서도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설연주가 쉰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설연주, 봤어? 저게 바로 네가 목숨을 바쳐서 구한 남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