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에서 마치 호랑이가 달려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번쩍 안아 현관 수납장 위에 올렸다.“대표님!”성혜인은 놀란 나머지 목이 메었다. 수납장 위에 올라앉으면서 188cm의 반승제와 눈높이가 같아졌다.성혜인이 깜짝 놀라 벽으로 바짝 붙었지만 반승제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성혜인은 알고 있다. 그날 밤, 침대에서 괴력을 보여준 반승제는 평상시 냉랭한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는 것을.곧바로 병원에 가야 할 정도였다.턱을 잡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성혜인의 눈동자에서 물보라가 일었다.반승제는 그런 성혜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그는 곧바로 입을 맞췄다. 성혜인이 거절할 틈도 없이 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놀란 성혜인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하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반승제를 밀어내기 시작했다.하지만 반승제의 입술은 숨 쉴 틈도 내어주지 않았다. 성혜인은 아찔한 기분에 다리 마저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문득 눈앞이 뿌옇게 변하면서 그대로 멈춰버렸다. 마치 수많이 손이 그녀를 수렁 안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기분이었다.반승제의 입술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다 어느 한 곳에 멈춰 섰다.바로 그 순간, 성혜인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반승제를 그대로 밀쳤다.강한 힘에 반승제 역시 힘쓸 새 없이 뒤로 밀려났다.성혜인은 황급히 수납장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하지만 너무 경황이 없던 나머지 문을 열자마자 넘어지고 말았다.손에 쥐고 있던 자료들이 공중 위로 날아 사방에 흩뿌려졌다.반승제는 성혜인을 부축하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을 쓰기도 전에 성혜인은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성혜인은 다리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뒤로 하고 자료 더미 사이에 쪼그려 앉아 자료들을 한 장 한 장 줍기 시작했다.반승제 역시 허리를 숙였다. 성혜인이 고개를 들지 않자 손가락으로 마지막 종이 한 장을 꾹 눌렀다.다급하게 종이를 줍다 마지막 한 장에 손을 댔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반승
성혜인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아닌 척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안녕하세요, 시환 씨.”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그를 지나쳐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두 군데가 온시환의 눈에 띄었다. 몸에 난 흔적과 손에 들고 있던 네이처 빌리지의 설계도. 옅게 붉어진 눈시울과 작게 떨리는 손끝만 봐도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페니 씨.”온시환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린 성혜인에게 짓궂은 질문을 날렸다.“승제가 꽤 과격했나 봐요.”성혜인의 어깨가 들썩였다. 하지만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이고 빠르게 이곳을 벗어났다.온시환은 씩 웃으면서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눌렀다.꼭대기 층에서 내린 그는 반승제 방의 방문을 두드렸다.한참이 지나서야 문이 열렸다.온시환은 슬쩍 방 안 냄새를 맡았다. 일을 치른 이후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지금 애들 불러서 얘기해. 결혼한 여자랑 한 판 놀았다고. 사람들이 과연 믿을까?”그 사이 반승제는 실크 재질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덕에 손과 발이 더 길쭉해 보였다.온시환은 반승제가 반응이 시큰둥하자 더 흥미로워졌다.“방금 엘리베이터에서 페니 씨 봤어. 귀신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데.”그 말에 볼펜을 쥐던 반승제의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온시환은 마음속으로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진짜 한 거야? 엥, 자고 싶으면 바로 잘 수 있는 윤단미가 떡하니 있는데, 다른 남자랑 잔 적 있는 여자와 자는 건 더럽지 않아?”굳이 남자친구나 남편이 있는 여자를 골라 만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비웃음을 사게 되는 취향이다.반승제는 말없이 눈앞에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고 앞으로 밀었다.“이거 갖고 꺼져.”오늘의 약속 상대는 온시환이었다. 국내 최고 극작가인 온시환은 지금 극본을 하나 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다분야 경영을 하고 있는 BH그룹은 명품점, 호텔, 자동차, 놀이공원, 여행지 등 십여 종의 다양한 분야를 산하에 두고 있다.하지만 가장 핫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는 줄곧 투자를 아껴왔었다.오늘
온시환은 서류를 들며 침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나 간다. 오늘 일, 다른 사람한테 얘기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윤단미한테도.”현관문이 닫히고, 방 안에 적막이 찾아왔다.침실 창가에 서 있던 반승제는 창밖을 쳐다봤다.도시 전체에 내려앉은 네온사인 불빛이 한눈에 담겼다.하지만 반승제는 무심하게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바라봤다.부드럽고 따뜻한 온기, 그리고 향기. 모든 게 손끝에 남아 모공을 뚫고 사지 전체로 퍼져 나간다.온시환의 말이 맞았다.아직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사슴처럼 공포에 떨고 있는 여자를 보고 참지 못해서 달려들었던 걸까.입술을 삼키는 것으로 모자라 그녀의 뼛속까지 파고들고 싶었다.욕구를 너무 오래 방치한 탓일까.한 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너무 오래 참아서 그런 걸까.관자놀이를 문지르던 그때, 마침 윤단미에게서 전화가 왔다.“승제야, 회의 끝났어? 과일 좀 준비해서 갈까 해. 심 비서가 오늘 밤에 해외 회의가 있다고 알려줬어. 늦게 끝날 거라고.”윤단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윤단미는 그사이 도우미를 시켜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쯤 혼자 있을 것이라는 온시환의 문자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반승제 앞에서 늘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그의 뒤를 쫓아 다니는 다른 여자들과 차별점을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반승제가 유일하게 허락한 여자친구이기 때문에 조급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완벽한 핑곗거리를 찾아야 했다.온시환이 이렇게 말한다는 건 지금 반승제에게는 여자가 필요할 것이다.윤단미는 얼굴을 붉히며 도우미를 재촉하면서도 따뜻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나 지금 가고 있으니까 거절하지 마. 우리 제대로 대화 나눈 지 정말 오래됐잖아.”그사이 반승제는 침착함을 되찾았다. 놀랄 만한 자제력이었다.거실로 나와 컴퓨터를 켰다. 해외 회의 연결까지 30분 남았다.“알았어.”미지근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서류를 처리하기 시작했다.한편 윤단미는 눈을 반짝이며 빙긋 웃
반승제가 성혜인을 단지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그녀는 성혜인한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성혜원은 윤단미에게 절대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프런트직원은 성혜원을 무의식적으로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전에 꼭대기 층 스위트 룸에 온 적이 있는 여자인데 오늘 그녀는 또 왔고 그 룸의 손님 정보를 꼭 알아내려 한다.꼭대기 층은 반 대표의 룸이다. 기나긴 복도에는 두 개의 스위트 룸만 있는데 그중 하나는 새로 인테리어를 한 반 대표가 고정으로 숙박하고 있는 룸이고 다른 하나만 외부 고객의 예약을 받는다.그렇다면 누구든 그 방을 예약할 수 있는데 왜 이 여자는 굳이 예약한 손님의 정보를 묻는 걸까? 반 대표 때문에 온 것이 분명하다.프런트직원은 괜히 번거로운 일과 엮이고 싶지 않아 반사적으로 부정을 하려고 하였는데 방금 그 눈빛은 이미 성혜원을 배신했다.성혜원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이내 몸 돌려 떠나려 했다.그러나 윤단미는 웃으면서 물었다.“성함이 어떻게 되세요?”성혜원은 그녀 앞에서 패기가 부족하여 입술만 오므리고 윤단미에게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했다.윤단미는 눈을 가늘게 떴고 포스가 넘쳤다.“이름도 못 알려주면서 감히 내 남자를 노리는 거예요? 누가 이런 배짱을 당신에게 준거죠? 다시 한번 내 눈앞에 띄면...”그녀는 천천히 다가가 성혜원의 귓가에 속삭였다.“당신과 당신 가족 모두 제원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해줄게요.”윤 씨 집안에게 그 정도 능력은 없지만 그녀의 배후에는 반승제가 있다.윤단미의 목소리는 그녀와 성혜원만이 들을 수 있다.성혜원의 눈시울은 순간 빨개졌고 강렬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녀는 얼른 몸 돌려 떠났고 눈에는 원망스러움으로 가득 찼다.‘천한 년! 기다리고 있어, 하루빨리 반승제와 사랑의 결실을 맺을 테니.’윤단미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비웃고 프런트직원을 향해 미소를 짓고서야 반승제가 있는 룸으로 향했다.프런트직원은 두 명은 모두 떠난 후에야 한숨을 돌리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토로했다.“방금 단미 아가
성혜인은 이때 이미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왔고 중도에 서민규에게 전화를 걸어가지 않겠다고 전했다.서민규는 조금 실망했지만 바로 전에 관계를 가졌던 여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성혜인을 가질 수 없다면 전에 관계를 가졌던 여자가 와도 상관없다. 어차피 돈은 썼으니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성혜인은 포레스트 펜션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앉아 있는데 여전히 피부에 닿았던 그의 입술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고 그 강한 자극은 뼛속 깊이까지 닿았다.그날 밤을 제외하고 그녀는 남자와 이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그녀는 얼른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단추를 풀었다. 붉은 흔적들을 보니 그녀의 얼굴은 순간 달아올랐고 차마 더 이상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얼른 욕조 속으로 숨어들었다.욕조에 한참 몸을 담그니 그제야 뼈 틈새의 간질간질한 느낌이 서서히 사라졌다.성혜인이 잠옷을 입고 일어서던 그때, 유경아의 노크소리가 들려왔다.“사모님이 급하게 방으로 들어가셔서요. 혹시 몸이 편찮으세요?”성혜인은 자신의 목에 난 자국을 보고 당분간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얼른 스카프로 감았다.유경아는 문을 열고 그녀의 온몸을 자세히 훑어보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별일 없으면 다행이에요. 방금 급히 올라오셔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어요. 그리고 마침 오늘 저녁에 전화드리려고 했던 참이었어요. 겨울이가 저녁에 갑자기 구토를 하더라고요. 왜 그런지 이유를 몰라서 병원에 데려가볼까 생각하고 있었어요.”겨울이가 아프다는 얘기에 성혜인은 얼른 뒤쪽 방으로 달려갔다.겨울이는 무기력하게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성혜인은 깜짝 놀라서 바로 겨울이를 품에 안았다.“아주머니, 제가 겨울이 데리고 동물 병원으로 가면 돼요.”아주머니는 나이가 많아 피곤하면 안 되기에 그녀가 직접 가기로 했다.황급히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성혜인은 겨울이를 데리고 제원에서 가장 큰 동물병원으로 향했다.제원의 가장 부유한 별장은 거의 모두 포레스트 펜션 반경 10킬로미터 안에 있을 정도로 그 위치는 아
반승제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소매 단추를 천천히 정리했다.실버 블루 컬러의 소매 단추가 유독 눈에 띄는데 그것은 윤단미가 선물해 준 것이다.계단에서 발자국 소리가 다시 들리자 윤단미는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승제야, 나랑 같이 위층으로 가자. 나 정말 너무 걱정이 돼.”말을 마친 윤단미는 그제야 성혜인을 봤고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왜 여기에 있는 거죠?”마침 이때 겨울이의 담당 의사가 걸어왔다.“페니 씨, 위층으로 모실게요. 수술은 약 40분 정도 소요돼요.”성혜인은 한숨을 돌렸고 이 좁디좁은 공간이 순간 널찍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옆에 있는 반승제와 윤단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반 대표님,윤단미 씨, 저 그러면 먼저 가볼게요.”윤단미는 아무 말도 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호텔 방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을 생각하니 조금 불안하였다. ‘그 머리카락은 도대체 누구 거지?’그리고 방금 호텔에서 반승제의 미팅이 끝난 후, 그녀가 그의 품에 안기려고 하는데 반승제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단미야, 우리 아직 화해 안 한 걸로 기억하는데."반승제가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윤단미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건 사실이다.비록 반승제가 두 번이나 붙잡았지만 윤단미가 보기에 그의 태도는 절박하지 않았고 그녀가 억지로 시킨 것처럼 보여 승낙하지 않았다.그 후 3년 동안 두 사람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반승제가 유일하게 정식적으로 인정한 여자친구로 그 누구도 그녀의 위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화해하는 일은 그녀가 말 몇 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반승제가 그런 말을 하니 윤단미는 조금 난처하였다. 그녀는 자신이 먼저 전화를 걸었으니 자연스럽게 화해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그러나 반승제의 생각은 달랐다.기회를 찾아서 얘기를 잘 해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 고양이한테 문제가 생겨 반승제에게 같이 가자고 부탁한 것이었다.지금 그녀가 성혜인을 바라
이때 세 사람은 2층에 도착했다. 성혜인을 안내해주던 의사가 한편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겨울이의 수술은 여기에서 진행할 예정이니 이쪽에서 기다리시면 돼요.”말을 마친 뒤 의사는 윤단미에게 몸 돌렸다.“윤단미 씨, 고양이는 20분 정도 소요 예정인데 이곳에서 여기 이분...”의사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말끝을 흐렸고 윤단미는 이때가 기회라 생각하고는 목을 치켜들었다.“남자친구요.”의사는 미소를 짓으며 안내를 하였다.“두 분은 다른 방에 있는 소파에서 기다리셔도 돼요. 저를 따라오세요. 저희가 최대한 빨리 진행할게요.”윤단미가 남자친구라고 얘기를 할 때 반승제는 성혜인을 곁눈질해 보았다.그러나 성혜인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겨울이 수술실만 바라보느라 눈치를 채지 못한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였고 윤단미의 손에 끌려 다른 방으로 갔다.윤단미는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대화가 없는 걸 보고 그제야 한숨을 돌렸고 방에 앉아 기다리면서 계속 얘기를 꺼냈다. “방금 페니 씨 목에 있는 흔적 봤어? 전에도 자주 저런 상태로 출근했어?”말인 즉 그녀는 남자와 관계를 자주 가지고 결혼까지 한 사람으로 반승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이다.반승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등을 살짝 뒤로 기댔다.“승제야, 왜 말이 없어.”윤단미는 애교 섞인 말투로 물었다.“전에도 자주 저런 상태로 출근하고 그랬어?”반승제는 첫날밤이 생각났다. 그때의 흔적은 이번보다 더 많았다.“한번 있었던 것 같아.”그의 말투는 매우 담담했고 이런 화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윤단미는 그가 성혜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윤단미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지만 곧이어 또 약간 불안해졌다. ‘그 머리카락 두 개, 설마 반승제의 아내 것은 아니겠지?’“승제야, 할아버지는 너와 그 아내가 하루빨리 아기를 가지는 걸 바랄 텐데 너와 그 사람은...”만약 다른 여자 이야기를 꺼낸다면 반승제는 신경을 쓰지 않을 테지만 그 아내 얘기를 언급하자 바로
두 사람 모두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성혜인은 계속 이 자세로 움직이지 않고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반승제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다시 한번 문질렀고 물로 손에 있는 거품을 깨끗이 헹구고는 옆에 있는 휴지를 뽑아 천천히 손을 닦았다.그 과정은 일분도 되지 않았지만 성혜인은 한 세기가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반승제는 닦은 휴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침착한 척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내가 그렇게 무서워?”평소에 언변이 그토록 뛰어나더니 지금은 놀라서 몸서리를 치는 그녀의 모습에 반승제는 입을 열었다. 이런 대화를 시작했으니 성혜인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반 대표님은 저의 상사이고 고용주이니 당연히 무서운 존재죠.”반승제는 그녀의 귀 뒤에 가려지지 않은 흔적을 보았다. 아마 서둘러 오다 보니 아무도 그녀에게 귀띔을 주지 않은 모양이다.“남편과의 식사자리는 즐거웠어?”‘이런 모습을 남편이 목격했는데 이혼을 당하지 않았다고?’성혜인은 바로 머리를 굴렸다.“저녁에 겨울이한테 문제가 생겼고 마침 민규 씨도 바쁜 터라 약속을 취소했어요.”반승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에서 윤단미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자리를 떴다.성혜인은 그 자리에 서있었다. 왠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휴지를 뽑아 손을 닦으려고 하는데 반승제는 다시 돌아와 몸을 약간 기운 채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은 우리 모두 잊었으면 좋겠어.”성혜인은 온몸이 굳었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서로에서 좋은 것이라고 눈빛에 쓰여있었다.그녀는 이제야 완전히 마음이 놓였고 그와 함께 지내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알고 있어요. 반 대표님은 윤단미 씨가 질투할까 봐 그러시는 거잖아요. 안심하세요, 저 입이 무거워요.”반승제는 바로 그녀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그녀의 홀가분해하며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보았다. 시선이 조금씩 그녀를 스쳐 지나갔고 말투도 조금 쌀쌀해졌다.“눈치는 있네.”